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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하지 않고 자유로운 모두의 것
#1 B의 메모
A는 스케치북으로 꽉 찬 배낭 하나와 함께 멜버른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꼭다음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어야만 했다.
택시를 타고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피츠로이Fitzroy에 들어서자 오후 두 시쯤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 몇 개의 작은 갤러리를 지나다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번사이드Burnside라는 카페였다.
그의 옆에는 반바지 차림의 신사 두 명이 갤러리 로비에 어떤 작품을 두느냐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조각가와 큐레이터인 듯했다. 그는 문득 B를 떠올렸다. 화가인 그도 큐레이터인 B와 전시 동선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는 배낭을 옆에 두고 주머니에서 작고 두툼한 몰스킨을 꺼냈다. 수첩 안에는 B가 추천해준 ‘가봐야 하는 갤러리’ 리스트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휴대폰 지도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A는 어딘가 좀 구식인 것이 멋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B는 반년간 심혈을 기울인 전시를 마친 후 태즈메이니아Tasmania로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세심하고 다정한 B는 자기가 없을 때 오는 게 걸린다며 400개가 넘는 멜버른의 미술관, 갤러리, 화랑을 분야별, 동네별로 정리해주었다. A는 메일로 받은 리스트를 열심히 노트에 적다, 결국 끝에 가서는 허무해지고 말았다. B가 메일의 말미에 적은 문장 때문이었다..
멜버른에서는 주말마다 아트 마켓이 열려. 네가 사고 싶은 물건은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만든 물건일 수도 있지. 근처 갤러리에 가면 세계에서 알아주는 작가의 전시를 볼 수도 있어. 축제는 얼마나 많이 하는지, 그것만 보러 다녀도 한 달이 빠듯할 거야.
그런데 사실, 내가 적어준 리스트들은 놓쳐도 좋아.
멜버른에서 일할수록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 가끔은 구분이 어려워. 설명하기 어렵지만, 조이 헤스터Joy Hester의 작품 앞에서 보내는 시간과 로열 보태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s의 그늘에서 일광욕하는 시간이 다른지 모르겠어. 난 시드니 놀런 Sidney Nolan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오후 네 시쯤 거리의 나무가 멜버른의 낮은 주택가 건물에 만드는 그림자와 우열을 가릴 순 없을 것 같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아무래도 이곳은 전혀 고상하지 않고, 자유로우니까. 또 여기서 보는 것들은 모두의 것이야.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지. 하지만 여기서 지내다 보면 넌 너만의 것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내가 돌아가면 어땠는지 알려줘. 물론 이곳 태즈메이니아로 보내주는 편지도 좋고.
– B
A는 쫓기듯 여행하는 타입이었다. 무조건 많이 보는 것, 많이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여행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무거운 배낭이 증명하고 있었다. A는 갈아 입을 옷 두어 벌과 스케치북으로 꽉 찬 배낭을 우습다는 듯 내려다보다 이번에는 B의 방법을 믿어보기로 했다. 옆자리의 신사들은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작품을 로비에 두기로 했을까. 얼핏 갤러리의 이름을 말했던 게 기억났다.
Words Lee Hy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