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STEPS AS A FAMILY

김현정 오디너리 작업실 운영

가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완전하면서 충분하다. 손을 움직여 나에게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핸드메이더 김현정 씨 가족은 평일에는 도시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주말이면 시골에서 오롯이 쉬는 나날을 보낸다. 조금 느리고 중심에서 벗어날지라도 우리만의 기울기로 궤도를 그린다.

나흘은 도시, 사흘은 시골

“아이가 넘어질까 조심시키거나 멀리 있는 화장실에 같이 가는 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나무를 바라보며 흙바닥에 텐트를 치고 자는 게 좋더라고요. 거기서 주말을 보내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는데, 낯선 도시에 온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소개 부탁드려요.

오더너리 작업실에서 자작나무껍질로 바구니를 만들며 수업을 하고 있어요.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시작해서 이름보다 그렇게 불리는 일이 많네요. 열한 살 아이를 키우며 금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캠핑을 떠나요. 4일 도시, 3일 시골에서 살고 있어요.

 

닉네임의 의미가 궁금해요.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어서 이름을 고민하다가 와이낫의 준말로 ‘왜 그럼 안 돼?’ 하는 의미로 지었어요. 와인을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집 안에 오래된 가구나 살림살이, 소품들이 정갈해요. 오래도록 쓰고 모은 제품인 듯해요.

결혼 전에는 그릇이나 주방 도구, 키친타월 같은 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 공간이 생기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요리에 흥미를 붙이고 싶어서 예쁜 그릇들을 사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자기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이것저것 사다 보니까 저는 물건이 반짝반짝하지 않아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는 디자인이 좋더라고요. 여행 가서 산 물건을 보고 ‘언제 어디에 갔을 때 내가 이걸 샀지, 아이랑 같이 골랐지.’ 하는 이야기가 생기는 게 흥미로웠어요. 제가 잘 못 버리거든요. 정리해야지 하고 꺼냈다가도 ‘그때 거기 가서 산 건데, 이거 살 때 내가 그런 말 했는데.’ 하면서 다시 집어넣곤 해요. 그래서 더 이상 사지 않고 있는 걸 잘 쓰려고 해요(웃음).

 

오래 머무는 공간은 사람을 닮는 거 같아요. 나를 닮은 집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나요?

봄 방학 때는 오전에 아침을 먹고 점심을 차려 놓고 작업실로 출근했어요. 작업실에서 수업을 하고 끝나면 두 시가 조금 넘어요. 그동안 아이는 숙제하고 쉬다가 책 보고 점심 먹고 있으면 제가 가는 거죠. 그때부터는 집을 좀 돌보고 아이 학원 보내고 데리고 오다 보면 금방 저녁이 돼요. 남편이랑 같이 세 식구가 밥 먹는 시간이죠. 아이가 잠들면 밤에 들어온 주문을 보고 자작나무 껍질로 바구니를 만들거나 뜨개질을 해요. 바구니 한번 잡으면 시간이 정말 금방 가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보통 한 시, 두 시가 금방이에요.

자작나무로 바구니를 만들어요?

네. 스웨덴에서 시작된 북유럽의 전통 공예품이에요. 자작나무 수피 부분을 재료로 바스켓과 여러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어요. 나무를 정복하지 않고 재료를 구하는 건데요, 자작나무를 채취하면 허물을 한 번 벗어서 단단하게 자랄 수 있게 된대요. ‘카사라이크’라는 소품숍을 운영하는 선생님이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스웨덴 공예를 배워 오셨어요. 직접 만드신 바구니를 블로그에 올리셨고, 수업을 한다고 해서 찾아갔죠. 체험 학습처럼 원데이 수업을 듣다가 다음 주도 등록하고 또 다음 주도 찾아가고,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져왔어요.

 

왜 그렇게 좋았어요?

