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For The Full Enjoyment

그림책공작소 민찬기 소장

지금까지 ‘미친 듯이 빠져 있다’는 표현은 피상적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어느 정도가 미친 정도인지 몰랐고, 어디까지 빠지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그림책에 미친 듯이 빠져 있는 사람을 만나고 나니 이 표현이 사뭇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림책공작소의 민찬기 소장은 본인이 만족할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출판사를 차렸다. 햇수로 6년 차에 접어들지만 아직까지 독자의 만족보다 자기만족의 비중이 더 크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는 그림책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냥

더 잘 만들고 싶어서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그림책공작소라는 이름을 보고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지으신 거예요?

맞아요. 편집자로 일한 지 15년쯤 되었을 때 출판사를 차렸는데, 다른 출판사들처럼 독자들에게 책으로 다가가기에는 늦은 감이 있어서 누가 봐도 그림책을 만드는 출판사라는 걸 직접적으로 알리고 싶었어요. 오로지 그림책만 만들겠다는 다짐과 함께 시작했죠.

 

‘대표’가 아닌 ‘소장’이라는 호칭이 새롭고 어색해요.

편집자 출신이라 그런지 대표님, 사장님 소리 듣는 게 너무 겸연쩍어서요. 출판사 이름이 그림책공작소니까 연구소의 연구소장처럼 소장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하다 보니 지금은 저도 부르는 분들도 익숙해졌어요.

 

어릴 때부터 ‘1인 그림책 출판사 대표’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꿈꾸지는 않았을 텐데요. 언제 처음 그림책에 빠지게 되었나요?

고등학교 때는 국어, 특히 시를 좋아했어요. 가방에 늘 《스크린》이라는 영화 잡지와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 들어 있었어요. 교과서들은 캐비닛에 넣고 그거만 갖고 다녔어요. 시집을 달달 외우며 시가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영화 잡지를 보면서 시나리오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면서는 라디오 방송작가를 꿈꿨고요. 어쨌든 작가가 되고 싶었죠. 그래서 국문학과에 들어갔는데 제 글발이 말발만도 못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웃음). 그래도 글을 다루는 일을 하고는 싶으니 편집 직종을 찾아봤죠. 업계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어서 무턱대고 열 몇 군데를 동시에 지원했어요. 

제일 먼저 면접에 붙은 곳이 학습지 만드는 회사였는데, 일주일에 한 권씩 열두 쪽짜리 유아 한글 교재를 만들었어요. 월요일 오전에 업무를 다 끝내고 부록 페이지에 열을 올렸어요. 교재 맨 마지막 두 페이지에 이솝우화나 위인전을 요약하고 교정교열을 본 다음 그림 두 컷을 발주하는 일이었는데 원고와 그림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지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때 처음 ‘난 이걸 하고 싶다. 해야겠다.’ 생각했죠. 매일 퇴근 후에 강남 교보문고 유아 코너로 가서 그림책 수천 권은 읽었던 것 같아요.

그때 완전히 그림책에 매료되었네요.

네. 그때부터 그림책 출판사를 알아보고 몇 군데서 일하다가 운 좋게 보림 출판사에 입사해서 2006년부터 7년 가까이 일했어요. 지금은 보림 기획위원으로 계시는 최정선 주간님한테 많이 배웠어요. 책 만드시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그림책이 생각보다 훨씬 임팩트 있는 매체라는 걸 알았어요. 저도 그렇게 매력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출판사를 차리신 거예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하면서 쌓인 욕구 불만들이 너무 커졌어요. 마음 맞는 작가들과 의미 있는 창작 그림책을 만들고 싶고 좋은 외서를 제대로 소개하고 싶은데 모든 결정권이 없으면 불가능하니까요. 가끔 진짜 좋은 외서가 우리나라에 왜곡되어 소개될 때는 책 만드는 이로서 안타까웠죠. 결국 내가 만들고 싶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서, 그것도 잘 만들고 싶어서 차린 셈이에요.

그림책공작소의 그림책 30여 권을 천천히 읽어보았어요. 나라, 장르, 작가의 경력, 기법, 내용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는 점 말고 공통점을 찾기 힘들더라고요. 

