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zin Is Moving

아름다운 게 최고입니다
오혜진—그래픽 디자이너

팔각 모양의 안경테에 담긴 두 눈은 말할 때마다 연신 둥글게 구부러진다. 한 마디, 두 마디 대화가 깊어질수록 유한 곡선에 강인한 힘이 붙는다. 결코 스러지지 않을 그 단단함은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손끝에서 피어나는 듯했다. 서울로와 63빌딩, 남산과 남산타워가 전부 보이는 이 작업실 안에 그것만큼 쓸모 있는 게 또 있을까.

좋은 디자인이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제 대답은 항상 “아름다운 게 최고입니다.”예요.

(커피잔을 쥐며) 잘 마실게요. 코스터가 정말 예쁘네요.

그거 귀엽죠. 콘크리트로 작업하는 작가님이 만든 건데 저도 참 좋아하는 코스터예요. 많이 사두고 싶었지만 하나밖에 못 들였어요. 커피 맛 괜찮으세요? 진하게 내려진 것 같아서… 혹시 쓰면 따듯한 물 좀 넣어 드릴게요. 원두를 너무 많이 갈았나 봐요.

 

딱 좋아요. 맛있는걸요. 작업실에 귀여운 게 많아서 자꾸 두리번거리게 돼요. 모닝글로리 지우개까지 특별해 보이네요(웃음).

짐이 좀 많죠? 편히 둘러보세요. ‘작업실’을 주제로 인터뷰한다고 해서 은근히 기대했어요. 인터뷰는 아무래도 갓 디자이너가 됐을 때 많이 하게 돼서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옛날 인터뷰가 더 많거든요. 그 자료를 토대로 인터뷰가 파생되다 보니 새로운 제 이야기는 업데이트가 안 되더라고요. 그게 좀 아쉬워서 오늘은 지금 이야기를 많이 해보고 싶어요.

 

좋아요. 그럼 지금의 오혜진을 소개해 볼까요?

저요(웃음)? 항상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입니다.

 

스튜디오 오와이이OYE라는 이름을 쓰고 있죠. 오와이이랑 오혜진은 어떻게 구분해서 사용하나요?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에요. 처음 오와이이라는 스튜디오를 만든 건 여럿이 모였을 때 그룹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인원을 충원하고 멤버가 늘어도 한 번에 아우를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규모를 키우면 월급이나 복지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겠더라고요. 점차 생각이 바뀌면서 지금은 혼자 일하는 게 편해졌어요. 손이 필요할 때도 물론 있는데, 그럴 땐 프리랜서 디자이너나 인턴을 구해서 기간제로 함께하고 있어요. 어쨌든 이제 멤버를 구하고 싶단 생각은 없어져서 오와이이란 단어를 그렇게까지 많이 사용하진 않아요. 오혜진이란 제 이름이 좀 흔해서 아이덴티티를 나타내기 위해 오혜진(오와이이)라고 괄호를 붙여 부연 설명하는 편이죠. 이젠 크레디트도 디자이너 오혜진이나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으로 나가는 게 더 좋아요.

 

이런 질문해도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래픽 디자인이란 게 뭐예요?

그래픽 디자인에도 분야가 다양해서 ‘그래픽 디자인은 이런 거다.’라고 정의 내리기는 조심스러워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미지와 텍스트를 활용해서 어떤 내용을 시각화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시각화”라고 하면,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끔 만드는 걸까요?

책 작업을 예로 들어 볼게요. 우선은 책으로 엮일 ‘글’이라는 재료가 있잖아요. 활자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내용은 읽으면서 상상해야 하는 영역이지요. 머릿속에만 있는 그 의미를 시각화하는 게 그래픽 디자인 작업이라고 봐요. 머릿속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에 ‘너는 이렇게 생긴 애야.’ 하고 형태를 만들어 주는 거, 표지와 본문 디자인은 물론이고 조판과 흐름, 그 외 것들까지 생각하는 거죠. 활자 하나만 하더라도 어떤 서체를, 어떤 크기로,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야 하니까요.

 

단순히 가독성을 높이는 작업만은 아닌 거네요.

