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Our Own Time

작가 이연진

‘내가 신인류를 낳았다!’ 겁 많고 내향적인 엄마와 거침없고 호기심 많은 아들이 만나 11년을 함께 보냈다. 그동안 엄마는 아이의 밀도 높은 재능과 호기심을 묵묵히 지지했고, 아이는 엄마의 지지를 받으며 착실히 성장해 나갔다. 그렇다면 그 시간은 오로지 아이만을 위한 것일까? 이연진 작가는 단호히 아니라고 답한다. 엄마의 시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고 또 말한다.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

“남들과 다를 순 있지만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저처럼 조용한 엄마들, 겁 많고 정 많아 변화의 시기를 그저 가만가만 보내는 분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엄마인 당신도 좋다고, 아름답게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요.”

《내향 육아》에 이어 최근 《취향 육아》를 출간하셨어요. 두 번째 책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나요? 

첫 책 《내향 육아》는 아이뿐 아니라 제 삶에도 단 한 번뿐인 이 소중한 시간을 좀더 용감하게, 온전한 내 인생으로 살아내기로 결심한 후 길을 찾아간 과정을 엮은 책인데요. 출간 후 엄마로서 제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알았어요. SNS에서 오랫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도 한결같은 취향을 가지고 육아하는 삶에 대해 궁금해하셨고요. 요즘 취향이 중요한 키워드잖아요. 다들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왜 육아에는 적용이 안 되는지 의아했어요. 물론 저도 아이를 키우며 육아라는 영역에는 부모의 취향은 커녕 기질조차 들어올 틈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지만, 그래도 ‘심미적 취향 생활자’로서 육아하는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었어요. 

 

두 권을 합치면 ‘내향적인 엄마가 취향을 품고 아이와 함께 커나가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저는 한창 ‘엄마로만 살지 않겠습니다!’라는 목소리가 커지던 시기에 전업주부가 되었는데요. 다들 발 벗고 뛰어나갈 때 남겨졌다는 자괴감이 엄청났어요. ‘그럼 아이만 키우는 사람들의 삶은 뭐지? 나는 가치가 없나?’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죠. ‘헬육아’라는 말도 정말 싫었어요. 육아에 부정적인 프레임을 덮어씌우는 게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내 삶의 한 자락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을 희생하는 시간, 참고 감내하는 시간이라고만 얘기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어느 순간 지금을 잘 꾸려보자는 오기가 생긴 것 같아요. 엄마로‘도’ 잘 살아보자고요. 저는 그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삶에도 나름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으니 그리 나쁘지 않고, 잠깐 머물러 있는 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성장일 수 있어요. 그건 나중에 봐야 알잖아요. 남들과 다를 순 있지만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저처럼 조용한 엄마들, 겁 많고 정 많아 변화의 시기를 그저 가만가만 보내는 분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엄마인 당신도 좋다고, 아름답게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요.

 

책에 줄곧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나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같은 문인들이 언급되는데, 문학을 좋아하셨던 거죠?

맞아요. 학교 다닐 때부터 문학 작품이나 예술가의 전기, 비평론 같은 걸 주로 읽었어요. 초등학교 이후로는 드라마도 본 적이 없고 친구들이 H.O.T.나 젝스키스 좋아할 때도 잘 몰랐죠.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가 있었던 게 신기해요(웃음). 랭보는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는데요. 대학 시절에 전국의 도서관을 다니면서 국내에 출간된 모든 책을 다 읽고 신문기사, 잡지,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자료들도 다 봤어요. 랭보뿐 아니라 몇몇 작가들의 연대기는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예요. 친구들이 스펙을 쌓거나 놀러 다닐 때도 저는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어요. 수업 빠지고 연극 보러 다니고 미술관 가고요. 휴대폰도 잘 안 들고 다녔는데 늘 도서관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친구들이 알아서 잘 찾아내더라고요(웃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열성적이었네요. 왜 그렇게까지 깊게 몰입한 것 같아요?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이유가 없어요. 다만 즐거운 건 있어요. 랭보를 좋아했을 뿐인데 주변의 프랑스 후기 시인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서 나아가다 보면 여러 갈래로 가지치기가 돼요. 몰입하면서 확장하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리면 빠져들었다가 확장하는 사이클이 생기는데 그게 정말 즐거워요. 