아이를 재우고 혼자 바구니를 만드는 데 사각거리는 소리와 만지면서 느껴지는 질감이 좋았어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햇살 속에서 간밤에 만들다 놓은 흔적을 보는 것도 뿌듯했고요. 손을 움직이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크더라고요. 육아에는 정답도 없고 성과가 눈에 바로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손으로 만드는 것들은 시간을 잡고 뚝딱거리면 눈으로 보이게 완성돼 있어요. 무에서 유가 생기는 거죠. 내 손으로 만들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빈티지 그릇과 가구랑 너무 잘 어울리더라고요. 같이 두면 따뜻해 보이고 실용성도 있어요. 쓰다 보니까 더 좋아졌죠.

 

캠핑장에서도 부지런히 뜨개질을 하시던데요.

스웨터를 잘 뜨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꿈이 있어요. 난롯가에 앉아서 술술술 니트를 뜨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계속 끊지 않고 손을 움직이니까 손가락이 아픈데, 제일 잘하고 싶은 일이거든요. 제가 인형을 만들면 아들이 너무 좋아하고 이름도 붙여주니까 신나서 더 떴어요. 요즘 옷 뜨는 걸 배우고 있는데 익숙해지면 아이 옷을 떠보고 싶어요.

캠핑은 언제부터 하게 된 거예요?

아이가 일곱 살쯤부터 했어요. 캠핑하는 친구 따라 텐트랑 의자, 테이블, 침낭 정도 사서 갔는데 남편과 아이가 참 좋아하더라고요. 저는 처음부터 캠핑이 좋진 않았어요. 우리 라이프 스타일과 맞지 않으면 텐트를 얼른 팔아야지 했는데, 한두 번 가보다가 계속 다니게 됐어요. 처음 친구들과 간 캠핑은 근처 동네 뒷산에 있는 캠핑장이라서 지금 생각하면 야유회 정도인 것 같고, 그 이후에 평창으로 캠핑을 갔어요.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옆으로 흐르는 곳이었죠. 아이가 넘어질까 조심시키거나 멀리 있는 화장실에 같이 가는 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나무를 바라보며 흙바닥에 텐트를 치고 자는 게 좋더라고요. 거기서 주말을 보내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는데, 낯선 도시에 온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첫 캠핑을 내추럴하게 해서 그런지 저희는 아이들 놀이 시설이 잘 돼 있고, 매점이 있는 캠핑장보다는 오지 같은 캠핑장을 좋아해요. 캠핑은 당연히 텐트에 흙도 묻고 비가 오면 진흙 범벅이 되고 벌레도 많은 거니까요.

 

캠핑장 한달살이도 여러 번 하신 거 같아요. 그것도 겨울에요.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여름과 한겨울에도 부지런히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어땠어요?

저도 겨울 캠핑은 처음이라 좀 무서웠어요. 강원도 춥잖아요. 영하 15도쯤 되는데 과연 괜찮을까? 하면서, 아이가 좀 컸으니까 시도해 보기로 한 거예요. 난로를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을 익히면서 용기를 냈죠. 해보니까 할 만하더라고요. 겨울 한달살이를 한 곳은 원주에 있는 캄파슬로우라는 캠핑장이에요. 사이트가 몇 개 없고 간격이 넓어요. 그곳만의 문화라고 여길 만한 감성이 있고 조용히 쉬다 오는 곳이라 그룹으로 갈 수는 없어요. 스스로 대출 대장을 적어 책을 빌릴 수 있는 책방도 있고요. 보통 저희는 금요일에 남편이 반차를 내거나 근무를 빼요. 아이도 학교에 체험 학습 신청서를 내거나 하교 후 바로 캠핑장으로 갈 준비를 해요. 사도삼촌이라고 도시 4일, 시골 3일 지내는 거예요. 텐트를 치고 4주 동안 금요일마다 가서 쉬고 올라오니 시간도 넉넉하고 마음이 더 편해요. 캠핑을 오래 하니까 캠핑 간다고 장을 따로 안 보고 냉장고를 털어 가요. 냉장고에 먹을 게 없으면 주변에서 장을 보고요. 겨울에는 난로에 기름을 채우고 전기장판 켜고 이불 펴는 시간이 있는데, 봄가을에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놀아요. 일 시작하고 바빠서 겨울 동안 캠핑장에서 많이 쉬었어요. 밤 열 시가 되면 너무 추워서 “엄마 이불 속에 조금만 있을게.” 하고 아침까지 자기도 했고요.

