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TCHHIKER’S GUIDE TO THE TABLE IN MOVIES

영화 속을 여행하는 테이블을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TABLE IN MOVIES

영화 속을 여행하는
테이블을 위한 안내서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몇 편의 테이블이 남았다. 어떤 테이블은 인물보다 크게 느껴졌고, 어떤 테이블은 거기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갔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그 주변으로 흘렀다.

세상의 모든 계절, 2010
관계의 테이블

“방해는 무슨. 음식은 많아.”

정신과 의사, 지질학자인 톰과 제리 부부는 나쁘지 않은 노년을 보내고 있다.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가야 할 때가 많은 나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고, 주변의 친구들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아들은 알아서 제 앞가림을 할 만큼 자라주었다. 주말엔 농장에 가서 먹을 만큼 농작물을 키운다. 계절의 흐름을 지켜볼 여유가, 그들에게는 있다.

20년째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메리는 제리의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결혼을 두 번 했고 이제는 예쁜 것이 걸림돌이 될 만큼 늙었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이사를 하고 차를 사면 삶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비슷한 삶의 시궁창 안에 있는, 그래서 서로의 시궁창을 시시각각 목격해야만 하는 우울하고 못난 제리부부의 친구이다. 메리는 그를 뿌리치고 제리 부부의 아들인 조에게 애정을 표한다. 하지만 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를 데려온다. 메리는 조의 여자친구를 질투하며 분위기를 망친다.

선을 넘은 메리의 태도에 톰과 제리, 조는 적잖이 실망한다. 제리 부부는 그들의 삶 안으로 메리의 구질구질한 일상이 들어오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메리의 삶에 들어가 그녀가 가진 공백을 채워줄 이유도 없다. 그 후 메리는 그들의 집에 초대 받지 못한다. 넓은 식탁에 앉아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자신의 시시콜콜한 하루를 털어놓을 수도 없다. 

어느 날 메리는 초췌한 몰골로 불쑥 그들의 집에 찾아온다. 그녀를 쫓아내고 싶지만 결국 한자리를 내준다. 방해되는 거 아니냐며 묻는 메리에게 제리는 ‘음식은 많다’고 짧게 대답한다. 그들의 식탁에 메리가 앉을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음식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제리 부부가 베풀 수 있는 동정과 연민은 딱 거기까지다. “이들은 내 가족이야, 메리. 너도 그걸 이해해야 돼.”

인사이드 아웃, 2015
감정의 테이블

“슬픔아, 네가 필요해.”

타국에서 여행 중에 만난 사람이 있었다. 그와 나는 두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고 세 번 만났을 때 결국 일정 중 하루를 같이 하게 됐다. 그는 함께 저녁을 먹던 중 힘이 들 때, 행복했던 기억을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을 들려줬고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행복’이란 한 가지 감정으로 존재하는 기억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결국 지금은 꿈인지 진짜였는지도 잘 알 수 없는, 사진처럼 박제된 기억을 털어놨다. 아빠와 엄마, 동생과 함께 시내 레스토랑에 갔던 날. 제일 좋아하던 빨간 원피스를 입고, 흰 레이스 양말에 구두를 신었던 나. 원형 탁자에 앉아 능숙하게 피자를 주문하던 아빠의 모습. 교과서에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라고 각주를 달아놓아도 괜찮았을 우리 가족. 그건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설명하기 힘든 순간이었다. 물론 어렸을 때 그 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한 행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열두 살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까칠이’, ‘버럭이’가 있다. 그들은 감정 컨트롤 본부의 테이블 앞에서 시시각각 라일리의 감정을 조정한다. 라일리가 살면서 겪은 중요한 사건은 핵심 기억으로 저장된다. 라일리가 처음으로 하키를 하며 골을 넣었던 순간, 태어난 라일리에게 기쁨 덩어리라고 말하던 아빠. 그리고 그런 기억들이 모여서 라일리의 인격을 만든다.

기쁨이는 라일리가 행복한 핵심 기억을 갖고 살아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던 중 라일리네 가족은 익숙하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한다. 새로운 동네의 집은 허름하고, 집 근처 피자집은 맛도 없다. 그때 슬픔이는 행복했던 라일리의 핵심기억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이제 라일리는 호수에서 엄마, 아빠와 하키를 하던 기억을 떠올려도 마냥 행복하지 않다.

라일리의 머릿속만을 보여주던 영화는 중·후반에 이르러 엄마와 아빠의 머릿속 감정들도 함께 보여준다. 라일리의 슬픔이는 다른 감정들 사이에서 필요 없는 감정으로 취급 받아 의기소침하지만, 엄마의 슬픔이는 라일리의 슬픔이와 다르게 차분하고 냉철하다. 라일리의 감정 중 기쁨이가 핵심인물이라면 엄마 감정의 핵심인물은 슬픔이다. 엄마의 슬픔이가 테이블 앞에 제대로 앉아 여러 감정을 컨트롤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에 버려지고 또 생겨났을까? 언젠가는 라일리의 감정들도 기쁨이에게 의존하며 네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이좋게 테이블에 둘러앉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행복하다고도 슬프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일 거다.

시, 2010
테이블 밖에서 쓰이는 이야기

“선생님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어요? 너무 어려워요.
아무리 쓰려고 애를 써도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 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어요?”

미자는 예쁜 할머니다. 꽃무늬가 수놓아진 옷을 차려입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말할 수 있는 할머니. 어느 날 팔이 저려 병원에 다녀오는 길, 미자는 응급실 앞에서 정신을 놓고 울지도 못하는 여자를 본다. 함께 사는 손자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그녀의 딸은 강에 투신했다. 집에 돌아온 미자는 코밑이 시커먼 그녀의 손자에게 자살한 여중생을 아냐며 묻는다. 코밑이 시커먼 손자는 말한다. “나 걔 잘 몰라요.”

얼마 후 미자는 동네 문화원에서 시 수업을 듣기 시작한다. 선생님은 시를 쓰기 위해선 잘 봐야 한다고,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로 미자는 ‘본다’. 주변의 예쁜 것들을 본다. 사과를 보고 나무를 본다. 손자가 자살한 여자애의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도, 바깥으로 나가 꽃을 보며 시상을 구한다. 하지만 철없는 할머니 앞에 나타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다. 앞서서 성폭력 사건을 쉬쉬하려는 교감, 죽은 자보다 산 자의 삶을 쉽게 높이는 가해자의 아버지들, 미자가 의료도우미로 일하는 집에서 자신의 성욕을 풀어달라 요구하는 노인.

시를 쓰기 위해 나무와 꽃을 열심히 바라보던 미자는 이제 예쁘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 마주한다. 죽은 소녀의 위령미사에 찾아가서 그 애의 사진을 훔치고, 자발적으로 그의 손자가 성폭행의 가해자가 되었던 학교 과학 실습실에 간다. 소녀가 투신한 다리를 찾아가고 훔친 소녀의 사진을 손자가 밥 먹는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손자는 잠시 놀라지만 곧 무심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린다. 식탁 위에 놓인 죽음은 너무나 옅다.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손자를 형사가 데려간 날, 미자는 혼자 식탁에 앉는다. 죽은 소녀를 성폭행한 손자가 매일 밥을 먹는 식탁에서, 무언가를 쓴다. 시 수업 마지막 날 미자는 수업에 오지 않지만 유일하게 시를 낸 학생이다. 그녀가 낸 시가 그 식탁 위에서 쓰였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 식탁이 없었어도 시는 쓰였을 것이다. 미자가 스스로 보고 싶은 것들과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주한 그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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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

포토그래퍼 안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