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We Look After Each Other

레트로킷 배선영

서래마을은 이국적이고 고즈넉한 동네다. 골목 사이사이 프랑스 학교와 프렌치 빵집이 있고 편집숍, 공원이 어우러져 마을의 고유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곳에 둥지를 튼 지 11년, 작고 소중한 일상을 가꾸며 살아가는 ‘레트로킷’ 배선영 실장을 만났다. 세상의 집과 동네에는 사소한 나날이 빚어낸 이야기가 있다. 일터와 집에서 일상을 보내고 제주에서 쉼을 누리는 가족의 이야기는 이들의 전부나 다름없다.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부모들이 아이에게 사랑 준다고 생색낼 일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감내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뒤통수 맞듯 깨달았어요.”

Living Now
지역 서울시 서초구
형태 빌라

Trace
0~4세 서울시 성동구
4세~ 서울시 서초구

동네가 한적하고 고요하네요. 

서래마을에 산 지 8~9년 정도 되었어요. 레트로킷 매장으로 잘 어울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 잡은 곳이죠. 프리미엄 편집숍을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구매력 있는 지역도 중요했지만 대로변이나 역 근처의 번잡한 곳은 피하고 싶었어요. 작은 비스트로와 프렌치 빵집, 레스토랑이 있고, 프랑스 학교도 근처에 있어서 거리마다 외국인이 많아요. 다양성이 존중되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장을 얻고 1년 뒤 집도 근처로 옮겼고요. 

 

거주지를 정할 때 어떤 것들을 고려했어요? 

집은 레트로킷과 3분 거리예요. 저희 부부가 일과 육아를 함께 해야 했기에 일터와 가까운 게 제일 중요했어요. 아이들 가까이에서 함께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여기로 이사 오기 전에 금호동 아파트에 살면서 출퇴근했는데요. 집과 어린이집 위치, 이모님 스케줄 모두 너무 복잡했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변수가 많아서 두무개길을 따라 하루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는지 몰라요. 일터 근처로 이사 오고 싶었는데 집값이 너무 비싸서 고민하던 차에 이 집이 나타났어요. 집 사이즈는 전보다 작지만 전망이 트여서 서래마을 전경이 보이고 빛이 가득 들어오는 곳이라 마음에 들었죠. 급하게 이사 왔는데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어요. 학교, 숍, 학원 모두 걸어서 이동이 가능해서 살수록 너무 만족스러워요. 아이들한테 유해한 환경도 없고요. 

 

레트로킷이 2013년에 만들어진 브랜드죠? 레트로킷의 뜻과 의미가 궁금해요. 

‘레트로’와 ‘로킷’을 더해서 만든 단어예요. 로켓이 주는 작용 반작용의 독특한 에너지에 반해 즉흥적으로 이름 지었어요. 자신만의 길을 가는 로켓이 내뿜는 활기찬 느낌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로켓처럼 우리만의 에너지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누군가 ‘레트로킷은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주는 브랜드’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마다 가진 여러 모습 속 아이덴티티를 찾아주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보여주려고 해요. 지금도 그 과정 중에 있어요. 

 

부부가 오랜 시간 쌓아온 관심사와 취향이 섞여 브랜드의 색이 된 거 같아요. 브랜드를 만들기 전에 어떤 일을 했어요? 

남편은 음반을 여러 개 낸 밴드 드러머로 음악을 오래 했어요. 스케이트보드를 즐겨 타고 오토바이도 다섯 대쯤 가지고 있죠.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이에요. 저는 미술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회사에 다녔어요. 남편과 오래 만나다 보니 시가에서 가족의 사업을 이어가는 걸 제안하셨어요. 시가가 안과 의원, 안경원을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오래 연애했으니 결혼을 하게 될 테고, 안경사는 가정을 꾸리는 데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데 동의했어요. 저와 남편은 다시 대학에 입학했고 안경광학을 공부하고 안경사 면허를 취득했어요. 졸업 후 유명 프리미엄 안경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안경사이면서 미술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으로 다양한 일을 해볼 기회가 주어졌죠. 여러 매장의 디자인 작업을 하고 마케팅, 매장 관리, 직원 교육을 하면서 숍 전반의 많은 일들을 했어요. 성실히 일해서 성과를 내고 인정받는 게 좋아서 아이 둘 낳고도 꽤 열심히 했어요. 남편은 음악을 계속하다가, 군대를 다녀오고부터 함께 일했죠. 10년여 일하면서 여기서 일한 대로 한다면 앞으로 뭐든 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그즈음 남편한테 “이제 우리 매장을 열어보는 게 어때?” 물었고, 남편도 동의했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콘셉트를 그려보면서 레트로킷을 만들었어요.

