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WHAT YOU READ

당신을 말하는 당신이 읽는 책

당신을 말하는
당신이 읽는 

몇 해 전 광화문 교보문고의 현판에는 괴테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그때는 광장 계단에 함께 앉았던 사람이 있어 ‘곁에 있는 사람’이란 글자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지나고 나니 그중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책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장소나 사람이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내 마음을 가늠할 수 없을 때 가끔 책장을 본다. 다른 사람이 궁금할 때도 가끔, 그들의 책장을 본다.

한승재 

푸하하하 프렌즈Fhhh Friends의 건축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하던 일이 내 일 같지 않아 글을 썼다. 자비로 책으로 만들어 팔다가 정식 출판하게 됐다. 그의 소설 《엄청멍충한》의 서문에는 ‘매일 내 방을 붉게 물들이는 주황색 지붕에게’라는 말이 나온다. 낮고 진한 주황색 지붕이 보이는 그의 큰 창의 풍경 속에는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창문 앞에 앉아 척추가 여름날 쭈쭈바처럼 녹는 병에 걸린 인류와 거울 속 분신에게 주도권을 뺏긴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 자신을 병적으로 뻥 치는 인간이라 말하는 그의 수첩에는 다음 책에 실릴 이야기들이 빼곡히 숨죽이고 있다.

01 좀머 씨 이야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열린책들

저는 이제 다 큰 것 같아요. 그런데 늙는 건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 책은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좋아하는 책이에요. 책 속에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실컷 쳐다보았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어렸을 땐 그런 게 일상이잖아요. ‘내가 자살하면 다들 슬퍼하겠지?’란 생각을 하는 것도, 피아노 선생님은 언제나 무서운 것도.


02 육식 이야기 | 베르나르 키리니 | 문학동네

이건 제 바이블입니다. 완벽한 책이에요. 그리고 제가 고른 것 중 남들이 잘 모를 것 같은 유일한 책이죠(웃음).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요. 이 책이 그 계기이기도 해요.


03 LOVE&FREE 러브 앤 프리 | 다카하시 아유무 | 에이지21

저는 직장 다니기 전까지 해외여행을 한번도 간 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어른이 되면 외국에서 일할 것 같았거든요. 같이 일하는 동료 중 한 명은 아직도 제가 외국에서 일하다 온 줄 알아요. 직장 생활하며 읽었는데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책이죠.


04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

우연히 주인공의 나이쯤 읽었던 책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그 시절의 기억이 응축된 느낌이 들어요. 반항기 있고, 허세 부리고,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이 책에 다 들어 있어요.


05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책세상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는 실존주의, 허무주의 이런 게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때 읽은 책의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뻥칠 때 빼고는 쓸데없는 말을 안 해요. 남들과 대화할 때 리액션도 별로 없어요. 책에서 ‘어제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고가 분리되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주인공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06 슬램 덩크 17권 | 이노우에 다케히코 | 대원 씨아이

뭔가를 열정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힘을 합쳐서 이루는 게 평생의 꿈이에요. 무한도전에서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걸 아직 안 해본 것 같아요. 지금도 친구들과 같이 일하지만 프로젝트에 따라 한 명이 주력으로 일하고 나머지는 받쳐주는 형태거든요. 슬램덩크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뭉치기는 힘들죠. 17권은 지역 예선 끝나고 전국대회 나가기 전 한 템포 쉬면서 합숙훈련 하는 내용인데 모두 열심히 달리다 잠깐 쉬는 분위기가 부러웠어요.


07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대성 이론 | 뉴턴 코리아 편집부 | 뉴턴 코리아

친구들이 한참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 읽을 때 저도 따라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없는 거예요. 괴물이 나타나서 죽였더니 더 큰 괴물이 나타나는 이야기들이요. 이 책에는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서 거울을 보면 내가 보일까?’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있어요. 어떤 판타지보다도 더 판타지적인 과학이죠.


08 디스코 하렘 | 브레흐트 에번스 | 미메시스

벨기에 일러스트레이터의 책인데,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과 내성적이고 인기 없는 사람의 이야기에요. 파티를 주최한 건 인기 없는 헤르트인데 모든 사람이 인기 있는 사람을 따라 해요. 선이 없고 색감에 제약이 없는 그림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김사월

음악가 김사월은 창문 너머로 다 헤집어진 기찻길이 보이는 곳에 산다. 그녀는 책장에서 여덟 권의 책을 꺼냈다. 젖은 머리로 책을 바닥에 펼쳐놓고, 요즘은 책을 읽는 것보다 읽었던 글을 받아들이는 데 더 오랜 시간을 쓴다는 얘길 했다. 그녀의 방은 노랗고 그녀는 얼굴이 맑다. 단정하고 어색한 말투로 형광등은 상스럽다고 말하고 ‘지옥까지 가버려’라는 가사를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며 노래한다. 그녀는 책을 소개하며 2~3년 전이라는 비슷한 시점을 계속 이야기했다.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책들은 그녀의 2~3년 전 어디쯤을 그려낼 단서가 될 것이다.