그럼요. 디자이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더 넓은 영역을 고민해요. 가독성은 그래픽으로 구현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인 거지,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가독성이 똑같이 좋더라도 활자에 고딕체를 입힐지, 명조체를 입힐지, 볼드 처리를 할지, 라이트하게 갈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무척 많아요. 입힐 수 있는 옷이 다양하니까 그만큼 고민도 많아지죠. 때에 따라서는 없는 옷을 만들어서 특이하게 입힐 수도 있고요.

어떤 옷 입히는 걸 좋아해요?

요즘은 특정 스타일을 추구하는 걸 지양하고 있어요. 제 스타일을 만들기보다는 내용에 걸맞은 걸 선택하길 좋아하죠. 어쨌든 제가 만드는 거니까 동일한 미감이 생겨나기는 하는데 저만의 시그니처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모든 작품에서 나만의 느낌이 나도록 일정한 표현 방식을 넣는 분들도 있지만 저한테는 그 방식이 잘 안 맞아요. 저는 한 번 해본 표현 방식은 피하려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이전 제 작업의 외형을 레퍼런스 삼아 작업해 달란 요청이 늘 고민스러워요. 비용과 일정이 만족스러워도 해본 걸 또 하는 건 제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요.

 

특정 스타일보다 재료와 내용에 집중한다는 거군요.

맞아요. 그래서 초기 작업부터 지금까지 제 작업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어요. 옛날에는 자기만의 시그니처 표현 방식이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요. 프로젝트마다 내용이 다른데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는 게 모순적이고 재미없게 느껴지더라고요. 지금은 표현 방식에 대해서는 열어두고 내용을 해석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앞으로도 안 해본 걸 시도하면서 저변을 넓히고 싶고요.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란 말도 있지만, 제가 계속 달라지는 사람이니까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다고 믿어요(웃음).

 

고정적인 걸 선호하지 않나 봐요.

옷만 해도 옛날엔 남이랑 똑같은 걸 절대 못 견뎌서 구제, 빈티지 옷만 입었어요. 근데 지금은 대중적인 게 좋아요. 두드러지지 않고 평범한 옷들이요. 거대한 익명 중 하나인 게 가장 편하다는 생각도 하고요. 매번 변하는 사람이어서인지, 제 과거가 자주 낯설어요. 이전의 저를 지금의 제가 못 보겠는 느낌(웃음). 그래서 매일 ‘오늘부터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죠.

 

그림이 좋아서 미대에 갔다고 들었어요. 디자인보다 회화에 관심이 있었나요?

원래는 만화를 좋아해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1학년 때는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영상 수업도 들었죠. 그게 싫어진 건 아닌데, 언젠가부터 그림은 배워서 습득하기보단 스스로 해나가는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술적인 걸 배운다고 해서 내 그림이 남의 것처럼 바뀌는 건 아니니까 개인에 따라 능력치가 다르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 고민을 할 즈음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배우게 됐어요. 아예 모르던 분야여서 재미있었고, 글자에 의도를 넣어 표현한다는 게 놀라웠어요.그때 그래픽 디자인과 편집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주로 어떤 작업을 해왔어요?

그래픽 디자인 영역에서도 전시 아이덴티티나 출판 프로젝트 같은 인쇄물 위주의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출발점이나 재료가 명확하게 주어지는 일이 재미있거든요. 그 재료라는 건 작가의 글이나 전시 기획 같은 것들이죠. 저는 콘텐츠를 이해하고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어서 재료가 있는 그래픽 디자인이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럼 그림 작업은요?

여전히 그리는 행위는 좋아해요. 다만, 느낌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그림은 직관적으로 저를 표현하는 작업인 것 같아요. 그래픽 디자인과 달리 주어지는 재료 없이 ‘오늘 먹은 거’라든지 ‘오늘의 즐거운 일’ 같은 걸 그리게 되니까요. 근데 저는 누군가에게 저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점차 본격적인 작업으로는 드로잉을 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림으로 표현할 대상이 있다면 작업해 볼 수도 있겠네요?

재작년에 대학원 졸업하면서 글자 그리는 작업을 했어요. 글자를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건 그릴 수 있는 명확한 존재가 있는 거잖아요. 다양한 형태를 생산해 보고 싶은데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글자라는 형태에 기대서 형식 실험을 해보자는 의도였어요. 제목도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라고 붙였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작업을 시작한 게 아니라 여러 회사를 다녔다고요. 1년 반 동안 세 번이나 이직했다고 들었어요.