책을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은 명확한 주제예요. 그림책에 적합하고 기존의 것보다 진일보한, 아이와 어른이 공감할 만한 주제인지를 살펴봐요. 두 번째는 그 주제에 걸맞은 화법과 플롯, 장면 구성과 표현 기법을 갖추었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죠. 만약 핫한 그림 트렌드를 따라가거나 전작이 잘된 작가의 다음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없는 돈 끌어다 계약을 따왔겠지만 다행히 저는 그런 관점으로 책을 고르지는 않아요.

 

주제에 대한 제약은 없나요?

무척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예전에 비해서는 완화됐지만 그림책 출판사마다 내규 방침이 있어요. 전쟁, 이혼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추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림책공작소에서는 그런 제한을 두지 않아요. 사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전쟁은 벌어지고 있고, 우리나라 이혼율도 무척 높은 편이잖아요. 세상의 실체와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일찍 접할수록 사리분별이 가능하고 건강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제까지 감추기만 할 수는 없어요. 가령 전쟁의 경우, 그것이 음흉하고 어둡고 너무 차가워서 어른들도 보기 싫을 정도로 나쁜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른으로서 의무기도 하죠.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재쇄 찍을 때 한 번도 수정을 거치지 않은 적이 없다고요.

주위에서 저를 변태 편집자라고 불러요. 봉준호 감독의 ‘봉테일’을 빗대어 ‘민테일’이라고도 하죠(웃음). 좋아하는 책을 책임지고 잘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초판을 냈다고 손이 놓아지지는 않더라고요. 초판 2,000부를 봐주신 독자들만 고마운 게 아니라 다음 판을 찾아주실 독자들에게도 고맙잖아요. 초판이 다 팔리는 동안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2쇄를 찍을 때 조금이라도 반영하는 게 맞다고 봐요. 그걸 깨우쳤는데 그냥 넘어가는 건 좀 비약적이긴 하지만 2쇄 독자들에 대한 기만 행위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어떤 부분이요?

《여름 안에서》를 예로 들면, 한국어 초판은 원서와 다르게 맨 마지막 네 페이지가 다 펼쳐지지 않고 5mm가량 붙어 있어요. 원서가 36페이지인데 우리나라 접지기는 8페이지짜리라서 32페이지까지만 깔끔하게 제본되었기 때문이죠. 색감과 페이지네이션 등 모든 것을 원서에 최대한 가깝게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마지막 페이지가 붙어 있는 게 너무 신경 쓰이더라고요. 사무실에서 3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이것만 보고 있다가 마침내 ‘유레카!’를 외친 순간이 왔어요. 인트로 2페이지, 아웃트로 2페이지를 추가해 40페이지를 맞추면 되겠다싶은 거죠. 그래서 원서에 있는 디자인 소스로 직접 디자인 디렉팅을 했어요. 2쇄부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하게 펼쳐지게 됐고, 결과적으로 추가한 페이지가 책의 몰입도를 높여 주었어요. 저자인 솔 운드라가 작가가 작년에 내한했을 때 책을 보고 너무 좋아하면서 원 저작권사에도 이야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재쇄 때 고민을 안 할 수 없어요. 물론 디테일 하나가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해요. 제 만족과 더불어 그림책공작소 책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이죠.

재쇄 때마다 달라진 점을 찾는 재미도 있겠네요. 얼마 전에 출간된 《노란공》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루이스와 루이사가 사라진 노란 공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는데,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몸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노란공》은 몇 년 전 볼로냐 국제 아동 도서전에 갔을 때 플라네타 탄제리나 출판사에서 메인으로 내놓은 책이었어요. 그림 기법이 계속 바뀌고 중간에 사진까지 삽입되는 점이 약간 애매했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계약을 했어요. 저는 이 책을 ‘독자와 랠리하는 책’이라고 소개해요. 독자분들 반응이, 코로나19 때문에 집 안에만 있다가 책 속에서나마 움직여서 그런지 아이들이 엄청 신나 한대요. 차원 이동이라고 할 정도로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잖아요. 아마 이렇게까지 독자와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그림책은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책이라는 물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파격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어요. 글, 그림 작가들도 너무 멋진 작업을 해주었고요. 그 흔한 굿즈 하나 없이 순위권에 들었다는 게 너무 감사해요.