01 명료한 오후 | 서영기 | 안목

2년 전 어느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누워있는데 이 책이 갑자기 읽고 싶더라고요. 한 장 한 장 천천히 봤어요. 이 작가는 빛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빛을 이용했다기보다 어떤 시간대의 사진을 계속 찍고 있어요.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오후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까 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02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 존 브래드쇼 | 학지사

저에 대한 답이 있을 것 같아서 심리학책을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시절이죠. 이 책은 좋은 학습서지만, 그 당시에 이걸 통해서 나아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제가 찾았던 갈래 중 하나였죠.


03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 로버트 다이머리 | 마로니에북스

‘이걸 과연 읽을까?’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진짜 읽어요. 여기 실린 앨범들을 다 알았으면 좋겠고, 단언할 수 없지만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듣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했고요. 2~3년 전에 LP 틀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거기 사장님은 자기 가게에 이 책에 나온 앨범들이 다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갖진 못해도 다 들어봐야지’라고 생각했어요.


0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 민음사

하루키를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제가 책을 거의 안 사는 편인데도 하루키 책은 많아요.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저는 그가 가치 있는 것을 계속 남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으로 생각하면 듣기 쉽고, 많은 사람에게 일반적인 동요를 주는 음악을 하는 거죠. 그런데 다들 좋아하고, 쉽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작품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면, 글쎄요. 저는 사실 그런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아이돌도 좋아하고요. 단순히 예뻐서도 좋아하지만 저는 다수에게 미감을 줄 수 있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한 것 같아요. 하루키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소설을 쓰니까…. 아, 사실 좋아하고 있어요(웃음).


05 불면증 2 | 박은아 | 학산문화사

어릴 때 ‘밍크’나 ‘파티’ 같은 만화잡지를 좋아했어요. 박은아 작가는 발랄하고 담백한 내용을 쓰는 편인데 이 만화는 감정을 끝까지 끌고 가요. 사춘기 때 화자가 취하는 방어적인 태도에도 많이 영향을 받았죠. 절판된 1권에서는 인쇄 실수로 한 장이 온통 까맣게 처리가 된 부분이 있었어요. 마지막 한 마디하고 돌아서는 장면 뒤에 까만 장이 나오는 거죠. 그리고 또 넘겼는데 또 까만 장이 나오고. 인쇄 실수였다지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던 기억이 나요.


06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 | 필립 퍼키스 | 안목

사진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정말 좋을 것 같은 책이에요. 무엇을 찍고 싶은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고 누구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부드럽게 인도하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저는 시각적인 미감에 대해 안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꼭 잘 찍은, 아름다운 사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07 개선문 | 레마르크 | 학원사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중3 때인가, 고1 때예요. 저는 두꺼운 버전의 개선문을 읽었었는데 내용에 퇴폐적인 것들이 있어요. 어릴 때는 술 이름만 봐도 두근거리잖아요. 시간이 지나 잊혔던 책인데 올해 1월에 부산에 공연하러 갔다가 헌책방 골목에서 다시 샀어요. 원래 제가 읽은 책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라비크’인데 여기선 ‘라비쯔’라고 나와요. 그런 것도 재미있었고요.


08 김사월x김해원 비밀 노트 | 김사월, 김해원 | 자립생산

앨범을 내면서 만든 작업기예요. 예전부터 ‘작업기를 만드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제 20대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고요. 텀블벅에서 앨범 제작에 후원을 해주신 분들에게 드리려고 기획했던 건데, 인쇄는 500장, 1,000장 등 큰 단위로 해야 하더라고요. 수량이 남아 판매까지 하게 된 거죠. 책방 유어마인드에서 팔고 있어요. 아직 조금 남아있을 거예요.

이재민

책과 음반과 위스키 그리고 고양이.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민이 쓰는 Studio fnt의 사무실 한 켠은 이 네 가지로 채워져 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일을 하고, 함께 사는 고양이 시루를 보고 싶어할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되는 공간이다. 반복과 변주 속에서 단순미를 추구하는 그의 작업처럼 책상을 둘러싼 물건들은 모두 단순하고, 따뜻하고, 쓸쓸했다.

