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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뭘 먹나?
인류 최대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내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 읽다 보니, 얼마 전에 본 켄 로치의 마지막 영화도 생각이 났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인스타그램이 요즘 나한테 많이 추천하는 콘텐츠는 셀프 인테리어와 배우 한소희 씨 그리고 요리다. 20년 셀프 인테리어 인생, 셀프라면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서 ‘반찬 셀프’인 식당조차 싫어질 정도인데, 돈이 아까워 또 ‘그냥 내가 할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의 멍청함을 이렇게 간파하다니. 그걸로도 모자라 인스타그램은 내 이름과 가운데 글자 하나만 다르지만 나와는 한 점 닮은 데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애통한 미녀 배우 한소희 씨를 향한 내 동경의 마음과, ‘오늘은 또 뭘 해서 저것들을 먹여야 하나….’ 하는 갑갑한 내 심경을 (내 남편보다) 더 잘 알아준다. 무서운 우정이다.
그러게, 오늘은 또 뭘 해서 저것들을 먹여야 할까. 원래 나는 요리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은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사지가 늘어지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와도 언제나 요리할 에너지는 남아 있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없던 에너지가 솟을 정도였다.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거라는 기대, 잡생각은 할 틈이 없는 일사불란한 절차. 요리는 내 최고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오늘 뭐 먹지?’라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오늘 저녁에는 커다란 나무 볼에 밥과 (명절에 먹고 남은) 나물을 넣고 비벼서 온 가족이 밥그릇 하나씩 들고 둘러앉아 먹었다. 왠지 구걸한 밥을 나눠 먹는 거지 가족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내일은 또 뭘 먹어야 하지?
죄책감과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명절 동안 읽은 박혜윤의 책 《오히려 최첨단 가족》의 한 구절을 옮겨 써본다.
이 가족의 끼니는 간단하다 못해 음… 좀 이상할 정도다. 아침은 어른이건 아이건 직접 만든 요거트를 알아서 꺼내 먹고 나간다. 점심은 미리 만들어 냉동해 둔 빵을 구워 먹는다. 저녁으로는 오븐에 구운 제철 채소를 그냥 먹고, 현미밥에 김이나 두부, 대충 만든 김치 같은 걸 올려 먹는다. 만약 다른 게 먹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직접 요리해서 먹으면 된다. 이것 역시 어른이건 아이건 마찬가지다. 이 가족은 거의 매일 이렇게 먹고 산다고 한다.
이렇게 먹으면 끼니 때우기가 스트레스가 될 일이 없다는 것이 박혜윤의 주장이다. 설거지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장을 보러 갈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집안일에 들이는 수고가 최소화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집안일이 싫어서, 먹는 데 취미가 없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하고, 하찮은 집안일이야말로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들이 먹는 음식은 대부분 직접 시간과 품을 들여 만든 것들이다.
“오늘 뭐 먹지?”라는 질문을 원천 차단하는 시스템이라니, 정말 ‘신박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매일 대단히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사는 것도 아니고, 매 끼니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다. 여행을 가서 4박 5일쯤 매 끼니를 사 먹다 보면 맛도 맛이지만, 하루에 세 번씩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생각보다 정말 귀찮다. 그냥 집에 가서 물 만 밥에 김치나 얹어 먹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쁨은 반복의 사이클에서 가끔 가다 선물처럼 떨어지는 특별함에서 오는 것 같다. ‘모처럼만의 외식’이라는 말, 그 말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가만 보자. 우리가 가장 열심히 집밥을 만들어 먹던 때는, 돈은 없고 시간은 넘쳐흐르던 시기였다. 그때는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시간과 열정을 추진력 삼아 밤마다 빵을 반죽해 구웠다. 잼을 만들고, 보리차를 끓여 마셨다. 김치를 담그고, 감자탕을 끓이고, 치킨과 감자칩을 튀겼다. 커피콩까지 볶았다.
그러고 보니 요리가 곤혹스러운 과제가 되어버린 이유는 시간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너무 바쁘다. 정말로 할 일이 많아서 바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마음만 바쁜 것 같기도 하다. 만약 매일매일 아무런 할 일이 없다면, 망망대해처럼 길고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제멋대로 써버릴 수 있다면, 의무도 책임도 없다면, 그러니까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나도 예전처럼 저울을 꺼내 밀가루를 계량하게 될까? 커피콩을 가스불 위에서 20분 동안 흔들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2023)의 배경은 영국 북부의 쇠락한 탄광 마을이다. 과거 이 마을에는 탄광이 있었고, 탄광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번성했다. 하지만 지금 탄광은 문을 닫았다. 노동자들도 마을을 떠났다. 일자리 없는 마을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불행은 마을 곳곳에 퍼져 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버스 한 대가 도착한다. 버스에 탄 낯선 이들은 시리아에서 온 난민이다. 목숨을 걸고 고국을 탈출해 이 먼 유럽 끝까지 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반기지 않는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들어 허덕이는데, 이교도들이 물을 흐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리 몫까지 빼앗아 갈 거라고 생각하니 불안하고 화가 난다. 마을 사람들은 난민들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못한다.