회사 생활은 저랑 정말… 안 맞아요. 다른 것보다도 조직에서 발생하는 상하 구조를 못 견뎠죠. 택배나 전화가 왔을 때 그걸 처리하는 사람은 무조건 ‘막내’라는 시스템이 싫었어요. 다 같이 식사를 해도 막내가 수저를 놔줄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요. 소일거리를 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게 버거웠던 거죠. 그게 싫어서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또 그만두고, 하다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스튜디오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인터뷰에서 디자인하면서 아쉬운 점으로 ‘혼자 일하는 것’을 꼽았더라고요.

스튜디오 오와이이에 멤버를 모집할 마음도 있던 때여서 그랬을 텐데, 이야기했다시피 지금은 혼자 일하는 게 정말 만족스러워요. 사실 이렇게 변한 건 함께 사는 사람 덕분인 것 같아요. 그래픽 디자이너랑 결혼한 덕에 고충이 생겨도 털어놓기도 하고 공감도 받으면서 혼자서 해내야 하는 힘듦이 많이 없어졌거든요.

 

아, 코우너스의 조효준 디자이너와 결혼하셨죠.

공개적으로 말하려니 좀 쑥스럽네요. 가끔 작업 보여주면서 “뭐가 더 나은 것 같아?” 물어볼 때도 있고, 짜증나는 일이 생기면 털어놓기도 해요. 좋은 일이 생기면 서로 축하도 해주고요. 동종 업계에 있다는 게 안심이기도 하고 큰 위안이 돼요.

 

연애를 짧게 하고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연애 이야기 물어봐도 되나요(웃음)?

어…(웃음), 처음 대면했을 땐 이미 서로 알고 지낸 지 꽤 된 때였어요. 코우너스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면서 리소그래피 인쇄소를 겸하고 있는데요. 인쇄 의뢰하러 갔다가 처음 보게 되었고, 조금씩 친해지다가 우연히 집 방향이 같은 걸 알게 되면서 빠르게 가까워졌어요. 연애를 하나 싶더니 반년 만에 결혼도 하게 됐죠. 정신을 차려 보니 같이 살고 있더라고요(웃음).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집에 가면 누가 있다는 게 좋았어요. 결혼하고 나서 작업에도 집중이 더 잘되고, 마음이 편해지니까 삶이 재미있어졌어요. 결혼하길 잘했단 생각을 자주 하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각났어요. 그래픽 디자이너 김강인‧이윤호 부부가 혜진 씨 작업실 파티에서 만나 결혼하셨다고요?

맞아요. 지금 DDBBMM으로 활동하는 부부 디자이너인데, 예전에는 사람들을 제 공간에 초대해서 노는 걸 좋아했어요. 워낙 사람에 관심이 많을 때라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김강인 디자이너를 작업실로 초대한 거였죠. 윤호 언니는 원래 저랑 친한 사이였는데, 저도 둘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얼떨결에 결혼식 날 축사도 했어요. “잘 살아라.” 그러면서(웃음).

 

큐피드가 된 거네요(웃음). 작업실 파티를 열 정도면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제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요. 20대 때는 낯선 사람 만나는 자리를 즐겼어요. 공연이나 전시도 많이 보러 다니고, 모임이 있으면 꼬박꼬박 참석했죠. 근데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보니까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더라고요.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의 허세나 찌질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새 사람을 만나는 데 흥미도 떨어졌고요.

 

정말요? 이번 작업실로 이사할 때 SNS에 “사람 많이 초대하고 싶다.”라고 적어놓은 걸 봤는걸요?

그때 살짝 병이 도지긴 했는데(웃음) 낯선 사람들을 모으기보단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단 뜻이었어요. 팬데믹 상황 때문에 여러 명을 한 번에 부르진 못했지만 소수 만남은 꽤 여러 번 했죠. 이 작업실 창이 크고 넓어서 야경이 멋있거든요. 도심 뷰를 안주 삼아 와인 한 잔 마시자며 친구들을 종종 부르곤 했어요. 옛날엔 창밖으로 나무나 공원이 보이는 게 제일 좋은 줄 알았는데, 여기로 이사 오고 나서 빌딩 뷰도 매력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약간 성공한 것 같은 착각도 들고(웃음).