아티스트의 전시를 열고 합이 잘 맞는 브랜드와 협업하여 제품을 기획하기도 했죠. 아이웨어 편집숍을 넘어서 여러 가지 볼거리를 소개한다 느꼈어요. 

레트로킷은 고객들에게 좋은 제품을 좋은 서비스로 제공하는 걸 최우선에 두고 있어요. 퀄리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외형의 디테일뿐 아니라 정서의 퀄리티도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안경 브랜드를 소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골이 생겨났고 좋은 분들이 모여들었어요. 새로운 기획을 할 때 정서 퀄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해 ‘우리 고객분들이 좋아하겠다.’, ‘우리와 잘 어울린다.’ 싶은 직감에 따르는 편이에요. 남편은 음악을 하던 사람이라 공간에 자연스럽게 음악과 예술을 잘 담아요. 아티스트 알타임 죠Artime Joe, 그라플렉스Graflex, 김건주 작가와 협업했고, 레트로킷과 어울리거나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제품군을 소개하기 위해 프루타, 키티버니포니, hiro, 십화점, 부리, 민주킴, LX 하우시스 등과 상품을 만들었어요. 모두 다른 카테고리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판단을 믿고 계획을 세워 추진해요.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성과를 내면서 조금씩 성장했어요. 판매도 중요하지만 고객과 파트너들에게 레트로킷이 좋은 브랜드로 기억되길 바라요. 고객뿐 아니라 함께 기획하고 협업한 브랜드에도 프라이드가 되면 좋겠고요. 레트로킷은 만 10년이 된 브랜드인데요, 이제 시작 같아요. 5~6년까지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앞을 보고 달려왔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어요. 아이들도 많이 컸고 제가 다시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시기가 왔어요. 레트로킷 2막을 꿈꾸고 있죠. 

 

SNS에 올린 글을 보면서 강단 있고 에너지가 많은 성향이라 느꼈어요. 

외향형으로 보이겠지만 어린 시절 저는 내향형이었어요. 형제가 넷인 가족의 셋째 딸로 자라며 이리저리 눈치 보고 알아서 살아야 했어요. 타고난 성향과 재능을 내 안에 품은 채늘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결정과 실행 전에 머릿속으로 촘촘하게 시뮬레이션을 그려보고 조금이라도 애매한 게 있으면 시도하지 않아요. 하기로 결정한 것은 안정적으로 쭉 이어 나가고요. 그 생각과 결정, 실행의 작은 연습들이 쌓여 경험이 되었어요. 고객들이 필요한 것을 기획한 건지, 사고 싶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이젠 생각하고 결정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아지고 결과 예측도 한순간에 가능해진 것 같아요. 이건 엄마이기 때문에 그 능력치가 커졌다고 생각해요. 애를 업고 안고 쓸고 닦으면서도 나의 고객과 일은 머릿속에 계속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앉아서 고민하지 않아도 다 가능하게 된 거죠. 보기보다 에너지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아이를 낳고 에너지를 허투루 쓰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10년간 레트로킷과 아이를 키우면서 단련한 나만의 방식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해요. 

 

10년간 단련한 나만의 방식을 좀 더 들어볼래요. 일하고 아이들 케어하며 빽빽한 하루를 살 거 같은데요, 일과가 어떻게 흘러가요?

저의 루틴은 굉장히 단순해요. 일곱 시 삼십 분쯤 일어나 아이들 밥 간단하게 먹이고 학교 보내요. 그런 다음 매장이 문 여는 열한 시까지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한강을 7~8킬로미터 걷거나 집에서 자유 시간을 보내요. 체중이 는 것 같거나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 스스로 관리하려고 노력해요. 출근 후 아이들 하교 시간에 잠시 집에 들르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10대가 되고는 둘이 알아서 집에서 할 일을 하고 학원도 가기 때문에 6~7시까지 일하는 날이 많아요. 저녁에는 아이들과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하고 같이 유튜브나 책 보다가 잠드는 일상이죠.

