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RIEND, JOY

내 친구, 조이

MY FRIEND,
JOY

내 친구, 조이

조이는 나의 첫 태국인 친구이자, 가장 친한 친구다. 잡지에 소개할 만큼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언젠가 한번은 꼭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참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라운드에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나의 말에 조이는 기뻐하며 “Oh, Wow! Such an honor to be in Around Magazine!”이라고 외쳤다.

떠나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지난 2012년, 태국에 온 지 어느덧 1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차츰 타지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학원을 다니며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생겼고, 동네 사람들과도 종종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집 계약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아직은 초보 티가 나는 여행자와 생활자의 사이에서 나름대로 씩씩하게 잘 해나가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외롭다’라는 말을 내뱉으면, 단어가 주는 쓸쓸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날마다 입을 틀어막으며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친구들이 여행을 오긴 했지만,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후유증을 앓았다.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일은 늘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에 있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녔던 친구들이 자주 연락을 해주었다. 날마다 낯선 것과 마주쳐야 했던 시절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그 익숙한 온기에 잠시나마 긴장된 마음도 쉴 수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태국에서 친구가 필요했다. 클래스메이트나 눈인사를 하는 동네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친구, 가벼운 농담도, 무거운 이야기도 함께 나눌 그런 친구가 필요했다. 사실 태국에서 친구를 사귈 기회가 몇 번 있기는 했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 건너건너 소개를 받은 친구들은 대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 가수 이야기만 하는 친구에게 나는 무어라 대꾸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도 나도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다른 친구는 한국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아니냐며, 모든 계산을 내가 해주기를 바랐다. 친구를 가려 사귀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관심사와 취향이 다르다 보니 그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BTS(방콕의 지상철)를 타러 가는 길에 누군가 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나의 영어 이름인 “주이 킴Zooey Kim?”을 말했다.

조이와의 첫 만남

고백하자면 그 무렵 나는 태국 사람의 외모를 잘 구분하지 못했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오며 가며 만났던 사람 중의 한 명이려니 하고 인사를 하곤 했었다. 반가운 표정으로 “아, 싸와디카~.”라고 인사를 한 다음 ‘어디서 만났던 사람이더라?’ 머리를 재빠르게 굴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Do you know me?”라고 물었고, 나는 다시 태국어로 “음…. 찡찡 마이 루(사실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저는 조이라고 하고요, 당신의 오랜 인스타그램 팔로워예요.” 앗, 이럴 수가. 인스타그램의 태국인 팔로워를 지상철 역에서 만나게 되다니! 우리는 한쪽에 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이는 나의 이야기들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내가 방콕으로 이주한 것을 보고 왠지 한 번쯤은 마주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로 마주치게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고. ‘가만, 나는 인스타그램에 (당연하게도) 한국어로 코멘트를 달고, 얼굴 사진은 거의 올리지 않았는데 그녀는 어떻게 나를 알아본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이야기했다. “왠지 당신일 것 같더라고요.” 퇴근길의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더 긴 이야기는 할 수 없어, 서로의 메신저 아이디를 주고받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것이 나의 베스트 프렌드인 조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나의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졌지만, 그녀가 밝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전형적인 태국인의 외모였지만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웃음이 많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얼마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주이, 방콕에도 수상시장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아니, 나는 담넌 사두억 수상시장밖에 못 가봤는데, 방콕에도 수상시장이 있어?”,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갈래?”, “좋아!” 우리는 차오프라야 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수상시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배가 움직일 때마다 강가에 늘어선 태국의 역사 깊은 사원과 왕궁들을 소개해주었고, 덕분에 주변에 있던 여행자들까지도 귀를 기울였다. 배에서 내려 우리가 간 곳은 랏마욤Latmayom 마켓으로, 토요일에만 열리는 시장이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파는 태국음식으로 허기를 달랬고, 보트를 타러 가기로 했다. 

“여기에 나와 친한 아저씨의 보트가 있어. 그 아저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후에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에 끼어 작은 보트에 올라탔다. 천천히 노를 젓는 아저씨의 손짓에 따라 보트는 이리저리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연신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와 농담을 주고받더니, 물고기 밥으로 사용하는 식빵을 넉살 좋게 얻어와 나에게 건네주며, 강에다가 던져보라고 손짓했다. 우리의 보트는 연꽃이 한가득 떠 있는 곳으로 향했고, 나는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노를 젓던 아저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이가 말했다. “내가 이 아저씨의 배를 꼭 타려고 했던 이유를 알겠지? 우리 마치 베니스에 온 것 같지 않아

