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

몸으로 길을 기억한다는 것

산티아고 가는 길

산티아고Santiago로 향하는 내 걸음에는 종교적인 목적도 심신의 건강을 위한 목적도 없었다. 단지 일정 시간 동안 무작정 걸을 곳이 필요했고 그렇게 걷다 보면 내가 걷는 길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생경한 길의 생김새를 몸으로 경험하는 일 말이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 바람의 세기와 주변의 소리들을 느끼고 또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기에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바다를 따라 걷기

 

열흘의 시간을 정하고 걷기로 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산티아고로 가는 수많은 경로 중 북쪽 길Camino del norte을 선택했다. 바욘Bayonne 혹은 이룬Irun부터 산티아고까지 900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로, 대서양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사람들이 주로 걷는 길은 프랑스의 생장 피드 포르St. Jean Pead de Port에서 시작하는 프랑스 길, 카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és로, 이 길을 걷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루 20여 킬로미터씩 한 달 반 정도를 걸어 산티아고에 닿는다. 하지만 나처럼 시간이나 체력의 제약이 있는 경우 3, 4회의 여름 바캉스로 나누어 여유롭게 걷기도 하고, 산티아고에서 멀지 않은 도시부터 시작해 짧은 기간 내에 완주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나와 친구들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전부터 가보고 싶던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에서 그 여정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3일 정도 머물며 마을을 구경한 우리는 산세바스티안을 떠나 열흘 동안 140킬로미터를 걸었고 그 사이 아홉 개의 ‘알베르게Albergue(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거쳤다.

카미노를 걸으며 잊을 수 없는 것들 중 한 가지가 바로 알베르게다. 녹초가 다 돼서 이제 더는 못 걷겠구나 싶을 때쯤 항상 알베르게가 보였다. 신기하게도 걷는 열흘 내내 그랬다. 산꼭대기에 멋지게 자리 잡은 산장 같은 곳, 우리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주던 곳, 성당을 개조해서 만들어 놓은 곳, 귀여운 강아지가 뛰놀던 동산이 있는 곳, 폐교 교실에 허름한 2층 침대를 꽉 채워놓은 곳, 그곳에서 우리는 각국의 순례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너무나도 사소한, 그래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알베르게 Albergue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순례자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곳이다. 머문 사람에게는 귀여운 도장을 찍어준다. 공립 알베르게는 자율 기부제거나 하루 5유로 정도의 적은 이용료로 운영된다. 그 외에도 15유로에서 30유로 사이인 사립 알베르게가 있는데 기호에 따라 근처 호텔에서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한 도시에 여러 알베르게가 있다면 취사 가능 여부 등의 시설과 가격대를 고려하여 고르면 된다. 순례자들이 많이 걷는 7~8월을 제외한 시기에는 문을 닫는 공립 알베르게가 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돈을 조금 더 내고 사립 알베르게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걷는 이들의 하루

순례자의 아침은 침낭을 돌돌 마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전 6, 7시경에 일어나 재빠르게 세수를 하고 짐을 챙긴 뒤, 배낭을 메고 식당으로 가 간단히 커피와 빵으로 배를 채운다. 길을 나설 채비를 하는 것이다. 걷는 일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생각해 놓은 마을에 늦어도 3시경에는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숙소가 꽉 차서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곳으로 20킬로미터 가량을 더 걸어야 하거나 차가운 바닥에서 침낭을 깔고 자야 하기 때문이다.

7, 8킬로그램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노란색 화살표만을 의지한 채 쉬지 않고 걷다 보면, 길 위의 즐거움이 ‘걷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걷는 일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일은 함께 걷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 덕분에 늘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을 가까스로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며 걷지는 못한다. 각자의 속도에 맞춰 누구는 저만치 앞서고 누구는 저 멀리에서 뒤따라온다. 

하지만 그 길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된다. 가슴이 확 트이는 풍경을 먼저 마주하거나 사나운 개가 짖는 무서운 상황이 오면 뒤에서 걸어오는 이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길을 지나간다.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감동적인 일이었다.

언제나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땀이 흥건한 옷가지들을 세탁해서 숙소 주변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후 슬금슬금 마을을 산책하러 나가기도 하고. 취사 가능한 알베르게에서는 산책길에 슈퍼를 찾아 저녁거리를 마련했고, 다음날을 위해 초콜릿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숙소에 취사 가능한 곳이 없다면 순례자를 위한 저렴한 메뉴가 따로 준비되어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도장을 받았다(레스토랑뿐만 아니라 바Bar, 성당 등에서도 도장을 받는 일이 가능하다). 

식사를 다 끝낸 이들은 보통 각자 휴식을 취하는데 조용히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 모여 게임을 하는 무리도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각자 살아온 인생을 들려주기도 하고 다음 길에 대한 조언 혹은 지나왔던 길에 대한 이야기를 안주 삼아 맥주나 와인을 홀짝이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그날 하루를 마무리하고 저녁 10시가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잠에 빠져든다. 우리의 일과는 걷다가 힘이 들면 조금 쉬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말동무가 필요하면 옆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피곤하면 잠에 드는 것이다. 순례자의 시간은 이렇게도 단순하고 정직하게 흐른다. 돌아보면 그런 순간들이 내 마음을 무척이나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고 머릿속을 한없이 맑게 해주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길을 걷다 보면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숨이 차오르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이 험해서, 발에 물집이 잡혀서, 관절이 아파서, 비가 많이 내려서, 산짐승들이 길을 방해해서, 위험하고 짜증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같은 곳을 향해 걷는 이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