레트로킷을 만들기 전에 두 아이가 태어났다고 했어요. 엄마라는 자리가 주어지고 어떤 변화가 생겼어요?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졌어요. 젖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육체노동이 벅찬데 아이들은 간절히 엄마만 원해요. 눈물 나게 징하게 엄마만 찾았어요. 남편이 곁에 있는데 밥도 내가 하고 애도 내가 보고… 일은 같이 하지만 육아는 나 혼자 하는 거 같아 외로웠어요. 아이들 키우면서 화내는 이유는 사실 한 가지였어요. 남편이 마음에 안 드는데 참으니까 애들한테 그 화가 전달되는 거죠. 이 힘듦을 나누고 싶은데 남편과도 온전히 공유할 수 없어서 쓸쓸한 순간이 많았죠. 내 기분만 나빠지니까 최대한 남편 탓을 안 하려고 노력했어요. 남편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아이를 재우고, 청소도 한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애절한 사랑에 ‘그래, 내가 한 번 다 받아보겠다.’ 마음먹고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며 감당했어요. 입주 이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일도 놓지 않았죠. 저녁 여덟 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이모님이 한 명은 업고 한 아이는 유모차 밀고 아파트 입구에 나와 있어요. 멀리 아이들이 보이면 주차장까지 가기도 전에 차를 잠시 세워두고 내려서 달려갔어요. 아이들이 저를 보면 반가워서 방방 뛰었어요. 첫째가 좋아하는 빨간 애착 이불을 입에 물고 저를 기다리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렇게 애틋했죠. 

 

두 아이를 키우며 일을 놓지 않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맡은 건 성과를 내거나 잘해야 하는 성향이라 노력을 많이 했죠. 첫째를 낳고 얼마 안 돼 연년생으로 둘째를 임신하면서도 우리 지점을 매출 1위로 이끌었어요. 회사 내 여직원에 대한 편견도 깨졌고 다들 일을 열심히 해서 불평이나 불만, 잡음이 없었어요. 나중에 들었지만 대표님이 다른 점장님들에게 “선영 씨는 아이 둘 낳으면서도 저렇게 일을 잘한다.”고 이야기하셨대요. 일에서 인정받으니까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힘들어도 보람이 컸어요. 버티는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만능이 되었어요(웃음). 

 

그러다 브랜드를 만든 거죠? 

맞아요. 사실 계속 직장 생활을 했어도 잘했을 거예요. 하지만 아이들 덕분에 결정하게 된 일이에요. 아이들을 더 많이 보고 싶고 기왕이면 가까이서 함께하고 싶었어요. 또 나만의 숍이 있으면 내 재능을 더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서 늦기 전에 독립을 한 거죠. 제가 살고 싶은 삶은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중심을 잘 잡는 편이에요. ‘성실히 일하고 고객과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대하면 되겠다.’ 생각을 하니 일도 육아도 다 잘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처음엔 이모님 도움을 받았는데, 큰애가 여섯 살 무렵 “할머니도 편하지만 엄마가 우리를 봐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어요. “엄마가 일을 하면서 너희도 잘 챙기기는 힘들어. 놓치는 게 많을 거야.” 했지만 자기들이 엄마를 도울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했어요. 일하다 부랴부랴 아이들 데리러 가고 집은 늘 난장판이고 간신히 정신줄 붙잡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그제야 제대로 엄마가 된 거 같더라고요. 두 아이를 품고자는데, 첫째와 다르게 둘째는 며칠 지나니까 좀 불편해하는 거예요. ‘내 손이 편하지 않나 보네. 더 친해져서 익숙하게 만들어야겠다.’ 마음먹고 딱 붙어 지냈어요. 6개월 지나니까 애착 관계가 돈독해졌어요. 힘에 부치고 에너지는 바닥이 나서 화내는 날도 있었지만 다 지나가던걸요. 그 결정으로 조금 덜 벌었고,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도 많았지만 100배로 보상받았다 생각해요.

보통 육아 책에 나오는 ‘세 살까지 쌓은 애착 평생 간다, 하루 세 시간 아이와 보내야 한다.’ 같은 이야기에 일하는 엄마들이 죄책감을 느끼곤 해요. 그 시기를 놓쳐도 애착은 쌓을 수 있는 거네요? 