 

국내 창작 그림책도 꾸준히 펴내고 계시죠. 《나의 엄마》를 비롯한 강경수 작가의 책들, 그리고 WEE 한국 어린이 그림책 어워드 후보에 오르기도 한 《하루거리》, 《소중한 하루》 등 10여 권의 책을 출간하셨어요.

창작 그림책은 기성 작가의 그림책을 선보이는 뚝딱뚝딱 우리책 시리즈와 신인 작가의 책으로 꾸리는 뚝딱뚝딱 나래책 시리즈 두 갈래로 나뉘어요. 제가 작업 과정에 민감하고 개입도 많이 할 것 같지만, 기성 작가와 작업할 때는 거의 터치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가 집중하고자 하는 영역은 편집이나 디자인 디렉팅 영역이지 작가의 메시지, 장면 구성, 캐릭터 설정에 대한 게 아니니까요. 서로 동의해 계약했다면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가요. 숟가락만 얹는다는 표현이 딱 맞죠. 그러니 기성 작가 분들도 그림책공작소로 편히 연락 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뚝딱뚝딱 우리책 시리즈를 주로 함께해온 강경수 작가님도 콘셉트를 세워서 작품을 마무리해 놓으면 거기서 작업을 끝내시는 스타일이에요. 그걸 더 발전시키거나 편집자와 논의해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하지 않죠. 하려는 이야기가 많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분이에요.

강경수 작가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보림에서 일할 때 작가님이 공모전에 투고를 하셨어요. 13~14년 전이니까 저는 편집팀 대리였고, 작가님은 그림책을 시작하고 거의 최초 더미를 내신 거예요. 작가님 작품은 본선 열 명 안에 들었지만 수상작은 아니었어요. 후보들의 작품은 보통 심사위원들이 한마디씩 코멘트를 해서 택배로 돌려보내 주는데, 작가님은 직접 찾아와 작품을 돌려받고 자기 작품의 부족한 점을 물으셨죠. 그런데 저는 진행 담당이었지 심사하는 입장은 아니었거든요. “글쎄요. 심사위원이 아니라서….” 하면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씀드렸어요. 이 부분에서 캐릭터가 애매했다, 결말 부분에서는 이게 나았을 것 같다고요. 그랬더니 뜻밖에 “아, 네. 제가 딱 고민하던 지점입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뭔가 통하는 데가 있다고 느끼셨나 봐요. 나중에 또 작품 얘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해서 명함을 드렸고 꾸준히 교류했어요. 심지어 보림에서 나올 책이 아닌 책들도 함께 의논했죠(웃음). 그중에는 라가치 상을 수상한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있었어요. 아쉽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긴 했지만 그 무렵부터 더 돈독한 인연이 됐어요. 처음 같이 작업한 책은 2014년에 출간한 그림책공작소의 두 번째 책,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을》이에요. 이후 서로 합이 잘 맞아서 《춤을 출 거예요》, 《나의 엄마》, 《나의 아버지》 등을 연이어 펴냈어요.

 

멋진 인연이에요. 다른 작가들과의 작업도 궁금한데요.

곧 유준재 작가님의 신간 《시저의 규칙》을 선보일 예정인데요. 최소 2~3년 기간에 걸쳐 책을 내는 작가님의 작품인데다 기존 스타일과 달리 서사적인 플롯에 회화성이 더 돋보여요. 작가님도 설레고 기대되겠지만, 강경수 작가님 외에 인지도 있는 기성 작가와 첫 작업이라 그림책공작소로서도 기대와 부담을 동시에 품고 있어요.

 

혹시 직접 작가가 되어 그림책을 쓰고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물론 있죠. 그 마음을 숨길 수는 없어요. 근데 저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걸 잘 구분하거든요. 여러 작가들과 작업하면서 속으로 ‘민찬기, 네가 해보면 되잖아.’ 하고 자문도 해봐요. 근데 안 돼요(웃음). 나중에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지금은 만드는 일만 하고 싶을 정도로 즐거움이 커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책을 만들고, 작가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이 너무 좋아요. 아주아주 나중에, 마치 편집자의 욕구가 쌓여서 발행인이 되고 싶었던 것처럼 못 참을 정도로 마음이 커지면 한번 시도는 해볼 것 같아요.

