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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할 수 있는 문화생활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조카가 돌이 되었다. 먼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다. 운전해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이웃 도시에 살지만 코로나가 뭔지 이렇게 고모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고모만 못 본 게 아니에요. 얘는 태어나서 집 밖에선 마스크 안 쓴 어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얘가 사람이 어떻게 생겼나 제대로 모를까 봐, 가끔… 무서워요.”

그날부터 나는 길에서 유모차를 볼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웃어준다. 아직도 걷어내지 못한 유모차 비닐 속의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일부러 눈가 주름을 자글자글 만들고 콧잔등을 찡그려가며 웃는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너희를 환영하고 있다고 전하기 위해서다. 처음 코로나 집콕 생활을 시작할 땐 잠시만 숨죽이고 숨어 있으면 될 줄 알았다. 이젠 삶의 방식을 코로나 스타일로 바꿔야겠다. 코로나가 없던 시절의 모습을 모르는 아이들이 태어나 벌써 걷고 “엄마 아빠” 말도 하기 시작했다는데, 언제까지나 다시 옛날 모습이 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일단 베란다 앞으로 의자를 옮겼다. 밖에 나갈 수 없더라도 하늘을 좀더 바짝 당겨 보기 위해서다. 만보걷기 앱도 깔았다. 해외여행은 못 가더라도 매일 어디론가 떠나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차를 타고 다니던 길을 이제는 걸어 걸어 옆 동네 재래시장으로 간다. 매일 감자 두 개, 애호박 하나, 두부 한 모, 눈에 띄는 나물들을 산다. 효율성 위주로 한꺼번에 사지 않고, 배송시키지 않고 낯선 길을 부지런히 걷고 있다.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는 대신 한순간이라도 반가우라고 진짜 우표를 붙인 손 편지를 보냈다. 규격봉투에 넣으면 더 싸지만, 100원쯤 더 비싸더라도 비규격 예쁜 편지봉투를 선택했다. 친구들은 각종 청구서 외에 얼마 만에 받는 편지냐며 기뻐했다. 3천 원도 안 되는 우푯값을 내고 커피 기프티콘을 몇 개나 받았는지 모른다.

예전 방법대로는 아니지만, 새로운 시도들도 재미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전시 공연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하지만 코로나 시대 전시 공연도 좋은 점이 있다. 미리 예약만 한다면 관람객 수가 많지 않으니 훨씬 더 쾌적하게 볼 수 있다. 줄줄이 서서 뒷사람에게 떠밀려 더 보고 싶은 그림 앞을 떠나야 할 일도 없고, 거리두기 때문에 극장 좌석을 떼어 놓으니 앞사람이 시야를 다 가리는 일도 없다.

가장 어려운 일은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었다. BC(Before Covid19) 시대에는 수액을 맞듯이 어느 하루 날 잡아서 전시회나 공연장을 찾아 문화 지수를 바짝 올리면 됐지만, 이제는 자주 나갈 수 없으니 생활 속으로 문화예술을 끌어들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라고 하지 않던가. 짜릿한 기쁨보다 사소하더라도 즐거운 순간이 자주 있는 게 더 행복한 것이라고. 문화생활도 그러기로 했다. 강도보다 빈도! 미술 전시회에는 못 가도 언제부턴가 없애버린 종이 달력을 샀다(알고 보니 은행에서 공짜로 나눠준 달력도 그림이 예쁜 건 중고 시장에서 제법 고액에 거래되고 있었다!). 외식 대신 그릇도 예쁜 것으로 몇 개 샀다. 똑같은 볶음밥을 먹을 때도 방울토마토를 반 잘라 올렸다. 아이들 눈이라도 즐거우라고 그림 대신 반찬! 스피커도 힘줘서 장만했다. 음악회 대신 ASMR을 듣더라도 귀가 좀 더 즐거우라고. 아이가 말했다. “그런데 엄마. 음악 들을 시간이 없어.”