 

작업실 이사를 여러 번 한 걸로 알아요. 이 작업실이 몇 번째예요?

(손으로 꼽으며) 여섯? 일곱인가?

 

여러 작업실을 돌아다녔군요. 넓은 데로 이사해서 좋다는 이야기도 하셨는데, 이번 작업실에선 또 어떤 걸 고민했어요?

화장실이 좋아야 했어요. 당연히 월세가 합리적이어야 했고요. 무엇보다 어딘가에 노출되지 않은 공간이길 바랐어요. 한때 1층 작업실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불쑥 불쑥 들어오는 경험을 많이 했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좀 스트레스 상황이어서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어요. 혼자 일하다 보니 대체로 편안한 차림으로 출근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는 건 부담스럽더라고요. 한때는 여러 사람이랑 작업실을 공유한 적도 있는데요. 각자 미팅도 있고, 이래저래 사람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원치 않게 사람 만날 일이 많았어요. 저는 만날 준비가 안 됐는데 갑자기 저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도 더러 있어서 그런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죠.

 

어? 근데 이 작업실도 건축사사무소와 공유하는 형태 아닌가요?

맞아요. 세 공간으로 구분을 두어 미팅하는 공간, 건축사사무소, 제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해요. 함께 쓰는 건축가는 제 친구들이에요. 이전 공유 작업실이 넓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입주해서 작업하는 형태였다면, 지금 작업실은 친한 친구들과 함께 구한 거라 그런 부담은 없어요. 두 팀 다 사람을 잘 안 만나는 성격인 데다가 배려도 많이 해서 누군가 오거나 특별한 일이 생기면 미리 알려주거든요.

본격적으로 이 공간을 소개해 볼까요?

들어올 때 건물 이름 보셨나요? ‘경김회관’인데, 경주 김씨 자손들이 사용할 용도로 만든 사무실 건물이라고 해요.그러다 공실을 임대해서 저희가 들어와 있는 건데요. 몇몇 사무실엔 문 위쪽에 한자가 적혀 있거든요. 그런 곳들은 경주 김씨 자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래요. 그 외엔 세를 놓은 곳들이고요. 월세 낼 때가 되면 농담 삼아 “우리가 경주 김씨의 현대판 소작농이다.” 그래요(웃음). 아무래도 한 가문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보니 오래된 건물인데도 관리가 잘돼 있고 깨끗해서 좋아요. 저희는 5층을 쓰고 있는데 들어올 때부터 잘 구성된 공간이어서 크게 불편한 게 없었어요. 이전엔 SoA라는 건축사사무소가 쓰던 공간이었는데, 천장 쪽에 짐을 보관할 수 있게 선반을 만들고 철제문도 다 공사해 두어서 저흰 페인트만 칠하고 들어올 수 있었거든요. 건축가 친구들은 해가 잘 드는 걸 선호해서 창과 가까운 데 자리를 만들었고, 저는 숨는 게 좋아서 가장 안쪽에 책상을 두었어요. 이 작업실에서 자랑스럽게 소개할 부분은 역시 창밖에 서울로가 보인다는 거, 빌딩 숲이 펼쳐져 있다는 거, 넓다는 거예요.

 

그리고 빛이 잘 든다는 거! 밝고 시야가 확 트여서 좋네요. 오늘은 토요일인데, 주말에도 자주 나오세요?

일하러 오는 건 아니지만 종종 와 있긴 해요. 책을 읽거나 화분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내죠. 업무는 보통 월요일에서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고 있어요.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건 저한테 중요한 일이어서 웬만하면 어기지 않아요. 저는 학생 때도 밤을 잘 못 새우던 사람이라 지금도 야근은 힘들거든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체적으로도 점점 버거워지는 것도 있고요. 저녁 8시가 넘어가면 집중이 안 돼서, 업무 효율을 위해서라도 정시 퇴근을 지향해요. 야근을 한다고 해도 9시 이전에는 꼭 퇴근하는 편이고요. 더 하고 싶어도 밥 먹고 나면 집중력이 흐려지고, 저녁을 안 먹는다고 해도 급속도로 피곤해지거든요.

 

그럼 일정이 빡빡한 작업은 안 받게 되겠네요.