좋은 사람

수상시장에서 나와 조이는 드립 커피를 파는 카페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방콕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현지인이 안내해주는 곳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커피를 앞에 두고 비로소 차분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조이는 방콕에 있는 국제학교에서 특수아동반을 담당하고 있었고,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언니였다. 그녀 역시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고, 한국 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고 했다. 그녀는 인디 음악과 카페문화를 좋아해서 한국 여행을 갔을 때도 홍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다고 했다.(나의 홍대 단골 카페 이름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해서 방학 기간을 이용해 여행을 자주 다닌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와 취향이 비슷했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거의 매주 한 번씩 만나서 새로운 카페나 플리마켓을 찾아다니거나, 현지인들만 아는 야시장을 가곤 했다.처음엔 그저 서로 좋아하는 것이 비슷해서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조이는 가까이 지낼수록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그녀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에너지 덕분에 조이를 만나고 온 날이면 나에게도 그 에너지가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여러 사람과 함께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중에 영어를 전혀 못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누군가 그를 놀리기 위해 “나는 학교에 간다.”를 영어로 해보라고 했고, 그는 “I school go?” 라고 대답했다. 다들 배를 잡고 깔깔깔 웃어댔는데 조이만 혼자서 엄지를 치켜들며 그에게 “오, 좋은 시작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순서를 조금만 바꾸면 돼요.”라고 말했다. 옆에서 그를 놀리던 사람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항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주고받고, 길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을 주었다. 가끔 뜬금없이 “여기 한국 사람을 만났어.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영어를 못해. 네가 한국어로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알지도 못하는 한국인 여행자와 대화하며 그를 도왔다. 특히 작년에 한국에서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때, 조이는 어린아이들이 그렇게나 많이 희생된 것이 안타깝다며 눈물을 흘렸다. 남의 나라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마음 아파했다. 그날 그녀의 눈물을 통해 나는 조이와 친구가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친구의 이야기

태국에는 ‘싸바이 싸바이Sabai Sabai’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좋게 좋게.’ 혹은 ‘편하게 편하게.’라는 뜻이다. 불교 문화권이다 보니 자족하며 욕심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말이었다. 태국사람들은 대부분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원하는 꿈을 이룬다든지, 어떤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한국에서는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지만, 태국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힘든 일보다는 급여가 조금 적더라도 쉬운 일을 택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런 사회 안에서 조이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쁘라추압Prachuap이라는 태국 남부지방에서 태어나 방콕으로 이사했는데, 2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서 엄마를 따라서 다시 고향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엄마의 재혼과 함께 떠난 이사.

그녀는 새 아빠의 가족이 사는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탕수수 농장을 하던 새 아빠를 따라 엄마는 농부가 되어야 했다. 친아빠는 양육을 전혀 책임지지 않았지만, 엄마는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았고, 새 아빠는 똑똑한 조이의 교육을 위해 다방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이는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며, 이사를 많이 다녀서 적응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를 사귈 만하면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녀는 책 속으로 도망쳤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조이는 망고나무 아래에 앉아 홀로 점심을 먹었다. 외롭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고 다만 친구를 사귀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바꾸거나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그녀는 쉬는 시간이면 뉴스와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유쾌한 성격 탓에 친구들은 차츰 그녀의 브리핑(?)현장에 모여들었다.

너의 꿈이 뭐야?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학교에서 일한다는 것을 듣고 처음에 당연히 조이가 유학을 다녀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학연수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영어에 관심이 많아서 혼자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했다고. 대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외국 손님들을 공항에서 픽업해서 호텔로 데려다주는 일을 하며 한 달에 7000바트(약 25만 원)를 받았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덕분에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영어로 주저리주저리 하며 영어가 많이 늘었고, 자연스레 외국인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국제학교에 문을 두드렸다. 학교에 무작정 이력서를 들고 찾아간 뒤 1년 후, 학교는 그녀를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 결과 그녀는 태국의 국제학교에서 일하는 특수교사들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태국인 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급여를 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조이는, 급여의 일부는 정기적으로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후원했다. 얼마 전에는 라오스의 시골 마을에 다녀왔는데 그 역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봉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늘 다른 사람을 위하는 조이. 나는 그녀의 꿈이 궁금했다. “너의 꿈이 뭐야?”, “나 꿈이 좀 많은데, 우선 아이들을 위한 책을 쓰고 싶어.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거든. 그리고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데. 특히 dyslexia(난독증)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고 싶어. 태국에는 배울만한 곳이 없거든 그리고 나중에 학교를 열거야.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어. 마지막 꿈은 세계 일주를 꼭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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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