Zero Per Zero’ s Drawing Tools

그림을 만드는 숨은 친구들

굵고 단순한 까만 선으로 가족과 사람들을 그린 그림, 제로퍼제로의 책 《MOTHER AND DAUGHTER》를 본 독자가 있다면, 이 낙서 같은 그림이 어떤 도구로 그려졌는지 궁금해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으로, 포스터로, 티셔츠로도 만들어진 이 그림은 사실 A4용지를 대충 반으로 접은 뒤 어릴 때부터 집에서 굴러다니던 칼라펜과 크레욜라Crayola 크레용으로 단숨에 그린, 딸에게 보여주려고 급하게 만든 여덟 쪽짜리 그림책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문구를 좋아한 이유는 그것이 온전한 나의 공간, 나의 시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독서실에서 양옆이 벽으로 막힌 나만의 공간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가장 좋아하는 펜을 꺼내는 순간, 더 커서는 카페 테이블에 필통과 작은 수첩을 꺼내놓고 보내는 시간, 그림을 배울 때 화방에서 고심 끝에 고른 아크릴 물감 한 개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꺼내 컬러 인덱스에 동전 크기로 칠하는 순간은 나 혼자만의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문구를 고르는 순간도 그렇다. 문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내보이지 않아도 되기에 오로지 나만 생각하면 된다. 나에게 문구는 글의 도구, 그림의 도구라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구점이나 화방에 들어가면 마치 보물 창고에 들어온 것만 같다. 매번 보는 물감이고, 다 아는 펜 코너 앞에 한참을 서 있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여행을 떠나면 그곳의 문구점에 꼭 들른다. 빼곡히 들어선 문구와 화구를 천천히 살펴보고 있으면 시간이 사라져버려 매번 여행 일정이 꼬이곤 했다. 작업실을 가지고부터는 급기야 왕년에 프라모델 좀 만들어봤다는, 문구 좋아하는 동료(겸 남편)와 뜻이 맞아 좋아하는 문구들을 구해다가 판매까지 하고 있다. 

문구를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그 반대인지는 몰라도 그림을 그리는 내게 아직도 문구는 가장 가까운 물건이다. 사용하지 않는 순간조차 예뻐서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물건들. 그중 특히 제로퍼제로 그림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많이 쓰는 도구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그림 도구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고마운 밥벌이 도구인 셈이다.

굵은 테두리를 그리자

칼라펜

모나미의 칼라펜은 단종되어 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펜이 됐다. 어릴 적에는 대중적인 펜이었던 것 같은데…. 아빠는 군대에 있을 때 이 펜을 몇백 개는 썼다며, 그 애증의 펜으로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고 하신다. 디자인도 이름도 정감 가는 이 펜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성펜이다. 그림을 그리면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의 잉크가 적당한 탄성의 펠트 촉에서 나온다. 다른 펜에서 느낄 수 없는 선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와 딸’ 등 제로퍼제로의 그림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굵은 선 그림들이 이 펜으로 그려졌다. 단종된 걸 알고 온라인을 뒤져 겨우 여분을 사두었는데, 다 쓰고 나면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다.

•Monami Color Pen

꽃다발보다 펜다발

가장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가요?

연필을 깎지 않아도 그만

이것만 있으면 나도 화가!

종이와 가위

네임펜

집에 있던 오래된 지구본에 아크릴 과슈를 칠한 뒤 국가명과 도시명 등을 써서 만든 제로퍼제로의 지구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들곤 했던 즐거운 작업이다. 지구본에 사용한 손글씨 이미지를 데이터화할 때는 코팅지에 유성펜을 사용한다. 코팅지는 아트지나 스노우지를 잘라 사용한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유성펜은 모나미의 네임펜 XF 103. 그보다 좀더 굵은 글씨는 다치카와 파인포인트 시스템을 굵기별로, 가장 커다란 글씨인 오대양 이름은 안료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건담마커를, 가장 얇은 도시 이름 등을 쓸 때는 파이롯트 드로잉펜 005를 사용했다.

•Monami Permanent Marker XF 103

•Tachikawa Finepoint System 0.8, 1.0

•PILOT Drawing Pen 005

•Gundam Marker

수성펜

제로퍼제로의 쇼룸 겸 매장인 제로스페이스의 가격표는 문켄이라는 종이를 작게 자른 뒤 수성펜으로 설명과 가격을 써서 만든다. 수성 잉크라 보통의 중성펜보다 조금 묽고 연하다. 마치 옵셋 인쇄물의 먹색 같다. 문켄은 입자가 조금 거친 종이라 쓰다 보면 이리저리 번지곤 하는데, 어릴 때는 이렇게 랜덤으로 번져나가는 것을 싫어했는데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뒤에는 하얀색 마스킹테이프를 돌돌 말아 제품 옆에 붙여둔다.

•Mitsubishi Pencil Uniball5 UB-105

중성펜

평소에 작업 스케치를 하거나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펜은 노크식에 얇은 중성펜인 유니볼 시그노 RT1 0.28과 파이롯트의 주스 업 03이다. 볼펜보다 얇은 젤잉크펜을 좋아하는데, 여행 중이나 잠깐씩 쓰는 메모에 뚜껑 걱정 없는 노크식 펜은 정말 유용하다. 하이테크나 시그노의 얇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간편함까지 더해진 이 펜들을 좋아할 것 같다. 또 수채 안료에 번짐이 없는 중성펜인 무인양품의 볼펜 0.38(일반적인 볼펜이 아닌, 볼이 들어 있는 젤잉크펜이다.)도 컬러잉크나 수채화와 함께 그릴 때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펜을 살 때는 가능하면 시필 후 구입한다.

