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Still Here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59

나는 종로에서 자랐다. 영천시장 떡볶이를 먹고, 교보문고 카펫에 앉아 책을 읽고, 낙원상가에서 기타를 사고, 바이닐 레코드에 꽂혔을 땐 세운상가를 돌며 빈티지 리시버를 찾아다녔다. 서대문을 지나 광화문을 지나 종로 1, 2, 3, 4. 오랜만에 마주한 광장은 거대한 혀 같아서 상가 입구로 들어설 땐 삼켜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기저기로 난 계단을 올라 좁은 통로를 걸으면 작은 방들이 끝없이 있다. 낡은 작업대 위에 빽빽한 부품 서랍과 낯선 도구들. 바삐 움직이는 손을 빼고 모든 것이 가만한 이곳은 뭐든 하나 이상 ‘제대로’ 하는 이들의 세계다.

세상의 기운이

모여서


방문을 두드려 만난 어른은 모두 저마다의 세운을 얘기했다. 그중 한 어른은 세운상가가 세워지기 전, 청계천 인근이 판잣집과 노점상으로 바글바글하던 때를 얘기했다. 그는 50년이 넘도록 세운에서 수리를 한 기술자다.

전쟁 후 고향을 잃고 서울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종로의 큰 공터에서 엉성하게나마 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건물 하나 없이 비워져 있던 땅은 금세 판자촌이 됐다. 굶주린 이들은 생계를 위한 장사라면 뭐든 했고, 그러니 그때의 종로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동네이자 구하면 안 될 것도 구해지는 동네였다. 서울은 곧 도시 한복판에 벌어진 무허가 거주지와 노점상들을 정돈할 계획을 세웠다. 만들고 고치는 기술을 가진 이들은 상가로, 집이 필요한 이들은 아파트로. 그렇게 지어진 주상복합단지가 바로 세운世運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세운의 황금기 시절 이야기도 들었다. 상가에서 3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품 상점 사장님의 얘기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나 들어본 말, ‘기술의 발전’으로 세운에는 새바람이 불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가전은 물론이고 오락실 게임기와 노래방 반주 기계가 모두 세운에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새벽마다 세운으로 모였다. 먼저 가야 임자가 될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부품이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청계천 일대에서 노래방 사업을 하는 형님들은 아침부터 조직원한테 돈가방을 들려 보내 가게 앞에 종일 앉혀 뒀다. 사장님은 태연하게 가게에서 제 몫의 물건을 기다리던 험상궂은 남자를 묘사했다.검색도 예약도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발로 뛰었다. 좋은 물건을 사려면 상가를 헤매며 비교하고, 물건을 만들려고 매일 기술자의 방에 찾아가 묻고 얘기를 나눈 것이다. 부지런히 걷고 떠들고 만지다 보면 어느새 손님 역시 세운의 사람이 된다. 사장님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기술자는 그의 오랜 단골손님이었다. 전자 회사에서 조립하는 일을 하며 세운상가에 드나들던 그는 부도가 난 후에 이곳에 들어왔다.

찬란한 시절이 가고 위기가 닥친 건 20세기 말부터다. 컴퓨터 상점들이 용산으로 떠나고 온라인 쇼핑이 활발해지면서 세운상가를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다. 빈틈을 본 재개발 계획에 맞서다 세운단지 중 하나인 현대상가를 잃기도 했다.

세대의 기운을

모아서

 

앉을 곳을 찾아 세운테크북라운지에 들어섰다. 화사한 청록색 소파를 둔 공간은 상가 내부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지나오며 본 3층의 여느 가게들도 그랬다. 오래된 것을 동경하며 만든 게 분명하지만, 새것만이 가지는 생생한 기운이 도는 것. 상가에 젊음이 스민다.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철거하는 대신 다시 살리기로 했다. 이럴 때 고쳐 쓴다는 말을 해도 될까. 새로운 걸 만들려면 어디에 쓸지를 고민해봐야 하고, 고치려면 뭐가 고장 난 건지 들여다봐야 한다. 서울시는 고민하고 들여다볼 사람을 모아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래된 상가에는 새 통로와 방이 생겼다. 젊은 창작자와 스타트업이 들어올 세운메이커스큐브를 마련하고 마켓, 워크숍, 공모전을 열어 기술자들이 경쟁하고 소통하는 길을 열었다.

상가 사람들은 이제 서로에게 길을 배운다. 세운상가를 ‘없는 게 없고, 뭐든지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 건 지난 시절의 고수들뿐이다. 상가를 찾아온 이 중 반절은 허탈하게 돌아간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른들은 젊은이에게 길 찾는 법을 알려준다. 자세히 계획하고, 필수와 옵션을 구분하고, 나를 찾아올 것. 준비가 된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어떤 사람과 공장을 찾아가야 하는지를 척척 알려줄 테니. 반대로 어른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길에 대해 듣는다. 기술과 예술의 모호한 영역에서 태어나는 문화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에 관해서. 이렇게 세대와 세대, 자원과 시장 사이로 정보는 끝없이 흐른다. 세운이 꿈꾸는 ‘메이커 시티’다.

기술자와 기술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일을 나누고 또 함께하는 것. 상가의 모두가 아는 기술의 법칙이다. 오랜 시간 상가를 지킨 이들과 상가에 새 둥지를 찾은 이들이 만났다.