01 SPOMENIK | Jan Kempenaers | Roma Publications

1960년대와 70년대에 만들어진 ‘Spomeniks’라고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쟁기념비에요. 80년대까지는 사람이 많이 찾았지만 그 후에는 방치되었죠. 사진작가가 이곳을 여행하다가 찍어서 사진집으로 낸 거에요. 형태적으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요. 세포의 형태를 닮거나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기념비들도 있고요.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있는 건축물의 용도를 잃어버린 장대함도 느껴지고, 퇴색됨에서 오는 처연한 느낌도 있고요. 주변의 자연과도 어우러져 기이한 느낌을 줘요.


02 100만 번 산 고양이 | 사노 요코 | 비룡소

제 ‘인생 책’인데요. 말이 조금 뻔해지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던 책이에요. 저는 사실 디자인 서적은 별로 보지 않아요. 그런 책도 있긴 있지만 제가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고요. 그래픽 서적보다는 울림이 있는 책을 많이 접하는 게 디자인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03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 안자이 미즈마루 | 씨네21북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밤의 원숭이》라는 책을 통해 안자이 미즈마루를 처음 알았어요. 대학교 때 서점에서 처음 봤는데 이 그림은 정말 대충 그렸지만 울림이 있는 거예요. 이 그림은 정말 대충 그렸지만 울림이 있는 거에요. 그리고 소재들도 전부 시시콜콜한 것들인데 그 시시콜콜함에서 뭔가 잃어버린 느낌, 두고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04 뉴로맨서 | 윌리엄 깁슨 | 황금가지

SF 소설을 좋아해서 골랐어요. 뉴로맨서(여러 가지 약물, 기기, 특이한 경험으로 자신의 뇌나 신경체계를 조작하는 사람)는 ‘Neuro’에 ‘Mancer’를 합쳐 만든 신조어인데 한국에서는 ‘New Romancer’로 소개됐대요. 얼마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뉴 로맨스New Romance’라는 프로젝트를 했어요. 호주 큐레이터와 한국 큐레이터가 같이 기획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의 관계에 대한 전시였는데 이 책의 한국어판 오역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05INSECT ERECTUS | Thomas Jung | 가짜잡지(와 친구들)

최환욱 일러스트레이터가 만든 책인데 수상한 느낌이 들죠? 출판사도, 작가도, 이야기도 모두 지어낸 이야기인데 18세기에 멸종한 직립 곤충류의 생태를 담은 책이에요. 본문은 영어 같지만 한국말 발음을 알파벳으로 풀어쓴 거예요. 굉장히 열심히 만든 책이죠.


06 우주만화 | 이탈로 칼비노 | 열린책들

이 책에는 ‘KFWFK’라는 주인공이 나와요. 그는 진화 중인 생물일 때도 있고, 원자나 원소 단위의 무언가일 때도 있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일 수도 있는 가상의 캐릭터예요. 정말 재미있게 읽어서 편집 디자인 수업할 때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텍스트로 주고 자기만의 에디션을 만드는 과제를 진행하기도 했어요.


07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 1984

이 책은 1984 출판사의 기획으로 다시 디자인한 책이에요. 제게 위대한 개츠비는 예전에 사서 본 책, 1984에서 원래 디자인한 책, 새로 디자인한 책 이렇게 세 권이 있네요. 원래 피츠 제럴드의 소설을 즐겨 읽었어요. 개츠비의 인생이 파란만장하잖아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시절에 대한 낭만과 회한과 처연함이 담겨있죠. 제가 일관되게 좋아하는 정서에 쓸쓸함이 있는 것 같아요.


08 みさおとふくまる | 伊原美代子 | リトル·モア

포토그래퍼인 손녀가 할머니 미사오와 함께 사는 후쿠마루를 찍은 사진집이에요. 제가 고양이를 좋아해요. 그런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걸 아는 친구들이 이상하게 선물로 자꾸 이 책을 줘요. 그래서 똑같은 책이 여러 권 있어요. 그런 부분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죠.

김이경

어라운드 편집장 김이경은 동화책을 읽는 어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을 읽더라도 끝까지 읽지 않았던 그녀가 북디자이너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핸드메이드 북아트 작업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북디자인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처음 맡은 표지에 직접 그린 그림을 싣게 되었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쌓여 있지만 아직 어려 종이를 자꾸 찢는 통에 진짜 아끼는 책은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가 컸을 때 책장에서 어떤 동화책을 고르게 될지 궁금해하며 천천히 책장을 채우는 중이다.

01 Meine Grosse Tier-menagerie | André Hellé | KNESEBECK

크기도 아주 크고, 본문에 내용이 많은 책이에요. 1911년에 프랑스의 유명 그림작가 André Hellé의 책을 독일에서 재출간했는데, 지금 봐도 여전히 감각적이에요. 최근 베를린 여행 중 동네서점을 지나고 있었는데, 입구 선반에 이 책이 세워져 있었어요. 마치 그림 액자를 보는 것 같아 한눈에 반했어요. 이 큰 책을 여행 내내 들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했지만, 한 달 동안 저의 트렁크에서 함께 여행을 한 책이에요.