그제야 깨달았다. 문화생활은 조건이 아니라 여유라는 것을 말이다. 문화를 즐기는 여유는 애초에 코로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

글·그림 앤서니 브라운 | 옮김 서애경 | 웅진주니어

틀림없이 이 책을 보자마자 “아! 런던 테이트 미술관이네. 언제쯤 여기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감탄을 한 독자가 있을 것이다. 맞다. 앤서니 브라운 작가가 테이트 미술관에서 상주예술가 자격으로 머문 후에 만든 그림책이다.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온 가족이 미술관 나들이를 했다. 엄마는 미술 작품에 빠져들었지만, 두 아들과 아버지는 시큰둥하다는 게 엄마는 액자 안에, 다른 가족들은 액자 밖에 그려진 장면만 봐도 느껴진다. 하지만 얼마나 유명한 작가가 그린 건지, 예술 사조는 어떤지, 작품 특징은 뭔지 하나도 몰라도 그림을 보면서 가족끼리 낄낄대고 시답잖은 농담을 한 시간들이 참 좋았나 보다. 미술관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의 표정은 다정하고 부드럽다. 면지를 보면 미술관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가족끼리 그림그리기 놀이를 한 흔적이 있다. 한 사람이 어떤 모양을 그리면 다른 사람이 그 모양에 덧붙여 그려 그림을 완성하는 놀이다.

어쩌면 미술관보다 이 놀이가 아이의 미적 감각을 훨씬 더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영어판 제목은 미술관이 아니라 이 놀이의 이름이다. ‘The Shape Game.’

백다섯 명의 오케스트라

글 칼라 쿠스킨 | 그림 마크 사이먼트 | 옮김 정성원 | 비룡소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지식 그림책. 그런데 왜 표지는 옷을 갈아입는 사람일까? 책을 펼치면 난데없이 샤워하는 사람, 욕조에서 책을 읽는 사람, 물기를 닦는 사람, 머리를 말리고 수염을 깎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목욕 책인가? 바로 저녁 공연을 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다. 음악을 주제로 한 그림책은 대부분 유명한 작곡가나 지휘자, 독주 연주자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다섯 명의 오케스트라》는 주인공이 백다섯 명이다. 단원들은 청중이 음악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검은 옷을 입고, 정성껏 몸치장을 하면서도 연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팔찌는 하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이 켜지기 전, 꺼진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것은 의외로 어린 독자들의 관심을 끈다. 서로 다른 스타일로 씻고, 다른 스타일로 옷을 입는 단원들이 음악만큼은 한마음으로 서로 어울려 마침내 한 곡을 완성해 내는 과정 자체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관현악 음악이 아닐까?

모든 오케스트라가 105명인 것은 아니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40명 규모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자가 104명이다. 거기에 지휘자가 더해져 105명인 것이다. 104명이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지 유튜브에서 공연실황을 틀어놓고 찾아보면서 그림책을 읽어도 재미있다.

나의 바이올린

글 수지 모건스턴 | 그림 마리 데 살레 | 옮김 헤이리 키즈 | 주니어김영사

체임버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갔다가 그만 바이올린에 반해 버린 소녀의 이야기다. 공연 이후 주인공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금방 실망한다. 똑같은 악보인데도 선생님이 연주하면 아름다운데, 왜 ‘내’가 연주하면 고양이가 야옹거리는 소리 같단 말인가? 멀리서 볼 때는 쉬워 보이던 바이올린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답은 바로 ‘레슨’이다. ‘도레미’의 레는 바로 ‘레슨’의 레! 그림책의 중간 제목은 ‘레슨은 반복의 연속’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녀는 레슨에 질려버린다. 

“난 안 할 거야!” 학교 끝나고는 연습 따위 하지 않고 그냥 놀고만 싶다. “네가 하고 싶다고 했잖아.” “조금만 더 참고 하면 잘하게 되고 재미있어질 거야.” (어른들의 말은 서양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소녀를 다시 레슨으로 이끄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의 힘이다. 이렇게 아름다우려면 지루하고 끝없는 ‘파’리를 잡는 것보다 어려운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준다. ‘라’랄라 즐거운 음악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고, 그러나 가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범 내려온다

