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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송승언의 시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의 첫 문장은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같이 보면 좋을 영화를 헤아렸고, 날짜와 시간을 맞췄고, 뜨거운 어느 한낮 낙원동을 찾았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극장을 나오고 나서도 사위는 쨍하고 뜨거웠다.
영화라는 주제에 시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은 2015년에 발매한 첫 시집 《철과 오크》에 실린 시예요. 나카무라 다카유키 감독의 <요코하마 메리>(2006)를 보고 극장을 나왔을 때의 강렬한 기억이 반영돼 있죠. 그렇다고 그 영화에만 국한된 시는 아니고요, 그 당시 자주 드나들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느낀 감상이나 관련된 기억의 편린들을 바탕으로 쓴 시예요.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제목이 ‘영화관’이 아니라 ‘극장’인 점이 좋았어요.
극장이란 명칭은 우리 세대만 해도 영화관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단어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보는 곳을 극장이라 불렀어요. 제가 생각하는 극장은 일단 멀티플렉스는 아니어야 해요. 단 하나의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란 느낌이 있거든요. 단관에, 상영되는 한 편의 영화 포스터만 커다랗게 붙어 있는 곳이죠. 반면 영화관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멀티플렉스 느낌이 강해요. 그런 의미에서 극장이란 단어를 골랐어요. 아, 극장이라고 하면 스크린이 좀더 큰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렇지 않나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시편에 팝콘과 콜라가 등장하잖아요. 이건 멀티플렉스와 좀더 가까운 느낌이지 않아요?
정확히는 ‘콜라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사실 영화관에서 콜라병으로 콜라를 마시진 않잖아요. 결국 극장이든 영화관이든 이 시 속에선 허위적인 공간으로 그려진 거예요. 극장도 영화도 진짜는 아닌 거죠. 여기서 사용한 콜라병은 신동집 시인의 <빈 콜라병>이란 시와 연관되는데요.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 빈 콜라가 들어 있다. / 넘어진 빈 콜라병에는 /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인데, 이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극장이라는 어두운 공간에 빛이 들어차는 모습을 콜라병에 비유하고자 했던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콜라병에 대한 시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오늘,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를 같이 봤잖아요.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의도적으로 함께 영화를 보게 됐어요. 어땠어요?
시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에서는 각자의 연인과 극장에 와서 모르는 사람과 연인적인 감각을 주고받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애초에 구현할 수 없어요. 모르는 사람끼리 쌍방으로 연애 감각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고, 혹시라도 한쪽에서 느꼈다고 해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요. 이 시는 사실, 제가 현실에서 감각하는 것을 완전히 반대로 표현한 시거든요. 저는 누군가와 같이 영화를 보더라도 같이 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롯이 떨어져서, 독립된 느낌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 일행과 약간 멀어진 느낌이 들어요. 좋은 영화일 때 특히 더 그런데, 영화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실에 있는 사람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느낌을 비틀어서 타인과 영화관에 갔다는 식으로 표현한 거죠. 결국 이 시에 등장하는 낯선 사람은 실제로는 화자의 연인이에요. 영화가 끝난 뒤 연인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죠.
‘낙원동 시절 서울아트시네마’를 좋아한다고 했죠. 오늘 방문한 극장이 그 위치라고 알고 있는데, 어땠는지 궁금해요.
이전과 비슷한 지점도, 변한 지점도 많아요. 우선은 화분이나 인조 담쟁이덩굴 같은 것들이 장식용으로 많이 들어왔더군요. 실버극장과 함께 운영하다 보니 내부에는 노인들만 있고요. 예전엔 젊은 사람과 노인이 절반씩 있었거든요. 내외하는 느낌이랄까, 세대 간에 긴장감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사라지고 온전히 어르신만의 공간이 된 것 같아요. 저는 이런 변화가 좋게 느껴져요. 어르신들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잖아요. 종로도 사실은 어르신들의 공간이었는데 최근 익선동이 개발되면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어요. 한정적이나마 어르신이 모일 공간이 있다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의 어떤 점이 좋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상영관과 연결된 야외 공간을 좋아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엔 흡연자가 많은데, 저는 비흡연자지만 그 난간에서 종로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특히 좋아했죠. 극장 위치가 낙원상가 4층이라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어요. 영화를 보지 않는 날에도 찾았고 여전히 종종 들르는 곳이에요.
