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만화책 읽기

we often chuckle as we read a cartoon book

공원에서 만화책 읽기

만화책이란 모름지기 방구석에서 몸을 잔뜩 구기고 읽는 것이 제맛이지만, 다니구치 지로たにぐち じろー의 만화책은 어쩐지 밖에서 읽고 싶었다. 낯선 골목길을 산책하거나 소박한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거나 험한 산을 오르거나 하는 그의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바깥으로 향했다.

《우연한 산보》에 빠지다

“나 이거 정말 좋게 봤어.”라며 남편이 진지한 목소리로 한 권의 만화책을 건넸다. 처음엔 너무 별 얘기가 아니라서 어떻게 이런 걸 만화로 그릴 생각을 다 했을까 했는데 짐짓 삶을 깊이 파고들어 오는 작가의 통찰과 섬세한 그림체에 크게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와 산책을 하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니 자세한 이야기는 이 만화를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만화책의 제목은 《우연한 산보》. 쿠스미 마사유키くすみ まさゆき가 글을 쓰고 다니구치 지로가 그림을 그렸다.

한 화마다 8페이지씩 총 여덟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만화는 정말이지 놀라운 만화였다. 자칭 ‘산책의 천재’라고 하는 주인공 우에노하라 조지가 이러저러한 일들로 우연히 어느 동네에 갔다가 그 동네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든가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전부다. 하지만 그 이야기엔 때로 눈물이 핑 돌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지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첫 화 <에디슨 전구>부터 마지막 <메지로의 카키모치>까지, 나는 그와 함께 산책에 동행하는 마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잇장을 넘겨댔다.

우에노하라 씨의 존재감이란 정말이지 대단했다. 산책을 할 때면 계획을 세우지 않고 무작정 흥미가 당기는 길로 새고, 결과가 어떻든 산책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큰 만족감을 느끼는 그에게서 나는 삶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반드시 커다란 사건과 마주할 때만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에도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지혜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이 만화는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완전히 그의 팬이 되어 버린 우리 부부에게 ‘우에노하라 조지’라는 풀 네임은 단지 어느 만화의 주인공 이름으로 지어진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산책 자체를 의미하는 새로운 명사로, 혹은 ‘우에노하라 조지하다’라는 새로운 동사로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산책하러 가자”고 하지 않고 “우에노하라 조지하러 가자”고 말했다. 이 만화의 끝에 실린 쿠스미 마사유키 씨의 후기에서 산책을 ‘우아한 헛걸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산책을 그냥 산책이라고 말할 때보다 ‘우에노하라 조지’라고 말할 때 바로 그 의미가 몇 배는 더 강화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만화책을 추천하며 언급했던 결혼 이야기도 후기에 실려 있었다. “산책이라는 것은 생활의 짬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인이나 연인과 하는 산책은, 장소를 정하고 약속을 하고 만나고 나서는 것이기에, 데이트나 여행은 되지만 산책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엔 생활이 없으니까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짬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곧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요.”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책들과 함께

공원으로

우리는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책들을 잔뜩 사서 거실 한편에 쌓아 두었다. 쿠스미 마사유키와 함께 호흡을 맞춘 또 다른 작품인 《고독한 미식가》를 포함해 그 양이 총 열일곱 권에 달했다. 만화책들보다 열 배는 더 높은 높이로 쌓여 있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잠깐의 꿀맛 같은 휴식시간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곧장 저 만화책들을 해치우리라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왠지 방구석에 처박혀 만화책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지난 번 《우연한 산보》를 읽을 때 몸에 느껴졌던 ‘근질근질함’을 기억했기 때문이리라. 온갖 골목길을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주인공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좀이 쑤셨던가.