 

그렇게 좋아했는데 직업으로 이어가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소심하고 겁도 많은 편이라서 대학 진학할 때부터 부모님 말씀에 따르거나 현실에 타협하곤 했어요. 고등학교 때, 어떤 대학이어도 상관없으니 불문학과 영문학을 배우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부모님께서는 제게 안정된 직업을 권유하시며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사범대로 진학해 영어교육과 불어 교육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대학 가서는 또 어떤 직업을 가져도 상관없으니 문학 분야에 발만 걸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졸업하고 프랑스로 가서 문학과 미술사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저를 너무 걱정하셔서 포기했어요. 저 역시 겁이 났고요. 이번에도 안전하게 대기업에 입사해 마케팅실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20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내 꿈과 맞바꾼 삶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만 돌봤기 때문에 새로운 걸 시도하기도 어렵다 보니 꿈을 향한 에너지를 그리워하는 데만 썼던 것 같아요. 

 

계속 안전한 길을 선택하면서도 꿈을 쥐고 있었던 덕분에 지금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거 아닐까요?

뭔가가 너무 그립고 아쉽고 미련이 남으면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오히려 응축되어 있다가 폭발하는 힘이 더 강해져요. 짬짬이 책을 들여다보게 되고 인터넷에 한 번이라도 더 검색해 보게 돼요. 이번에 신간을 내면서 엄마들에게 과거의 취향을 묻고 이야기 나누는 이벤트를 진행했는데요. 상상도 못한 답이 많이 나왔어요. 스킨스쿠버, 암벽 등반, 밴드 보컬, 뜨개 공예, 상담사…. 그리움에 막 울었다는 분들도, 이렇게 물어봐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런 애틋한 모습을 보면서 물론 아쉽고 힘들겠지만 잠깐 그렇게 두시라고, 그거 안 없어지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더라고요. 저도 문학이랑 예술사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제 마음도 같이 뭉클해지네요. 혹시 너무 확고한 취향 때문에 시야가 좁아진다는 걱정은 해본 적 없어요?

너무 제 세상만 편애했던 것 같아요. 깊이 들어간다는 건 알았는데 좁아진다는 건 의식조차 못 하고 파고들기만 한 거죠. 근데 윤하 덕분에 알게 됐어요. ‘내가 좁았구나.’ 아이가 갖고 오는 세상이 그동안 알던 세상이랑 완전히 달라요. 새로운 문을 열어준 거죠. 윤하가 과학을 좋아하는데, 과학, 기계 원리, 그런 거 제가 생각이나 해봤겠어요(웃음)?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공을 던지면 왜 항상 아래로 떨어지는지, 차를 밀면 왜 계속 가다가 멈추는지 세 살, 네 살 때부터 계속 물으니, 호기심이 생겼어요. 분명 나도 교과서에서 배우고 시험도 봤고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데 왜 몰랐지, 하면서 같이 공부하니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과학은 제가 알던 예술의 세계랑은 다른 아름다움이 있어요. 정연하고 깔끔해요.

 

한 인터뷰에서 ‘취향’을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의 나’와 ‘엄마인 나’ 사이에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개연성’이라고 표현했어요. 반면 책에서는 “초보 엄마가 육아서 아닌 시집에 밑줄을 긋는 건 얼마나 나태하고 사치스러운 일인가” 고민하셨다고 했고요. 

구두 신고 시집을 들고 다니던 제가 아이 낳고는 후줄근한 차림으로 허둥지둥 밥 하나 제대로 못 차렸어요. 두 가지 ‘나’ 사이에 골이 너무 깊어서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어떤 분들은 육아하면서 활동적으로 변하고 더 멋있어지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때까지 애써서 만들어놓은 나, ‘~일 수도 있었던 나’, ‘~가 되고 싶었던 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나’가 엄마인 나보다 소중하지는 않다는 것도 금세 깨달았죠. 지금 제가 엄마라서 윤하가, 하나의 독특하고 고유한 세계가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거잖아요.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것보다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면서부터 그렇게 붙잡고 못 놓았던 것들이 스르르 놓아졌어요.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나요?

네. 육아하는 순간순간, 시구절이나 예술가의 일화 같은 것들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었어요. 이유식 냄비 젓다가, 아이안고 재우다가, 육아서 읽다가, 너무 힘들어서 울다가…. 억지로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불현듯 찾아왔어요. 그것들을 하나둘씩 모았더니 이제는 선명해질 건 선명해졌고 잊힐 건 자연스럽게 잊혔어요. 이렇게 끝까지 남은 것들이 진짜 내 취향이구나 싶어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서

“돌아보면 단지 아이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때는 아이를 위해서 모성애로 한다고 생각했고, 이게 곧 희생이라는 억울함이 있었거든요. 저도 고집이 세고 저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윤하의 호기심을 채워주려고 노력한 날들 덕분에 다듬어지고 너그러워진 것 같아요.”