이전에 <시티 라이트>를 본 적 있나요?
어릴 때는 비디오방에 가거나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많은 영화를 접했어요. 비디오방에 가는 건 제가 영화를 선택하는 일이지만 영화 채널로 보는 건 방송국에서 고른 영화를 보게 되는 건데, 그때 영화 채널을 통해 <시티 라이트>를 보게 됐죠.
여러 번 보면서 감상이 달라졌을 것도 같아요.
새로운 감상은 크게 없지만, 어릴 때 보던 것들에서 취향이 정립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감각은 어릴 때 본 것들, 그때 감상에서 쌓인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처음 <시티 라이트>를 봤을 때의 감상과 오늘의 감상에 큰 차이는 없어요. 판별이 이미 10대 때 이루어졌으니까, 20대든 30대든 그때 만들어진 취향의 연장이라 생각하면 차이가 없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찰리 채플린 좋아해요?
저는 그를 보면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요. 좀 다른 얘기지만, 찰리 채플린을 보면 영구가 떠올라요(웃음). 영구를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고 하잖아요. 채플린을 오마주해서 만든 캐릭터로 알고 있어요. 저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에는 골자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에 ‘영화적’이라고 불리는 요소로만 <시티 라이트>를 만들면 러닝타임이 반 이상 줄어들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 영화에서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계속해서 슬랩스틱 하는 장면이 등장하잖아요. 이런 요소가 당대엔 영화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반영화적인 것으로 여겨져요. 그런 장면들을 삭제하면 남는 건 거의 없을 거란 거죠. 이런 지점이 섞여 있다는 게 채플린 영화의 재밌는 부분 같아요. 지금은 불가능한, 불가능해 보이는 양식이 혼재하는 거요.
ⓒ <시티 라이트>
채플린은 무성영화의 아이콘이잖아요. 무성영화 어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화와는 다른 개념의 영화 같아요. 시로 따지면 이론적으로만 아는 근대시, 신체시 같은 느낌이죠. 비유일 뿐이지만, 유성영화를 소설이라고 한다면 무성영화는 시에 좀더 가까워요.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중간중간 자막이 나오는 형식이죠. 자막이 등장하는 것도 영상 예술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최대한 줄이고, 장면의 분위기나 배우의 동작이 보여주는 뉘앙스에 따라 관객이 유추하도록 하는 게 무성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지점이 시 같다고 느껴져요. 시도 다 말하지는 않거든요.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말하고 보여주는 식이죠.
흑백영화를 보면서 색채는 큰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색이 있어야만 표현되는 것도 있잖아요. 이 영화에선 특히 ‘꽃’이 그렇고요.
흑백영화는 색이란 요소에 시선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확실히 단순하고 명쾌해지는 면이 있어요. 절대법은 아니지만, 시에서도 색채를 애매하게 넣을 거면 차라리 무채색을 유지하라고 하거든요. 무슨 의미냐면, 색이 들어가는 순간 색채 하나 때문에 상징이 더 부여된다는 뜻이에요. <쉰들러 리스트>(1993) 같은 영화는 흑백인데 빨간색 단 하나만 부각하는 효과를 활용하잖아요. 이처럼, 하나의 색채도 크고 작게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생기게 돼요. 그런데 흑백영화는 색채라고 하는 상징이 제거되니까 색이 없는 나머지 부분에 집중할 수 있어요. 연기라든지 흑과 백, 콘트라스트로만 보여주는 심리구조에 집중하게 되는 거죠.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같은 영화가 흑백 구조와 공간으로만 심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영화예요. 저는 흑백영화의 이런 점이 좋아요. 색이 아닌 다른 것들에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요.
