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ano

데마노, 손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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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마노, 손으로부터

바르셀로나에서 만들어 판매되는 물건들에는 ‘Made in Barcelona’라고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메이드 인 스페인’이 아니라 ‘메이드 인 바르셀로나’. 이 말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외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디자이너입니다. 나는 작은 가게에서 물건을 팝니다. 그리고 나는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한 가지를 더 보태도 좋겠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파도를 담고 있습니다.

보른 지구에 있는
평범한 가게

데마노demano는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보른 지구’에 있다. 보른 지구는 디자이너, 화가들의 작업실이 모여있어 작고 매력적인 가게들이 많은 곳이다. 데마노는 그다지 튀지 않는 가게라 오가며 자주 지나치면서도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데마노’, 우리 말로 해석하면 손으로부터.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니 리사이클링 제품을 판다고 쓰여있었다. 손으로 만든 리사이클링 제품이라니. 그때부터 나는 데마노 앞을 지날 때마다 흘끔, 가게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성큼 가게로 들어섰다. 

가방이며 지갑 등 제품을 살펴보다가 카운터에 앉아있는 나이가 지긋한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영어를 잘 못하고, 우리는 스페인어가 서툴다.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가 여인은 잠깐 말을 멈추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한 여인을 데리고 나왔다.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그는 여인의 딸이라고 했다. 이후 스페인어와 영어가 섞인 대화가 오갔는데, 언제 스페인어를 썼고 영어를 썼는지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만나는 외국인과 이렇게 오래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보는데, 나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잘 못하는데, 대화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다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영어로도 스페인어로도 자신 있는 말. 당연히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자랐을 거라고 짐작하고 건넨 질문이었다. “콜롬비아요. 바르셀로나로 아주 오래 전에 이주했어요.” 아, 순간 남아있던 긴장이 모두 풀렸다. 곧장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3년 전에 콜롬비아를 여행했어요.”, “보고타요?”, “네 보고타랑 메데진….” 그리고 연이어 홀린 듯 고백했다. “저는 콜롬비아를 좋아해요.” 3년 전,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 숱하게 외쳤던 말을 아주 오랜만에 꺼낸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아마 몹시 수줍어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그는 웃었다. 바르셀로나에 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는 콜롬비아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스스로 전생에 콜롬비아나였을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고, 그는 콜롬비아나이니까. 우리는 생의 어느 지점,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다.

길을 걷다 만난
버려진 현수막

그의 이름은 마르셀라. 데마노의 대표이자 디자이너라는 그는 나보다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도 잘했다. 그의 인내심 덕분에 우리는 이야기를 느리게나마 이어갈 수 있었는데, 중간중간 내가 잘 알아듣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99년이었어요.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걷는데, 버려진 현수막을 봤어요. 재질이며 상태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다가 집에 가져왔죠. 그걸로 가방을 만들었고요. 그게 데마노의 시작이에요.” 

나도 많이 봤다. 바르셀로나 거리에는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항상 걸려있으니까. 일 년 내내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들을 안내하는 현수막은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게 할 정도로 아주 예쁘다. ‘바르셀로나는 디자인을 참 잘하는구나.’ 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17년 전 마르셀라는 현수막의 다음 생애를 생각했다. ‘이 근사한 현수막으로 가방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현수막은 마르셀라의 손을 거쳐 책가방이나 숄더백이 되었다. 지갑, 노트북 파우치가 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쓰임을 다한 카이트도 마르셀라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가로등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도,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는 카이트서핑도 바르셀로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이 무심코 지나쳐 보낼 것들이기도 하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자란 디자이너.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 그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걸까.

현수막이 쌓여있는 작업실

마르셀라는 작업실로 우리를 초대했다. 작업실은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시내 외곽에 있었는데,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 거리를 걷는 동안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공간에 가는 일은 늘 설렌다. 게다가 마르셀라를 두 번째 만나는 날이었으니까.작업실에서는 한창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산에서 나온 천으로 가방을 만드는 중인 것 같았다. 

“폐업하는 오래된 우산 공장에 가서 남은 천을 받아왔어요. 그걸로 장바구니나 간단한 가방을 만들죠. 우선 가볍고 방수도 되고요.”

한쪽에는 현수막, 카이트 등 재료들이 쌓여있었는데, 정돈이 잘 되어있다. 현수막 사이를 걷다 보니 내 눈에 낯익은 것들도 보였다.

“어? 이거 작년 메르쎄 축제 현수막이네요?”, “네, 그거 유명한 화가, 신 스컬리가 그린 그림이에요.” 현수막은 바르셀로나 시와 정식으로 계약해서 직접 받는다고 한다. 축제가 끝나면 현수막은 플라스틱으로 분류되어 버려지는데 그중 일부를 가지고 온다. 화가나 사진작가와의 저작권 협상도 모두 완료한 후에 사용한단다. 최근에는 에티오피아 후원 공연 주최 측에서 공연 현수막을 활용한 책가방을 주문해 대량 제작하기도 했단다. 그 책가방들은 에티오피아로 보내질 예정이다.

“바르셀로나 거리에 걸리는 대부분의 현수막이 저에게로 와요. 새로운 현수막이 거리에 걸리면 눈여겨보게 되죠. 특히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의 현수막을 발견하면 가슴이 뛰어요.”

Made in BAR.CEL.ONA

이곳 사람들은 바르셀로나를 ‘BAR.CEL.ONA.’ 세 음절로 나누어 표현하곤 한다. 이곳 말로 바르(BAR)는 바, 셀(CEL)은 하늘, 오나(ONA)는 파도. 바와 하늘과 파도, 바르셀로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세 단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 쌓여있는 현수막과 카이트, 우산 천들, 그리고 그것들로 만들어진 제품을 보면서 어쩌면 이게 진짜 ‘메이드 인 바르셀로나’이겠구나 생각 했다. 쾌청한 하늘 아래서 햇볕을 오랫동안 머금은 현수막과 긴 시간 파도와 바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중해 위를 날아다닌 카이트로 만든 가방을 산다는 건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파도, 햇볕과 바람, 시간을 함께 사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실은 마르셀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내내 가방 하나가 자꾸 눈에 밟혔다. 건물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다란 현수막을 리사이클링해 제작한 가방인데 하나의 현수막에서 2백 개의 가방이 나왔다고 한다. 몇 개 남지 않은 것 같아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들어 당장 사고 싶었지만, 지금 저걸 사겠다고 말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줄 게 뻔해 참았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데마노’로 가서 그 가방을 살 것이다. 가방을 멜 때마다 그 순간 내가 어디에 있든 간에 나는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 앞 높은 건물에 한 시즌 걸려있던 현수막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햇볕, 공기도 함께.

데마노 demano
demano.net
carders 36, Barce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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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