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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슨 동생의 운명

그거슨 동생의 운명

어느 날, 블로그에 올린 둘째 아이 사진에 덧글이 붙었다. “ㅋㅋ 남자아인데 장갑에 리본이 달렸네요. 누나 장갑 물려 받았나 봐요. 귀엽.” 그날따라 엄마 블로그를 보던 둘째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나도 내 거 사주세요. 해골 그려져 있는 걸로. 까만색으로.” 그렇다고 물려받은 장갑이 멀쩡한데 새 걸 사줄 수는 없고, 부루마불 두 판 해주는 걸로 아이를 달랬다. 원래 엄마들 사이에 은밀하게 도는 구호가 있다. ‘첫째에겐 사랑을! 둘째에겐 새 옷을!’ 첫째 아이 땐 기저귀 하나를 사도 밤새 검색해서 제일 좋다는 걸로 사주지만, 둘째 아이에겐 집에 있는 교구나 책도 건너 뛰기 일쑤다. 둘째 엄마들의 말버릇. “첫째 때 내가 다 해봤는데, 하나 안하나 똑같아!” 진심이다. 이런저런 방문 학습을 한 첫째 아이나 못 배운 둘째나 공부 능력은 비슷한 것 같다. 이쁘다고 물고 빨면서도 돈은 하나도 안 쓰고 키우니, 가끔 미안하다. 그럴 땐 돈 안 드는 폭풍뽀뽀, 애정공세로 무마하면서 키우니 오히려 성격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둘째야. 넌 늘 누나 것을 물려받아야 하지만, 괜찮지? 그거슨 둘째의 운명이다. 대신 너는 누나가 먼저 가보고 ‘하나 안 하나 똑같다’는 걸 확인한 각종 학원과 교재를 안 해도 되니 뒹굴거릴 시간이 있잖니? 귀여운 자, 모든 권리를 갖는다는 ‘귀득권’도 너의 것.

© 내 빤스

《내 빤스》를 읽으면서 둘째 아이가 완전 공감을 한 것은 당연하다. 주인공 철수는 계란말이 한쪽도 굵고 실한 놈으로 먹으려면 젓가락 전투에서 이겨야 하는 자식 많은 집 막내다. 자그만치 여섯 형과 누나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한 날, 철수는 앞에 리본이 달린 빤스(팬티가 아님) 때문에 창피를 당하고 집에 와서 엉엉 운다. “나도 새 빤스 입고 싶어요!” 하늘을 나는 슈퍼맨 표지 그림은 바로 새 빤스를 입고 하늘을 나는 철수의 꿈 장면이다. 책 뒤에 ‘엄마 아빠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이라며 ‘신체검사 하는 날의 풍경’ 등 70년대 풍경과 설명이있다. 신체검사를 지정 병원에 가서 하지 않고, 학교에서 다 같이 했던 것이 새삼 기억난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몸무게가 많이 나올까 봐 전날엔 굶곤 했다. 가슴둘레를 잴 때는 얼마나 창피했던지! 친구들이 알까 봐 부끄러우면서도, 정작 부끄러워서 의논한 사람도 친구였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함께 성장을 하고, 공감대를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친구들과 비밀스러운 공감대를 만들어나갈까. 

이성복 시인이 ‘시는 침술 같은 것’이라고 했다. 문제 되는 부위를 정확하게 찔러 통증을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투약이나 수술 없이도 약간의 아픔만으로 고통을 제어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바로 시라는 얘기에 나는 무릎을 쳤다. 그림책이야말로 내겐 명의의 침 한 방이다. 수술없이 고통을 달래주고, 웃음으로 아픔을 보듬어주는 것. 그 침은 공감과 유머다. 《내 빤스》는 함께 그림책을 보면서 어린 아들은 공감으로 위로를 받고, 에미는 추억을 소환하여 웃을 수 있다. 이런 그림책 침 한 방을 맞은 후라면, 아이는 새물건을 쓰지 못하는 서러움 대신에 물려주는 형과 누나의 존재가 살아가는 내내 얼마나 든든하고 위로가 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지 않을까.

