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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을 건네는 마음 : 시인 오은 × 뮤지션 윤덕원
“딸기가 좋아, 자몽이 좋아?” 청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종류별로 가방에 담아 와서는 원하는 청을 건네주는 마음을 우정이라 말할까. 포켓몬 케이스에 이어폰을 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귀여워.” 나지막이 말하는 그 마음을 우정이라 말할까. 애써 말을 보태지 않아도 핑퐁처럼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닿았다 멀어지는 모든 순간에 마음을 거두지 않는 사이. 어떤 봄에는 그런 촘촘한 사귐을 보았다.
시인과 뮤지션 친구를 만나게 됐네요. 서로의 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오은: 안녕하세요, 시 쓰는 오은입니다. 덕원이랑 같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네요(웃음). 덕원이는 한마디로 ‘다독이는 사람’이에요. 다독이는 음악을 하고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을 다독여주는 친구죠. 다독인다는 건 보호하고픈 대상을 살살 두드리는 느낌 같기도 하고, 잘하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기도 해요. 이번에 출간한 제 산문집 제목이 ‘다독임’인데 덕원이에게 그 제목을 붙여주고 싶네요.
덕원: 쑥스럽네요. 저는 브로콜리너마저라는 밴드를 하고 있는 뮤지션 윤덕원이에요. 은이는 게임 캐릭터에 빗대자면 힐러Healer 같은 사람이에요. 보통 음유시인이나 성직자로 표현되는데 직접 적을 공격하진 않지만 팀원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올려주는 치유의 캐릭터죠.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남을 위해 마음 쓸 줄 아는 사람이에요.
훈훈하네요. 두 분은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나요?
덕원: 잊을 수가 없죠. 은이랑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요일이 달라서 얼굴 볼 일은 없었거든요. 그러다 전체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이 학교 후배라고 소개하길래 인사하려는데, 대뜸 막걸릿잔을 들고 테이블을 넘어오는 거예요. 첫마디가 “어!! 반갑다!!”였어요. 당황스러웠죠.
오은: 부담스러웠어? 저는 브로콜리너마저를 좋아했기 때문에 덕원이랑 대면하기 전에 이미 노래를 많이 들은 상태였거든요. 심적으로 가깝게 느껴져서 반가운 마음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재수를 했기 때문에 사실상 학교 후배지만 이미 졸업했으니 동갑내기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덕원: 그 이후로 만날 일이 많아지면서, 그날 모습이 순간적인 흥 때문이 아니라 진솔한 반가움이었단 걸 알게 됐어요. 저는 은이랑 달리 주변을 살뜰하게 살피고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은이 캐릭터가 더 강렬하게 와닿은 거 같아요.
덕원 님께 함께 인터뷰하고 싶은 친구를 물으니 곧장 오은 님을 추천하셨죠.
오은: 그 얘길 듣곤 ‘얘가 진짜 친구가 없구나.’ 싶었어요(웃음). 당연히 뮤지션을 먼저 떠올릴 줄 알았거든요.
덕원: 10여 년 음악을 하다 보니 선배 소리를 듣고 있는데 저는 그 선후배 관계가 어색하더라고요. 연차에 상관없이 뛰어난 뮤지션도 많은데 그 사이에서 선배 노릇을 하는 것도 멋쩍고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음악을 시작한 친구들 대다수가 음악계를 떠나기도 했고…. 물론 계속 음악을 하고 있는 친한 뮤지션들이 있기는 한데, 그 친구들과 함께하면 신세 한탄으로 흘러갈 것 같았어요. 워낙 오래 같은 일을 해와서 새롭게 할 말이 없을 것도 같았고요.
오은 님도 “덕원이라면 시원하게 오케이!”라며 흔쾌히 승낙하셨어요.
오은: 친구라고 매일매일 연락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브로콜리너마저나 윤덕원의 음악을 들으면서 ‘덕원이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생각하곤 해요. 굳이 전화나 메시지로 안부를 묻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종종 떠올리며 지내고 있죠. 그런데 이번 기회로 덕원이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덕원: 오래 만나지 못해도 주저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는 단연 오은이에요. 연락하지 않는 시간에도 서로에게 관심이 있단 걸 알고 있거든요. 은이랑은 언제 만나도 어색함 없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우정의 밀도가 높으니까요.
친구로 주고받는 영향도 있겠지만 창작자로 작업에 미치는 영향도 있을 것 같아요.
오은: 2016년에 나온 제 시집 《유에서 유》에 실린 <졸업 시즌>이란 시를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카페에서 시를 쓰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취업할 준비는 안 됐고 졸업은 코앞인 학생들이 앉아 있었어요. 뾰족한 수가 없으니 휴학하고 졸업을 유예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의 고민을 들으며 덩달아 우울해졌죠. 그 당시 청년 세대에 관심이 많기도 해서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까 고민한 기억이 나는데, 자주 듣던 노래에서 힌트를 얻었단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이란 곡에도 비슷한 정서가 있거든요. “방황하던 청년들이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는 내용이죠.
덕원: 저는 지난 몇 년간 창작을 많이 하지 못했어요. 잘하려고 맘먹을수록 짜임새 있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결과물을 내놓는 데 성공하지 못했죠. 그러다 최근에 은이 시에서 영향을 받아 다시 창작을 시작하게 됐어요. 은이가 근래 발표한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각성이 들었거든요. 특히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의 산문시들이 그랬어요. 제가 그동안 조각하듯 깎아내며 하나의 의미를 남기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면, 은이는 작은 덩어리를 붙여가며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는 게 보였어요. 지나치기 쉬운 순간을 차곡차곡 모아서 의미를 찾는 은이의 방식이 이 시대에 맞는 창작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반대의 표현 방식을 보면서 영향받은 거군요.