인터뷰에 앞서 좋아하는 감독을 물었어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꼽았죠.
나루세 미키오는 작품 대부분에서 여성의 삶을 다뤄요. 남자 감독인데도 집요할 정도로 여성 위주의 이야기를 만들었죠. 남자 감독이 페르소나를 여성 인물로 설정한다는 건 흔치 않은 경우라고 생각해요. 그런 그의 방식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요.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 나루세 미키오의 <번개>(1952)와 <흐트러진 구름>(1967)이라고요.
나루세는 힘들고 갑갑한 상황 위주로 영화를 만들어요. 그게 가족 관계에서 오는 경우도 많은데, 보고 있으면 약간 짜증이 날 때도 있어요. 그런데 <번개>는 그런 중에도 그의 다른 작품보다 마지막이 밝다는 느낌이 있어요. ‘이 삶을 견뎌내겠다.’는 당찬 포부는 그의 어느 작품에나 있지만, <번개>는 비교적 상쾌하고 에너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또, 나루세 감독은 여성의 심리를 나타낼 때 자연이나 계절의 변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가령,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데 이유가 없는 경우는 없거든요. 날씨가 심리를 백 퍼센트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런 기법이 <번개>에 특히 도드라지는데 그런 요소들을 보는 것도 좋았어요. 싱거운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영화에 제삿날 메밀국수 먹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게 너무 맛있어 보여서…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번개>를 보고 나면 항상 메밀국수를 먹곤 했네요(웃음).
<번개>는 흑백영화잖아요. 흑백으로 음식이 맛있어 보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메밀국수가 모양새나 색채 때문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에서 국수를 먹는 장면 앞뒤 상황 때문에 맛있어 보이는 거죠. 많은 영화에서 죽음과 삶 사이에 음식을 넣곤 하는데요. 저는 항상 그런 장면에서 음식이 맛있어 보이더라고요. 어쩌면 <번개> 속 메밀국수는 흑백으로만 표현되어서 더 맛있게 보이는지도 몰라요. 무는 하얗고, 장국은 까맣고, 면도 검은 편이고. 하얀 무가 까만 장국 위로 갈리는 모습은 흑백과 잘 어울리지 않나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좋아하는 영화로 꼽아준 또 다른 작품 <흐트러진 구름>은 나루세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고 있어요. 유일한 컬러 영화기도 하고요.
거기에 의미를 두고 좋아하는 건 아니고, 스토리가 마음에 들어서 좋아해요. 거칠게 요약하자면 여자 주인공이 교통사고로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잃어요.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과 사후 처리 때문에 계속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다지 아름다운 사랑은 아니니까 서로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서서히 관계가 끝나는데 저는 이 모든 게 사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교통사고로 인한 한 인간의 죽음부터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까지 전부요. 피할 수 없이 겪게 되고, 맞닥뜨리고….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것도 숭고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걸 억누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웃음) 재밌었어요.
01~02. <번개>
03. <흐트러진 구름>
저도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하나 찾아봤어요. <흐르다>(1956)였는데, 무척 놀랐어요. 현대적인 느낌이 들더라고요.
맞아요. 그런 감독이에요. 영화를 보면 대개 컷들이 절제되고 세련됐죠.
게이샤를 다루고 있는데 차림새나 말투 등에서 옛스러운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현대 영화를 흑백 처리한 느낌이었달까요.주제적인 측면도 그래요. 영화 대부분이 돈 문제 중심으로 돌아가는데요. 주인공은 항상 가난해요. 돈을 빌리거나, 쫓기거나, 사업을 하더라도 부족하고, 항상 돈 때문에 곤궁한 여성들이 등장하죠. 그 시대에 자본과 관련된 것을 그렸다는 점도 멋있지 않나요? 주제나 영상 모두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독이죠.
