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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뛰어넘어 꿈을 이룬 여성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작가가 되기 위해 ‘가정의 천사’를 죽여야만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정신이나 욕망 없이 타인의 소망에만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여성상 말이다. 지금 소개할 다섯 명은 ‘가정의 천사’를 물리치고, ‘자신’이라는 나침반을 믿고 세상의 울타리를 넘은 여성들이다. 그들의 지난한 싸움을 소개한다.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보육원에서 배운 바느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열두 살 무렵 아버지는 가브리엘을 포함한 세 자매를 보육원으로 보냈다. 엄격한 규칙이 많은 보육원은 지루하고 따분한 곳이었다. 가브리엘은 정해진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힘들어했고, 이런 행동 때문에 보육원 수녀님들에게 미움을 사곤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지켜준 것은 직업 교육으로 배운 바느질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뛰어노는 시간에도 좋아하는 바느질을 했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찾고자 노력했다. 가브리엘은 남들이 하니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소녀였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가브리엘은 낮에는 양장점에서 옷을 짓고 저녁에는 무도회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때 그가 부른 노래 이름이 ‘누가 코코를 보았는가?’다. 사람들은 노래하는 그를 “코코! 코코!”라고 외쳤고, 이때부터 가브리엘은 코코로 불리게 된다.
이즈음 남자 친구의 소개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고, 프랑스 상류사회를 접한다. 말 타기를 배우는가 하면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를 여성용으로 개량해보는 파격적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의 스타일 역시 논란을 일으키곤 했는데, 코르셋을 입지 않았고 소박하며 창이 좁은 모자를 썼기 때문이다.
파리에 모자 가게를 열었을 때도 당시 유행하던 모자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고 만들고 싶은 모자를 구상했다. 이때 가브리엘은 자신의 삶을 이끄는 하나의 원칙을 세운 듯하다.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가브리엘은 벨 에포크 시대의 프릴 장식이 화려하고 코르셋으로 몸을 꼭 조이는 드레스를 극도로 혐오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걷어내고 실용적인 소재로 만든 단순한 옷을 입어 남들과 다른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번창했고 파리에도 부티크를 열었다. 종아리를 드러내는 심플한 저지 드레스와 승마 재킷, 활동하기 편한 스웨터와 바지 등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많은 여성들의 삶을 새롭게 바꿨다.
가브리엘은 늘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았고, 감각을 키우며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진정으로 파악했다. 소년같이 슬림한 몸매와 짧은 머리, 살짝 그을린 피부와 활동적인 행동, 경제적인 자립은 많은 이들에게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비치게 된다.
향수, 장신구, 가방, 신발로 이어진 토털 룩
그는 익숙한 것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구현하는 일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1921년에는 여러 꽃 성분을 조합하여 인공 향료를 사용한 최초의 향수를 만들어낸다. 이는 ‘샤넬 넘버 5’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향수가 된다. 2차 대전 기간에 샤넬의 휴업 상태가 이어지면서 모두가 뉴룩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브리엘은 70이 넘은 나이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급스럽게 변주하여 패션쇼를 연다. 이후 손에 드는 클러치가 주였던 여성들에게 어깨에 걸치는 ‘2.55’ 백을 선보이고, 실용적인 낮은 굽의 투톤 슈즈를 출시하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수많은 여성을 샤넬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샤넬은 가브리엘 그 자체이고, 그의 행보는 늘 과감했다. 그에게 패션은 절대적인 삶의 주제였고, 자기 자신을 위해 창조해야만 하는 길이었으니까.

Little People BIG DREAMS
가브리엘 코코 샤넬
글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
그림 아나 알베로 | 옮김 공경희 | 달리
“인간이라는 가족의 절반인 어머니이자 여성이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주변의 일
에멀린의 아버지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날염 공장을 운영했다.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 안에서 여러 자녀를 둔 부모님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세상을 바르게 바꾸는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에멀린은 어릴 적부터 미국 노예 해방 운동을 지지하는 자선 행사에 참여하거나 여성 참정권 집회에 참석했다. 다섯 살 때부터 노예나 해방, 바자회, 기부금 같은 단어는 이미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아이
세 살 때 글을 깨우친 에멀린에게 책은 기쁨이자 위안이었다. 다방면의 책을 읽으면서 책 속 주인공처럼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소녀로서 누릴 수 있는 탄탄한 교육과 문화를 누려왔지만, 학교에 갈 시기가 되자 뭔가 잘못된 관념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는다.
소녀교육의 목표는 소년과 달리 ‘집을 매력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꽤나 진보적이던 에멀린의 가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똑똑하고 영민한 에멀린의 침대 맡에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얘가 남자애로 태어나지 않아서 안됐어.”
당시 여성들은 대학에 갈 수 없고 선거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멀린은 남자들이 자신이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여자들도 그런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성의 권리
엄마와 함께 여성 운동가인 리디아 베커의 강연을 들은 날이었다. ‘여성과 남성이 차별받지 않으려면 동등하게 선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에멀린은 모임을 열어 여성이 참정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의회에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는 법을 만들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여성 선거권 법안 초안을 작성한 변호사, 리차드 팽크허스트를 만나 결혼한다. 사회 운동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의 연속이었고, 그 사이 남편의 죽음과 생계의 불안이 덮쳤지만 에멀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말이 안 되면 행동을 보여주면 될 일이다. 딸들과 함께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을 만들어 독자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펼쳤다. 전투파 참정권 지지자인 ‘서프러제트suffragist’라는 명칭은 이때 얻은 것이다.
공공건물 유리창을 부수거나 불을 질렀고, 단식을 했다. 1차 대전 때는 전쟁터로 간 남성 대신 여성이 일을 하도록 이끌었다. 병원이나 경찰서에서 여성들은 제 몫을 해냈고, 여성도 남성처럼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갖기까지
1차 대전이 끝나고 드디어 30세 이상의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때부터 10년이 지나 21세 이상 선거가 가능해지고, 비로소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갖게 된다.
지금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가 작은 아이의 꿈틀거리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 정해준 꿈이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꿈이었다면 이토록 치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라는 목표를 위해 무모해 보일지라도 과감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던 에멀린. 우리는 이제 그를 영웅으로 기억한다.

