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 Physical

Wander, Wonder
나는 물질이다

외모에만 신경 쓰든 내면에만 신경 쓰든 똑같이 반쪼가리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위가 저리고 앉았다 일어날 때 허리가 아파 재활치료 전문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첫 이틀간 트레이너는 내가 몸을 움직이는 패턴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서는 자세부터 문제였다. 허리는 너무 휘고 어깨는 앞으로 말렸고 턱은 쳐들렸다. 심지어 온몸의 힘을 빼고 누워도 허리는 활처럼 휘었다. 수십 년 동안 하루 24시간 내내 긴장 상태였으니 허리가 노란 카드를 꺼낼 만했다. 또 다른 문제는 발 근육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점이었다. 엄지발가락만 올려 보라는데 되지 않았다. 다섯 발가락이 할인 상품처럼 한 묶음으로 움직였다. 걷는 자세, 앉는 자세, 눕는 자세, 팔을 올리는 자세, 무릎을 움직이는 자세, 다 문제였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걸음마부터 새로 익히고 있다.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던 직장에서 무지막지하게 ‘생산적’인 시간을 여러 해 보냈더니 ‘낭비’야말로 지고의 호사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른바 쓸데없는 일, 굳이 타인을 설득할 필요 없이 그저 내가 좋아서 나만을 위해 쓰는 시간과 돈은 기꺼웠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에 실제로 돈을 쓰는지 여부가 바로미터다. 액수가 크든 작든 돈이 아깝다면 사실은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거나 아직 돈을 쓸 만큼 좋아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소주랑 삼겹살은 자주 먹으면서 책은 비싸서 못 보겠다는 사람은 책이 비싸서 못 보는 게 아니라 소주랑 삼겹살이 더 좋을 뿐이다. 사람은 옷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며 세 장에 만 원짜리 티만 입는 사람, 어째서 백팩 하나가 100만 원이어야 하는지 궁금해 기꺼이 지불하는 사람, 미래의 불확실성에 현재를 통째로 저당 잡히는 사람, 모두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이 납득하는 방향으로 운용하는 것 아닐까?

생산에 함몰되던 직장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오디오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잡히는 미팅 후 음반 매장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고 청음하고 구매하는 과정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해 주는 것이 오디오였다. 음악이라는 비물질적 가치는 오디오 가격과 맞물려 작동했다.

몸의 회복력은 예상보다 빨랐다. 두 주 만에 발가락은 묶음 할인 처지에서 벗어나 어엿이 독립했고 두어 달이 지나자 몸이 왠지 달라 보인다는 지인의 보고가 잇따랐다. 사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꽤 망설였다. 10여 년 전 헬스클럽에 다닐 때 일주일에 두 번도 하기 싫어 꼭 한 번 걸러 한 번씩 취소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실수를 또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운동을 하고 싶어질까?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 새 운동복과 운동화를 샀다. 그걸 입고 싶어서라도 기꺼이 하리라는 속셈이었다.

“운동만 하면 됐지, 왜 쓸데없이 그런 데다 돈을 쓰냐?”

“새 옷 덕분에 건강해질 텐데 어째서 쓸데없어?”

알맞은 도구를 알맞은 때에 알맞은 곳에 사용할 줄 모르면 저만 손해다. 운동용품은 최신 기술이 집약된 분야다. 가볍고 걸림이 없는 소재는 몸을 움직이는 데 최적이고 악취가 배지 않고 금방 마른다. 반바지 속에 덧붙은 레깅스에는 핸드폰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주머니가 있고, 운동 전후의 컨디션 조절을 위한 얇은 바람막이를 돌돌 말아 넣은 손바닥만 한 가방을 똑딱이 단추로 허리춤에 고정할 수 있다. 집에 있는 면티와 면바지를 입어도 운동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운동하는 상황을 두루 살펴 제 몫의 일을 제대로 해낸 인간 덕분에 더 쾌적하게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인류애도 조금 상승했다. 운동복 몇 벌 값에 인류애를 얻었으면 괜찮은 투자다.

인생이 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짧은 모양이다. 노화 단계를 착실히 밟아 나가는 몸을 실감 나게 한 건 노안이다. 핸드폰을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했다. 전담 안경사의 조언으로 컴퓨터 작업과 독서 거리를 아우르는 단거리 안경을 맞췄다. 그에 맞춰 세세한 것들을 조율했다.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 단거리 안경을 기쁜 마음으로 지니고 다니려면 멋진 안경집을 구해야 했다. 안경을 사면 딸려오는 안경집은 대부분 휴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안경테의 형태, 크기, 비례는 저마다 다른데 보통 한 브랜드의 안경집은 한 가지 모양뿐이라 모든 테에 맞지는 않다. 크고 무거운 테를 사지 않는 내겐 거추장스러운 편이다. 가끔 가죽으로 만든 멋진 안경집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안경집에 넣었다간 책이나 노트북 따위에 눌려 안경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 안경테에 맞는 안경집. 당연해 보이는 이 작은 사안 하나도 이뤄지지 않을 만큼, 세상엔 수많은 이유와 가치가 서로 충돌한다.

기껏 교정 중인 몸이 다시 망가지게 둘 수 없어 적절한 작업 자세를 검색하니 모니터 상단은 눈높이에 맞추고 팔꿈치는 직각을 이루게 하란다. 내 작업 도구인 13인치 노트북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자세다. 새로 들일 물건은 노트북 거치대, 별도의 자판과 트랙패드. 자판과 트랙패드는 어차피 한 가지뿐이라 주문하면 그만인데 거치대는 좀 까다로웠다. 가벼우면서 각도가 높게 조절되어야 했다. 1순위 후보는 한국에서 파는 데가 없어 해외 직구를 해야 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두 달이 넘게 걸려 받았다. 심지어 잘못된 선택이었다. 너무 무거웠고 높이는 내 앉은키와 어긋났고 받침 부분이 너무 넓어 자판과 트랙패드를 놓을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2순위 후보가 다행히 적당했다. 

새로 구축한 작업 환경에서 이 문장을 쓰고 있다. 물건이 곧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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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