맞아요. 아이와의 관계는 언제든 회복할 수 있어요. 지금부터라도 마음만 먹으면 전보다 나아질 수 있다 믿어요. 어릴 때 부족했다 싶은 엄마의 정을 시간이 조금 지나서 가득 채워줬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저에게 더 큰 사랑을 알려주더라고요. 부모들이 아이에게 사랑 준다고 생색낼 일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감내하며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뒤통수 맞듯 깨달았어요. 한 번은 첫째 아이와 에스컬레이터에 탔는데, 나란히 서고 싶어서 저는 한 칸 올라가고 아이는 한 칸 내려갔어요. 서로 엇갈린 걸 보고 웃고, 껴안으면서 “내가 엄마 나이 들면 딸처럼 잘해 줄 거야. 엄마는 착한 엄마야.”라고 하던 순간을 잊지 못해요. 아홉 살까지 정말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보석 같은 말을 담느라 늘 애썼는데, 3학년이 되면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눈치도 빨라지면서 현실적이고 독립적으로 성장하더라고요. 

 

두 아이가 비슷한 듯 달라 보여요. 각자의 책상을 봐도 성격이 보이던걸요? 

맞아요. 첫째 아윤이는 굉장히 야무진 아이예요. 어릴 때부터 침 한 번 안 흘렸어요(웃음). 잘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계획을 세워서 달성하려고 하고, 스스로 어느 위치인지 확인하고 성장하려고 노력해요. 자존심이 강하고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고 사고 싶은 것도 꼭 사야 해요. 누구 말을 무조건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더 믿는 편이죠. 그리고 강아지를 너무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깊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아이라, 아윤이에게 강아지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개박사예요(웃음). 지금 강아지 키우기를 목표로 책상 위에 버킷리스트를 스스로 적어뒀어요. 둘째 아인이는 순하고 귀여운 아이예요. 즉흥적이고 유연한 성향이에요. 춤추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요. 아빠 생일날 편지를 써줬는데 한번 보실래요? “아빠는 나처럼 완벽한 딸을 낳았으니 축하받을 자격이 있어.” 언니랑 달리 늘 어딘가에 밥풀이 붙어 있고 입가에 소스를 묻혀놓는 아이죠. 뭔가 흘리고 묻은 걸 알려주면 그냥 웃어요. 그런 자신도 맘에 든대요(웃음). 어디서든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고 밝아서 누구와도 잘 지내요. 몸 쓰는 걸 좋아해서 댄서가 되고 싶어 해요. 

 

아이들과 대화를 자주 하는 거 같아요. 

맞아요. 아이들이 “엄마 이야기하자.” 부르면 누워서 자정이 될 때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해요. 저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니 진짜 감사한 일이죠. 하루 있었던 일부터 주변의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한 번은 친구 둘이 아윤이 없는 데서 험담한 일을 알게 되었대요. 속상했을 거 같아 마음을 살폈는데, 아이는 그 탓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더라고요. 저라면 많이 속상하고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는 그 친구들이 자신을 부러워해서 그런 거라고, 다른 친구와 놀면 된대요. 친구의 감정을 자신과 분리하는 모습을 보고 좀 놀랐어요. 얼마 후 정말 그 친구들이 부러워서 그랬다며 편지를 써줬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모습에 제가 반했어요. 주변 환경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이 저보다 나은 거 같아요.

사랑에서 비롯된 용기

“설거지하면서 ‘아윤아 사랑해.’라고 하면 ‘내가 더 사랑해.’라는 말이 벽 너머에서 들려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랑에서 비롯되는 용기라고 생각해요. ‘사랑해.’라는 말도 스스로 ‘용기 내자. 괜찮아.’라고 되뇌는 말인 거죠.”

저도 반했어요(웃음). 이 말을 듣고 보니 SNS에 “아름다운 존재가 커가는 데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글을 쓰신 게 이해가 되어요. 