윤하가 다섯 살 때 <영재 발굴단>에 ‘꼬마 과학자’로 출연했었죠. 어릴 때부터 과학에 호기심과 재능을 보였다고 했는데, 아이가 남다르다는 걸 감지하고 처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해요.

윤하는 기어 다닐 때부터 리모컨 만지는 걸 좋아했어요. 종일 버튼을 누르고 건전지를 뺐다 꼈다 했죠. 더 커서는 선풍기를 분해하기 시작했는데, 아파트 단지에 버려진 선풍기들을 집에 가져가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동네 어르신들이 다 달라붙어서 말린 적도 여러 번이에요. 결국 못 말리셨지만요(웃음). 제가 낳았는데도 참 신기했어요. ‘나 같은 사람한테서 어떻게 이런 애가 나왔지? 내가 신인류를 낳았네.’ 하고요. 신기하고 궁금해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요. 윤하가 어떻게 커 갈지 흥미로웠어요.

 

아이가 영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모로서 뿌듯하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웠을 것 같기도 해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재능이 있다면 더더욱요. 

저도 그랬어요. 윤하가 어려서부터 과학이나 숫자, 기계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잘 모르는 건 인터넷을 찾아보거나 남편에게 물어서 알려줬어요. 그런데 궁금증이 확장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더라고요. 어설픈 대답으로 아이를 헷갈리게 하느니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라고 다 알 수는 없잖아요. 가장하기도 싫었고요. 그래서 윤하가 한 질문을 되물으며 답을 찾아가거나 책을 찾아 읽어주고, 질문을 따로 노트에 정리해 보면서 제 방식대로 해결해 나갔어요. 제가 아이의 관심 분야에 박식한 사람이었다면, 아이보다 더 많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는데요. 음… 너는 왜 나만큼 못 하냐며 다그쳤을지도 몰라요. 아이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보다 아이가 뭘 물어도 자존심 상하거나 부끄럽지 않은 사람, 천천히 같이 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기서도 작가님만의 방법을 찾은 거네요. 그런 마음을 품고 윤하가 학교에 가기 전까지 집육아를 해오셨다고요. 

바깥 활동 자체가 즐겁기보다는 지치고, 너무 많은 정보와 타인의 감정이 들어오는 게 힘들어서 집에서 활동하는 편이 잘 맞았어요. 윤하도 엄마랑 뭔가를 오랫동안 하면서 놀고 싶은데, 나가면 엄마가 자기를 두고 자꾸 어디를 가니까 싫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 우리 둘이 여기 있자.’ 하고 어느 순간부터 콕 박혀서 살게 됐어요. 육아 초반에 서울의 ‘교육 특구’로 유명한 동네에 살다가 이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요. 여기도 서울 근교이긴 하지만 예전 동네에 비하면 정말 외진 곳이에요. 버스나 택시도 잘 안 다녀서 오는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어요. 그런데 오히려 너무 편하고 좋았어요. 쫓기는 게 없으니 맨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 먹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간 동안 아이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면서 자기의 방향을 찾고 저는 또 지치지 않을 나름의 지점을 찾았어요.

 

함께 있는 시간의 밀도가 높을수록 인내심과 이해심이 더 필요했을 것 같아요.

물론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게 너무 무료하고 힘들었지만, 애들한테는 어른한테 없는 눈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니 참 사랑스럽더라고요. 우리도 모두 그랬을 텐데 어느 순간 다 놓쳐버린 거잖아요. 그걸 좀더 오랫동안 지속시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윤하가 선풍기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하루는 남의 아파트 단지 쓰레기통을 다 돌아서 선풍기를 찾고, 이고 지고 버스를 탄 적이 있어요. 너무 더운 날 걸어서 언덕을 올라오는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게 흘렀어요. 막 울면서 올라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돌아보면 단지 아이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때는 아이를 위해서 모성애로 한다고 생각했고, 이게 곧 희생이라는 억울함이 있었거든요. 저도 고집이 세고 저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윤하의 호기심을 채워주려고 노력한 날들 덕분에 많이 다듬어지고 너그러워진 것 같아요.

기관에 보내지 않은 게 걱정되지는 않았어요?


걱정됐죠. 보통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사회성을 배우고 키운다고 하잖아요. 다른 아이들이 겪는 과정을 다 놓치고 있다는 두려움과 조급함은 있었는데, 항상 잊지 않으려고 했던 건 아이가 자기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거였어요. 주변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데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는데, 생각지 못한 좋은 습관과 가치관도 생기더라고요. 