그 당시에 여성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도 그렇고요.
맞아요. 그는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게 아니라 여성의 삶 자체를 그려요. 돈, 사회, 남자와 엮인 여성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그리면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한계를 드러내죠. 반면 남자는 대부분 짐덩이예요.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장본인인 경우가 많죠. 나루세 영화 속 여성들은 저항하기 쉽지 않아도 근근이 버텨내는 이미지로 그려져요. 그런 점도 멋있어 보여요.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웃음이요. 영화가 아무리 진지하고 어두워도 보는 사람이 웃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최근에 <미성년>(2018)을 봤는데요. 밝은 영화가 아닌데도 코미디처럼 느껴져서 계속 웃었어요. 장르가 무엇이든, 내용이 무엇이든, 설사 비극일지라도 보는 사람을 웃길 수 있어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웃음이 없는 영화는 삶과 가깝지 않다고 느껴져요. 진짜 우리 인생이 아니라 가식이고 과장이고 허위처럼 느껴질 때가 많죠. 그런데 잘 만든 좋은 영화들은 슬프거나 비극적인 것에만 너무 치우치지 않고, 보는 사람을 웃게 만들어요. 웃음엔 생각보다 많은 기능이 숨어 있기 때문에 좋은 영화엔 웃음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저도 <아무르>(2012)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검색하니까 사운드 트랙이 있더라고요.
전면에 삽입되지 않고 군데군데 쓰이는 음악도 OST 앨범에 실리더라고요. <넬리 앤 아르노> 같은 경우엔 음악으로 갈등을 표현하기 좋은 상황에서도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요. 감정적으로 좀 밋밋하고 메마른 느낌이 들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표면적으로 노출을 잘 안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도 말하지 않고 차단해버리는 식으로요. 음악을 사용하지 않아서 감정선이 더 부각되는 영화였죠.
음악이 없어서 오히려 돋보일 수 있다는 게 재밌네요. 이번엔 원작이 있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얼마 전 SNS에 <고스트 아미> 영화화 소식을 언급했는데, 원작이 있는 영화들 어때요?
<고스트아미>의 원작은 책인데 이미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어요. 현재는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영화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저는 원작이 영화화되는 거에 반감은 없어요. 원작이 책일 때도 그렇고요. 원작이란 개념을 크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다른 장르에서 만들어졌을 때 좋으면 좋은 거고 별로면 별로인 거죠. 원작 유무의 차이일 뿐,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가령 해리포터 시리즈는 원작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책에는 이런 장면이 있는데 영화에는 없네.’, ‘이 귀한 장면을 영화가 망쳤네.’ 등의 이야기가 오가는데, 원작을 영화에 어떻게 다 담겠어요. 그럴 거면 뭐 하러 영화로 만드나 싶기도 하고요. 또, 원작에서 좋은 부분을 영화로 담았을 때 더 좋으리란 법도 없잖아요. 결국 원작을 영화화하는 것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판단일 텐데, 그게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라고 생각해요.
《철과 오크》
송승언 | 문학과지성사
ⓒ <지게차 운전수 클라우스>
“아, 이거 추천했다고 욕먹겠다(웃음).”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1959)
오즈 야스지로 | 드라마, 코미디
“생각 없이 던지는 거 맞아요.”
ⓒ <번개>
<번개>(1952)
나루세 미키오 | 드라마
“그냥 제가 좋아하거든요.”
ⓒ <솔라리스>
<솔라리스>(197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SF, 드라마
“기분이 좋으면 안 좋게 만들어야겠죠.”
ⓒ <비디오드롬>
<비디오드롬>(1983)
데이빗 크로넨버그 | 공포, 미스터리
“밤에는 이거죠.”
“아침에 영화를 어떻게 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저는 죽을 때까지 조조 영화는 못 볼 것 같아요. 그래서 추천할 수가 없네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 장소 협조 낭만극장, 47번가찻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