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로 쓴 이야기

Story, Typewritten

생전 처음 타자기를 사용해봤다. 자판을 누르며 생각했다. ‘어, 카메라 필름 감는 소리와 비슷하네?’ 카메라를 처음 만져보던 때가 떠올랐다. ‘FM2’라는 필름 카메라였는데, ‘철컥’ 찍고 ‘지익’ 감을 때마다 손으로 전해지는 투박한 감각에 홀려 한동안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탁’ ‘탁’ ‘탁’ 힘주어 자판을 치고 ‘지익’ 행을 바꾸며 생각했다. 나는 이 타자감을 잊지 못하겠구나. ‘사진 찍기’와 ‘글쓰기’라는 추상적인 작업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몸에 새겨진다.

아무튼 쓰는 게

좋았다

나는 학창시절 필기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내가 필기한 노트를 친구들이 복사해서 돌려 보곤 했다. 어느 날 학교 앞 복삿집에서 내 노트 복사본이 판매되고 있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복삿집 사장님에게 더 이상 팔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을 뿐 다른 대응을 하지는 못했다. 내 노트를 보며 공부한 친구들이 오히려 나보다 성적은 더 좋은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까 공부를 잘한 게 아니라 필기를 잘했던 나는 아무튼 쓰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하다못해 학교 수업 시간도 좋아했다. 듣고 받아 적는 시간이었으니까. 노트를 고를 때면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그 노트와 어울리는 펜을 고르는 것도 썩 즐거운 일이었다. 지방에 살았고, 당시만 해도 대형 문구점이라든가 팬시점 같은 곳이 많지 않아서, 노트나 펜을 구할 데라고는 고작 학교 앞 문방구뿐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사 모은 편지지와 엽서에 사연을 써서 라디오 프로그램에 수도 없이 보냈다. 노트를 사서 친구들과 교환 일기도 썼다. 스스로 ‘칠공주’라 칭하던 일곱 명의 친구들과 돌아가며 쓰는 교환 일기장이 있었고, 단짝 친구와 둘이 나눠 쓰는 일기장도 있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 자정에는 방문을 닫고 웅크리고 앉아 가장 좋아하는 노트 위에 아끼는 펜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절절한 소망을 빼곡히 적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글을 지어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 종이 위에 펜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가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시절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잊고 있던 이야기를 한번 떠올리고 나니, 학교 앞 복삿집에 내 노트가 진열되어 있던 장면까지 아주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루 종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까맣게 잊었던, 손으로 글씨를 쓰며 행복해하던 나를 다시 만난 건 제주 종달리에서였다. 

필기

: 글씨를 씀

제주시 구좌읍 종달초등학교 근처에 ‘필기’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이름을 듣자마자 귀가 번쩍 뜨였다. 연필 등 문구 제품을 판매하는 가게인데 ‘글쓰기 작업 공간’ 대여도 함께 한다고 한다. 가게 한쪽에 책상 두 개를 놓고 그 책상을 빌려준단다. 책상에는 사용이 가능한 타자기와 종이, 연필 등이 놓여 있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필기에 갔다. 원래 나 말고도 같은 시간에 한 명이 더 예약을 했는데 직전에 취소해서 오롯이 혼자 쓰게 되었다고 했다. 먼저 책상을 골라야 한다. 두 책상 모두 내가 꿈에 그리던 모습을 하고 있다. 둘 다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하나는 구석 자리라 아늑하고, 다른 하나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어서 고즈넉하다. 들어오다 만난 고양이와 다시 눈 맞춤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마당이 보이는 책상을 골라 앉았다. 그리고 타자기 사용법을 배웠다.

여행을 하다 벼룩시장에 가면 언제나 타자기에 눈이 갔다. 늘 사고 싶었지만 가격이 상당했고, 여행 중에 사서 들고 다니기엔 많이 무거웠다. 사더라도 결국 사용하지 않고 장식품처럼 가지고만 있을 것 같아 매번 구매를 포기하곤 했다. 자판이라도 한번 쳐보고 싶었지만 쉽게 고장 날 것 같아 한 번도 만져보지도 못했다. 당당하게 사용료를 내고 필기의 책상에 앉아 비로소 처음 눌러본 타자기 자판은 상당한 힘을 주어야 제대로 작동했다. 키보드로는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무심코 써버리던 한 글자도 타자기로 쓰니 새롭게 느껴진다. ‘기역’과 ‘아’ 그리고 ‘이응’ 받침을 모으면 ‘강’이라는 한 음절의 단어가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어릴 적 글을 처음 배울 때의 감각이 다시 살아난다.

남아있는

노래처럼

심정으로 본격적으로 허리를 고쳐 세우고 앉아 일단 타자기에 손가락을 올렸다. 무슨 글을 쓸까 하다가, 문득 떠오른 노래 가사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캠핑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발표된 핑클의 신곡 ‘남아있는 노래처럼’.

“철이 없던 참 행복했던 찬란히 빛나던 아득한 시절에 우리 함께 부른 노래가 내 가슴에 빛나네 묻어둔 채 살아가다가 익숙한 멜로디 귓가에 들릴 때면 나도 몰래 멈춘 걸음이 또다시 날 그때 그 자리로 가만히 차오르는 그날의 너의 목소리 가득히 피어나는 예쁜 너의 얼굴이 그리워서 함께 부르던 우리들의 노래가 어깨를 맞춰 걸어가던 우리 꿈들이 소중했지 남아있는 노래처럼 늘 우리 그대로”

                                                                                                         -핑클, ‘남아있는 노래처럼’

핑클의 팬도 아니었던 내가 왜 이 노래 가사를 자판으로 치고 있는지 도대체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쳤다. 그리고 치다 보니 알았다. 14년 만에 다시 만난 핑클이 이야기하는 그 시절, 철없이 행복하던, 찬란히 빛나던 아득한 그 시절에 나는 노트를 펴고 친구에게 전할 편지를 꾹꾹 눌러 쓰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부른 노래는 나에겐 함께 쓴 일기장이었다. 낯선 공간 낯선 책상에 앉아 타자기 자판을 하나씩 치는 사이, 놀랍게도 이 책상이 내 자리 같아졌다. 근처에 앉아 있을 주인도 의식되지 않았다. 70분 동안, 이 책상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가방 안에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북이 있었는데 펼치지 않았다. 노트북을 접어두고 글을 쓰는 경험은 정말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핸드폰도 열어보지 않았다. 타자기 사용은 제법 어려웠고 자음 하나 모음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쳐야 했다. 종이 위를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가는 글자처럼 나도 천천히 나에게 집중했다. 콘셉트로서의 아날로그가 아닌, 진짜 아날로그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필기에서 돌아 나오며 다음번엔 친구와 함께 와야지 다짐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교환 일기를 나눠 쓰던 내 친구 혜령이와 나란히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한때 나의 감정을 나 자신보다도 속속들이 알던 친구고, 여전히 사랑하고 언제나 응원하는 내 친구지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가끔 주고받는 간단한 문자메시지 외에 긴 안부를 전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혜령이의 지금 마음을 타자기는 알고 있을 것 같다. 분명히 그럴 테지.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