다시 얻은 삶에서

주변을 돌아보다

너무 전력을 다하고 계신 건 아닐까 걱정도 돼요. 가끔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딱 그런 생각이 들 때쯤에 사고가 났어요. 출판사를 차린 후 거의 4년 정도는 일주일에 3~4일은 기본적으로 밤을 샌 것 같아요. 정말 말 그대로 밤을 새웠어요. 그때 생활이 어땠냐하면, 아침 일곱 시에 퇴근해서 출근하는 아내와 교대를 해요. 일곱 시 반쯤에 아이를 깨워서 머리 땋아 주고 유치원복 입히고 밥 먹이고 양치 시킨 다음에 가방 싸서 아파트 뒤에 있는 유치원에 데려다줘요. 그리고 저는 다시 사무실로 출근해서 주문 출고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어요. 낮에 점심 먹으러 가는 대신 한두 시간 쪽잠을 자고 일을 했어요. 업무를 다 처리하고 진짜 책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여섯 시 이후부터여서 그 시간에 정말 충만하게 책을 만들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무모하게 살았어요. 졸음운전이 일상다반사였죠. 고속도로에서 200킬로미터로 달리다가 갑자기 셧다운되면서 사고가 났는데, 9일 만에 깨어났을 때 몸이 너무너무 아파서 소리 지른 기억만 나요. 그때 무려 5개월을 누워서 쉬었어요. 돌이켜보면 신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기회를 주신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그렇게 계속 살았으면 책상 위에 엎어져서 죽었을 수도 있는데, 평생 건강 지키고, 가족 좀 생각하라고요.

 

모두에게 상상 못 할 충격이었겠어요. 그렇게 큰 일을 겪고 건강을 회복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하셨죠.

최선을 다하는 건 똑같아요. 다만, 예전에는 내 만족감을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 가족, 그림책공작소를 운영하는 긍정적인 방향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최선을 다해요. 스스로 각성해서 지속 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무섭게 느끼고 나면 돈, 일, 명예, 사람 관계 모두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남는 건 건강과 가족 딱 두 개예요.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 중 다만 한 분이라도 ‘내 건강을 돌보고 있나? 우리 가족은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셨으면 해요. 만약 괜찮지 않다고 생각되면 조금이라도 바뀌려는 노력을 해보시면 좋겠어요. 

또 한 가지 변화는 기부 생활인데요. 지금 월드비전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있어요.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는 지점을 넘어서면 더 유의미한 곳에 돈을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책을 만들어야 하니까 저한테도 돈은 중요하죠. 하지만 잉여 자금으로 기부하기는 힘들어요. 일단 있는 돈을 먼저 기부하고 그다음에 책을 더 열심히 만들어서 팔고, 그래도 모자라면 은행에 가서 빌려 와야죠(웃음).

 

무척 좋은 방향으로 바뀐 것 같은데요(웃음).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야근을 안 한다는 거예요. 밤 아홉 시, 열 시까지 일하기에는 몸상태가 좋지 않기도 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 동안에만 책을 만들려고 해요. 그래서 자연스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예전엔 정말 나만 아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맞벌이를 하면서도 아내가 철저하게 희생했어요. 아이들도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빠와 같이 있는 시간, 나들이, 함께 보내는 주말을 다 포기했죠. 병원에서 그런 것들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가족들의 묵묵한 배려 덕분에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실 수 있었군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중심이 잡힐 때까지 아내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셨을 것 같아요.

