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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판동의 아름다운 책 보고 : 수류산방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삼청동길까지 걷는다. 평일 대낮에도 사람이 많다. 교통정리 하는 경찰과 삼삼오오 어울려 이야기 나누는 청년들, 조금은 무료해 보이는 상인들, 활기를 띤 관광객…. 각양각색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집 앞을 빗질하는 아저씨가 보인다. 자연스러운 동네 풍경이다. 구석구석을 살피며 팔판길 1-8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2층에 나와 있는 커다란 책장이었다. 건물 바깥에 큼직한 책들을 늘어놓고, 책이 젖지 않도록 묵직한 비닐을 덮어둔 이곳. 이미지와 텍스트를 세심히 조합하여 새로운 작업물을 선보이는 수류산방 앞에서 정성스러운 사람들을 만날 채비를 한다.
수류산방은 정갈하고 조용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네요.
수류산방의 작업 공간은 서울 팔판동八判洞이라는 동네에 있어요. 판서가 여덟 명 살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해요. 삼청동과 경복궁 틈의 한적한 골목인데, 오래된 정자나무가 큰 그늘을 드리우는 곳이에요. 사실 수류산방의 작업 공간은 어디에나 있을 거예요. 늦은 밤 어둡고 인적 없는 삼청동길을 걸어 돌아갈 때, 주말 광화문과 청와대 앞의 시위 인파를 뚫고 걸어 나올 때, 인사동의 허름한 술자리에서, 별안간의 출장 여행 중에…. 감각과 생각이 바깥과 이어지고, 종일 책상 앞에 납작 붙어 있던 고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바꾸곤 해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작업 공간은 어떻게 나누어져 있나요?
2017년 봄부터 머물고 있는 이 작업 공간은 크게 사무 공간과 회의 공간, 그리고 옥상 다락으로 나뉘어요. 꽉 들어찬 공간과 빈 공간의 구분이기도 하죠. 폭발 직전인 자료들로 바글바글한 사무 공간 안은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직급이나 부서에 따른 분리도 없지만 가벽이나 파티션도 없어요. 독립성 따위는… 보장되지 않죠. 서로 하는 일의 내용이나 일어나는 문제는 그때그때 모두 동시에 알게 돼요. 저희는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그런 만큼 회의 공간은 되도록 비워두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금세 새로 나온 책들로 가득 차곤)하는 편이에요.
비워둔 회의 공간에선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요.
손으로 작업하는 공정이 많은 수류산방의 일에서, 회의 공간은 곧잘 수류산방의 공동 작업장이 되곤 해요.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끈을 꼬거나 스티커를 붙이거나 칼질을 하죠. ‘잠실 5단지 설계 공모’나 《매일 50》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프로젝트의 마감을 앞두고는 야전 사령실처럼 분주해져요. 때로는 사진 스튜디오로 변하기도 하고요.
이 공간에서 어떤 분들과 함께하고 있나요?
지금은 박상일, 심세중, 이수경, 장한별, 김민진, 이지응이 함께 있어요. 이 공간의 또 다른 식구는 함께 있는 ‘조성룡 도시건축’이에요. 건축가 조성룡 선생님께서 꾸리는 건축 설계 사무소로 박규빈과 신영대가 매일 나오고 있어요. 출판사와 설계 사무소가 거의 영역 구분이 희미한 채로 함께 지내고 있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하고 있네요. 작업실을 꾸릴 때 가장 먼저 고려한 점이 궁금해요.
글쎄요. 책상이 나란히 한 줄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또,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서늘하게 바람이 통해서 에너지를 조금 덜 써도 되는 곳을 찾았어요. 창이 넓고 언제든 열 수 있는 곳, 언제든 한 걸음만 나서면 바깥인 곳, 산자락에 기댈 수 있고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창가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는 곳. 어쩌면 우리가 상상한 공간은 일에 집중하기에 어려운 곳일지도 모르겠어요. 여러 제작 공장을 오가기에 편하고, 건강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좋아해요. 하지만 작업 공간에 대한 고려라고 하기에는 삶의 공간에 대한 취향에 가까워서 적절한 답변인지 모르겠어요.