《곰돌이 팬티》도 팬티 얘기다. 곰돌이가 팬티를 잃어버렸다. 생쥐가 같이 찾아주기로 했는데, 세상엔 얼마나 팬티가 많은지 화려한 줄무늬 팬티는 얼룩말 것, 당근 팬티는 토끼 것, 먹을 게 잔뜩 그려진 팬티는 돼지 것, 아주 작은 팬티는 나비 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과 알록달록 색감들이 총 출동한다. 책을 펼치면 먼저 팬티가 보인다. 팬티 모양으로 페이지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뒷장에 있는 그림 중에서 팬티 부분만 보이는 형식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누가 그 팬티를 입고 있는지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구멍 뚫린 책의 형식 자체가 아가들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팬티를 머리에 쓰거나 구멍이 여러 개인 문어 팬티를 보고 있자니 어른도 웃게 만든다. ‘생쥐가 좋아요.’라고 쓰인 팬티는 누구 것일까? 생쥐가 좋아하는 걸 보니 생쥐네 유니폼일까? 아하, 알고 보니 바로 고양이 것! 그나저나 곰돌이 팬티는 어디로 갔을까? 알고 보니 하얀 곰이 하얀 팬티를 입고 있어서 잃어버린 걸로 착각했더라는 반전이 귀엽다. 

아무리 둘째라도 그렇지, “물려 받는 것이 네 운명.”이라고 하기엔 좀 미안해서 아이에게 슬쩍 옷 이야기 그림책을 한 권 더 읽어준다. 《이유가 있어요》, 《불만이 있어요》, 《이게 정말 나일까?》 등 유머면 유머, 귀여운 그림이면 그림으로 요즘 가장 인기있는 작가 중 한사람인 요시타케 신스케의 《벗지 말걸 그랬어》.아아, 내 아이가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라면 좋겠다. 《벗지 말 걸 그랬어》의 아이는 윗옷을 벗으려다 그만 머리가 끼어버린다. 옷은 뒤집어진 채 얼굴을 가리고, 노출된 배는 썰렁하다. 어떡하지?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가? 아이는 위기에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최고의 낙천성과 적응력을 보여준다. 옷 사이로 얼핏 바깥이 비쳐 보이니까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훌륭한 일을 하는 것과 옷이 머리에 끼인 것은 아무 상관없다.

언젠가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똑같은 상황인 아이를 만나 친구가 될지도 모르잖아? 함께 고민을 나누면서 더 큰 우정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몰라.
“꽃봉아. 내 빤스(《내 빤스》 이후 우리는 팬티라고 하지 않고 빤스라고 부른다)에 리본이 달리면 어떻고, 레이스 빤스면 어때? 빵구멍이 빵빵 나 있는들? 옷은 중요한 게 아니야. 옷처럼 누군가에게 있는 조건은 다 생각하기 나름인 거야. 얘 봐라. 어떤 사람은 머리에 옷이 끼었다고 좌절할지도 모르는데, 얘는 전혀 상관하지 않잖아.”
“맞아요, 엄마. 중요한 건 옷이 아니라 사람이지. 무슨 옷을 입었나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 그 자체가 중요하니까.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누군 울고 누군 웃어요.”
“바로 그거야! 이런 인생의 비밀을 깨닫다니, 우리 아들 너무 멋지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지라도 제대로 벗어볼까 하다가 바지도 발목에 걸려버린다. 결국 아이의 인생은 이렇게 꼬여버리는 것일까? 천만에. 이때 등장하는 구원투수는 바로 엄마. 엄마가 와서 “아직도 안 벗었냐?” 아무렇지 않게 빤스까지 홀라당 벗기고는 버둥대는 알궁둥이를 데리고 목
욕탕으로 간다. 역시, 엄마는 해결사. 

《내 빤스》에서도 그랬다. 엄마는 재봉틀을 꺼내 휘리릭 새 빤스를 만들어주신다. 그것도 강아지 무늬가 있는 걸로. 아이들은 그림책 속에서 존재를 뒤흔드는 문제마저도 뚝딱 해결해주는 엄마를 보면서 안정감을 얻고, 세상으로 나가는 힘을 얻는다. 문득 엄마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를 가진, 이미 엄마가 되어버린 나는 어떡하나 심란해진다. 아이들 문제야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준다 쳐도, 내 머리에 끼인 내 문제는 어떡하지? 벗지 말걸 그랬어. 하지 말걸 그랬어…. 하지만 아이에게 바라는 만큼 나 스스로도 긍정 파워를 발휘해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뭐 어때? 옷이 머리에 끼었어도, 훌륭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잖아? 이 책의 꼬마처럼.

나는 벌써 중학생인 첫째 딸, 초등 고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아직도 그림책을 읽어준다. 《웰컴 투 그림책 육아》 책을 쓸 때만 해도 “고학년이 되어도 그림책을 읽어주세요. 아이와 마음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답니다.”라고 했는데, 요즘은 한 발짝 더 나간다. 그림책은 어른들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그림책 침 한 방의 ‘약효’를 더 느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림책은 때론 시처럼, 때론 한 편의 그림처럼 마음에 툭, 질문을 던진다.

“잘 살고 있니? 괜찮아, 괜찮아. 넌 이미 잘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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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