02 MA FAMILLE SAUVAGE | Moreau Laurent | Helium

제가 좋아하는 책 대부분이 동물이나 자연을 담고 있어요. 이 책도 야생동물 가족을 소개하는 책이에요.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이 등장하는데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의 형은 강인한 코끼리로 아이들과 함께 시소를 타고, 엄마 기린은 도심 속을 워킹우먼처럼 도도하게 걷고 있어요. 아빠 사자는 해변 앞 파라솔 밑에서 휴식을 만끽하는 등 등장인물들이 재미난 상황 속에 놓여 있죠. 어릴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동물이 사람과 함께 뒤섞여 사는 거요. 그리고 동물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과 도시는 어떨까 하고. 이 책을 보면 그때가 생각나요.


03 PRAIAMAR | Bernardo P. Carvalho | Planeta Tangerina 

이 책은 디자인이나 구성이 독특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블랙과 화이트를 제외한 세 가지 색만을 써서 작업했는데, 유심히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게 활용했어요. 그리고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이 하나도 없어요. 텍스트에 익숙한 우리에게 손이 인도하는 대로 책을 보고 상상하라는 의도라고 해요. 페이지 순서대로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어요. 내가 해변에 와서 조개를 먼저 주울지 수영을 먼저 할지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가 결정할 수 있는 거죠. 저는 때론 거창한 문장보다 한 장의 이미지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좋아하는 책이에요. 이 그림작가는 한국의 CJ 그림책 전시회에서 수상했던 경력이 있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체인 거 같아요.


04 ETRANGES CREATURES Cristina Sitja Rubio, Cristobal Leon | Editions Notari

그림책 서점인 ‘피노키오’에 갔을 때 단연 눈에 띄었던 동화책이에요. 아이가 아직 글은 읽지 못하지만 이 책에는 반응을 보여요. 아마도 표지가 녹색의 풀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인 것 같아요. 내용은 사실 슬프고 잔인해요. 인간이 행한 무자비한 개발로 파괴된 자연을 평온한 숲 속의 동물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해요. 아이가 좀 더 커서 이 책을 보고, 자연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05 슬러쉬마운틴 | 비에른 루네 리 | 텍스트컨텍스트

이제껏 전 겨울에 스키장을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스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산속 마을 슬러쉬마운틴을 배경으로 한 이 책에 관심이 가요.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하나 표정이 익살스럽고, 패션감각이 남달라요. 이 책을 보며 올해는 꼭 스키장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어요.


06 정글 파티 |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 시공주니어

주제가 동물인 책 표지를 디자인할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릴지 고민하던 중 발견한 책이에요. 저는 동화책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아요. 정글 파티라는 주제에 맞게 환상적인 분위기를 잘 살렸고, 색을 잘 쓴 것 같아요. 어릴 때 미술 시간에 하늘은 파란색, 나무는 갈색, 풀은 녹색으로 칠하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하늘색, 나무색, 풀색이라고들 하는 거겠죠.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만의 색으로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요. 나무의 한 부분이 노란데 내 눈에 그게 인상적이었다면 그 나무는 노란색일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그게 나무가 아닐까요? 이 책도 동물과 식물에 색을 다양하게 썼지만 고유성을 잃지 않으니까요.


07 모네의 정원에서 |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글, 레나 안데르손 그림 | 미래사

아이를 키우다 보면 무언가 설명해줘야 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와요. 지금은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지만, 곧 많은 질문을 하면 당황해하며 저는 설명을 하느라 진땀을 빼겠죠. 이 책에서 리네아라는 여자아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나가요. 리네아는 실제로 작가가 한국에서 입양한 딸의 이름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더 친숙하죠. 책을 읽으며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 손녀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이들 책이지만, 어른이 볼 만큼 수준 높은 내용이 많아요. 집에 돌아온 리네아는 이런 말을 했죠. ‘여행이 끝났어도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집에 돌아온다는 것, 친구들한테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 사진이 어떻게 나왔나 하는 것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08 십장생을 찾아서 | 최향랑 | 창비

세련되진 않았지만 한국적이고 묘사가 재미있어요. 이 책의 시작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할아버지와 나는 둘도 없는 단짝입니다.’ 저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런 문장은 슬프고 아련해요. 아픈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손녀가 열 가지 십장생을 모아 할아버지의 건강을 비는 이야기예요. 흔히 할머니 방에 가면 볼 수 있는 자개, 자수, 물감, 모시 천 등 오브제를 활용해 동양미를 잘 살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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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