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LITTLE PRINCE

기다리는 아빠에게

DEAR MY LITTLE PRINCE 

기다리는 아빠에게

여행을 시작한 지 석 달째였다.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는데 아빠가 말했다. “네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그 목소리가 맴돌아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언젠가 엄마와 아침을 먹다가 영화 <접속>에 대한 얘길 나눈 적이 있어. 주인공은 한 노래를 듣기 위해 음반가게를 돌아다녀. 영화의 배경은 90년대고 LP가 CD로 바뀌던 시기였지. 애타게 LP를 찾아다니는 걸 보니 80년대도 궁금하더라고. 엄마 젊을 땐, 듣고 싶은 음악을 어떻게 들었느냐고 물었어. “음악감상실, 다방, 음반가게 같은 곳에 가면 들을 수 있었지.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기도 했고. 어릴 땐, 전축도 부잣집에나 있었거든. 음악뿐이니? 휴대폰이 없으니까 사람 만날 땐 어땠겠어. 만나기로 약속을 잡으려면 찾아가거나 편지를 써야 하고, 약속했어도 늦으면 왜 안 오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땐 뭘 하든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 많았지.”

“우린 우리가 길들이는 것만을 알 수 있는 거란다.”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는 거지.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줘.”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다음날 다시 어린 왕자는 그리로 갔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이 필요하거든.”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엄마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다가 이 이야기를 떠올렸어. 무슨 책인지 알지? 나 열여덟 살 때부터 이 그림책, 그러니까 《어린왕자》를 좋아했어.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새 친구를 사귈 때, 오랜 친구를 보지 못할 때,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쩔 줄 모를 때 읽는 책이야. 수십 번을 읽었지만, 매번 이 부분에서 여우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거든. 왜 같은 시각에 와야 하는지, 어째서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만 하는지. 의식은 또 뭔지.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가도 되는 거잖아. 보고 싶은 친구면 언제와도 반갑지 않을까? 마음은커녕 얼굴 단장할 틈 없이 민얼굴로 만나도 좋을 것 같은데….

엄마 얘기를 듣다가 힌트를 얻어서 이런 상상을 해봤어. 전화가 없는 오늘을 그려보는 거야. 오늘은 월요일이고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출근하자마자 좋아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그를 만나려면 어떻게 할까? 편지를 쓰겠지. ‘이번 토요일에 만나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요? 토요일 한 시에 보문역 4번 출구 앞에서 만나요.’ 점심시간이 되면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칠 거야. 거절하면 어떡하지, 주소는 제대로 썼나, 그런 생각을 하며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을 보내겠지. 목요일 즈음엔 집 앞 우체통을 수시로 확인할 거야. 몇 번씩 열어보고 손을 넣어 우체통 바닥도 쓸어보겠지. 그러다 손끝에 편지 한 통이 걸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만나자는 답장의 기쁨도 잠시, 고민이 시작될 거야. 무슨 얘길 하지. 이번 주에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즐거웠던 걸 얘기해줘야지. 할 말을 고르고, 예쁜 옷을 고르고 골라, 약속 장소로 나갈 거야. 아, 쓰다 보니까 아빠는 이미 알고 있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잖아. 아무리 바빠도 친구나 애인과 시시때때로 얘기할 수가 있어. ‘오늘 점심은 간단히 샌드위치 먹었어. 너는 뭐 먹었어?’, ‘이거 봐봐. 이 영상 진짜 웃기다.’, ‘이제 퇴근해서 집으로 가고 있어. 저녁 같이 먹을까?’ 이런 걸 매일, 몇 년을 반복했던 게 나의 20대야. 온종일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하면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우리 세대에겐 자연스럽고 익숙한 일이야. 이 안에만 있는 기다림도 있어. 데이트가 끝나면 잘 들어갔느냐는 문자메시지가 오길 기다린다거나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지워지길 확인하는 일들. 떨리고 행복하지. 그렇지만 ‘이것보다 조금 더 기다리면 어떨까.’를 자꾸 상상하게 되었어.

아빠, 나는 지금 파리에 있어. 여행 중에 전시나 공연을 보며 기다림에 대한 상상을 이었던 적이 있어. 보고 싶으면 문자메시지를 보내듯 마음만 먹으면 컴퓨터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잖아. 귀찮음을 무릅쓰고 샤워를 하고, 화장하고, 옷을 입고, 거리를 걷고, 지하철을 타고, 티켓을 사는 수고를 해야만 해. 번거로울 법도 한데 여전히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접속>의 여주인공과 엄마가 음악을 듣기 위해 어디론가 향했듯. 그런 게 여우가 말하는 일종의 ‘의식’이 아닐까. 이번 여름엔 보고 싶은 것이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그러니까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

아빠는 기다림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 어릴 땐, 기다리는 건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어른의 나이를 갖고 다시 생각해보니 기다리는 사람은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기다리려면 어떤 긴 시간이 따라가야 하다 보니, 그 시간이 여정처럼 남는 거 같아. 좋아하는 이에게 편지를 부친 사람은 평일 내내 자신의 일상을 보냈을 거야. 업무를 처리하고, 친구도 만나고, 밥도 먹었겠지. 공연장으로 향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공연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지만, 가는 길에 근사한 노을을 발견했을지도 몰라. 공연은 잠시 잊고 멈춰서 노을을 구경했을 수도 있겠지. 아빠도 그렇지? 나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종일 나만 기다리고 있진 않았잖아. 매일 아침엔 동네 뒷산을 올랐겠지. 산에서 내려오면서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했을 거고, 저녁나절엔 강아지 하루와 산책하는 것도 거르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어느 시간이 되면 내가 무얼 하고 지내나, 언제쯤 오려나 궁금했겠지.

요즘은 애써 기다리는 시간을 만들곤 해. 그건 오늘 보고 싶은 아빠를 내일에서 기다리는 일이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도톰히 덮은 아빠의 얼굴을 그리워하는 일이고,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파리의 거리를 아빠와 걷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기도 해. 아빠, 우리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만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서로를 기다려본 적이 있다는 건 알아. 그 시간에 아빠는 나를, 나는 아빠를 길들였다는 것도 알 것 같아.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기다리겠지. 더는 기다릴 수 없는 날도 오게 될 거야. 슬픈 일이지만, 슬픔 안엔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어린왕자가 책의 맨 마지막에 들려줬던 얘기지. 아빠가 이 비밀을 풀 수 있는 힌트를 줬어. 언젠가 우리 《어린왕자》의 다른 비밀을 풀어봅시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파리에서 딸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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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