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 Book]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영화 <어시스턴트>(2019)를 보다가, 머릿속이 온통 저 질문으로 가득 차 있던 오래전 나의 어시스턴트 시절이 기억났다. 나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세상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할까? 그게 너무 궁금하고 걱정이 돼 점도 보고 타로도 보고 사주팔자도 봤는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어쨌든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기는 하니 그걸로 됐다.         

대학 4학년 겨울 방학, 나는 아직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라고 부를 수도 없을 회사들에서도 면접을 봤으나 거기서조차 다 떨어졌다. 결국 나를 불러준 곳은 한 달에 2주를 일하고 30만 원을 받는, 어느 패션 잡지사의 편집 보조, 그러니까 어시스턴트 자리였다.

나는 그 잡지사에서 1년을 일했다. 직급도, 자리도 없는 나는 기자들이 외근을 하면 비는 자리를 찾아 옮겨 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전화를 걸고, 전화를 받고, 검색을 하고, 복사를 하고, 퀵서비스를 부르고, 소품을 사고, 샌드위치와 주스를 포장해 왔다. 어시스턴트 아르바이트생에게 친절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너는 어디서 뭐 하다가 여기까지 왔냐?” 하고 빈정대던 사람도 있었고, 일하는 내내 ‘너 따위엔 관심 없으니까 일이나 똑바로 해.’의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 시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경력이 없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라도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똑똑하거나, 일을 기똥차게 잘하거나, 성격이 밝고 싹싹하거나, 아니면 예쁘고 잘생기거나 매력적이기라도 해야 한다. 나는 그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1년을 그럭저럭 헤쳐 나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곳에서 만난 같은 처지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나는 그 애들의 호의에 기대어 캄캄한 무명의 시기를 버텨냈다.

미스터 하네다는 미스터 오모치의 상사였고, 미스터 오모치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터 사이토는 미스 모리의, 미스 모리는 나의 상사였다. 그런데 나는, 나는 누구의 상사도 아니었다. 이걸 다르게 얘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스 모리의 지시를 받았고, 미스 모리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터 사이토는 또……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정확성을 위해 덧붙이자면, 밑으로는 위계 서열을 뛰어넘어 지시가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유미모토사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지시 아래 있었다.

— 아멜리 노통브, 《두려움과 떨림》 중에서 

1년에 한 번쯤은 책장에 꽂힌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두려움과 떨림》을 꺼내 읽어본다. 사실 내가 읽은 아멜리 노통브의 책은 이것이 유일하다. 한때 모두가 이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었지만, 당시 너무 힙하던 그녀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헌책방에서 발견한 이 책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목도 좋고, 얇은 양장본의 느낌도 좋았다. 그리고 책 속의 가볍고 우스꽝스럽고 슬프고 이상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좋다.

벨기에인인 아멜리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란 추억을 잊지 못해, 일본의 종합상사인 유미모토에 계약직 사원으로 취업을 한다. 하지만 기괴해 보일 정도로 엄격한 이곳의 위계질서에서 아멜리는 이물질 같은 존재다. 모두들 이 이방인에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한다.

아멜리의 상사 모리 후부키는 그림 속의 여자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키가 180센티미터나 된다는, 일본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핸디캡이 있다. 아멜리는 후부키의 아름다움을 경외한다. 그러나 다른 부장의 중요한 계약 건을 돕다가 후부키에게 밉보인 후, 그녀가 시키는 온갖 무의미한 잡무를 하다가 화장실 청소까지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럼에도 아멜리는 우스꽝스러운 연극 같은 일본식 회사 생활을 멀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녀에게는 이 회사의 밖, 이 섬나라의 밖에 다른 세계가, 최소한 이보다는 좀더 합리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이 안에서 평생을 시들어가는 후부키 같은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후부키는 이 세계의 가련한 피해자인 동시에, 이 세계를 떠받치는 무수하고 굳건한 기둥 중의 하나다. 후부키는 자신의 커다란 키를 부끄러워하고, 아직 결혼하지 못한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남자들보다 유능하지만 그들처럼 승진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한다. 후부키가 아멜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아멜리가 감히, 외국인에 말단 계약직 사원인 주제에 자신도 아직 닿지 못한 자리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아멜리가 날 때부터 일본 여자들은 꿈꿀 수 없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자리에서, 유미모토의 44층 화장실에서, 간부 한 명이 남기고 간 쓰레기의 잔해를 문질러 닦고 있노라면 이 건물 밖에, 여기서 전철로 열한 정거장 거리에,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변기 세척 솔과 나를 전혀 연관 짓지 않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두려움과 떨림》 중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배우, 줄리아 가너가 연기하는 영화 <어시스턴트>의 주인공은 한 영화 제작사 대표의 어시스턴트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영화 제작자가 되고 싶어 이 회사에 들어왔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얻어낸 이 자리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대표의 온갖 뒤치다꺼리뿐이다.