그건 또 아니에요(웃음). 작업할 땐 손이 빨라요. 물론 아이디어를 생각할 때는 속도와 상관없이 고민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요. 정해지고 나면 그다음 것들은 술술 처리하는 편이에요. 주어진 기간에 딴짓하지 않고, 집중해서 끝내고 퇴근하는 걸 선호하죠. 그래서 이 루틴이 버거운 적은 거의 없어요.

 

사람마다 출근 직후 패턴이 있더라고요. 누구는 커피를 내리고, 누구는 환기를 하고…. 작업하기 전에 예열은 어떻게 해요.

어, 특별히 없는 것 같아요. 요새 출근하면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는데 그건 예열이라기보단 여유가 좀 있으니까 돌보는 거고, 바쁠 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집중하기 바빠요. 전 출근과 동시에 일꾼 모드가 되는 사람인가 봐요(웃음). 사실 바쁜 날엔 출근 준비할 때부터 마음이 조급해서 다른 걸 할 여유가 없는지도 몰라요. 할 일이 많으면 전날 잠도 잘 안 오거든요. 얼른 출근해서 끝내고 싶단 생각뿐이어서 오자마자 일에 집중하고 그날 할 일을 마무리 짓는 걸 좋아해요.

 

일할 때 좀 계획적인 편인가요?

잘 몰랐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일을 집으로 가져가는 경우는 잘 없겠네요?

많아요(웃음). 근데 집에선 두 시간 이상은 집중이 안 돼요. 인프라도 이쪽에 다 갖춰져 있어서 출력하거나 샘플을 만들기도 편하죠. 초기에는 작업 공간이 집에 있었는데요. 그렇게 하다 보니 일하는 데 끝이 없더라고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 일만 하고…. 3-5일은 기본으로 세수만 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것 같아요.

 

작업실을 꼭 분리해야 하는 타입이군요. 잠깐 둘러봤는데, 여기 독특한 책이 참 많아요.

여행 가서 사온 책들이에요. 여행지에선 꼭 서점에 들르곤 했어요.

 

보통 어떤 책을 골랐어요?

예쁜 책이요. 사실 외국에서 사는 책은 읽을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내용보다도 종이, 제본, 디자인 같은 게 신기하다 싶으면 사게 되더라고요. (책꽂이에서 책 몇 권을 꺼낸다.) 이거, 제가 좋아하는 책들인데요. 일본 작가가 만드는 에세이 시리즈예요. 판형과 로고 위치는 일정한데 제본이나 만드는 방식은 매번 달라지는 게 재미있어요.

 

(책을 펼쳐보며) 와, 되게 특이하네요?

한국에서는 이렇게 못 만들어요. 만들어 달라고 하면 욕먹어요(웃음). 이 책을 만든 그래픽 디자이너가 공예가 성향이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더 독특한 책들이 나올 수 있는 거 같아요. 이 시리즈를 보면서 ‘나도 말도 안 되는 거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이 책은 모든 페이지가 접힌 채로 제본됐네요. 펼쳐볼 수가 없는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매호 주제가 있는데 이 여섯 번째 책은 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책장을 접어서 제본하고, 그 안쪽엔 푸른색을 넣어 물을 연상할 수 있도록 표현한 거죠. 독서경험이란 활자만 읽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각적인 요소들을 보기도 하고, 손으로 넘기는 감각도 느끼는 거잖아요. 이 파란 색깔이 모든 페이지에 들어 있는 걸 보면 특유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런 의도를 담는 게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픽 디자인은 꼭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일 같아요.

맞아요. 좋은 디자인이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제 대답은 항상 “아름다운 게 최고입니다.”예요.

 

이전 인터뷰에서 “건축이나 공간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죠. 언젠가부터 건축 관련 업무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해보니 어때요?

너무 좋아요. 제 작업은 거의 종이로 구현했는데, 그 스케일이 커지니까 너무… 좋더라고요(웃음). 작년엔 건축사사무소 푸하하하프렌즈랑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작업을 같이 했어요. 제가 구현한 작업이 거대한 규모로 도심 한복판에 떡하니 있는 걸 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어요. 이번 비엔날레 작업이 공사 가림막을 모티프로 만든 작업이었는데, 이 협업을 통해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에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픽 디자인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재료 삼아 재해석하는 과정이니까요. 클리셰한 시각 언어에 새로운 의도를 넣어 표현하는 게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클리셰한 시각 언어에 새로운 의도를… 좀더 설명해 주실래요?

