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ma & Book]

추운 건 정말 싫어

추위와 밤샘이 싫다. 정말 싫다. 그래서 20여 년 전에 영화 만드는 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일만큼은 계속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깨달았다. 나는 한국 영화 중에서 <남한산성>(2017)을 가장 좋아한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취향이 좀 고루해 보이나?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싶었던 이유는, 영화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같은 예술 형식이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종합예술. 근사한 옷을 입은 멋진 배우가 아름답고 독특한 배경 속에서 웃고 울고 움직이고 인상적인 대사를 말한다. 그 화면 위에 음악을 입히거나, 목소리를 넣거나, 그래픽을 더할 수도 있다. 하나의 컷과 다른 컷이 붙을 때 솟아나는 그 기묘하고 짜릿한 에너지란! 나는 영화 언어라는 것을 너무나 사랑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영화 창작의 세계를 떠났다. 도저히 영화를 해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나 자신에게 온갖 상황에서의 장시간 촬영, 협업의 크나큰 스트레스, 막막한 투자와 배급과 개봉의 관문을 견디며 뚫고 나갈 자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겨울에 밤을 새우는 것만큼은 정말로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아침형 인간이다. 추우면 욕을 하고, 어두워지면 자야 한다. 그런 사람은 영화를 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왠지 한심한데…)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 아쉽지 않으냐고? 살면서 내가 포기한 것이 어디 그것 하나뿐이겠는가? 아쉬운 만큼 안도감도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 추운 날 쏘다니지 않고, 해가 지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은 내 행복의 필수 요건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학 4년을, 그 많은 등록금을 그냥 허비한 것인가? 나는 실패한 영화학도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성공과 실패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성공은 살다 보면 지나게 되는 어떤 지점들에 불과할 뿐, 지속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 역시 마찬가지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며 실패한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영화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 쪽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강렬한 스타일에 열광하던 대학 때와는 달리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보다 조용한 영화들에 더 마음을 주게 됐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게 하는 영화들, 삶이란 어떤 것인지, 살아간다는 일은 어떤 것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을.

이제는 <오징어게임>으로 전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감독 황동혁의 <남한산성>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과거의 나와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하는 지금의 나,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킨 영화다. 사실 나는 사극을 딱히 좋아하지 않고 역사에도 큰 관심이 없다. 김훈이 쓴 원작 소설도 읽지 않았다. 그래서 톱스타들이 잔뜩 출연하고도 크게 흥행하지 못한 이 영화를 개봉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별 기대 없이 티브이로 틀었다가 놀랐다. 내가 이런 명작을 놓칠 뻔했구나. 

영화는 첫 장면부터 압도적이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는 단단하고 냉정한 문장 뒤에 설경이 펼쳐진다. 홀로 말을 타고 청나라의 군대를 바라보는 슬픈 얼굴의 남자와 그에게 쏟아지는 장대비 같은 화살들.

때는 인조14년 병자호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에 피신한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영화 속 배우들은 시종일관 고개를 조아리고 엎드린 채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 설움과 화를, 그 치욕을 입김과 함께 토해낸다. 나는 세자를 볼모로 보내서라도 청나라와 화친해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명길과, 청에 결사항전해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의 설전을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지켜본다. 저 두 사람, 둘 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자꾸만 싸우잖아. 하나는 실리가 중요하고 하나는 명분이 중요해. 대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지? 인조의 두 신하는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의 대의는 나라를 지키는 것인데, 다만 어떤 일이 나라를 지키는 일인지에 대한 정의가 다를 뿐이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다. 두 사람의 대립은 내 머릿속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는 동안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이 이어지고, 배우들이 걸친 갓과 도포는 한숨이 나올 만큼 근사하고, 그들이 내뿜는 하얀 입김은 마치 일부러 준비한 소품 같다. 한국의 살이 에는 듯한 추위는 영화의 배경을 우아한 무채색으로 덧칠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슬프고 아름답다. 이것이 영화라는 것이다. 전방위적인 아름다움. 모든 예술의 형식을 통합한 예술. 아마 오래전 내가 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영화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진하게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끔 서점에 갈 때마다 책을 꼭 한 권씩은 산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나는 이 서점에서 처음 만나는 책, 그러니까 이 서점이 아니었더라면 존재조차 몰랐을 그런 책을 고른다. 특정한 서점에서 낯선 책과의 만남을 나름대로 기념하는 것이다. 화가 장욱진의 그림산문집 《강가의 아틀리에》도 그렇게 어느 서점에서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와는 영영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오래전 어디엔가 장욱진 미술관이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욱진이 누군데?’ 하는 마음으로 찾아보니 그림이 좋았다. 아이 그림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 그린 이의 마음도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할 것 같은 그림이었다. 계속 보고 싶은 그림, 마음이 가는 그림들이었다.