Little People BIG DREAMS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 리즈베스 카이저 | 그림 아나 산펠립포
옮김 박소연 | 달리
“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고난의 연속
‘프리다’는 사진작가이던 독일인 아버지가 지어준, 평화를 뜻하는 이름이다. 하지만 프리다의 유년 시절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 하나가 가늘어졌고,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열여덟 살에는 끔찍한 전차 사고를 당했다. 철제 막대 하나가 그의 몸을 관통하여 꽂힌 것이다.
훗날 프리다는 “칼에 맞은 투우장의 황소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의대에 입학하려는 꿈은 버려야 했다. 서른 번이 넘는 수술과 불치의 신체적 외상, 후유증이 어린 프리다의 길을 가로막은 채로.
예술가의 탄생
바로 그 고통과 출혈에서 예술가 프리다가 탄생했다. 오랜 기간 침대에서 누워 생활하던 그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워서 석고 붕대에 나비를 그리거나 발을 종이에 그리다가, 천장에 거울을 걸어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는 몸의 고통과 마음의 아픔을 표현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프리다의 자화상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신화와 멕시코 대중 신앙 등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 개인의 이야기를 그들과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프리다만의 상징’을 찾고 분석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프리다의 그림을 보며 그의 삶 속 이야기에 더 깊은 연민을 느끼곤 한다.
디에고를 향한 사랑
프리다는 평소 학교나 교회에 벽화를 그리던 디에고를 존경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을 가지고 디에고를 찾아갔고, 디에고는 프리다의 그림을 칭찬하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둘은 결혼에 이르렀지만 힘든 임신과 몇 번의 유산, 디에고의 외도는 프리다의 삶에서 또 다른 큰 고통을 안겨준다.
남편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없었기에 항상 자신을 부족하다 여기며 괴로워했다. 그래서 이때 그린 ‘나의 출생’, ‘떠 있는 침대’ 등은 충격적인 폭력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결함은 프리다 자신을 갉아먹고 소진시키기에 이른다.
현실의 고통을 그림으로
1938년 멕시코의 전시를 마치고, 뉴욕에서 단독 전시회를 제안받았다. 고통과 슬픔을 복합적으로 담은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고, 《TIME》에 실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다.
프리다는 비로소 디에고와 연결되어 있던 자신을 떨쳐내고 독립적인 예술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파리에서 전시를 열자 피카소,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같은 미술계 대가들은 그의 그림을 앞다투어 칭찬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차례의 수술은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 기념전>이 열렸을 때는 침대에 누운 채 구급차를 타고 전시장에 가기도 했다.
세상이 그에게 던진 아픔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열렬하게 있는 그대로 맞선 프리다. 남겨진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며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견디는 태도를 생각해본다.