 

캠핑장에서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요?

우리끼리 갈 때와 친구들과 갈 때 다른 패턴으로 지내요. 우리끼리 가면 단순하게 먹는 것도 신경 덜 쓰고 같이 영화 보고 책 읽고 뜨개질도 하는 시간이 생기더라고요. 느긋하게 쉬다가 올 수 있고, 같이 가면 왁자지껄하게 놀다 와요. 보통 첫날은 점심 먹고 내려가서 짐 좀 정리해 놓고 한 바퀴 돌아요. 그다음 우주는 주로 흙을 파서 수로를 만들어요. 거기에 물을 퍼서 붓고 장난감으로 다리도 만들고 자동차도 놓고, 포크레인도 가져가서 놀아요. 겨울에는 계곡에서 썰매를 타거나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서 고드름도 따 오고 여름에는 물고기를 잡거나, 매미나 나비를 잡아서 채집통 안에 늘 뭔가 담겨 있었어요. 봄여름 가을에는 밖에서 불을 피우고 추우면 텐트 안에서 밥을 먹어요. 그런 다음 같이 영화를 보거나 보드게임을 하고, 저랑 남편은 술도 한 잔 기울이고 자요. 다음날 일어나면 아침 먹고 커피 마시고 음악을 들어요. 캄파슬로우 캠핑장에 가면 주인분이 키우는 시베리안허스키와 산책하거나 산을 한 바퀴 돌아요. 그런 다음 책을 빌리러 가고, 옆 텐트 이웃분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일요일은 아침 먹고 빨리 집으로 돌아와요. 한달살이는 일요일에 빨리 나와도 아쉬움이 조금 덜해요. 남편은 차가 막히기 전에 빨리 집으로 오고, 아직 해가 있어서 밝은 게 좋대요. 집에 와서도 쉴 시간이 있으니까 빨래도 하고 여유 있더라고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보다 한곳을 정해 오래 머물며 캠핑하는 스타일인 거 같아요.

남편도 저도 한곳을 여러 번 가는 걸 좋아해요. 식당도 카페도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집 같은 느낌이 있잖아요. 낯선 여행지를 가는 것도 좋지만 올해도 가고 내년에도 가면서 루틴이 되는 거, 낯선 장소가 익숙해지는 그 느낌이 좋아요. 관광지 유명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작은 시장이랑 동네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걸 좋아하죠.

 

평일엔 해야 할 일을 하고, 주말은 온전히 쉬는 패턴이네요.

맞아요. 아이가 어릴 때는 주말에도 체험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딸기 따러 가고 체리 농장에 가고 갯벌 체험을 하곤 했어요. 캠핑 가서도 도시에서 접할 수 없는 곤충을 잡고 흙을 파고 놀았죠. 그게 좋지만 꼭 도시를 떠나야만 자연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랑 아이는 봄 되면 꽃구경하고 가을 되면 낙엽 줍느라 유치원 가는 길이 한 시간씩 걸리곤 했어요. 아이가 크면서는 아이도 쉴 시간이 필요하고 저도 체험을 자연 속에서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줄었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온전히 쉬고 올 수 있더라고요. 계획이 없어도 계절마다 풍경이 변하고 아이는 늘 새로운 놀 거리를 발견하잖아요. 제 뜨개질 바구니의 털실을 빼고 밤을 주워 와서 구워 먹고, 겨울이면 고드름 따서 물도 붓고, 하루 종일 그렇게 놀아요. 자연에 있는 걸로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활동하게 되더라고요.

 

아이가 밖에서 스스로 잘 노는 모습을 보면 참 뿌듯하죠?

맞아요. 지난달 강원도 캠핑에서는 고드름을 이만큼 따서 물을 묻혀서 세우더니 조각상처럼 전시한대요. 계곡에 얼어 있는 얼음판을 깨면서 놀기도 하고요. 얼음이 한 번에 언 게 아니라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니까 표면에 결이 있더라고요. 결정이 보이니까 그게 재밌는지 여러 모양으로 깨면서 한참을 놀더라고요. ‘손도 안 시리나, 저렇게 열심히 하네.’ 싶으면서도 잘 노니 뿌듯해요.