전 아이들이 ‘사랑과 자유’를 가지고 ‘순수하고 성숙하게’,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길 바라요. 아윤이가 두 살쯤 작은 가위를 들고 있을 때 표정을 아직도 기억해요. ‘위험해! 내려놔!’ 또는 ‘내가 해줄게!’라고 말할까, 지켜볼까 고민됐죠. 그때 아윤이의 앙다문 입술과 야무진 손가락을 보니 가만둬야겠더라고요. 아이는 이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아는 것 같았어요. ‘정말 위험한 순간에 내가 개입해야지. 어떻게 하나 보자.’ 했는데, 예쁘게 잘 잘라냈어요. 

저의 육아관은 어린이집 영향으로 더 단단해진 거 같아요. 어린이집에 다닐 때 미션이 딱 하나가 있었는데, ‘아이들 말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적는다.’였어요. 키즈노트에 하루 일과가 아니고 아이가 오늘 한 이야기 중 하나를 선생님이 적어주세요. 그럼 저도 하원 후 아이가 한 얘기 중 하나를 받아 적어서 보내야 해요. 일례로 “엄마가 일하느라 밥 잘 못해줘서 미안해.” 했더니 아윤이가 “왜 엄마만 밥을 해야 해? 엄마만 미안해야 해? 엄마가 바쁘면 밥 못 해줄 수도 있는 거야. 그건 엄마라서 미안한 거 아니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했어요. 그럼 그 말을 적는 거예요. 내가 평가하고 해석하고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보석 같은 말을 그대로 쓰는 거죠. 첫째, 둘째 다니는 4년 동안 아이들 흔적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몰라요. 그렇게 글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죠. 지나고 보니 그게 아이들의 모든 것이었어요.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걸 존중받은 거예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할머니가 손주를 데리고 등원하면서 날이 추운데 얇은 옷을 입고 나간다고 떼를 써서 아침부터 고생했다며 아이가 너무 말을 안 듣는다고 원장님한테 하소연한 거예요. 그때 원장님이 아이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00아, 할머니가 너무 말을 안 듣지? 입고 싶은 옷 입고 가겠다는데 할머니가 고집 피워서 너 참 힘들었겠다.” 아이들 시선에서 바라보며 얘기해 주시는 걸 보고 저도 참 많이 배웠어요. 어린이집 친구들이 영어 유치원, 일반 유치원으로 옮겨 갈 때 고민되긴 했지만 그곳을 계속 다니길 너무 잘한 거 같아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업도 중요한 부분일 텐데요, 아이들은 어떤 걸 공부하고 배워가고 있나요? 

저는 공교육을 신뢰해요. 때가 되면 가능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2~3학년이면 구구단을 떼고, 내가 사는 나라와 지역에 관심이 생길 때쯤 사회를 배우는 식이잖아요. 초등 교육은 영어 과외 외에는 학교에서 하고 있는데, 고학년부터는 조금 벅찰까 싶어서 “이젠 학원을 가보는 건 어때?” 물어보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스스로 하겠다고 해요. 큰아이가 스스로 해보지도 않고 학원을 가는 건 자기 자신을 테스트해 볼 기회조차 안 가지는 거라고,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무슨 토를 달겠어요. 제 생각보다 훨씬 잘 해내고 있으니 믿어야죠.

둘째의 꿈이 댄서라고요. 올려주신 영상 속 두 아이의 모습이 즐겁고 진지해 보여요. 

아이들이 학교 방과 후에서 방송댄스를 배웠어요. 재미있다고 해서 집 가까이에 아크로바틱과 댄스 학원을 찾았고 5년째 계속 배우고 있어요. 요즘은 둘이서 유튜브 찾아보고 안무를 따라 해요. 안무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요. 저는 그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여요. 아이들과 꿈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데, 댄서가 꿈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댄서란 무엇인지, 어떻게 경제활동을 할 건지 이야기해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는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해요. 댄스 학원에서 둘째에게 대회에 나가보면 어떻겠냐며 제안해 주셨어요. 저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나가보자. 대상 도전해 보자!” 했더니 아인이가 대회 나가는 건 촌스러운 거래요. 그냥 추는데 잘 추는 거, 그게 멋있는 거래요(웃음).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말문이 막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 많아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나만의 속도는 어떠한지, 스스로 알아가면서 찾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두 아이들은 춤으로 재미, 재능, 적성, 능력, 사랑, 하기 쉬운 것, 시간이 필요한 것, 안 되는 것, 자존심, 자존감, 성취감, 결단력 등을 경험하고 있어요.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즐기고 그 이상을 해나가죠. 시간을 투자해서 흥미가 고통을 통해 실력이 될 때, 희열감을 느끼고 자기 확신이 자라는 게 보여요. 

