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베아트릭스 포터, 곧게 뻗어온 발자국 뒤로
《피터 래빗 이야기》를 탄생시킨 영국의 동화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동물 이야기를 그리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다른 이름은 정원사이자 농부, 그리고 자연을 사랑한 환경론자다. 아주 조금만 들춰보아도 선명히 보이는 그 이름들의 뒤편에는 망설임 없이 곧게 뻗어있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1860년대 런던,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도시의 환경과 상류 사회의 혜택을 누리며 자란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가 입고 먹는 거의 대부분의 생활에는 어느 정도의 격식이 필요했지만, 매년 여름만은 달랐다. 온 가족이 스코틀랜드의 시골 지역으로 떠나 몇 달씩 긴 여름휴가를 보냈기 때문이다. 소녀는 그때마다 시골의 정원을 뛰어다니며 꽃과 풀과 나무를 관찰하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그 시간 속에서, 각 잡힌 설계나 그림같이 꾸며진 풍경보다 사소하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삶의 일부인 집 안의 정원과 여름휴가지의 푸르름은 자연에 대한 애정을 더욱 깊고 넓게 확장해 주었다. 소녀의 노트는 자연에서 보고 만진 것들을 옮겨 그린 그림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노트 앞장에 적힌 이름은 ‘베아트릭스 포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품은 호기심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베아트릭스는 자연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나갔다. 봇짐을 지고 다니는 보따리장수처럼 그녀의 등에는 언제나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어느 날이고 위로나 흥미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하나 둘씩 꺼내져 조곤조곤 읊어졌을 것이다. ‘피터 래빗’ 역시 그렇게 쓰인 편지 한 장에서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다. 베아트릭스가 그녀의 가정교사의 아들인 노엘에게 써 내려간 편지에는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가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가 적혔고, 이후 피터는 종이를 뚫고 나올 듯 생생한 캐릭터로 거듭났다. 엄마 말을 어기고 맥그리거 아저씨의 농장에 들어가면서 아찔한 모험을 하는 토끼가 된 것이다. 베아트릭스는 이 이야기를 《피터 래빗 이야기》라는 책으로 펴내 독립출판으로 250부를 출간했다. 그리고 이 작은 책은 당시의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넘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
베아트릭스는 《피터 래빗 이야기》 이후 연이은 흥행을 이루어냈다. 그녀 곁에는 든든한 파트너 노먼원이 늘 함께였다. 책에 관한 일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상의하는 사이였던 두 사람은 신뢰가 두터워지면서 서로에게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노먼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도심에서 떨어져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꿈도 꾸었다.
1905년부터 시작한 힐 톱 농장에서의 생활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가 되었다. 농부이자 정원사가 된 그녀에게는 사계절을 부지런하게 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록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텃밭과 정원이 펼쳐졌는데, 베아트릭스는 그 안에서 겨울에는 잠든 식물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봄에는 장미의 가지를 치고 야생화를 돌봤다. 여름에는 건초를 만들어 가축들을 먹이고 잡초를 벴다. 가을에는 국화를 키우고 채소를 수확했으며, 다시 겨울에는 가만히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북쪽에 위치한 힐 톱에는 봄이 더디게 찾아와 정원이 색을 되찾는 속도도 그만큼 잔잔했다. 그녀 역시 계절이 정원을 물들이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마음을 치유해 갔을 것이다. 정원을 향한 애정 어린 태도는 고양이 가족이 등장하는 《톰 키튼 이야기》, 알을 지켜내는 오리 《제미마 퍼들덕 이야기》 등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마흔이 다 되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베아트릭스는 어떤 앞날을 상상했을까? 명성을 숨기며 조용하게 지내는 삶, 《피터 래빗 이야기》를 뛰어넘는 대표작을 만드는 데 몰두하는 삶, 새로운 사랑을 만나 안정을 찾는 삶…. 수많은 갈림길 중에는 분명 눈 감는 날까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연을 지켜내는 삶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의 영국 사회는 교육권을 포함한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시기였다. 베아트릭스의 남동생은 학교를 갔지만 그녀는 집에서 가정 교사에게 배우는 것이 전부였고, 부모님은 그녀가 적령기에 맞춰 지체 높은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두 가지를 모두 거부했다. 재능을 묻어두지 않고 직접 책을 만들었고, 호기심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현미경으로 균류를 연구해 보고서를 써 내려갔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넘도록 독신이기도 했다.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용감한 걸음을 디뎠다. 설령 그 길이 부모를 실망시키거나 주위의 눈초리를 받는 일이더라도 말이다. 책을 팔아 번 돈으로 땅과 농장을 사들일 때도 개발업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 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 자연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베아트릭스는 레이크디스트릭트 500만 평의 땅과 농장, 집을 환경 단체인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연을 사랑하는 소녀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중년이 되고, 그 아름다움을 지키는 노인이 되었다. 평탄하게 닦인 길을 마다한 대신 그녀는 진짜 자기 삶을 얻었다. 평화롭기만 한 그림 속에 숨어있는 강인함이 이제야 보인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글 마르타 맥도웰 | 그림 베아트릭스 포터 |
옮김 김아림 | 남해의봄날
베아트릭스 포터가 런던을 떠나 생활한 아름다운 정원에 관한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말년까지 그녀가 걸어온 인생을 조명하며 그림을 그리고 정원을 가꾸고 환경을 지키게 되기 까지의 시간을 보여준다. 힐 톱 정원의 사계절과 자연을 관찰하며 그려낸 다양한 그림들, 작품의 몇몇 장면들이 수록되어 있다.
피터 래빗 전집
글·그림 베아트릭스 포터 |
옮김 황소연 | 민음사
파란 재킷을 입은 토끼가 주인공인 《피터 래빗 이야기》를 포함해 스물일곱 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동물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어린이들만을 위한 동화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주는 메시지에 위로받는 어른들이 많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에디터 이다은
자료 제공 남해의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