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남자와 커피
단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진짜다. 과자? 안 먹는다. 사탕? 안 먹는다. 케이크는 입에도 안 댄다. 단, 초콜릿은 가끔 먹는다. 맥주 마실 때 안주용으로 좋다. 처음엔 이거 어쩌나 싶었다. 디저트를 다뤄야 하는데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입맛을 가진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기적과도 같은 우연처럼, 사진 한 장이 대뇌피질을 스윽 지나갔다. 어떤 남자가 커피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열두 척의 배, 아니 한 잔의 커피가 있었다. 당시 10대 초반인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나도 어서 빨리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견뎌야 했다. 당신은 아마 그 사진의 정체가 궁금할 것이다. 밑의 곡 설명에 부기하도록 한다.
처음엔 믹스커피였다. 대학 시절 몇 잔의 믹스커피를 마셨는지 당연히 셀 수 없다. 학교 가서 한 잔 마시고, 수업이 끝나면 한 잔을 마셨다. 시험 기간이 되면 공부하다가 자판기에서 몇 잔 뽑아 친구들과 함께 마시고, 밤에는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또 한 잔을 마셨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달다는 이유로 믹스커피 따위 입에도 대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는 안 변해도 미시적으로는 변한다. 입맛이라는 게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당신은 설탕 뺀 블랙 믹스커피를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커피 전문점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쪽이 낫다는 게 내 대답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마다 또한 다 다르다.
지금까지 수많은 커피를 마셨다. 단, 조건이 있다. 내 입맛이 워낙 세련되지 못한 탓에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한다는 거다. 내 책 《평양냉면: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에도 썼듯이 나는 ‘얼죽아’라는 말이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한 이 분야의 선구자다. 바람 쌩쌩 부는 한겨울에도 밥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잘 마신다. 참고로 내가 맛본 아이스 아메리카노 영순위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였다. 스텀프타운Stumptown이라는 곳인데 나중에서야 커피로 유명한 포틀랜드 지역 프랜차이즈인 걸 알았다.
커피 관련 부심 가질 만한 경험은 하나 더 있다. 아니, 스텀프타운이야 커피 좀 아는 마니아층에겐 워낙 유명한 곳이므로 사실상 이게 유일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 나는,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케냐와 탄자니아 커피를 직접, 그것도 10일 동안 매일 마셔본 사람이다.
‘찐’했다. 한국에서 마시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피의 질감이 강렬하고, 농밀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것은 마치 커피를 주삿바늘을 통해 혈관으로 직접 꽂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하루 최소 두 잔씩 케냐에서 케냐 커피를 마셨다. 탄자니아로 넘어가서는 탄자니아 커피를 마셨다. 따라서 이것만큼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과연, 사람은 세세한 영역에서만 변하는 게 아니다. 환경에 따라 맞춤형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원래 환경으로 복귀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럽게 되돌아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역시 최고다. 이제 정체를 밝혀야 할 때다. 나에게 어른 되기의 욕망을 커피를 통해 일깨웠던 바로 그 사내, 故신해철이다.
방송과 글을 통해 수도 없이 말했지만 나는 신해철이라는 뮤지션을 동경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모든 곡과 앨범을 빠짐없이 챙겨서 들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글쎄. 신해철이 남긴 유산 중 어떤 게 최고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개인 취향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신, 어떤 앨범이 가장 풋풋하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1990년 발표한 신해철 1집이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전곡의 가사를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다. 그중에서도 촌스러운 듯 애틋한 발라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와 코드 네 개를 반복하는 순환 코드 방식으로 노래, 랩, 내레이션을 오가는 ‘안녕’의 인기가 대단했다. 나에게는 앨범 커버를 통해 커피에 대한 욕망을 처음 일깨워준 역사적인 앨범이기도 하다. 1990년이라는 시대사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찻잔 속 커피는 믹스였을 확률이 높다.
만약 커피 관련한 원고가 라디오에서 나온다면 그 뒤에 선곡될 확률이 아주 높은 곡들 중 하나다. 한데 이 곡은 기실 커피 예찬과는 거리가 멀다. 적시하면 알코올 의존자였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이 술을 끊은 뒤에 “이 멀쩡하게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하는 곡이다. 즉,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커피와 TV라도 달라는 거다. 따라서 라디오에서 커피에 관한 음악을 틀고 싶다면 차라리 다음 곡을 선택하도록 하자.
“스모우크 핫커피 리필 / 달이 뜨지 않고 니가 뜨는 밤” 곡 형식은 발라드라고 봐야 한다. 동일한 가사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사운드의 덩치가 서서히 커지고, 곳곳에 노이즈가 스며든다. 과연, 성기완표 음악이라고 할 만하다. 빼어난 뮤지션인 그는 탁월한 시인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빌려 그는 “부드럽고 가지런히 정리된 발라드 사운드에 노이즈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이 음악도 마찬가지다. 스모크를 스모우크로 일부러 쓰고 발음하면서 곡은 서정미를 획득한다. 여기에 시인의 말마따나 노이즈를 스포팅spotting 기법으로 도입해 도무지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을 길어 올린다. 그는 시와 음악을 통해 화음과 소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 가히 절묘한 경지다.
이 곡, 내가 아주 가끔씩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즐겨 찾는 노래다. 못 들어봤다면 꼭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글 배순탁―음악평론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