 

첫째가 6학년이죠? 중학교 입학쯤 여러 가정들이 학교와 학원 선택에 깊은 고민을 한다고 들었어요. 거주지 이동도 많고요. 부부는 어떤 고민이 있어요? 

저희는 주변의 교육 인프라에 만족해요.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좋은 학원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혼자 공부해 온 우리 애들이 갈 수 있는 학원이 없을 거 같긴 해요. 중학생이 되면 학원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그때 돼서 생각하려고요. 과외를 해도 되니까요. 공부를 스스로 하면서 재미를 느끼다 보면 꼭 해야 할 때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지금은 공부를 싫어하지 않고 부딪치고 즐기는 걸로 만족해요. 아윤이는 80점을 맞아도 너무 기뻐해요. 지난번에 70점을 맞았으니까요. 그런데 90점 맞은 친구들이 80점인데 넌 왜 기분이 좋은 거냐 물었대요. 자기는 엄마와 선생님한테 혼날 것 같아서 두렵다면서요. 그날 90점을 맞아도 행복하지 않은 친구도 있다는 걸 알았대요. 자신이 참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50점 맞은 나도, 100점 맞은 나도 다 나.”라고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혼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라고 했어요. 공부에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 공부를 열심히 했거나 안 했거나 공부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 말 할 때 진심으로 멋있어요. 인생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같거든요. 저는 그저 “야, 너 진짜 멋있다.” 감탄만 해요(웃음).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얻고 감내하는 것이 다르잖아요. 서래마을에서 누리고 사는 것과 아쉬운 점은 뭐예요?

일과 집이 가까운 삶을 선택했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아주 많아요. 정서적인 안정감이 가장 큰 이점이에요. 번잡하지도 않고 유연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분위기에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주변의 교육과 문화 인프라도 만족스럽고요. 일과 가정, 교육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자주 느껴요. 분리되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가 없냐고 묻는 분도 계시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멀리 가서 쉬어도 머릿속에 일이 없진 않고 나와서 일하고 있어도 집에 있을 애들이 생각나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뭔가 하나가 잘되면 하나가 안되는 게 아니라 모두 같이 상승 효과를 누리는거죠. 아쉬운 건 비싼 집값이에요.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솟아서 집을 사는 건 포기하고 살아요. 하지만 내가 열심히 벌어 언젠가 그날이 올 거라는 믿음은 있어요. 

 

아이들 방학 땐 제주도에서 머문다고요. 이유가 있나요? 

아이들 2, 3학년 때 휴가로 제주에 갔어요. 즐겁게 놀고 돌아가기 전날 밤, 첫째가 집에 가기 싫다고 울었어요. 다시 오자고 달래면서 연휴 때마다 제주에 왔어요.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일주일 머물기로 한 일정을 2주일로 연기하고, 그러다 한 달이 되었어요. 지나고 세어보니 1년에 100일 가까이 제주에 머물렀더라고요. 저는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지친 상태라, 낯선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온전히 쉬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면 어디 그럴 수 있나요(웃음). 갈 때마다 한곳에 머무는 편인데, 그 동네에서 ‘강이’라는 강아지를 알게 되었어요. 밤이면 깜깜하고 조용한 시골인데 언제나 마을 어귀에서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어요. 아이들이 비 오고 눈 오고 춥고 더운 날에도 숲속 외길을 걸어 다닌 지 몇 년 되었고, 일부러 강이를 보러 가고 싶어서 밤낮으로 무서운 길을 내려와 만지고 먹이고 했죠. 새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달려갔어요. 너무 수고했다고 만져주고, 귀엽고 똑똑한 새끼들도 많이 예뻐해 줬죠. 강이가 무지개다리 건너면서 남겨진 새끼 ‘건이’를 아주 아끼고 있어요. 자매는 강아지를 입양하고 싶어서 자기들만의 프로젝트를 만들었어요. 강아지를 입양하게 된다면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정리나 청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둘이 단계를 정해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어요. 

