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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에 감춰둔 시간
‘사람들은 시간을 같은 길이로 쪼개어 달력을 만들지만 어떤 날은 다른 날과 다르고, 또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과 다르다.’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나에게는 스페인의 어떤 섬에서 보낸 일주일이 그렇게 다른 날이고 다른 시간이었다. 그날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로 계속 흐르고 있는 듯이 생생하다. 한눈에 반했던 첫사랑처럼 단숨에 빠져들었지만 왜 그리 좋은 거냐고 물어도 딱히 답할 길이 없는 것. 시간이 흘러도 애틋함이 사그라지지 않고 여전히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것. 나에게는 남들에게 말하기도 주저될 만큼 고스란히 아껴두고 싶은 섬이 하나 있다. 그 감춰두었던 시간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기묘한 섬,
란사로테
란사로테Lanzarote는 남편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막 걷기 시작한 아기일 적부터 가족과 자주 휴가를 오던 섬이었다. 이번에도 우리는 남편이 이곳에 올 때마다 머물렀다던 집에 짐을 풀었다. 테라스로 연결된 커다란 창 앞에 선 남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적만 해도 이 창에서 바로 푸른 바다와 까만 흙으로 뒤덮인 해변 전체가 내려다보였다고.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집과 바다 사이에는 여러 집이 줄지어 들어섰다. 이제는 눈으로 다른 집들의 지붕을 넘고 넘어서야 비로소 바다를 볼 수 있게 되어버렸다. 몇십 년 전의 그 풍경을 보지 못한 나마저도 아쉬워졌다. 그래도 다행히 관광지로서 개발이 막 시작되던 80년대에 건축가 세자르 만리케Cesar Manrique의 노력으로 고층 건물을 찾기는 어렵다. 대신 새하얀 벽으로 세운 1~3층의 낮은 건물들이 칠흑처럼 까만 대지와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다.
란사로테는 섬 대부분이 용암으로 덮여 있는 화산섬이다. 사막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풍토는 척박하다. 이 섬에서는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기묘함이 보인다. 검은 화산재로 덮여 황량하기 그지없는 대지에는 돌덩이가 굴러다니거나 덩어리처럼 엎어진 익숙하지 않은 식물이 퍼져 있다.
강하고 거센 섬의 바람은 듬성듬성한 나무의 머리채를 매섭게 흔들어댄다. 비 오는 날이 일 년에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농작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포도나무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현무암으로 담을 둘러 쌓고 그 안에 구덩이를 깊이 팠다. 그 속에서는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을 막을 수 있었고 포도가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돌담과 구덩이로 일구어진 포도밭이 다시 이곳만의 독특한 풍광을 만들었다.
이렇게 척박한 섬의 식사는 대부분 단출할 수밖에 없다. 화산 분화구의 벽 일부가 바다에 잠겨 만들어낸 해안 절벽 엘 골포El Golfo가 보이는 곳에는 작은 식당 여러 개가 모여 있지만 식당마다 메뉴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특별한 양념 없이 간만 맞춰 구워낸 생선이나 간단한 조리법으로 만든 해산물, 소금으로 감싸 익힌 감자, 몇 가지 채소, 빵 등에 곁들여 현지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을 마시는 정도가 전부이다. 이렇게 쓸쓸하고 낯선 풍광이 나의 어느 곳을 건드렸길래 내가 이토록 이 장소에 홀려버린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바람의 섬,
푸에르테벤투라
란사로테 섬에서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카나리아 제도의 또 다른 섬인 푸에르테벤투라 섬Fuerteventura 북쪽 끝 항구에 내렸다. 남편은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억 속의 바닷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그 해변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시아버님이 찍은 영상에서 말이다. 두어 살쯤 된 아가는 엄마 손을 잡고 그 바닷가를 아장아장 걷다가 차가운 파도가 발에 닿자마자 엉엉 울었다.
남편의 기억을 더듬어 운전해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당나귀, 양, 염소를 차례대로 만났다. 반가움에 차를 멈추면 한결같이 어슬렁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와 머리를 창문 안으로 들이밀었다. 문을 열어주면 대신 운전이라도 하려는 듯 차에 곧 올라탈 기세였다. 가방을 뒤져 땅콩 몇 알을 주고서야 그 길목을 통과했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려 어느덧 안개가 자욱한 어느 해변에 도착했다. 몇십 년 전에 찍은 비디오 영상 속의 그곳이다. 남편은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들고 나는 해변에 드러누웠다. 하얀 파도가 올라올 때마다 혹시나 남편이 위험하지 않을까 조바심에 내다보다가 저 멀리 물 밖에 나온 머리가 보이면 안심이 되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에도 놀라 울던 그 아가가 이제는 보란 듯이 바다 수영을 하다니. 떠나기가 아쉬워 늑장 부리다 보니 어느새 꽤 어스름해졌다. 란사로테 섬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배편 시간에 맞춰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아슬아슬했다. 서둘러 돌아가려다 부주의해진 탓일까. 좁다란 산길에서 마주 오는 상대 차의 옆구리를 사이드미러로 긁고 말았다. ‘독일인’ 커플이었던 상대편이 렌터카의 계약서에 적힌 그대로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 해 결국 다시 차를 돌려 근처 마을까지 나가게 되었다. 어렵게 경찰서를 찾았지만 우리의 예상대로 이곳 경찰들은 주말 밤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우리 사고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경찰서를 찾아 두 시간을 더 헤맨 후에야 일단은 서로 전화번호만 교환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란사로테 섬으로 돌아가는 배는 진작 끊겼으니 오늘 밤은 이 섬에서 보내야 한다. 우리는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다시 어둑어둑한 길을 달린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된다.
에디터 이현아
글·사진 이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