아이를 돌보는 데 부부 간의 협의와 조율이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그게 참 어려웠어요. 아내는 코스메틱, 패션 업계에서 오래 일한 커리어우먼이에요. 처음에는 아내가 “오빠, 나는 내일 일이 있으니까 오빠가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해 줬음 좋겠어.” 하면 “내일 작가 미팅 있어서 절대 일찍 퇴근 못 해. 세상이 두 쪽 나도 못 해.”라고 말했어요. 그럼 다시 “나는 회사원이고 오빠는 스케줄 조절할 수 있잖아.” 하면서 서로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가사와 육아 분담 문제도 그렇고요. 아이를 키울 때 칭찬과 훈육의 역할분담도 필요하잖아요. 둘 다 혼내면 안 되니까 주로 아내가 악역을 맡고 저는 칭찬을 해줬어요. 첫째 성윤이는 너무 귀해서 어떻게 혼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오죽하면 어린이집을 3년 내내 안고 다녔겠어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졌어요.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서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요. 이달부터 아내가 퇴사를 결정하기도 했지만, 10년 동안 서로를 겪으면서 이 사람의 성향, 내 성향을 인지하니까 많은 얘기가 필요 없어졌어요. 그리고 ‘이거 해, 저거 해.’ 하면서 아이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오만한 발상을 다 없애기 시작했어요.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은 육아 방식이고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지침은 다 무의미한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가족의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거죠. 아이 성향을 반영하면서 조정해 갈 거고요.

 

가족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예요?

첫째는 남들한테 폐 끼치지 않는 거예요. 그러려면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저와 아내의 건강은 물론이고 아이들 건강도 케어해 줘야죠.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거예요. 근데 저희 가족처럼 큰일을 겪으면 말뿐이 아니라 몸에 나쁜 건 최대한 안 하려고 노력하고 실천해요. 아프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걸 실감했으니까요. 일요일이면 다 같이 나가서 의무적으로라도 상암동, 연남동 공원을 걸어요.

 

아이들과 사이가 무척 친밀해 보여요.

성윤이 유치원 다닐 때는 퇴근하고 집에 막 뛰어갔어요. 어머님이 아이를 봐주셨는데, 빨리 가려고 지하철에서도 뛸 정도였죠. 제일 빨리 내릴 수 있는 칸을 외워 다녔고요. 집에 오면 ”어머님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아이랑 책도 보고 아내랑 저녁 먹고 그랬어요. 성윤이 다섯 살 때까지 목욕을 제가 시켰는데요. 아기 씻기는 것처럼 눕혀서 안고 씻길 정도로 보석 다루듯이 했어요. 그런데 그림책공작소 차리고 나서는 거의 목숨 걸고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돈독하게 지내던 아이와도 멀어지게 되었어요. 퇴근하면 늘 자는 모습만 보고, 저녁을 같이 먹은 적이 1년에 몇 번 안 되는 때도 있었어요.

 

서먹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어요?

제가 보답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책을 만들고 처음으로 갖다주면서 “성윤아, 아빠가 이번에 새로 만든 책이야. 전국에서 네가 제일 먼저 읽어.”라는 말 한마디 하는 거요. 내가 만든 책을 제일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보여주고, 첫 독자라는 기쁨을 함께 준다는 게 되게 큰 기쁨이었어요. 전에는 좀 과하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줬다면 지금은 양방향 애정이 오가는 것 같아요.

첫 독자라니 부럽네요. 책을 받고 성윤이는 뭐라고 하나요?

예전에는 갖다주는 제가 더 신나서 책을 읽어줬다면 성윤이가 열 살이 된 지금은 직접 책을 읽고 의견을 많이 내줘요. 그림책공작소 책이 20권이 넘어간 즈음부터는 출간된 책이 아니라 교정지 상태로 들고 가서 보여주고 있어요. “성윤아, 이번에 만들 거야. 어때?” 하면서요. 《노란공》도 성윤이의 도움을 받았어요. 남자아이 루이스의 대사 중에 “루이사, 네가 좀 더 날씬하면 여기 들어오기 쉽겠지만···”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한국어판에서는 그 대사를 찾아볼 수 없죠. 의도적으로 오역했거든요. 만약 제가 원서대로 옮기면 루이스만한 아이들은 주변에 있는 루이사 같은 여자아이들을 함부로 놀릴 것 같았어요. 남녀에 대한 구별을 전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 한참을 고민하다 성윤이를 보여줬어요. 아무 힌트도 안 줬는데 딱 그 지점에서 “아빠, 근데 여자애들은 다 날씬해야 돼?”라고 하더라고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바뀐 내용이 “머리가 조금 더 작았다면”이에요. 그림상으로 둘 다 머리가 크거든요. 성윤이는 어느새 저와 상호 작용하는 조력자이자 동료가 되었어요. 