작업 공간은 삶의 취향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이 공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무엇인가요?
서울을 둘러싼 네 개의 산에 모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넓은 옥상에서 1년에 한두 번쯤은 해 질 녘에 와인을 마셔요. 회의를 하다 도무지 안건이 풀리지 않을 때 창밖 느티나무가 잎을 흔들어 그림자를 드리우면 마음을 잠시 빼앗겨버리죠.
불편한 점도 있겠죠?
책이 나올 때마다 온 식구들이 달라붙어 용달 트럭에서 책이 가득 든 상자들을 내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2층까지 들고 올라와요. 숨이 차죠. 지층에 작게라도 공간이나 작업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책의 무게를 진중하게 대면하는 경험이기도 할 거예요. 눈이 많이 오는 날 계단을 쓸거나, 한여름 태풍에 비 샐 걱정을 하면서 계절을 깊이 새기기도 하는데요. 불편이 우리를 늘 깨어 있게 한다고 믿고 싶어요.
‘식구들’이라고 표현하니 삶을 함께하는 느낌이에요. 다들 출퇴근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대개 아침 10시에 출근하고 1시에 점심을 먹고 7시 퇴근을 원칙으로 해요. 출근한 다음이나 퇴근하기 전에 하늘이나 산, 그리고 공간에 감사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을 거예요. 점심 식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하려고 해요. 되도록 맛있게 먹을 곳을 궁리하고, 슬슬 걸어 나가서 밥상머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죠. 식대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강요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우리 중 어떤 이에게 일상의 공유가 불편하거나 버겁지는 않을지 조심스럽게 걱정도 해봅니다. 바쁘지 않은 오후에는 밥을 먹고 돌아오다 새로 시작한 전시나 숍을 함께 구경하는 일도 가끔 있어요. 아무튼 퇴근은 곧잘 늦어요. 밤에 안국역까지 걸어 내려가서 막걸리를 한잔하며 떠들다 헤어지기도 하고요. 대부분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와 결정은, 푸른 별이 반짝일 때쯤 이루어지곤 해요.
일상을 함께하는 듯한데, 좀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오후에는 누군가 커피를 내려요. 좋은 커피를 사고, 가끔 꽃시장에서 한 아름 제철 식물을 장보기도 해요. 그리고 회의실 창에 석양이 드리우면 모두 모여 ‘점검’이라는 이름의 회의를 하죠. 그러는 종종 문 앞에서 기다리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요. 솔직히 수류산방은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인 업무 분화와는 거리가 멀어요. 루틴을 깨는 것이 수류산방의 방식이죠.
그래서 근사하고요(웃음). 작업 공간이 단 하루 수류산방의 친구가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작업 공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매일 여기에서 살아요. 산방에게 ‘터’는 우리를 받아들이고 품어준, 어쩌면 성스러운 곳이죠. 친구를 말하자면, 늘 친구이지 ‘단 하루’ 친구라는 것은 없고, 아무 말 안 해도 친구이지 ‘무슨 이야기’를 해주어야 친구는 아닌 것 같아요. 작업 공간에게 “더 깨끗하게 정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늘 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고마운 친구야.”라는 바보 같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앞으로 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라도 이미 벗인 어떤 이들이 가까이서, 그리고 저 멀리서 조금씩 뜻있는 일을 해나가고 있을 거예요. 혼자 책상 앞에서 남은 일을 하는 어떤 밤에 그들과 아무 말 없이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는데요. 그것이 이 작업 공간에 깃든 힘일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쩌면 수류산방이라는 이름의 뜻일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해요.
수류산방
기획, 편집, 디자인 등 여러 분야 전문가가 모여 2003년에 문을 열었다. 문화예술, 건축 분야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새로운 조합을 이루는 단행본을 만들어온 출판사이기도 하다. 책을 만드는 일을 중심으로 디자인, 전시와 공간 기획 등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H. instagram.com/suryusanbang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