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여행자, 무덤 앞에 서다
여행자, 무덤 앞에 서다
동네 뒷산을 산책하던 중 이름 모를 이의 무덤을 만나 놀란 적이 있다. 죽은 자의 풍경은 이토록 가깝게 놓여 있다가 무방비상태에 있던 사람을 괜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여행하는 중이라면 이야기는 그 반대일 때가 많다. 여행자는 죽은 자의 무덤 앞에 가기를 꺼리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찾고, 보고, 탐닉한다. 나는 지금부터 죽은 자들을 위해 여행했던 세 번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프랑스 파리Paris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2008년 겨울,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던 때였다. 일행이 있었지만 서로의 여행 취향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따로 움직이는 시간을 하루 갖기로 했다. 내게 온전히 주어진 하루가 시작되자마자 곧장 향할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Le Cimetiere du Pere Lachaise였다. 1804년 지어진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는 파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동묘지로 무려 30만 개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그 엄청난 규모만 해도 놀랍기 충분하지만 그 묘들의 주인들이 누구인가를 알면 더욱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비드(1748~1825), 앵그르(1780~1867), 콩트(1798~1857), 발자크(1799~1850), 쇼팽(1810~1849), 피사로(1830~1903), 알퐁스 도데(1840~1897),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쇠라(1859~1891), 멜리에스(1861~1938),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이사도라 던컨(1877~1927), 모딜리아니(1884~1920), 에디트 삐아프(1915~1963), 이브 몽땅(1921~1991), 짐 모리슨(1943~1971)….
이름만 들어도 이토록 경외로운 프랑스의 지식인, 예술가, 정치인들이 이곳 페르 라셰즈 묘지 한곳에 잠들어 있다. 때문에 이곳은 프랑스 시민들뿐만 아니라 파리를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나 역시 그곳을 지나칠 수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의 아침이어서 그런지 추모객들이 많지 않았다. 마음을 먹고 오긴 했지만 거의 텅 빈 공동묘지 안에 혼자 들어가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때 맘씨 좋게 생긴 중국인 한 분이 쇼팽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연히 동행인을 얻은 상황에 힘입어 간신히 묘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 꺼림칙한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조경은 흐린 날씨에도 스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성한 나무들, 묘지마다 서 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상들, 추모객들이 놓고 간 형형색색의 꽃들이 꼭 공원에서나 보던 것들 같았다.
나중 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러한 내 느낌은 이 공동묘지의 실제 설계 목적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설계자인 알렉상드르 테오도르 브롱냐르는 죽음이 공포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건강하게 추모될 수 있기를 바라며 묘지를 장식하는 조각과 정원 조경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는 만들어진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동행인과도 슬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중국 산둥에서 왔고, 이름은 짜오홍밍이며,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언어는 잘 안 통했지만 우리는 비교적 손발이 잘 맞는 여행 파트너가 되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길, 곳곳에 놓여 있는 지도판을 해석해가면서 열심히 돌아다녔다. 짜오홍밍 씨가 처음 묘지를 들어서면서부터 찾고 싶어했던 쇼팽의 묘가 지닌 아름다운 자태에 잠시 말을 잃기도 하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들어찬 추모객들 가운데 프랑스 대학생들을 따라 에디트 삐아프 묘 앞에서 함께 묵념하는 시간도 가졌다. 파리 코뮌 병사의 벽 앞에서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죽음이 지닌 어두운 이미지 대신 아름답고 찬란한 생의 모습들을 기억하게 하는 곳,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하면서 죽은 자들의 풍경과 마주했던 첫 번째 기억이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
두 번째 기억 역시 프랑스 여행 때였다.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를 들르고 난 사흘 뒤, 일행들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다. 오베르는 1890년 7월 권총으로 자신을 쏘고 이틀 뒤 숨을 거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죽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마을이다. 파리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를 추모하기 위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 시기는 보수 때문에 고흐의 생가가 문을 열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여행객이 우리 말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머물던 집안을 둘러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오베르 마을 고유의 호젓한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고흐는 생전에 많은 그림을 이곳 오베르에서 그렸다. 마을 한켠에 자리한 작은 교회, 파란 지붕과 흰 벽이 인상적인 시청,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늑한 풍경들이 모두 그에 화폭에 담겼다. 샛노란 밀밭 위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을 그린 그 유명한 <까마귀가 나는 밀밭>도 그가 오베르에서 그렸던 최후작 중 하나다. 고흐가 생을 마감한 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오베르는 여전히 그때의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고흐가 잠들어 있는 오베르 마을의 공동묘지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되는 곳에서 가까웠다. 고흐의 묘 바로 옆에는 그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동생 테오 반 고흐(1857~1891)의 묘가 나란히 있었다. 형제의 무덤 앞에서 묵념을 하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묘비 앞에 놓여 있는 해바라기와 엽서 한 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엿새 전에 먼저 이곳에 도착한 어느 한국 여인의 편지였다.