•PILOT Juice Up 03

•Mitsubishi Pencil Uniball Signo RT1 0.28

•MUJI Gel Ink Ball Point Pen 0.38

만년필

줄줄 흘러나오는 잉크로 그리고 싶을 때는 라미 사파리 만년필을 쓰고 있다. 가장 얇은 EF와 M닙 두 개를 따로 구비해두고 때에 맞게 사용한다. 잉크 카트리지 상자조차 예쁘게 생겼다. 역시 러프한 종이인 문켄에 그려서 번짐을 느낄 때도 있고, 캔손Canson의 스케치북Croquis Sketch Pad에 그리면 구불구불한 느낌의 선을 그릴 때 좋다. 그냥 A4용지에 스윽 스윽 그릴 때도 있고 코팅지에 그려두고 며칠 말려볼 때도 있다. 제로퍼제로의 제품 중에서는 ‘Little Traveller’ 패스포트 그림 등을 그릴 때 사용했다.

•LAMY Safari Fountain Pen

색연필

스케치나 낙서할 때 항상 쓰는 도구는 색연필이다. 유성은 프리즈마Prisma, 수채는 카렌다쉬 것을 사용하고 있다. 색연필을 브랜드별로 다양하게 써본 건 아니지만, 카렌다쉬의 색감은 유독 독특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Caran D’ache Supracolor2

 


연필깎이

손잡이를 덜덜덜 돌려서 깎는 연필깎이가 조금 길게 깎이는 느낌이 들 때, 처음 산 색연필만큼 짧게 깎고 싶을 때 사용한다. 이 연필깎이는 그 둘 중간 정도의 길이감으로 깎인다. 끝도 아주 매끈하지는 않지만 깎다 만 지점에서 단이 느껴지는 투박함과 어딘가 비대칭으로 뾰족하게 깎이는 것이 마음에 든다. 지구본 연필깎이는 TV 위에서 장식품인 양 지내다가 집에서 연필깎이가 필요할 때 출동한다. 깎고 남은 것들이 지구본의 구 안에 쏙 들어가 황동 연필깎이보다 좀더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Kum 300-1

•Kum Globe Sharpener

 

휴대용 고체 수채화

쉬민케의 작은 휴대용 팔레트는 화방을 들락날락하던 언젠가부터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몇 년이나 지나서 결국 구입하게 되었다. 빈 팔레트에 고체케익 다섯 개만으로 만족하며 쓰다가 한 개 두 개 사모아 지금은 열 개의 색과 작은 물통이 꽂혀 있다. 몇 주 정도 긴 여행을 떠날 땐 가방 안에 슬쩍 넣기도 한다. 우리 집 책상 위에서 사용할 때도 여행 중에 그리는 느낌이 들어 그릴 때 가장 기쁜 마음이 드는 화구다. 미대 입시 때 항상 쓰던 물감보다 몇 배나 비싼 홀바인Holbein 물감을 처음 썼을 때 기분이 나기도 한다. 10색이므로 부족한 색은 작은 고체 물감인 사쿠라 팔레트를 이용해 함께 사용한다. 밝고 명랑한 색감들로 어린이 물감 12색 세트 같기도 한 이 팔레트는 사실 위의 작은 팔레트보다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Schmincke Horadam Watercolor Tin And Pans

•Sakura Petit Color 12

 

 

 

종이

가장 많이 쓰는 종이는 A4 복사용지다. 유성펜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펜이랑 색연필과 궁합이 잘 맞는다. 그 외에는 인쇄용지로 널리 쓰이는 문켄을 A4용지 사이즈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떨어지기 전에 꼭 사둬야 하는 것은 쓰리엠 포스트잇. 7.5센티미터의 정사각형 흰색 포스트잇이나 연한 회색 포스트잇은 여기저기 두고 메모나 낙서, 그림 그릴 때 쓰고 있다. 용도를 정해두고 계속 쓰며 모으는 제품도 있다. 수채화를 사용해 그릴 때는 겟코소의 스케치북을, 여행 노트로는 마루망의 가장 작은 스케치북을 활용한다.

•3M Post-it 654 WHITE

•Geckos Sketchbook 0F

•Maruman Pocket Croquis Sketchbook

가위

올파의 노란 가위는 미세한 홈이 나 있어 자를 때 드드드득 소리가 난다. 마치 미싱 선이 나 있는 종이를 뜯은 것 같기도 하고 특이하게 잘리는 느낌이 좋아 애착을 갖고 사용하고 있다. 덤으로 모양도 참 귀엽다. 그리고 외출할 땐 피스카스의 접히는 가위를 가지고 다닌다. 장난감 변신 자동차처럼(?) 변신한다. 작고 무척 잘 잘린다.

•OLFA SCS-3

•Fiskars Folding Sciss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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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진솔(제로퍼제로 일러스트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