제주에 오고 가면서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더 넓고 깊어진 걸 느껴요. 자연을 아름답다 여기고 자연 속에서 평온한 행복과 진정한 자유를 깨달아요. 자신을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재밌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요. 어느덧 모래가 발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했던 아이들이 거센 파도와 부딪히며 해지는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죠. 지금 우리 가족 공통의 관심사는 제주예요. 사람과 떨어져 있고 싶었던 저도 어느덧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어요. 제주에 머물며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어요. 열심히 일하고 학교 다니다가 제주로 돌아가는 삶을 살고 있어요. 

 

방학이 아닌 학기 중의 평일이나 주말에는 가족이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학교 다녀오고 영어 과외 하고 운동하고 나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요. 일하다 집에 잠시 들어왔는데 유튜브 보다가 낮잠 든 아윤이를 보면 참 귀여워요. “오늘도 학교에서 애썼구나. 그래서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니?” 물으면 엄마가 안 봐서 뭘 모른다며 자신이 공부하는 걸 가지고 와서 보여줘요. 그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웃음). 저녁에는 드라이브도 자주 해요. 차 안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 듣고 영화 보러 가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맥도날드에 가서 먹고 싶은 걸 먹고 오는 거죠. 주말에는 각자 친구를 만나거나, 함께 동네 산책 하고, 갑자기 강원도로 떠나기도 하며 즉흥적으로 보내는 편이에요. 짧은 휴일에 뭘 해야 하나 고민이나 계획이 거의 없는 편이에요. 우리에겐 제주가 있으니까요.

육아도 삶이라 여러 시도를 하면서 나에게 맞는 모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꼭 필요한 거 같아요.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불안해하며 더듬더듬 길을 걷는 시기도 있을 텐데요. 

어릴 때는 위험에서 지켜주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엄마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너무 자주 엄마를 찾을 때면 힘들고 지쳐 화내기도 했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내 감정을 이해하고 솔직하게 대하려 노력했죠. 화내고 짜증 내거나 변명, 분풀이하지 않고 이야기하려고요. 한 번 막힌 관계를 푸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니까요. 보통 부모를 괴롭히는 건 외부적인 요인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나와 아이만 집중하면 혼란스러운 일도 없을 거라 믿었어요. 작은 시누가 소아과 의사인데 조카 어릴 때 삼다수에 분유 넣어서 흔들어 먹이더라고요(웃음). 저도 모든 기준을 충족시키려 하기보다 편하게 키우려고 노력했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인생을 제가 책임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이의 생활을 내 눈으로 볼 수 없잖아요. 각자의 영역에서 알아서 살아내야 하죠.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가 힘들다고 하는데, 학교는 아이가 다니고 적응도 아이가 하니까 아이가 더 힘들 거라 생각했어요. 실수하고 실패하는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하는 시기이고요. 초등학생 때 숙제 안 하고 준비물 안 챙기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경험해 봐야죠. 첫째 아윤이는 어린 나이부터 잘하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저의 어린 시절 실수나 경험을 자주 들려주곤 했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받고 속상할까 지레짐작하고 격려한 말이었는데, 다시 돌아간다면 “그래 한 번 잘해봐.” 하면서 더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 같아요. 성취 욕구가 큰 아이에게는 그것이 더 좋은 응원이라는 걸 이제 알거든요. 앞으로도 내가 생각했을 때 괜찮겠다 싶은 대로, 남 이야기에 크게 관심 갖지 않으며 방법을 찾아가려고 해요.

아이라는 존재를 발견하며 스스로 많이 치유하고 성장한 모습이에요. 