 

어떤 습관이요?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움직이게 됐어요. 윤하는 시간을 쪼개지 않고 뭉텅이로 쓰는 편이에요. 집에만 있을 땐 뭐 하나를 해도 길게 할 수 있잖아요. 선풍기 하나를 두 시간, 세 시간 뜯어보고, 책 한 권을 쉬지 않고 쭉 읽고, 놀이터에서도 제일 오래 놀았어요. 아침 아홉 시쯤 다른 아이들이 유치원 갈 때 나가서 하원하고 학원 갔다 올 때까지요. 지금도 숙제를 먼저 해놓은 다음에 두 시간 동안 컴퓨터를 분해하면서 놀아요. 몰입해서 뭔가를 해보고 시간을 길게 써본 경험이 많이 쌓여서 뭔가 할 때 쑥 빠져들었다가 또 쉽게 쏙 빠져나와요. 시간을 운용할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열한 살이면 벌써 초등학교에 다닌 지 4년이 되었네요. 적응은 잘 했는지 궁금해요.

괜히 걱정했다 싶을 정도로 잘 다녀요. 유치원은 한번 보냈다가 한 달도 못 가서 그만뒀었거든요. 매일 붙어 있다가 갑자기 새로운 환경에 놓이니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제는 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정말 씩씩하게, 물 흐르듯 가서 잘 지내고 있어요. 최근에는 윤하가 학교에 도움이 되는 아이를 뽑는 투표에서 표를 많이 받아왔는데요.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친구들이 컴퓨터 할 때 모르는 거 있으면 다 가르쳐주고, 옆 반 선생님들도 윤하한테 가져오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주변에 도움을 주고, 그걸 또 반겨주시고 찾아주시니까 참 뿌듯하고 감사했어요.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네요. 작가님과 윤하의 관계, 또 윤하의 정서적인 면은 어떻게 신경 쓰고 있나요?

엄마가 끌고 갈 수 있는 아이가 있고 끌고 갈 수 없는 아이가 있는데, 저와 윤하의 관계는 후자예요. 제 성격상 윤하에게 강력한 리더나 코치가 될 수는 없더라고요. 윤하는 늘 에너지가 넘치고 자기 주관도 저보다 훨씬 강해요. 그래서 강력하게 지도하고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기보다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찾아가는 환경 설계자가 되기로 했어요. 아이가 책 읽고 마음껏 뛰어놀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신경을 많이 썼죠. 편지나 쪽지도 많이 써줬어요. 한창 한글 읽기 시작할 때는 밤마다 자기 전에 써두곤 했어요. 최근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게 좀 아까운 마음이 들길래 ‘같이 있었으면 우리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내용을 편지에 담았는데, 생각지 못하게 윤하가 펑펑 울었어요. 덕분에 저도 울었고요(웃음). 윤하가 글을 보고 느끼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문학작품을 별로 안 좋아해서 늘 아쉬움이 있었어거든요. 이렇게라도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요즘은 사춘기가 빨리 온다던데, 윤하는 아직인가 봐요.

왜요. 엄마 말고 친구들이랑만 얘기하는 날이 오겠죠. 윤하랑 간식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데, 크면서 주관을 점점 또렷하게 드러내요. 선호하는 게 있으면 절대 굽히지 않고요. 둘이 언성 높이는 시기가 슬슬 시작되고 있어요. 평소에는 목소리가 커지는 일이 거의 없는데 최근에 코로나19 때문에 종일 붙어 있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혼내고 나서 괜찮냐고 물어보면 윤하는 의외로 담담해요. 한 번은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냐고 물어봤더니 엄마, 아빠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엄마, 아빠 곁에 있을 때 자기가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알아서 괜찮다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보면 많이 큰 것 같은데 여전히 자기 전에 책 읽어 달라고 하고, 와서 손잡고 “엄마 사랑해.” 하면서 자는 걸 보면 아직 어린애 맞는 것 같아요(웃음).

 

요즘 윤하의 관심사는 뭐예요? 

컴퓨터에 푹 빠졌어요. 윤하 외할머니네 집에 오래된 노트북이 몇 개 있는데요. 몇 년 전에 한번 켜보더니 너무 좋아해서 갖고 놀라고 다 줬어요. 그랬더니 코로나19 기간 동안 하루 종일 노트북 몇 대를 놓고 부팅해보 고 하나하나 비교해 보더라고요. 그게 놀이래요.