Little People BIG DREAMS
프리다 칼로
글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 | 그림 지판엥
옮김 공경희 | 달리
“우리는 저마다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해내야 하는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학 소녀 마리
마리 퀴리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폴란드의 독립운동가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마리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 데 열심인 아이였다. 배움은 꿈을 낳는다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알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하지만 사회는 차별과 억압이 난무했고, 폴란드와 독일의 대학은 여자 학생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움을 포기할 마리가 아니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생기자, 원하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파리에 가기로 결심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벌고, 박물관의 실험실에서 혼자 실험을 하며 자신이 정한 길을 스스로 갈고닦았다.
그 결과 24세의 조금 늦은 나이에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
마리는 소르본 대학에서 만난 피에르와 결혼하고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1895년 독일의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고, 퀴리 부부도 이 특이한 물질의 연구에 몰입했다. 얼마 후 방사성이 원자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냈고, 강한 빛을 내는 방사선 물질인 ‘폴로늄’을 발견했다. 밤낮을 연구에 빠져 지낸 그들은 몇 달 뒤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둘은 방사성 원소로는 최초 발견이었고, ‘방사능’이라는 용어도 이때부터 쓰이게 됐다. 또한 우라늄 광석에서 순수한 염화라듐을 분리해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들은 인류 발전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다.
두 번의 노벨상
마리는 라듐이 암을 치료하고 몸속 사진을 촬영하는 등 의학 분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특허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특허를 냈다면 엄청난 부를 쌓았을 텐데 인류의 발전을 생각해 자신들의 업적을 세상에 기부했다. 금전적 이익을 얻는 일은 과학의 정신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라듐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특허 사용료를 부담하지 않고 성장해, 과학자와 의사들에게 유용하게 쓰였다. 마리 퀴리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이 떠난 이후 남편의교수직을 이어받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1년에는 인공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또다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한 사람이 노벨상을 두 번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과학자의 정신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마리는 해부학을 공부하고 몸속을 찍을 수 있는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 장비를 개발해 직접 전쟁터로 간다. 개조한 트럭을 사용하여 다친 군인들을 제때 치료했고, 치료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을 교육했다. 또한 퀴리 연구소를 열어 더 많은 사람들이 라듐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리는 과학으로 인류를 이롭게 하리란 꿈을 이뤘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에도 힘썼고, 자신의 아이들도 독특한 교육관으로 배움을 도왔다. 두 딸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소르본 대학의 교수들이 함께 만든 공부방에서 수업을 받게 한 것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번뜩이는 과학 실험을 보여주며 두려워하기보다 배워야 하며, 언제나 인류를 이롭게 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현재 마리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이 안장되는 파리의 팡테옹에 묻혀 있다. 그의 연구는 방사능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열었고, 방사능 단위와 화학 원소 퀴륨에 퀴리 이름이 사용되었다.

Little People BIG DREAMS
마리 퀴리
글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 | 그림 프라우 이사
옮김 박소연 | 달리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하는 거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잖아.”
새가 되고 싶은 어린이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난 아멜리아는 명랑하고 씩씩한 아이였다. 주로 밖에서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좋아했고, 언젠가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품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어린이였을 당시는 비행기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비행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스무 살이 될 무렵 아버지와 에어쇼를 보러 갔고, 조종사 프랭크가 비행기에 태워주어 10분간 하늘을 날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날 아멜리아는 자신의 삶의 길을 정한다. 앞으로 비행기와 하나가 되어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살겠다고.
여성도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장비를 다루는 일이 그렇듯이, 비행기 조종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자들도 비행을 배울 순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비행을 조종하는 남자들을 옆에서 도와주는 보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편견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아멜리아는 비행 학교에 가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았다. 비행기도 사서 꾸준히 연습하고 훈련했다. 드디어 약 4260m 높이까지 비행에 성공한 뒤 비행사 자격증을 얻고 꿈에 그리던 조종사가 된다. 이제 더 멀리 높이 날아볼 줄 알았는데,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즈음 최초로 대서양 횡단을 한 비행사가 나오면서 아멜리아에게도 동료 조종사들과 대서양을 횡단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들은 스무 시간을 넘게 날아 대서양 건너 영국에 도착했다.
멈추지 않는 도전
대서양을 건너보니, 여자들도 충분히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의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던 아멜리아는 혼자 힘으로 대서양을 건너고자 자신의 보라색 록히드 베가에 올라탔다. 단독 비행은 풍향과 폭풍의 위기, 항로나 항공 지도의 미비, 엔진의 불확실성, 피로 누적 등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일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어려움이 그를 덮쳤지만 추락 직전에 가까스로 착륙에 성공한다. 열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날아오른 뒤였다. 여성 최초의 대서양 횡단을 본 사람들은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은 그의 용기에 감탄하고, 수많은 여성은 아멜리아의 모습에 희망을 얻었다.
미국 의회에서는 뛰어난 비행을 기념하며 훈장을 줬고, 프랑스 정부는 기사 훈장을,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는 아멜리아에게 금장 메달을 수여했다.
모두의 영감
모두가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 아멜리아는 이제 세계의 영웅이자 모두의 영감이 됐다. 마흔 살이 되는 해, 항해사 프레드 누난과 함께 지구를 한 바퀴 돌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마이애미를 출발한 그의 비행기는 태평양의 하울랜드섬으로 가던 중 ‘엔진이 부족하다’는 무전을 남기고 해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의 대담함과 영향력을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상실감에 빠졌다. 아멜리아의 도전은 한 사람의 의미 있는 흔적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공황으로 힘들어하던 전 세계인의 기대와 용기를 등에 업고 나는 ‘희망의 비행사’였다.

Little People BIG DREAMS
아멜리아 에어하트
글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 | 그림 마리아디아만테스
옮김 박소연 | 달리
에디터 김현지
자료 협조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