예를 들어 이런 네모난 바탕이 있다고 해볼게요. (종이를 손에 든다.) 이 끝 쪽에 세로로 동그란 구멍을 뽕뽕뽕 일정하게 뚫는 거예요. 뭐처럼 보일까요?

 

스프링 노트…요?

그렇죠. 펀칭 그래픽을 넣는 것만으로 우리는 ‘스프링 제본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실제 스프링 제본을 하는게 아니라 시각적인 효과를 넣어서 전시 아이덴티티나 출판 콘셉트를 만드는 거죠. 그런 점에서 건축도, 그래픽 디자인도 어떤 재료를 뿌리 삼아 비유해서 보여주는 작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건축이 구조물에 비유해 담는 작업이라면, 그래픽 디자인은 시각 형태에 비유해서 보여주는 거죠.

 

이해가 쏙쏙 되는데요, 선생님(웃음). 협업하는 재미도 생겼을 거 같은데 또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 있어요.

건축 하는 친구들과 계속 뭔가 해보고 싶고… 아, 최근에는 패션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요즘 프랑스 패션 사진가랑 책을 하나 만들고 있거든요. 한국에서는 패션이 흔히 명품 브랜드로 표현되곤 하는데, 이 사진가는 그런 영역에서 좀 비껴난 작업을 해요. 패션 산업에서 발생하는 의심스러운 부분을 뒤트는 작업이죠. 보통은 패션을 보여주기 위해 날씬하고 예쁜 모델을 쓰곤 해요. 근데 이 작가는 본인이 사는 동네 주민들을 모델로 삼아요. 키나 나이대나 생김새가 전부 다른 사람들이죠. 그들에게 입힐 옷은 사진가의 친구들이 디자인하는데요. 시장에서 온갖 재료를 사 와서는 희한한 옷들을 만들어요. 종이로 드레스를 만든다거나…. 그 작업만 해도 재미있는데, 사진 찍는 감각도 새로워요.깔끔한 스튜디오나 햇빛이 잘 드는 곳을 택하는 게 아니라 모델들이 좋아하는 장소나 사연이 깃든 곳으로 가거든요. 이런 식으로 사진마다 내러티브를 담는 거예요.

 

어떤 책이 될지 궁금하네요. 프랑스 작가와 소통은 어떻게 해요?

영어로요. 구글 선생님이 저희를 도와주죠(웃음). 저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보다 제2 언어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편해요. 서로 좀더 직설적인 화법을 쓰게 되어서요. 오히려 영어권 사람들과 대화하면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최근에 영국 사람과 작업하면서 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있었는데 거기 “There Is Room.”이란 문장이 있는 거예요. 문맥 파악이 잘 안 됐는데 알고 보니까 “이렇게 할 여지가 있다.”더라고요. 어려운 문제 푸는 기분이었어요. 또 한번은, 한 미국인이 ‘IDK’라는 단어를 썼는데 처음엔 프로그램 용어인 줄 알았거든요. ‘CJK’라고, 차이니즈, 재패니즈, 코리안이란 의미의 축약어가 있어서 그런 줄임말이라고 생각한 거죠.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의미를 모르겠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I Don’t Know’의 줄임말이더라고요(웃음).

 

아이고, 저는 한국어 줄임말도 못 알아듣는데(웃음). 다시 작업실 이야기로 돌아와 볼게요. 이 공간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뭐예요?

식물 스테이션이랑 책장이요. 작업실에 전부 같은 철제 책장을 들여놨는데 구성이 조금씩 달라요. 옵션이 많아서 용도에 맞춰 고르기 편하더라고요.

이 작업실과 무척 잘 어울려요.(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긴 처음부터 식물들 자리였나요?

아니에요. 칼판을 놓고 뭔가를 자를 때 쓰던 곳인데, 화분을 하나하나 들이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돼버렸어요. 식물은 최근에 취미 붙인 거라 아직 자랑하기엔 쑥스러워요. 식물 가꾸는 데 미숙하다 보니 여기서 죽어 나간 화분도 꽤 많아요.

 

이파리가 다 탱글탱글한데요?