 

컴퓨터 학원도 보내고 있어요? 조금씩 앞날을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컴퓨터는 저랑 남편 둘 다 잘 몰라서 동네 학원에 가서 문의를 드렸어요. 연세가 좀 있으신 할아버지 선생님이 윤하랑 오래 대화를 나누시더니 이렇게 혼자 책 보면서 직접 뜯어보고 붙여보고 즐기는 아이를 어떻게 더 잘 가르칠 수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모르는 게 있으니 가르쳐 달라고 말씀드리면서 앞으로 어떤 자격증이나 대회를 준비하면 좋을지 여쭈어봤어요. 그랬더니 준비하지 말라고,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게 두라고 하셨어요. 그 조언이 크게 다가왔어요. 최근까지 저도 흔들렸거든요. 이 여세를 몰아서 관련 대회도 나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발을 들이는 순간 애써 벗어났던 경주가 또 시작될 게 뻔한 거죠. 아이는 분명 씩씩하게 잘 해낼 테지만 이제는 제가 자신이 없어요. 관련 대회가 열리면 오히려 윤하에게 숨기는 중이에요. 영재원도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안 보냈고요.

 

윤하 생각도 궁금해요. 뭔가 더 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하죠. 얼마 전에도 나가보고 싶은 대회가 있다고 했는데…모르겠어요. 어려서부터 경쟁하는 구조에 넣고 싶지가 않아서 아직은 조금 망설여져요. 윤하는 뭐든지 책으로 먼저 접한 후에 실물을 대하고 탐구를 시작하는데, 지금처럼 그저 즐겁게 몰입하고 놀이로 느꼈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속도가 좋아서 당분간은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이도 저도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살아보겠어요.

 

남편분과도 윤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 나누셨을 것 같은데요.

다행히 남편도 영재 교육에 미련이나 욕심이 없어요. 아이가 건강하고 편안하게 크는 게 가장 큰 관심사예요. 남편은 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윤하가 길을 찾게 도와줘요. 뭘 물어보면 한 번에 답을 안 주고 윤하가 스스로 답을 낼 때까지 며칠이고 몇 달이고 기다려요. 그러다 잊히는 질문들도 많은데, 옆에서 저는 그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냥 알려주면 좋을 텐데, 하고요. 그런데 그중에 몇 개가 답이 돼서 돌아오는 거 보면, 아이 안에서 그 문제가 충분히 익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이 참 귀해요. 단기간에 배우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배움이 되거든요. 남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내비게이션으로 찍고 가면 누구나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없거나 고장 나면 어쩌냐. 그때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진짜인 거다.’ 자기가 직접 더듬대고 가본 길은 한 번만 가도 기억에 남잖아요. 그런 방식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어요. 저도 동감했고요. 다만 아이한테는 쉽지 않은 일이고 부모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니까 온 가족이 함께 즐겁게 해보려고 해요. 셋이 뭉쳐서 뭘 하든 같이, 조금씩 조금씩이요.

Kids Said

스스로 찾아가는 꿈 | 황윤하 11세

요즘 뭐가 제일 재미있어요?

컴퓨터요. 오래된 노트북을 모으고 있어요. 몇 년 전에 외할머니 댁에 갔는데 노트북이 쌓여 있었어요. 제가 딱 컴퓨터를 좋아하기 시작한 때여서 집으로 가져왔어요.


이 노트북들로 뭘 하고 있어요?

노트북에 윈도우98, 윈도우XP 같이 옛날에 쓰던 OS가 깔려 있는데 요즘 거랑 뭐가 다른지 알고 싶어요. 하나씩 부팅해 보고 프로그램도 열어 보고 있어요.


노트북 연구하면서 알아냈거나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옛날에는 보조 프로그램으로 들어가면 지뢰찾기 같은 게임이 있었는데 윈도우7 이후로 없어졌어요. 해보고 싶은 건 새 컴퓨터랑 이 컴퓨터랑 부품을 바꿔보는 거예요. 새거 끼우면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헌거를 끼우면 얼마나 안 좋아지는지, 컴퓨터가 아예 먹통이 되는지 궁금해요. 근데 새 부품을 낡은 노트북에 끼우면 먹통이 될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에요. 왜냐하면 메인보드가 필요한 전기를 다 못 줄 것 같거든요. 


커서 하고 싶은 일도 노트북이랑 관련이 있나요?

사이버 수사대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컴퓨터를 잘하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사이버 수사대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는 뭐예요?

사람들이 해킹이나 바이러스 같은 범죄 때문에 피해를 봤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사람들을 도와줄 때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요.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