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ure Books From London

영국 그림책 수업

수많은 여행지 중의 한 곳일 뿐이었던 런던에서 일년 반 사는 동안, 영국 교육에 감탄했다. 영국 학교의 수업에는 정해진 교과서가 없다. 한국에서 영어 유치원을 보내면서, 미국 교과서를 교재로 수업해왔던 터라 학교 수업에 교과서가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교과서가 없으면 교재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문제집을 푸는 것도 아닐 텐데? 아이들이 다닌 학교는 영어 선생님이 고른 그림책으로 수업을 했다. Prep 과정인 고학년이 되면 그림이 비중이 줄어든 소설책이 주 교재이고, 이 교재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교과를 담당하는 영어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정한 책으로 글의 중심 문장 찾기, 어휘 배우기, 소리 내어 읽기와 같은 수업이 진행되는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이 주에 걸쳐 한 권의 책을 읽는다. 책 읽기 수업은 자신만의 창작 글쓰기의 기본이 된다. 그림책을 읽고, 책 속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이 전반전이라면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를 바탕으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하고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림책 읽기 수업의 후반전인 셈이다.

DATE | Tuesday 27th April 2021

LECTURE 001

SUBJECT  그림책의 주인공은 캐릭터야

1교시 영어 수업 시간. 아이들이 각자의 책가방에서 블루 컬러 여우 그림이 그려진 표지의 똑같은 제목의 책 한 권을 꺼낸다. 이번 텀 동안 읽어볼 책은 영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 로알드 달의 《 Fantastic Mr.Fox》. 문장의 호흡도 제법 길고, 페이지 수도 적지 않은 책을 아직 스펠링도 100%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소화해 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영국 학교의 많은 아이가 스펠링에서 자주 실수를 한다. 우리의 1~2학년 아이들이 받아쓰기에서 모두 만점을 받아 오는 게 아닌 것처럼). 교과서가 아닌 한 권의 그림책으로 2~3주간에 걸쳐 강도 높은 읽기와 쓰기 수업이 진행되는데 그림책 한 권을 완독할 뿐 아니라,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 책 속 주인공들의 배경 설정, 등장인물 간의 연결고리와 갈등 구조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해부하는 식이다. 한국초등학교에도 최근 들어 책 한 권을 통으로 같이 읽는 수업이 많이 도입되고 있는데, 내가 느낀 차이점이라면 영국의 수업에서는 인물들의 감정 변화나 책을 읽고 난 뒤 본인의 감정에 대해 서술하는 독후감식 수업이 아닌, 책 속 인물들의 외형적인 특징과 캐릭터 설정, 사건이 일어나는 보기스, 번스, 빈의 농장, 미스터 폭스의 집을 묘사해 보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림책 읽기로 널서리 과정부터 꾸준히 수업해온 아이들은 스펠링이 서툴러도, 그래머에서 실수가 있어도 10세 정도가 되면 자신만의 스토리를 캐릭터부터 서사까지 제법 탄탄하게 꾸려낼 수 있을 만큼 연필 쥐는 힘이 생긴다. 웨스 앤더슨 판 <판타스틱 Mr. 폭스> 같은 영화 속 예술성과 세밀한 효과들은 학교 수업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NOTE

한 권의 책 파헤치기

Fantastic Mr.Fox
글 Roald Dahl┃그림 Quentin Blake┃
PenguinAudiobooks

1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읽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골라 그린다.
2 캐릭터의 외적인 특징을 묘사한다.
3 캐릭터가 말한 책 속 인용구 쓰기.
4 보기스, 번스, 빈이 사는 농장을 묘사하는 부분을 찾고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기.
5 내가 그 캐릭터였다면 책 속의 내용을 어떻게 바꿀지 써보기.
6 미스터 폭스의 관점에서 순서대로 써보기.
7 책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새로운 캐릭터, 또 다른 ‘판타스틱 OOO’를 창조해 낸다.

DATE | Tuesday 4th March 2021

LECTURE 002

SUBJECT  월드 북데이

봄 학기의 시작과 함께 학교의 1년 전체 캘린더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월드북데이’가 열린다. 스콜라스틱 출판사 같은 굵직한 메이저 출판사들의 책을 저렴한 가격에 살수 있는 북마켓이 학교 강당에서 열리고 이날은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 속 주인공으로 멋지게 분장해서 학교에 온다. 핼러윈 못지않게 귀여운 코스튬을 입은 아이들이 준비한 짧은 연극도 무대에 올려서 부모님을 초청해 보여주고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그림책과 관련해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올해는 선생님들이 그림책을 랩으로 읽어주는 랩배틀을 유튜브에 올려서 학부모와 아이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아이들은 가장 의외의 장소에서 책 읽는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해 온라인상에서 투표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작년 월드북데이 행사에서는 잠옷 바람으로 옷장 속에 들어가 책을 읽는 사진으로 ‘Star’가 되었던 둘째 아이가 올해는 좋아하는 책 속 ‘Dog man’을 연상시키는 탐정 코스튬을 입고 리젠트파크의 부러진 나무둥치와 런던에서 가장 붐비는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책 읽는 사진으로 최종 후보에 올랐다. 역대 월드북데이 포토 수상자들의 사진을 보면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기 물을 틀어놓고 젖은 채로 책을 읽는 아이, 방문 끝까지 클라이밍으로 올라가 천장에 머리를 붙이고 읽는 아이, 스키장 리프트에서 읽는 아이, 트램펄린에서 점프하면서 읽는 아이 등 다들 정말 기발하고 개성 넘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책이라는 걸 꼭 책상에 독서대를 펼쳐놓고 정자세로만 읽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아이들이 종이 책과 멀어지는 요즘 책이라는 게 장난감만큼이나 재미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이런 행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 같다.

DATE | Thursday 6th May 2021

LECTURE 003

SUBJECT  내 마음에 담긴 장면

2020년, 런던의 거리마다 있는 서점 창가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은 책은 단연 찰리 맥커시의 《The Boy, The Mole, The Fox And The Horse》다. 첫 책으로 단숨에 스타 작가가 된 찰리 맥커시의 책은 표지부터 눈길을 끌었다. 나도 한 번 사서 봐야지, 하고 위시리스트에 올려두었던 책인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영어 숙제를 한다고 책상에 앉은 지우가 A4용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 찰리 맥커시 알아? 미스 셔털워스가 그 책을 읽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똑같이 따라 그려보라고 했어. 그게 영어 숙제야.”

출간된 지 일 년이 채 안 되고 아직 다운트북스의 메인 창가자리에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책을 학교 수업 시간에 읽을 수 있고, 그런 교사의 결정을 존중해 주는 학교와 학부모들.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과거의 작가와 작품에만 연연할 것 같았던 영국 학교에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나 제인 오스틴 같은 고전 작가들의 작품보다는 지금 사랑받는 작품들에도 그만큼의 애정과 가치를 두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읽고 있는 책이 학교 밖 거리의 서점에도 진열되어 있고, 또 그 책의 한 페이지를 손으로 따라 그려보면서 그림책과 더 가깝게 느낀다. 언젠가 나도 이런 그림책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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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허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