사 온 지 얼마 안 된 애들이라 그래요. 죽은 애들은 빠르게 처분했거든요(웃음).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식물이 너무 좋아요. 저희 엄마가 꽃을 참 좋아하시는데요. 어느 날 엄마랑 걷는데 “꽃들이 웃고 있네.” 그러시는 거예요. 그 당시엔 “무슨 소리야.” 그랬는데,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며칠 전엔 화분에 새순이 돋은 걸 보고 코가 찡해지더라고요. ‘이 겨울에 새순이 났구나!’ 그러면서(웃음). 작업실에서 작업 말고 관심을 두는 건 딱 이 식물뿐인데 일에서 잠깐이라도 눈 돌릴 시간이 생기니까 확실히 정신 건강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조금 유치하지만 얘네가 자라는 걸 보면서 ‘나도 힘내야지.’ 생각도 하고요.

 

이곳은 귀여운 소품과 식물과 책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갑자기 이런 게 묻고 싶네요.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게 뭐예요?

좋아하는 거요? 너무 많은데. 여기서 작업하는 것도 좋고….

 

일이 가장 먼저 나오네요?

중요하니까요. 제 인생에 축이 두 개라면 하나는 일이고, 하나는 주변 사람들일 거예요.

 

그만큼 작업실도 중요한 공간이겠네요. 공간이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음… 얼마 전에 <일본 침몰>이라는 드라마를 봤어요. 일본이 가라앉아서 없어지는 이야기인데요.나라를 구성하는 3대 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잖아요. 원작자가 ‘그중 영토가 사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만들었다고 해요. 영토도 공간이니까… 공간은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선 안 되는 주요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나라를 구성하는 삼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라면, 이 공간을 구성하는 삼요소는 뭘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 숲, 식물들, 옆자리 친구들.

 

어? 답이 되게 빨리 나오네요?

지금 여긴 완벽하거든요. 아주 만족스러워요(웃음).

새 옷을 입은 《AROUND》

이번 호를 보고 몇 명의 독자가 “어라?” 했을까. 100개의 작업이 있다면 100벌의 옷을 입히고 싶다는 오혜진 디자이너가 《AROUND》의 표지와 인트로 페이지에 새 옷을 입혀 주었다.

“‘기존 결과 방향성은 유지하며 리뉴얼하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고 지금까지의 《AROUND》를 떠올려 봤어요. 제 머릿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이미지는 큼직한 사진과 ‘AROUND’ 제호가 들어간 구성이에요. 초창기부터 보아 와서 그 표지가 익숙하기도 하고, 오래 그 모습으로 지속되기도 했고요. 그러한 인상을 유지하되, 제가 《AROUND》를 읽으며 느낀 부분에서 좀더 업그레이드한 인상을 주고자 했어요. 표지 전면에 이미지를 배치하고, 표지의 폭을 본문보다 약간 짧게 만들어서 디테일한 정보는 한쪽에 몰아넣는 식으로 레이아웃을 전개했어요. 표지와 인트로 페이지의 흐름이 연결되기를 바라 그 점에도 신경 썼고요.”

Point. 1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한국의 제주를 오가며 ‘볼드 디시전스Bold-Decisions.biz’라는 타입파운더리를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마스 빌고르Mads Wildgaard’가 영문 제호를 조금씩 다듬었어요. 굵기를 맞추거나 여백을 넓히는 미세한 시각 보정이었죠.

Point. 2

표지 종이를 고르는 데도 고민이 많았어요. 독서 경험은 활자만 읽는 게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종이의 느낌, 넘기는 시간까지도 포함하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여러 작업을 해오면서 한 번도 ‘이 작업은 이렇게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보는 눈도 다르니까요. 그래서 무언가 결정할 때 무조건 다수 의견을 따르진 않아요. 모두의 의견을 신경 쓰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디자인이 나올 것 같아요. 핵심 멤버의 생각이 가장 좋은 디자인을 불러온다고 생각해서 ‘독자들이 이렇게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작업했어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보자마자 ‘이게 뭐야.’ 하고 쓰레기통으로 던지는 물건도 있잖아요. 그런 물건이 아니기만을 바라요(웃음). 예뻐서 집에 두고 싶은 책, 그런 인상이면 좋겠어요. 쓸모 있는 걸 아름답게 만드는 건 중요하니까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