 

보통은 엄마들이 그림책에 관심이 많잖아요. 아빠가 그림책 읽어주는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돼요.

예전에도 그림책 만드는 일을 했으니까 집에 그림책이 워낙 많아요. 교육용으로 아주 유용했죠. 제가 보고 좋다고 여기는 책들을 읽어주는 게 그냥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한 메시지를 주니까 좋더라고요. 친구와 싸웠을 때, 편식할 때, 밤에 잠 안 잘 때 읽어주는 책이 다 달라요. 둘째는 아직 어려서 책 읽어주는 것 말고 뭔가 흉내내면서 놀아주는 것도 좋아해요. 아이의 주문에 맞춰 하루 종일 공룡, 타조, 포크레인으로 변신해야 하죠. 그러다 자기 전에 “엄마랑 잘래, 아빠랑 잘래?” 물어보면 “아빠랑 잘 거야!” 하는데, 제가 포크레인에서 아빠가 되는 순간이 그때예요(웃음). 잘 때 아이가 얼굴 부비고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아주 행복해요.

 

첫째 성윤이는 얌전하고 의젓해 보이고 둘째 경환이는 무척 활발해 보여요.

맞아요. 경환이의 발랄함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요. 예쁘기도 하지만 첫째 아이를 키울 때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혼을 내다가도 애교 한번 부리면 웃음이 나더라고요. 성격도 성격이지만 태생적으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가 엄청난 것 같아요. 성윤이는 안으면 포근한데 둘째는 안으면 엄청 뻗대요. 아내가 버거워할 정도로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성장 속도도 달라요. 큰애는 지금 많이 자라기도 해서 자율권을 주는 편이고, 둘째한테는 억압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들은 지적하는 편이에요. “여기서 뛰면 안 돼. 여기는 미끄러우니까 엄마 아빠를 불러.” 하고요. 아이는 아직 ‘돼’, ‘안 돼’를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른의 케어가 필요한 거고요. 안 되는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선의 육아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안 넘어지게 억지로 막는 것보단 고무 깔판을 사서 깔아놓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아이들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뭐예요?

간단하게 말하면 상호 존중이요. 제가 지금 에디터님을 대면하면서 사회인으로 상호 존중하는 거 훨씬 이상으로요. 아이를 훈육의 대상, 컨트롤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는 순간 행복은 깨져요. 아내와도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생기는 순간 육아 방침이 흔들리기 때문에 충분히 대화를 나눠요. 그렇다고 아이들한테 “우리는 상호 존중을 해야 돼.”라고 얘기할 순 없으니 그 말 대신에 “엄마랑 아빠가 너희들 친구는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해요. 큰애는 점점 친구들하고 쓰는 말투를 엄마, 아빠한테 하거든요. ‘헐, 대박, 찐’ 이런 말이나 비속어를 사용하면 “그런 말은 되도록 쓰지 마. 엄마 아빠는 그럴 땐 이런 말을 써. 너희들을 사랑하고 너희들과 친구처럼 지내지만 친구는 아니야.”라고 얘기해요. 존중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암시하려고 해요.

상호 존중이란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거예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요. 아이들이 아침마다 입고 싶은 옷을 스스로 고르게 하고 뭐 먹을지도 선택권을 줘요. “토스트 먹을까, 달걀 프라이 비빔밥 먹을까, 오레오 먹을까?” 이런 거죠. 애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탕수육을 찾지는 않으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간식 사거나 쇼핑할 때도 먹고 싶은 걸 두 개씩 고르라고 한 다음 계산할 때까지 손에 쥐고 있다가 계산대에 직접 올려놓으라고 해요. 이렇게 일상생활에 자율권을 적용하는 건 아내에게 많이 배웠어요. 자존감 높고 타인을 배려하는 아내의 좋은 면들을 아이들이 배웠으면 해요. 저는 어찌 보면 깐깐하고 편협한 시선도 있고, 또 이기적인 면도 있는데 아내는 여러모로 저보다 훨씬 더 넓은 사람이에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나요?