덕원: 맞아요.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자면, 얼마 전에 가족 여행에서 아이가 돌멩이를 한 아름 주워 온 적이 있어요. 너무 많으니까 제일 예쁜 거 하나만 고르자고 했더니 고르지를 못하더라고요. 아이에겐 돌 하나하나에 주워 온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만 가져가자고 하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그러다 문득, 그래봤자 돌멩이일 뿐인데 전부 가져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제일 예쁜 것만 남기고 정리하자는 말에서 하나만 남기고 깎아내는 제 작업 방식이 보이는 것 같았죠. 반면 은이는 제 아이가 그랬듯 여러 가지를 모아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은이에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두 분은 서로의 작품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보여요.
오은: 그럼요. 여기 오면서도 덕원이 앨범을 들었는걸요. 브로콜리너마저와 윤덕원의 노래에는 희망이 있어요. 어떤 정서를 노래하더라도 늘 가능성을 심어 두죠.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무척이나 반짝이는 부분이에요. 남아 있는 불씨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거든요. 그런 점에서 브로콜리너마저의 ‘가능성’은 자기 고백적인 노래로 다가왔어요.
덕원: 저는 음악에 어떤 내용을 담더라도 여지를 두고 싶어요. 한 가지에 심취해서 ‘너무 기쁨’, ‘너무 처절’만을 노래하고 싶진 않거든요. 영화 <에이리언>(1979) 같은 거죠. 주인공이 에이리언에게서 탈출하는 결말이지만 주인공 몸 안에 에이리언 알이 남아 있잖아요. 다 부쉈지만 전부 부숴지진 않은, 그런 여지를 두고 노랠 만드는 거죠.
오은: 영단어 에이리언Alien에는 ‘이방인’이라는 뜻도 있어요. 창작 활동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바로 이방인의 정서가 아닐까 싶어요. 익숙한 걸 또 만드는 게 아니라, 불편하고 어색하고 낯선 것을 통해 새로운 걸 만드는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에이리언의 알을 나란히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두 분의 본질이 닮았단 생각이 드네요. 혹시 동업해 볼 생각은 없나요(웃음)?
덕원: 이미 진행 중인 일이 있어요. 작년부터 은이 시를 노래로 만들고 있거든요. 음악은 말글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문학과 협업이 종종 이루어져요. 보통은 문학 작품이 음악의 모티프가 되거나 제목, 혹은 어느 구절을 허락받고 빌려 오는 정도인데 저는 좀더 본격적인 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침 은이 최근 시 중에 노래로 만들고 싶을 만큼 좋은 시가 있어서 은근슬쩍 운을 뗐죠.
오은: 덕원이가 고른 시는 《나는 이름이 있었다》에 실린 산문시였어요. 산문시는 문장마다 리듬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그걸로 노랠 만든다는 게 저에겐 무척 신선했어요. 제 시에 멜로디가 붙는 과정도 놀라웠고, 중간에 느낌이 확 달라지게 만든 것도 너무 좋았어요. “여름이 다 갔네~”
덕원: 음…. 연습 많이 시켜야겠네요. 올해 여름에 발매하고 은이에게 음악 저작권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어요(웃음).
기대되는데요. 두 분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친구’라는 게 뭘까 정의를 내리고 싶어져요.
오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반려자라면 친구는 꼭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각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주머니에 있는 사탕 하나를 기꺼이 건넬 수 있는 사람? 실제로 언젠가 덕원이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발매된 싱글 앨범을 가방에서 꺼내 주더라고요. 저를 언제 만날지 몰라 늘 가지고 다녔다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덕원: 언제든 만날 사이였으니까요. 제 생각에 친구는 별 이유 없이 가까이 지내는 사람 같아요. 이유가 있는 관계도 친구일 수 있지만 이유가 없어도 친구는 될 수 있는 거죠. 물론 목적이 겹치는 사람이 친구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목적 없이도 호감을 느끼는 관계, 그게 친구가 아닐까 싶어요.
후생에 두 분이 다시 만난다면 어떤 관계로 재회하고 싶어요?
오은: 주인이랑 반려동물이요. 제가 반려동물 하고 싶어요.
덕원: 반려동물 키워본 적 없는데 은이가 처음이겠네요(웃음). 제 답변이랑 연결되는 거 같은데, 저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제이고 싶어요. 무릎에 앉히거나 등에 매달린 오은, 생각만 해도 너무 귀엽잖아요. 많은 사람이 은이 덕분에 행복을 느끼지만 정작 사랑이 많은 은이는 상처받는 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감싸주고 싶어도 제가 살가운 편이 아니어서 그렇겐 잘 못 하거든요. 후생에는 은이를 좀더 마음껏 감싸주는 형이고 싶어요.
애틋한 마음이네요. 마지막으로 ‘오은과 윤덕원은 ______다.’를 채워본다면?
오은: “오은과 윤덕원은 물과 얼음이다.” 상태는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연결된 관계죠. 시원한 물이 먹고 싶을 때 얼음만 있거나 물만 있으면 아쉽지만, 둘이 만나 얼음물이 되면 훨씬 좋아지잖아요. 상태는 다르지만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는 관계! 덕원이가 여름이 되어 녹아버리거나 겨울이 되어 얼어버렸을 때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구나’ 생각하며 가만히 손을 내밀고 싶어요.
덕원: “오은과 윤덕원은 해와 달이다.” 만물의 에너지원인 뜨거운 은이, 그리고 조용하고 은은하게 빛을 내는 저. 성질은 다르지만 같은 하늘 위에서 빛을 품고 있는 건 닮았죠. 달이 있어야 해도 있고, 해가 있어야 달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오은: 정말이지 윤덕원을 만난 건 행운이에요(웃음).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 장소 협조 진부책방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