 

봄이 되면 또 어디로 떠날 예정이에요?

작년 여름에 제주도에서 캠핑을 했어요. 제주도에 왔다고 어디 돌아다니지 않고 캠핑장 안에서 밥해 먹고 잔디에서 종이비행기 날리고 놀았는데 너무 좋았어요. 아이도 한곳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니까 한 번 적응하면 또 가고 싶어 해요. 봄에 또 제주도로 캠핑 가고 싶어요.

아이와 보폭을 맞추며 걷는 일

“육아는 끝이 있으니까 일을 아예 포기하는 게 아니라 몇 년 아이와 시간을 가지면 아이와 애착 관계가 형성되고 그 이후에 조금씩 네 일을 찾아 시도해 보면 돼. 점점 네 일을 할 시간이 많아질 거야.”

아이를 돌보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은 과정이 궁금해요.

아이를 갖기 전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일을 그만뒀어요.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록을 남겨보고 싶더라고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기록이요. 주변을 들여다보면서 살림살이에 관심이 생기고, 빈티지 그릇을 모으고, 인테리어까지 관심이 확장되어 사진도 찍어보고 그랬죠. 새벽에 아이 수유하면 다시 바로 못 자잖아요. 그때 블로그에 글 쓰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 낳은 분들과 댓글을 주고받곤 했어요. 그때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과 실제로 만났는데, 너무 잘 맞아서 진짜 친구가 된 이들이 있어요. ‘블로마’ 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다 리빙 편집숍을 운영하는 친구도 있고, ‘꼬르뷔레더굿스’ 라는 가죽 브랜드를 만든 언니, ‘인하우스 스토어’라는 리빙 브랜드를 꾸리는 친구도 있어요. 만날수록 더 편하고 좋은 십년지기예요.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많은 자극이 되었어요.

 

《집에서 일하는 엄마》라는 책에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일을 그만두고 아이만 키우면서 내가 쓸모 없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거의 24시간을 아이 곁에 있으면서 끝나지 않는 터널 안에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좀 우울했어요. 그전엔 회사에 다녀서 집에서 일하는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는데, 집에서 육아를 하고 밸런스를 지키면서 내 일을 찾을 수 있구나, 이렇게 일하는 방법도 있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나도 나중에 뭔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아이를 키우면서 취미로라도 배울 수 있는 건 접하고 싶었어요. 여러 수업을 거치다가 5년 전쯤 자작나무껍질 공예를 배운 거고요.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수업 때까지 2주를 기다리기가 힘들더라고요. 손이 근질거려서 재료를 사 와서 아이 자는 밤에 끄적였어요. 엄마로서의 삶에 나를 위한 틈을 낸 시간이 처음에는 24시간 중에 한 시간이었으면 이게 두 시간이 되고 세 시간이 되었어요. 자작나무 껍질 공예가 대중화된 일본 사이트에서 레퍼런스를 찾아보기도 하고, ‘나도 이런 바구니 만들 수 있을까.’ 하면서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과정을 거치다가 아이가 성장하면서 적절한 시기가 와서 수업도 진행하게 되었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삶이 생각하던 것과 달랐어요?

출산 얘기는 비교적 많이 들어봤지만, 출산 이후 육아 얘기는 누가 해준 적이 없어요. 미리 옆에서 아이를 키우는 걸 봤다면 마음의 준비도 되었을 텐데 그냥 딱 그 상황에 던져진 거잖아요. 예전엔 내 삶에서 나 자신이 100퍼센트였어요. 회사 다니고, 뮤지컬이나 영화 보는 게 낙이었고, 여행 가고 싶으면 혼자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오늘부터 엄마가 되었어요. 아이가 100이 된 거죠. 물론 원해서 가진 아이라 좋았지만 나한테 이렇게나 큰 존재가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게 어려워 책을 찾아보면 내 아이는 책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요. 세 시간마다 수유를 해야 하는데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먹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루에 낮잠을 두 번 자야 한다고 하는데 한 시간을 재워도 안 자고요. ‘나중에 자면 되지, 나중에 먹겠지.’ 하면서 그런 변수가 괜찮은 사람들도 있잖아요. 근데 저는 그 상황을 힘들어하는 성격이었던 거죠. 예측이 안 되는 상황에 계속 부딪히는데, “잘하고 있어. 괜찮아, 아이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을 아무도 안 해주잖아요. 지금 아이가 4학년이 되었는데, 4학년 엄마는 처음이라 또 헤맬 거예요.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 좀 괜찮아지던가요?