자율적인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어요. 삶의 주도권을 갖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사람이요. 자율성이라는 게 적정선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호 존중을 하면서도 예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짚어주는 편이에요. 돈, 명예, 좋은 직업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짜 그런 삶을 산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그림책공작소의 미래도 궁금해지네요.

그림책공작소의 처음 모토는 그림책만으로 망하지 않는 출판사가 되자는 거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대형 출판사에서 파생된 레이블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림책으로 직구만 던져서 100권, 200권까지 내고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마음이 있었죠. 그런데 30여 권을 낸 지금 업무적으로 한계를 느껴요. 책 만드는 즐거움은 놓칠 수 없는데 그 외의 업무가 너무 많아졌어요. 더 하다가는 책의 퀄리티에 엄청난 차질이 생길 것 같아요. 저는 요즘 노선을 고민하고 있어요. 혼자 만든 책으로 독자들과 일 보 일 보 나아가는 만족감만으로 계속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지금도 업계의 핵심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기성 출판사들의 자금력과 기획력에 눌려서 주변부로 밀려나기는 절대 싫거든요. 그들에게 잽일지언정 타격을 주고 싶어요. 그림책공작소의 첫 걸음이 ‘수퍼 라이트 플라이급’이었다면 종수가 30권 정도 되는 지금은 ‘수퍼’ 자를 뺀 ‘라이트 플라이급’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50권 정도면 미들급이 되고 싶겠죠. 그러려면 책의 유의미함, 메시지, 독자층의 확장성도 그 급에 맞춰져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 누군가에게 책임과 권한을 믿고 맡기면서 나는 나대로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 할까, 그게 바람직한 출판사의 노선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어떤 의미로 책임도 느끼고 계신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블로그를 하나하나 봐주시고 ‘좋아요’를 눌러주시는 모든 분들께 너무나 감사해요. 편집자만의 만족을 넘어서는 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되어가고 있어요. 한 번 크게 엎어진 사람으로서 느낀 반성과 후회, 책을 만드는 기쁨은 5년, 1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올해 전국의 동네 책방에 띠지를 만들어 보냈어요. ‘나에게 책이란?’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받은 답변과 책방 로고로 디자인해서 그림책공작소가 아니라 책방 홍보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죠. 책방에 안내할 때 그런 얘길 했어요. 망할 때까지만 하겠다고. 당신들도 꼭 망하지 말고 내년에 또 보자고요. 그리고 SNS에 그 과정을 올렸죠. 대형 출판사에 메시지를 주고 싶었거든요. 그들은 자본과 능력이 있으니 동네 책방과 진정한 유대를 맺고 응원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우리는 출판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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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gram.com/wellmadepicturebooks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추천하는 그림책

모르는 척
글·그림 우메다 순사쿠·요시코 | 옮김 송영숙 | 길벗어린이

“먹 1도에 페이지가 많은 그림책이에요. 돈짱이라는 아이가 야라가세 패거리라는 불량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요. 전학 온 날인가 재채기를 했는데 침이 야라가세 쪽으로 좀 튀어서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해요. 특이하게 책의 화자는 돈짱도 아니고 야라가세도 아니고 그걸 목격한 다른 친구예요. 어느 순간부터 목격자였던 이 아이는 야라가세 패거리에게 대거리하기 시작해요. 연초에 n번방이라는 이슈가 있었잖아요. 저는 그들 모두 방관자라고 생각해요. 나쁜 짓은 막고, 좋은 일은 나눠야 하고, 막지 못해서 일어난 나쁜 일에 대해선 적어도 방관하진 말아야 하잖아요. ‘비겁하지 말자. 나한테도, 남들에게도.’ 다짐하는 의미에서 추천하고 싶어요.”

나는 지하철입니다
글·그림 김효은 | 문학동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보았으면 하는 책이에요. 볼 때마다 너무 예쁘고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하철이 1인칭 화자가 되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평범한 우리들을 돌아보게 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보듬어 주죠. 깜깜한 밤에 혼자 읽으면 눈물이 날 정도에요. 각기 다른 사람들을 가득 싣고 달리는 지하철을 꼭 만나보셨으면 해요.”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