난민들과 마을 사람들의 관계 개선을 위해 펍 ‘올드 오크’의 주인과 젊은 시리아 여성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홀에서 매일 무료 점심 식사를 제공하기로 한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집에는 제대로 된 음식이라 할 만한 것들이 없다. 부모들의 존재는 희미하고, 아이들은 게임이나 술, 마약에 찌들어 있다. 과자 한 봉지로 겨우 허기를 채우고 어지러워 수업을 듣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반대로 시리아 사람들의 집에는 빈궁하게나마 직접 만든 음식이 있고, 손님을 따뜻하게 대접하는 문화가 있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관계는 신뢰와 애정으로 끈끈하다. 이제 호혜는 시리아 사람들의 몫이 된다.
영국 노동 영화의 거장 켄 로치는 이 영화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선언했고, 그래서인지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날카롭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 왜 아직도 굶는 사람들이 있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평생을 바쳐 해결되기 원했던 과제를 끝내 미완으로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감독의 울분이 느껴진다. 켄 로치가 희망을 거는 것은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약자들의 저항과 연대다. 약자들이 손을 잡으려면 용기와 너그러움과 이해 그리고 연민의 마음이 필요하다. ‘올드 오크’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이.
박혜윤은 《도시인의 월든》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읽은 책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한 야생 먹거리 전문가가 실직을 하고 집 대출금도 내지 못해 쫓겨나게 된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는 먹을 게 없어 내내 굶은데다 잔디 깎을 기력조차 없어 뒤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저자는 뒤뜰의 잡초들 중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뜯어 친구와 함께 요리해 먹었다. 친구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돈 한 푼 들지 않은 풍요로운 식사를 했다고 했고, 이것이 힘이 되어 용기를 되찾았다. 시골에서 살면서부터 야생에서 블랙베리와 봄나물을 채취하고, 푸드뱅크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딸이 가져온 남은 음식을 요리해 먹고, 이웃이 준 멍든 과일을 고맙게 받게 되었다는 박혜윤은 이렇게 썼다. “풍요란 내가 나의 것을 축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를 통해 들어오고 흘러나가는 그 흐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완벽한 복지, 완벽한 평등이 아닌지도 모른다. 사실 완벽한 복지와 완벽한 평등이 가능이나 한 것인지, 완벽한 복지와 평등을 실현했다고 해서 세상이 정말로 천국이 될지 의심스럽다. 물론 우리는 완벽에 가까운 복지와 완벽에 가까운 평등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꼭 돈을 지불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진정한 풍요란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닌, 나를 통해 들어오고 흘러나가는 흐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내 집의 문을 열어주고, 음식을 나누고, 품을 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제도적인 복지와 평등이 미처 스며들지 못하는 틈을 촘촘히 채우는 온기일 것이다. 그런 세상이야말로, 부자든 가난한 이든 추락의 공포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손가락 터치 몇 번만으로 온갖 산해진미를 문 앞까지 배달받을 수 있는 이 편한 세상에, 집밥은 시대착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외식비는 너무 비싸다. 그리고 조리해서 파는 음식은 지나치게 칼로리가 높고 자극적이다. 나에게 어떤 음식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로 먹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과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먹일 필요가 있다. 귀한 것을 더 귀하게 음미하기 위하여 근사한 외식은 특별한 날로 미뤄둔다. 아주 간소한 식사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대충 차려서 대충 먹고 살기로 한다. 밥과 반찬 두어 가지면 더 욕심부리지 않으려 한다. 매일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과 여력은 남겨 두기로 한다. 가족과 가사노동을 더 적극적으로 분담하기로 한다.
어쩌면 집밥을 먹겠다는 결심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가지세요.’, ‘타인에 구애받지 말고 혼자만의 삶을 즐기세요.’, ‘그러니 돈을 쓰세요.’, ‘그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버세요.’라고 끝도 없이 주문을 거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리만의 고요하고 작은 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냉장고를 열자.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어떻게든 잘해나가 보자. 삶이란 그런 것이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