우리는 각자의 배낭 안에 마음에 드는 제목의 만화책을 몇 권 담아 자전거를 타고서 가까운 한강 공원으로 나갔다. 운동을 하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가족들과 함께 놀러 나온 수많은 사람들 틈에 만화책을 읽으러 나온 쪽은 우리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강 공원은 만화책을 읽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조용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고, 가끔 몸이 뻐근할 때 거닐다 올 잔디밭이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별 고민없이 제일 먼저 《에도 산책》이라는 만화책을 펴 들었다. 산책의 귀재인 우에노하라 조지에 대한 애착 때문인지 ‘산책’이라는 단어에 끌린 모양이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에도 시절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김정호 같은 사람의 이야기랄까. 아직 나라의 지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던 시절, 주인공은 지형과 지리를 파악하고 각 공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를 재기 위해 온갖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거리를 정확히 잴 수 있도록 보폭을 최대한 일정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또 그 사이사이 기막힌 표현들이 마음을 두드리곤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이 길을 걷다 만나는 무언가와 동일시되는 순간들이었다. 걸음의 모양, 보폭, 속도 같은 것에 집착하는 주인공은 땅에 가장 가까이 붙어 다니는 개미에 자신을 이입하여 기형적으로 커져 버린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연못 근처의 거북이가 되어 물속을 빠르게 헤엄쳐 다니기도 하고, 벚꽃을 피우는 고목나무가 되어 시간을 느끼기도 한다. 이쯤 되니 주인공이 길을 걷다가 코끼리를 만나면 이제 곧 코끼리가 되어 보겠구나 하는 마음에 다음 장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니 이제는 만화책 밖의 세상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돗자리 옆을 지나가는 이름 모를 곤충을 보면 나도 그 곤충이 된 마음으로 한강 풍경을 바라보게 되고, 하늘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보면 기러기의 시선으로 서울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가 지닌 묘한 힘이 그렇게 내게 또 한 번 스며들었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책들

01 열네살
다니구치 지로 | 샘터
40대 후반의 한 중년 남자가 어느 날 자신의 열네 살 시절로 돌아간다. 그는 어른의 방식으로 예쁜 여학생을 매료시키고, 친구에게 그의 미래를 예언하기도 한다. 다시 돌아간 그의 십 대엔 어떤 일이 생길까. 마냥 좋은 일만이 생기지는 않는다. 어른이 살아낸 아이의 시간, 그것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02 우연한 산보
쿠스미 마사유키, 다니구치 지로 | 미우 일본의 한 문구회사에 근무하는 중견 영업사원 우에노하라. 그는 일상 속에서 틈틈이 짬을 내 산보(산책)를 한다. 그날의 걸음을 따라 아무 곳이나 산책을 하는데, 그 여정을 따라가는 느낌이 즐겁다. 우연히 만난 즐거운 풍경은 우에노하라의 마음뿐만 아니라 읽고 있는 독자도 미소 짓게 한다.

03 겨울 동물원
다니구치 지로 | 세미콜론
다니구치 지로의 자전적 캐릭터로 유명한 주인공 하마구치. 그는 진로를 고민하다 우연한 계기로 만화 업계에 발을 디딘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재능, 의지를 원동력으로 삼아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을 보다 보면 알 수 없는 힘이 마음 깊숙이 생겨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04 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 애니북스
다니구치 지로의 대부분 작품이 그러하지만, 이 책은 유독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며 그런 아버지를 외면하는 주인공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우린 결국 닮아있는 자식이구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05 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다니구치 지로 | 세미콜론
부인과 사별한 노신사와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삼십대 중반의 독신 여성. 두 사람은 어색한 대화를 쌓아 가며 서로에게 자연스레 스며드는 감정을 키운다. 통속적인 멜로가 될 수 있는 소재를 담담하게 그려냈지만, 감초 같은 소재와 솔직함을 놓치지 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06 고독한 미식가
쿠스미 마사유키, 다니구치 지로 | 이숲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이 책은 일본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쿄와 오사카의 소박하고 오래된 열여덟 곳의 식당을 홀로 돌아다니며 일본 고유의 음식 맛을 즐기는 주인공.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일식집을 찾게 되곤 한다.

07 에도 산책
다니구치 지로 | 애니북스
그는 작품마다 ‘산보(산책)’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만큼 산책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 산책이란 단어는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소개하는 산책을 보다 보면 ‘제대로 산책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산책을 즐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08 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다니구치 지로 | 애니북스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을 원작으로 다니구치 지로가 만든 만화이다. 1924년 영국 히말라야 원정대에 참가해 정상을 200여 미터 남기고 실종된 조지 맬러리의 종적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주축이다. 다섯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2005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의 최우수작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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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선아

글 김민주 사진 김민주, 권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