‘당신의 그림이 이곳까지 나를 이르게 하였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당신의 그림에 끝없는 경외심을 표합니다. 그 그림으로 수없이 위로받고 설레고 황홀했습니다. 여기, 당신을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얻고 가길. 또 여기에 묻힌 당신의 또 다른 생도 부디 행복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베르의 따뜻한 햇살처럼 당신과 또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햇살 가득하길.’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는 팔지 못하고 그 누구보다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그였지만 잠든 그의 영혼만큼은 외롭지 않은 듯했다. 동생 테오가, 오베르를 찾아 그를 기리는 이들이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스위스 루가노Lugano
헤르만 헤세의 무덤
프랑스 여행이 끝나고 2년 뒤 죽은 자를 위한 세 번째 여행을 시작했다. 노년의 헤르만 헤세(1877~1962)가 죽기 직전 13년 동안의 여생을 보냈던 곳, 스위스 남부 티치노 주에 위치한 루가노로 향한 것이다.
루가노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20여 분 정도 더 들어가면 몬타뇰라Montagnola라는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는 헤세가 살았던 카사 카무치Casa Camuzzi와 카사 로사Cassa Rossa가 있다. 이제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이 되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내가 갔던 날은 열지 않는 날이었다. 그 사실은 여행을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반 고흐의 무덤을 찾았던 오베르 여행 때 그의 생가를 둘러보지 못하는 게 크게 아쉽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헤세에 관해 박제화된 아카이브를 둘러보는 일보다 그가 생전에 보고 경험했을 루가노 근교의 풍경을 다른 여행객의 소음 없이 온전히 느끼는 일이 내겐 더 중요했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자기 생의 마감을 결정했던 고흐와 달리 헤세는 여든다섯까지 장수했다.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한 행운을 가진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그는 열네 살의 사춘기 때,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집필하던 마흔여섯 살에 자살을 기도하는 등 우울증에 시달렸다. 몸이 약한 막내 아들이 병으로 몸져눕고 아내가 정신발작을 일으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자신의 고국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독일 내에서 집필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헤세는 마흔에 접어들면서부터 저물어가는 인생과 어두운 시대에 관해 고찰하는 글들을 썼다. 그것들을 모아둔 《아름다운 죽음에 관한 사색》은 내가 루가노로 여행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동기가 되어 줬다. 나는 숨이 다하기까지 그토록 죽음에 대해 끈질기게 번뇌했던 문인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헤세의 글을 살펴보면 그가 노년의 자기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얼마나 늙음의 덧없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는가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곤 했다. ‘나는 죽음을 염원하기는 하지만 너무 이르거나 덜 성숙한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다. 또한 성숙과 지혜로움을 갖추기보다, 아직 달콤하고 변덕스러운 인생의 어리석음을 가슴 깊이 사랑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명함과 달콤한 우매함을 모두 갖고 싶어한다.’
나는 헤세가 자주 산책했다는 길을 따라 몬타뇰라의 옆마을 젠틸리노Gentilino까지 걸어갔다. 젠틸리노에 위치한 성 아본디오St. Abbondio 성당 묘지 안에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당까지 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헤세의 묘지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규모도 작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곳이었지만 그의 무덤을 골라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헤세의 무덤을 찾는 참배객이 한 팀 더 있었는데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유럽여성 두 분이었다. 그들과 함께 30분이 넘도록 묘지 전체를 돌아다니고 나서야 우리는 가까스로 헤세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그의 무덤을 찾기 어려웠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의 묘지가 다른 묘지들에 비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내내 크고 화려한 무덤들만을 찾아다녔는데, 그가 잠들어 있는 공간은 유언에 따라 아주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의 겸손한 마지막 모습 앞에서 중년의 유럽여성 중 한 분은 크게 오열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분은 헤세가 살아 있을 때 함께 행사를 진행했던 출판 관계자라고 했다. 그를 절절히 그리워하는 그 애틋한 마음에 나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분들이 자리를 떠나고서 간신히 혼자 헤세 앞에 섰다. 묵념을 하며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 하다가 “당신의 책 《아름다운 죽음에 관한 사색》을 읽고 꼭 늙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무덤 앞에 서는 일. 설령 모르는 이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경험은 살아 있는 자를 묘한 기분에 휩싸이도록 만든다. 단순히 공포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오싹함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여행을 통해 생생한 삶과 까마득한 죽음의 거리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그 기묘한 순간들을 점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무덤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갑자기 내가 보았던 그 나라의 모습들이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웃음, 바쁜 도시 사람들, 거리에서 춤을 추는 무녀들이 내뿜는 삶의 에너지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란 곧 죽음과 마주하는 과정이다. 직접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무덤만이 아니라 여행자가 압도당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죽음이 지나간 자리들이다. 우리는 역사적인 터에서, 오래 전해져 오는 전통에서, 수백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장엄한 건축물과 먼지로 뒤덮인 프레스코화 앞에서 이제는 죽고 사라진 자들의 노동과 환희와 슬픔을 상상한다. 어느 여행지를 가든 그곳에 잠들어 있는 영혼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그것만으로도 여행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에디터 박선아
글·사진 김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