그녀는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을 하고, 해가 지고 난 후에야 퇴근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다. 오디션을 보러 온 늘씬한 배우 지망생은 그녀를 옷걸이 취급한다. 그녀는 중역들이 회의 도중 남긴 빵 부스러기를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심지어 바람둥이 대표가 시골에서 데리고 온 어린 여자애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그 여자애와 함께 있는 대표를 찾으며 분개하는 사장 아내의 전화까지 받아야 한다. 그런 일들을 하느라 그녀는 아빠의 생신마저 잊어버렸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시달린 그녀가 끝내 화를 터뜨린 대상은, 그녀보다 아래에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 바로 대표의 운전기사다.

그녀는 점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간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영화의 ‘영’ 자와도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일에서 벗어나 승진을 하면, 정말로 원하던 영화 제작 일을 하게 되면 행복해질까? 매일 마주치는 중역들의 삶도 피폐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권태와 짜증과 수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사무실. 종종 들려오는 한숨과 속삭임, 은밀하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과연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영화를 보다가 나의 어시스턴트 시절이 다시금 생각났다. 그들은 어시스턴트를 줄여서 ‘어시’라고 불렀다. 그들 중에는 ‘어시’가 ‘어시스트’의 준말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궁금했다. 나중에야 그 비결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정말 독한 여자들이었다. 웬만큼 독하지 않고서 그 시절의 패션 잡지계에서 버텨내기는 힘들었다.
마감 전 이런저런 잡무로 밤을 새울 때면, 나는 건물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태우면서 고요한 정동길과 서소문길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곳은 지옥이 아니었고 내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젊었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내 자리를, 내 이름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에 내 자리가 생길지도 몰랐다.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1년이 지나 공채 시험에서 합격한 정규직 사원들이 입사했을 때였다. 그들은 나보다 어린, 갓 대학을 졸업한 여자애들이었고, 잡지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자님’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시’였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단 하나, 들어온 문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해 겨울 나는 열심히 취업 포털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겨우 겨우 조그마한 애니메이션 회사의 기획팀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잡지사도 아니고 그저 그런 회사일 뿐이었지만, 이제 나는 어시가 아니라 정직원이었다. 더는 빈 책상을 찾아 옮겨 다니거나 잔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됐다. 여기에는 내 책상과 내 컴퓨터와 내 전화기가 있었다. 나만을 위한 내선 번호도 있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내 의견을 존중했다. 나도 엄연한 회의의 일원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물론 그 기쁨은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누구에게나 자리가 없던 시절은 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사회로 나온다. 자리가 없고 이름이 없는 시간은 결국 지나갈 것이다. 이력서의 빈 칸들은 조금씩 채워질 것이고, 사무실 한구석에는 정말로 나의 자리가 생길 것이다. 함께 낄낄댈 동료도, 그럴 듯한 휴가 계획도 생길 것이다. 어느 순간 인간에게는 과연 하루 몇 시간의 노동이 정당한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하는가. 인간은 과연 일하기 위해서 태어났는가. 따위의 돌파구가 없는 질문들이 용천수처럼 솟아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초짜들을, 어시스턴트들을, 무경력의 존재들을 안쓰럽고, 못마땅하고,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린 채. 아니, 더는 그 과거를 돌이키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본능적으로,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나는 이마를 창문에 갖다 대고 내가 그리워할 게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4층 꼭대기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것이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는 아니었다. 창문은 추한 불빛과 감탄을 자아내는 어둠 사이에 있는, 화장실과 무한 사이에 있는, 위생적인 것과 씻어 낼 수 없는 것 사이에 있는, 수세 장치와 하늘 사이에 있는 경계였다. 창문이 존재하는 한은, 세상 사람 누구라도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나는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몸이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픈 갈증이 해소되고 나자, 나는 유미모토 건물을 떠났다.
사람들은 나를 다시는 그곳에서 보지 못했다.

— 《두려움과 떨림》 중에서

반대로 세상의 모든 초짜들, 어시스턴트들, 무경력의 존재들이여. 자리가 없는 존재들이여. 당신을 괴롭히고 짓누르는 그들 역시, 얼마 전까지 바로 당신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시간은 가고, 실패는 경험이 되고, 상처는 잊히며, 당신은 나이를 먹는다. 당신보다 어린 사람들이 나타난다. 당신은 어른이 된다. 당신만의 자리를 갖게 된다. 그게 인생의 가장 다행스러운 점이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겠지만.

Movie—키티 그린 <어시스턴트>(2019)

Book—《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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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오하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