아이랑 24시간 붙어 지내면서 어느 순간부터 계획을 안 세웠어요. 나의 시간에는 계획이 있지만 아이가 하원하면 그날그날 하고 싶은 걸 했어요. 아이가 크면서 아이 성향이 드러나잖아요. 그러면서 저는 조금 내려놓고 아이가 주도하면 서 맞춰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입학 직전에 발등에 불 떨어져서 ‘가나다라’ 정도만 가르치고 학교에 보냈어요. 한글 모르는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상황이 닥치면 같이 해결하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1학년 2학기 때 받아쓰기라는 난관이 생겼어요. 이미 유치원 때부터 읽고 쓰기를 잘하던 친구들은 한 번 읽고 가도 잘하겠지만 우주는 집에서 저랑 연습을 많이 했어요. 목요일이 시험이면 월요일부터 남들은 한 번 볼 거 다섯 번씩 연습했어요. 온 가족이 받아쓰기라는 과제를 넘기 위해 아이를 응원했죠. 그렇게 했더니 2학기 내내 딱 두 개 틀렸어요. 노력으로 극복했더니 또 새로운 난관이 생기더라고요. 줄넘기요(웃음). 처음에 두 개 했나? 박자를 못 맞추는 거예요. 그래서 온 가족이 저녁 먹고 나가서 줄넘기를 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50개를 넘겨 수행 평가에 통과했어요. 그다음은 오카리나! 계속 장애물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가족이 하나가 되어 도와주는 과정이 유익했고 재미있었어요. 물론 그 당시엔 걱정도 됐지만 ‘학원 좀 미리 보낼걸.’이란 생각은 안 했어요. ‘친구들은 다 잘하는데 어쩌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안 했으니까 모르는 거지, 하면 잘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건 경험을 해봐야 알 수 있죠.

 

요즘 우주가 빠져 있는 건 뭐예요?

요즘은 책에 제일 관심이 많아요. 예전엔 책을 정말 안 좋아했는데, 지금은 아빠가 그만 보라고 해도 봐요. 닥치는 대로 유아 그림책부터 만화책까지 읽는데, 만화책이라고 말리진 않아요. 뭐든지 읽으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한창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시기보다 늦었어요. 늦어도 싫어지지 않는 상태로 있으면 빠져드는 시기가 누구나 오지 않을까 싶어요. 안 읽는 애를 억지로 읽히면 책이 싫어지니까 제가 읽고 싶은 책은 제가 읽어주곤 했어요. “여기 봐봐.” 해도 안 보고 장난감만 굴리다가 제가 잠깐 멈추면 왜 안 읽냐고 묻더라고요. 자기 전 책 읽을 때도 몇 달을 계속 똑같은 것만 가져오고 정말 질릴 때까지 한 책만 읽고 그랬는데 기다리니까 자기가 찾아 이것저것 읽고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주로 만화책이긴 해요(웃음). 그 옆에서 저도 제가 좋아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작가의 책을 사요. 처음에는 만화책에 손이 가잖아요. 그렇게 두다가 엄마랑 이거 읽어볼까 하면서 읽어줘요. 몇 페이지 읽어주면 뒷얘기가 궁금해서 스스로 읽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예전에는 아이가 아직 덜 커서, 이야기의 재미를 못 느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육아도 삶이라 여러 시도를 하면서 나에게 맞는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꼭 필요해 보여요. 한 인간을 길러내면서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도 성장하는 거 같고요.