세운공장협동조합 | 차광수 이준용 윤세원 이동엽 이선문

조합실 간판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첫 제품이 나왔다. 간단히 조립해서 쓰는 무드 조명 ‘폴디라이트’는 부품부터 패키지 스티커까지 상가와 인근 공장에서 만들었다. 제조의 모든 요소가 모여 있는 세운의 강점을 고스란히 담아낸 프로젝트다.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전문가예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뭉치면 못 만드는 게 없죠. 공장이나 다름없거든요.” 그들이 만들고 싶은 건 보편적인 생활용품에 기술을 더한 세운의 오리지널 제품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혁신. 사람들이 세운상가를 ‘좋은 물건을 만드는 곳’으로 떠올리기를 꿈꾸며 그들은 머리를 맞댄다.

수리수리협동조합 | 변용규 이승근 김광웅

“이리로 오는 물건에는 다 사연이 있지. 그러니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비싸대도 고치고 싶은 거예요.” 수리실에는 보물이 쌓여 있다. 할아버지의 라디오, 엄마의 워크맨….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A/S센터에서도 고칠 수 없는, 그런데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한 물건을 장인들은 고친다. 조합은 시범적으로 운영한 ‘수리수리얍’ 프로젝트 이후에 만들어졌다. 망가진 물건은 버리고, 때가 되면 새것을 사는 시대. 조합에는 누군가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만 찾아온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조합원이 아닌 장인들도 물건을 맡아 고쳐준다. 물건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은 주인의 마음이다.

생활안전장치 | 민창기 최찬우 곽창현 이선문

네 기술자는 상가의 이웃이자 동료다. 이들은 지난여름 ‘생활안전장치’ 공모에서 1차로 선정되어 시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일상에서 쓸 수 있는 새로운 안전장치를 만드는 서울시의 제작지원사업이다. 이럴 땐 경쟁심에 각자의 출품작을 감출 법도 한데, 어쩐지 다 같이 모여 네 가지 물건을 만들고 있다. 이들의 제품은 세운상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전시까지 하면 정말 좋죠. 공모는 대부분 결과가 나온 후에 그대로 잊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세운상가에서 만든 걸 직접 보고 얼마나 좋아요.”

노트랩 X 어보브 스튜디오 | 류재용 전창명 이진우 한석환

장인은 ‘내가 듣기에 딱 좋은 소리’를 내는 스피커를 만들었고, 이웃 기술자들은 종종 그의 방에서 음악을 즐겼다. 이웃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장인은 작은 진공관 블루투스 스피커를 만들었는데 그 물건이 어보브 스튜디오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진공관 특유의 매혹적인 왜곡과 음색을 살려 스피커를 다시 디자인했다. “작업할수록 선생님이 최선의 디자인을 하셨다는 걸 알았어요.” 스피커는 날것의 느낌을 벗고 묵직하고 세련된 색을 입었다. “몇 마디만 해봐도 마음이 통하는지 아닌지 느껴지잖아요. 이 친구랑 얘기하다 보니 그런 기분이 드는 거야. 재미있더라고.”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모인 네 사람이 만든 스피커는 ‘DDP디자인페어’에서 볼 수 있다.

세운의 시공간

“다음에는 걔랑 와야겠다. 여길 보여주면 나한테 반할 것 같아.” 옥상에서 같이 종로를 내려다보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 세운의 시간을 담은 스팟 여덟 군데를 골랐다.

다시세운광장

탁 트인 광장에서 올려다보는 세운의 이름이 듬직하다. 상가 사람들이 나와 새천년체조 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다. 상가에서 본 가장 재미있고 다정한 장면이다.

A. 세운상가 입구

시간의 축적

광장 뒤에는 숨은 유적지가 있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한 작은 장과 시대별 토층을 볼 수 있게 파인 땅을 고스란히 남겨둔 곳이다.

A. 세운상가 1층 계단 뒤

세운중정

세운상가의 아파트는 이제 대부분 사무실이나 작업실로 쓰인다. 나는 상가를 통틀어 5층 중정부터 빛이 드는 천장까지의 높은 풍경을 가장 좋아한다.

A. 세운상가 5-8층

세운옥상

상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종묘 너머 북한산까지의 풍경을 만끽하고 돌아서면 남산타워가 보인다. 종로를 한눈에 담는 기분이 퍽 좋다.

A. 세운상가 9층 

O. 월-일요일 09:00-22:00

세운전자박물관

레트로한 분위기로 꾸민 공간에 시대별로 유행한 전자제품을 뒀다. 이제는 보기 힘든 신기한 물건이 가득하다. 대부분이 개인 기증품이나 대여품이다.

A. 세운메이커스큐브 세운-서301호

O. 월-토요일 10:00-19:00(점심시간 13:00-14:00)

세운부품도서관

200여 개의 부품과 재료로 벽면을 채웠다. 재료의 종류와 이름을 몰라 막막한 이들에게는 오아시스가 되지 않을까.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전시대가 매력적인 공간이다.

A. 세운메이커스큐브 세운-서301호 옆

O. 월-토요일 10:00-19:00(점심시간 13:00-14:00)

수리수리청음실

바이닐, CD,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며 쉴 수 있는 공간. 진공관 앰프를 거쳐 나오는 소리가 따듯하다. 소장한 음반을 가져가서 들어볼 수 있다.

A. 세운메이커스큐브 세운-서302호

O. 월-토요일 11:00-17:00(변동 가능)

세운테크북라운지

책을 읽거나 회의를 하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다. 푹신한 소파와 기술에 관한 서적이 준비되어 있다. 귀한 기술 서적이 모여 있던 옛 세운상가를 떠올리게 한다.

A. 서울메이커스큐브 청계-서304호

O. 월-토요일 10:00-19:00(점심시간 13:0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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