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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 Wonder
남기고 취하는
지인한테 들은 기록하는 사람의 이야기 두 편.
노숙자 피터는 수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예술대학 정문 부근으로 출근해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피터는 낡은 옷을 입을지언정 깔끔했다. 자신의 취향대로 골라 입은 게 확실한 빈티지 차림이었고 구걸하지 않았다. 학교 학생은 누구나 피터를 알았기에 밥때가 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 샌드위치나 샐러드 따위를 음료와 함께 건네곤 했다. 피터가 먼저 학생에게 다가가 정중히 청하는 유일한 것이 커피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피터가 언제든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커피값을 적립하는 마일리지 카드를 교내 카페에 만들어 두었다. 피터는 책벌레였다. 교내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 들고 정문 부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피터가 독서에 집중할 때면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할 정도로 진지했다. 읽던 페이지를 나란히 바라보며 몇몇 학생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목격되곤 했다. 학생 중 몇 명은 피터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피터가 보이지 않았다. 감기에 걸렸나? 피터도 자신의 생활이 있으니까 다른 일을 보러 어디 갔을지도 모르지. 두어 주쯤 지나자 학생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 새로이 자리를 마련한 걸까? 우리 피터가? 에이, 설마! 피터가 잠은 어디서 자는지 궁금해하는 학생들이 생겼고 피터의 행적을 수소문해 거처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경찰이 등장한 건 그때였다.
“혹시 피터라는 노숙자를 아는 분 계신가요? 이 학교에 자주 왔다는 얘길 들었는데요.”
“피터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피터는 여기 학생이나 다름없어요. 안 그래도 며칠째 보이지 않아 다들 걱정했거든요.”
“누구한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같이 좀 가주셨으면 합니다.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어느새 정문 앞에 피터를 궁금해하는 무리가 모여들었고 열 명 남짓이 경찰을 따라나섰다. 경찰을 따라갔던 학생들이 다음 날 예술대학 학장과 교수 몇 명과 함께 정문을 나가는 모습이 보이자 호기심에 이끌린 학생 수십 명이 따라나섰다. 무리가 도착한 곳은 피터의 거처였는데, 큰 충격으로 숨 쉬는 것도 잊을 뻔했다. 폐가의 벽은 온통 드로잉으로 뒤덮여 있었다. 종이 크기와 지질이 제각각이고 성한 데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버려진 종이를 주워다 그린 모양이었다. 목탄 조각, 몽당연필, 잘 안 나오는 사인펜, 부러진 펜대 등 온갖 도구가 수백 자루 쌓여 있었다. 제대로 교육받은 그림이 아니었다. 녹색 사인펜으로 그리다 잉크가 다 되어 손에 닿는 다른 재료로 이어 그리기도 했고 그런 식으로 드로잉 하나에 여러 도구가 사용되었다. 폐가에서 발견된 수십 권의 드로잉은 교내 갤러리에서 한동안 전시되었다.
안드레는 역사 과목 교사로 40년 넘게 재직하다 은퇴 후에는 사진을 찍으며 소일했다. 안드레에게 사진이 진지한 작업은 아니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옛날 사진을 많이 접한 터라 친숙한 매체일 뿐이었다.
“타인이 남긴 기록이 제 삶의 전부였으니 이제 내 주변을 기록해 보자는 단순한 발상이었어요. 어차피 시간이 남아도니 운동 삼아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 일석이조잖아요. 셔터만 누르면 되니 힘이 드는 일도 아니고요.”
전 아내와 함께 사는 딸이 학교 숙제로 가족사를 쓰면서 사진을 스캔하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 안드레에게는 각성의 순간이었다.
“저 납작한 기계가 모든 걸 컴퓨터에 저장해 준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죠.”
안드레가 당장 스캐너를 장만한 데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앞으로 연금으로 생활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세간을 줄여 이사하기로 결정한 시점이 딱 그때였다. 모든 사진과 서류, 심지어 수백 권의 책까지 스캔해서 저장한 덕분에 짐을 줄일 수 있었다. 전자책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안드레는 원시적인 형식의 전자책을 스스로 고안한 셈이었다. 컴맹 수준이던 안드레는 스캔한 자료를 찾을 때 파일명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열어보지 않고도 무슨 파일인지 대략 알 수 있도록 파일명 체계를 세웠다. 이를테면 ‘buch_wahregeschichten_callesophie_044-045_sw’는 ‘책, 《진실된 이야기》, 소피 칼, 44-45쪽, 흑백’, ‘photo_19950401_viktoriaallee_farben’은 ‘사진, 1995년 4월 1일, 빅토리아 알레, 컬러’라는 의미였다.
“독일에서는 날짜를 일, 월, 년 순으로 쓰는데 파일명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에요. 컴퓨터는 왼쪽에 있는 정보부터 인식하잖아요. 그래서 익숙한 관습을 버리고 년, 월, 일로 표기했어요.”
여러 해 꾸준히 산책하며 찍은 사진을 스캔해 저장하던 안드레는 어느 날 다음 단계로 도약했다. “어릴 때 친구들이랑 복사기에 얼굴을 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복사하고 놀던 일이 떠올랐어요. 입체를 스캔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안드레는 책상 위의 연필, 지우개, 책상 빗자루, 안경에서 시작해 옷가지, 구두, 가방, 찻잔, 포크, 나이프, 접시, 매일 아침 사 오는 빵 등 모든 걸 스캔했다. 입체가 평면 스캐너에 읽히면서 기록되는 이상한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안드레는 소형 자가 발전기와 스캐너를 들고 밖에 나갔다. 풀, 나무, 돌, 참새, 고양이, 구름, 비, 무지개를 스캔했다. 딸을 만나러 갈 때면 셔터 릴리즈를 스캐너에 연결해 기차 창에 대고 흐르는 풍경을 스캔했다. 세상을 그대로 담은 풍경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었다.
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