맞아요. 우주가 어릴 땐 엄마가 애를 봐주시고 내가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과연 진짜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가 어린 나를 키우느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했는데, 내 아이까지 키워주시는 게 과연 선순환일까? 예전에 여성영화제에서 통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영화를 만드는 인력에 여성이 많았어요. 그 감독들이 나와서 일을 하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집안의 다른 한 여자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더라고요. 그들도 집안의 다른 여자를 희생해서 일을 지속하는 게 딜레마인 거예요. 그런 고민 자체가 없는 사회여야 궁극적으로 페미니즘이 없어지는 건데 그게 너무 어렵잖아요. 외국 여성 감독들은 다를 것 같지만 상황은 비슷했어요. 엄마가 좀더 자유롭게 육아와 일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었으면 좋겠고, 아빠가 아이를 학교에 데리러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엄마가 일하셔서 동생이랑 같이 밥을 챙겨 먹고 시간 되면 스스로 학원에 갔어요. “나는 나중에 집에서 간식을 챙겨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근데 커 보니까 엄마가 내 학원과 간식을 챙겨 주진 못했지만 계속 일을 하셔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보여요. 앞으로는 할머니나 다른 여성이 아이를 돌봐줘서 회사에 출근하거나, 엄마가 일하지 않고 아이를 돌보는 선택지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면서 일할 수 있는 조건이 다양하게 있으면 좋겠어요. 육아에 더 몰입해야 하는 시기가 있더라도 “육아는 끝이 있으니까 일을 아예 포기하는 게 아니라 몇 년 아이와 시간을 가지면 아이와 애착 관계가 형성되고 그 이후에 조금씩 네 일을 찾아 시도해 보면 돼. 점점 네 일을 할 시간이 많아질 거야.”라는 걸 누가 알려줬으면 그렇게 고민하며 우울해하지 않았을 거 같거든요.

좋아하는 일을 찾아도 나의 일과 소중한 아이, 소홀히 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고 있나요?

예전에는 엄마로서의 내가 80, 일하는 내가 20이었다면 지금은 일하는 나의 비중을 높이고 있어요. 아이도 엄마가 없다고 놀라지 않고 혼자 보내는 데 익숙해지듯이 저도 아이를 놓고 나와도 안심하고 일을 하는 게 편해지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일하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아이랑 보내는 시간엔 온전히 아이에게 몰두하려고 해요. 하루에 두 시간 일할 생각이라면 아이가 학원 간 시간 동안 집안일 못 했다는 죄책감은 갖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고 아이가 오면 다시 엄마로 돌아가는 거죠. 아이가 자라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오히려 제가 더 아쉬워요. 예전엔 제가 바구니 만들고 있으면 옆에 와서 도와준다며 같이 있고 싶어 했는데, 이젠 책 본다고 자기 방에서 안 나와요. 아이가 크면서 엄마 역할이 줄잖아요. 중·고등학교만 가도 학원 갔다 오면 늦고요. 그땐 내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너무 욕심내려고 하기보다 천천히 하려고 해요. 조금씩 해가는 게 확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계속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미 아이를 돌보며 성장을 도와주는 시간의 반을 지난 셈이에요.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가족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요?

남편이랑 가끔 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네가 나중에 대학을 외국으로 가면 엄마 아빠가 너 보러 여행 갈게.” 아이가 내 품에 잘 있다가 혼자 어딘가에 가서 공부하고 있으면 구경 가듯이 아이의 일상으로 여행 가고 싶어요. 엄마로서의 일을 다 했으니까 나로 돌아가서 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아들 학교에 놀러 가, 아들 친구들 불러서 맛있는 한 끼 사주고 쿨하게 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와 남편도 아이가 떠나가서 허무해 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편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고요. 저희 부모님이 지금 저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계세요. 자취할 때 보통은 엄마가 반찬을 싸주고 청소도 해주시잖아요. 저희 엄만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방 얻을 때 오고 한 번도 안 오셨어요. 제가 2주간 전화를 안 해도 연락이 없으셨거든요. 아이를 키워 보니까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바쁘다고 해서 자식에게 신경을 안 쓰지는 않잖아요. 속으로는 자식 혼자 타지에 보내놓고 마음 졸여도 성인이 된 자식에게 질척대지 않고 나의 일을 즐겁게 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