아이는 존재 자체로 사랑이에요. 내 안에서 새로운 우주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가장 가까이에서 커가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아이들을 통해 회복했고, 아이들 덕분에 성장했어요. 저는 평생을 살면서 예쁘다는 얘기를 못 들어봤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예쁜 거예요. “너희는 엄마, 아빠를 닮았으니까 너희가 이렇게 예쁘다는 건 나도 예쁘다는 거잖아. 엄마는 너희를 보면서 나도 예쁘다는 걸 알았어.”라고 말하면 아이들이 “엄마가 나보다 더 예뻐.” 하거든요. 누가 날 이렇게 사랑해 주고 좋아해 주겠어요. 제가 먼저 사랑을 주고 친절하게 대하니 아이들도 다정하게 굴어요. 저는 이걸 선순환 육아라 불러요. 가끔 나도 ‘멋지다, 훌륭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더 멋진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고 아이들에게 고백하기도 하죠. 엄마가 되고 나를 돌아보는 법을 배웠어요. 공감 능력이 커졌고, 경청하며 배려하는 지혜를 얻었고요.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도 사실 모두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설거지하면서 “아윤아 사랑해.”라고 하면 “내가 더 사랑해.”라는 말이 벽 너머에서 들려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랑에서 비롯되는 용기라고 생각해요. “사랑해.”라는 말도 스스로 “용기 내자. 괜찮아.”라고 되뇌는 말인 거죠. 제가 노력했더니 서로 친절하고 사랑 넘치는 가족이 되었어요. 사랑이 이런 거구나, 싶어요. 지금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응원해 주는 걸 제 소임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응원의 눈빛으로 그저 사랑만 준다면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어도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을 주고 친절하게 대하니 아이들이 다정하게 구는’ 건 참으로 당연한 이치인데,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더 멋진 가족 같아요. 나를 좀 더 칭찬해줘 볼까요? 

지방에 계신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일과 육아의 방법을 찾은 것도 칭찬하고 싶어요. 덕분에 내 가치관대로 아이를 키울 수 있었죠. 학원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지 않은 것도 잘한 거 같아요. 때가 되면 한글도, 수도, 구구단도 알게 될 거라는 믿음은 틀리지 않았어요. 그때 아낀 돈으로 아이들이 더 자라면 배낭여행 보내준다고 했어요. 무엇보다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은 걸 가장 칭찬하고 싶어요. 

 

아쉽고 후회되는 점도 있어요? 

남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요. 부부가 같이 일하다 보니 서로 백업하느라 가족이 모두 모여 여행 가는 날은 드물었거든요. 그래도 집 앞이 일터라 언제든 수시로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 안에서 일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챙기며 만족스럽게 사는 거 같아요. 나를 위한 시간도 가지려 애쓰는 편이에요? 요즘 관심사가 궁금해요. 

일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좋아요. 이제 아이들이 커서 아이들과 함께라도 제시간을 충분히 가지니까 굳이 나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아야 해. 자신을 사랑하고 남 일에 관심 끄고 너를 챙겨.”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면서요(웃음). 요즘은 ‘제주에서의 나’에 관심이 많아요. 두 아이와 제주 친구들과 제주에 대해 더 탐험하고 사랑하며 놀고 싶어요. 최근 제주에서 받은 영감과 나의 이야기를 더해 ‘레트로킷 페르소나’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그중 하나로 레트로킷이 자체 개발한 아이웨어를 소개할 예정이에요. 제주 한라산의 사계절이 변하는 모습처럼 안경테가 투명에서 그린으로 색이 바뀌는 안경 겸 선글라스를 만들었어요. 이 일을 계기로 제주를 위한 좋은 일에도 꼭 동참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제가 기획하는 일들은 내가 살고 누리고 즐기는 것들과 연결되지 않을까 기대돼요. 조화롭게 지혜롭게 잘 지내는, 나로 살고 싶어요. 

 

조금 먼 미래도 그려볼까요?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고 바라온 그림이 있나요? 

패셔너블한 할머니로 레트로킷에서 일하고 싶어요. 빨간 바지 입고 예쁜 안경을 권하는 할머니가 되길 꿈꿔요. 제주에 작은 집과 강아지가 있고, 제주 바다에서 원피스 수영복 입고 목을 쫙 빼고 살랑살랑 수영하면서 살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딸을 둘씩 낳아서 손녀들이 바글바글했으면 좋겠고요. 제가 딸 들처럼 잘해줄 거예요. 그때도 우리는 분명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저희 아버지가 폐암으로 투병하실 때 자식들이 시골로 가라, 일 그만두라, 권유했는데 한의사인 아버지는 지금의 일상에서 환자들 만나고 교인들 안부 묻고 이웃들이랑 가까이 지내며 살다 가겠다 하셨어요. 다행히 많이 좋아지셔서 지금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병원으로 매일 출근하세요. 매일 환자분들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주말이면 어머니와 산책 가고 교회에 다녀오시죠. 나이가 드니 아버지가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일상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 아버지처럼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임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