이 책은 한 번에 다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말 그대로 화가의 작업 노트 같은 책이라서, 동어 반복이 많은데다 딱히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화가답다. 심플하고 빈 데가 많으면서 따뜻하고도 쓸쓸한 느낌이 드는 그의 글은 그의 그림들과 닮았다. 그러니 이 책은 침대나 소파 옆에 두고 오다가다 한 번씩, 두세 페이지씩 읽는 것으로 족하다. 그 정도로도 이 성실한 화가의 깨끗한 마음에 충분히 젖어들 수 있다.

나는 사십여 년이 더 되는 세월을 그림과 술로 살아왔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요, 술은 나에게 휴식을 안겨 주는 것이다. 늘 생각하고 있는 일이지만 사람의 몸은 이 세상에서 다 소모시키고 가야 한다. 그것이 꼭 옛말에 있는 것처럼 “죽으면 썩을 육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존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소모를 뜻하는 것이다. 소비벽이 강한 나는 내 몸과 마음(정신)을 죽을 때까지 그림 그리는 데에 다 써 버릴 작정이다.
물론 남는 시간에는 예의 소비벽을 발휘하여 ‘휴식의 술’을 마실 것이다.

–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중에서

장욱진은 서울을 떠나 시골의 외딴 마을에 작고 허름한 오두막을 지어 살면서 매일 그림을 그리고 매일 술을 마신다. 그가 그린 작은 그림들 속, 그가 사랑하는 작은 것들이 매일의 외로움과 함께한다.

매일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고치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화가들의 작업 방식은 나에게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시간과 노력은 자칫 무용해질지도 모른다.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고, 만든 작품이 성에 차지 않아 폐기해야 할 수도 있다. 점 하나하나를 찍고 또 찍는 일을 수개월 동안 계속하는 작가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치지도 않고서 어떻게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작년에 홍천에 여행을 갔다가 시립 미술관에서 한 조각가의 전시를 봤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시 팸플릿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작업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며 오늘의 수행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나에게 매일의 작업은 매일의 수행이다.” 눈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매일의 작업이 매일의 수행이다. 완성은 별개의 문제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매일 자신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일상적 노동과 비일상적 창작은 하나가 된다.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완성된 영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고행일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했고, 가능한 한 피하고 싶기까지 했다. 그 과정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 만드는 일을 포기했다. 

지금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정의 어려움이나 내가 싫어하는 변수들을 나의 일로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렇게 기다렸어야 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이 세상의 모든 벽과 모든 산을 넘어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지금도 나는 영화 촬영이라는 버거운 과제를 즐길 수 없을 것 같다. 추운 밤의 야외 촬영이라니, 소름이 다 돋는다. 다행히 쾌적한 실내에서 혼자 글을 쓰고 그 글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일만큼은, 아무리 오래 해도 질리지 않는다. 매일의 수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창조된 생명이 분만될 때까지 꿋꿋하게 기다리는 일만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갈파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꾸준하게 추구하며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그것을 배우고 고통스러워하며 또 배우는, 그러면서도 그 괴로움에 지침이 없이 그 괴로움에 감사하는 데에 예술가의 생활은 충만하리라 믿어진다.

– 《강가의 아틀리에》 중에서

<남한산성>을 만든 감독 황동혁은 <오징어게임> 시리즈를 촬영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금니가 다 빠졌다고 했다. 황동혁은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만든 영화는 짜릿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아는 사람을 찾기란, 그런 일을 할 줄 알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욱진의 《강가의 아틀리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의 영역을 메워 나갑니다.” 매일의 수행에 지쳤을 때, ‘왜 이렇게 힘든 일을 괴로워하며 하고 있나? 왜 나는 이것을 하고 있나?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같은 질문들이 그 달의 공과금 청구서처럼 우편함에 꽂힐 때, 그때는 이 심플한 문장이 하나의 심플한 답이 되어줄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시간의 영역을 메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Movie—황동혁 <남한산성>(2017)

Book—《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 | 열화당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