글 김진 | 그림 김우현 | 아이들판

20세기 이후 판소리가 이토록 힙한 음악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이날치 밴드의 음악에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만든 ‘범 내려온다’ 춤추는 영상은 원래 한국관광공사에서 만든 한국 홍보 영상이다. 한동안 우리 집에서는 온 가족이 수궁가의 한 부분인 ‘범 내려온다’ 춤을 따라 하느라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그런데 자라가 토끼 간을 구하러 오는 이야기인 수궁가에 범이 나왔던가? 나온다! 자라가 토끼를 꾀느라 “토선생”이라고 부른다는 게 그만 긴장을 했는지 턱이 뻣뻣해져 “토, 토, 토, 토, 호, 호선생!”이라고 해버린 것이다. “누가 날 선생님이라 부르느냐. 그렇고말고 나는 지체 높은 선생이고 말고.”라면서 호선생, 범이 신나서 자라에게 달려오는 장면이다. 우르르르 산이 흔들리고 쿵쿵쿵쿵 골짜기가 흔들리는데 온갖 동물들이 함께 외친다. “범 내려온다!” 한달음에 내려온 범이 자라를 보고 “이런 말라비틀어진 쇠똥 같은 것이 하나님 똥인가? 하나님 똥은 만병통치약이라는데.”라며 한입에 자라를 삼키려고 한다. 자라는 과연 어떻게 이 위기를 이겨낼까?

노래만큼이나 그림도 시원하다. 유튜브를 또 켜야겠다. 그림책과 함께 이날치 밴드의 신나는 음악을 같이 들어보자. 

드가의 산책

글 사만사 프리드만 | 그림 크리스티나 피에로판 | 옮김 최순희 | 주니어RHK

이 책의 원서 출판사는 MoMA(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뉴욕 현대미술관이다.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아이들에게 보다 쉽게 명화를 소개하기 위해 썼다. 첫 페이지는 드가의 작업실이 있던 파리의 어느 건물. 높은 곳에서 보는 파리의 풍경이 아름답다. 드가는 원래 역사화를 그리던 화가였지만 창밖의 생동하는 거리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금방 바뀌고 금방 사라지는 장면들을 그리고 싶었다. 드가는 거리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망토를 두르고 지팡이를 짚은 드가의 눈에 비친 파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 유행하던 모자며 여자들의 패션을 보는 즐거움도 쏠쏠하고,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하는 여인들 같은 장면에서는 어떻게 드가의 그림으로 되살아났는지 바로 비교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 파리의 풍경이 속속들이 나타난다. 꼭 드가라는 화가와 그의 작품을 익히지 않더라도 이 그림책 자체의 아름다움만 느껴도 충분하다.

미술관에 갈 상황이 못 된다면 이런 그림책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드가가 파리를 산책하며 작품으로 승화한 것처럼 우리도 산책 후에 그림을 그려보자며 아이와 함께 책을 보다 말고 뛰쳐나가도 좋겠다.

마시모 비녤리의 뉴욕 지하철 노선도

글·그림 에밀리아노 폰지 | 옮김 천미나 | 주니어RHK

이 책도 MoMA,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소장품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책이다. 그런데 ‘지하철 노선도’가 주제다. 드가나 피카소 같은 화가의 명화도 아니고, 데미안 허스트 같은 설치미술 작품도 아닌, ‘지하철 노선도’가 현대미술관 소장품이라고? 사람이 쓰는 모든 것엔 디자인이 필요하다. 24개 노선에 500개 가까운 지하철역이 있는 뉴욕 지하철 시스템이야말로 디자인이 필요한 영역이다. 일목요연하게 지하철역 정보를 전해주는 노선도는 물론, 지하철 안내판들의 글씨체, 색깔 이 모든 것이 눈에 띄면서도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이 일을 해낸 것이 그래픽 디자인의 거장 마시모 비녤리다. 이 책은 비녤리의 작품 못지않게 책만으로도 아름답다. 절제된 색깔과 풍경들이 마시모 비녤리의 예술철학을 충분히 재현하고 있다.

지하철역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늘 접하는 생활 공간이 미술관에 소장될 만큼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니, 그 도시가 부럽다. 그 도시를 걷기만 해도 예술 향유가 아니겠는가. 우리 아이들이 일부러 미술관으로 찾아가는 것보다 더 일상적으로 예술을 경험해서 ‘눈을 높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활 속의 예술 향유.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책을 읽어줘야 하고, 어른이 함께 그림책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

무의식에 남은 미적 체험과 향유의 경험은 코로나 시대, 무엇보다 든든한 마음의 친구이자 진로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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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