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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가 있는 풍경
Collect moments
not things
빨래가 있는 풍경
빨래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었구나, 깨달은 건 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였다. 아마 처음부터는 아니었을 것이다. 출발의 설렘과 긴장이 휘발된 뒤에, 금방 돌아갈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마음이 차츰 느긋해진 뒤에, 낯선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 이곳에서 한동안 살아볼 사람처럼 짐을 부리게 된 뒤에, 그러나…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아주 마음을 다 주지는 못하고 있을 때, 그 풍경은 다가왔을 것이다. 빨래는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동시에 내가 떠나온 삶을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내가 살아볼 수도 있는 삶, 그리고 아마도 내가 살아가게 될 삶. 낯선 곳에서 모든 페이지를 새로 쓸 수 있다는 작은 흥분과 아무렇게나 써온 지난 페이지를 끝내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 그럴 때면 나는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인지, 여태껏 내가 살아온 삶인지. 그걸 모르는 채로 매번 내 것이 아닌 일상을 향해 카메라를 들던 순간의 나는 아마도 조금 외로웠던 것 같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의 삶을 상상하는 일
좁은 골목길의, 낡은 아파트 창가의, 지붕 위의 빨래를 찍는 일은 많은 것을 짐작하게 했다. 손바닥만 한 아기 옷들이 올망졸망 매달린 빨랫줄을 볼 때면 생각했다. 저 집엔 아기가 있구나, 밤이면 열린 창의 틈새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하겠지. 불이 켜지고 커튼 너머로 아이를 어르는 어린 엄마의 실루엣이 비치기도 할 것이다. 비슷한 색깔의 낡은 작업복들만 널린 집도 있었다. 베란다의 화분들은 시든 구석 없이 싱그러웠다. 매일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잠들며 화초처럼 일상을 돌보는 사내가 혼자 살고 있을 것 같았다. 빨래를 찍는 건 그런 식으로 내가 모르는 삶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여행이란 참 이상하다. 나의 생활 바깥에서 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생활 바깥을 잠시 서성이다 돌아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바깥에 서서 생활의 안쪽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스스로 원해서 걸어 나온, 그 단조롭고 눅눅한 삶의 안쪽을.
비가 와도 걷지 않는 빨래가 널린 옥상도 있었다. 빨래는 저 홀로 젖고 마르기를 반복했다. 나는 혼자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창가에서 옥상을 내려다보며 옷의 주인을 궁금해했다. 마르고 다시 젖기를 반복하는 동안 버석버석해졌을 빨래의 감촉을 떠올렸다. 내내 움직이지 않는 것 같던 그 풍경은, 그곳을 떠나던 날 아침에야 달라져 있었다. 밤새 빨래가 걷히고 없었다. 저 옥상의 아래, 여섯 개의 창문 중 어느 창문 안엔가 옷가지의 주인이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이 알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빨래만 보아도 도란도란 둘러앉는 식탁이 떠오르는 집도 있었다. 식구가 몇일지, 그들이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애칭으로 서로를 부를지 상상하다 보면 그보다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어떤 일로 울고 웃을지,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그리워할지. 깊은 밤, 저 빈 창으로 골목길의 가로등을 내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그런 생각들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홀로 여행하던 나를 덜 외롭게 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오랜 여행을 하는 여행자가 빨래를 하게 되는 순간이란 비교적 분명하다. 이곳에 생각보다 오래 머물게 될 거란 예감이 들 때. 그게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빨래가 마를 때까지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의 빨래는 즐겁다. 배낭을 뒤집어 모든 옷을 탈탈 털어내어 한꺼번에 빨다 보면, 한동안 구겨 넣고 다닌 마음을 그런 식으로 꺼내어 헹구는 것 같다. 야간버스에서 덮고 자기를 반복하는 동안 퀴퀴한 냄새가 밴 외투도 꺼내 욕실로 던진다. 그럴 땐 샤워를 하면서 옷가지를 자박자박 밟는 게 힘들이지 않는 방법이다. 샴푸와 비누 거품, 오랜 걷기로 단련된 야무진(?) 발바닥 아래서 묵은 때가 쏙쏙 빠져나간다. 그런 다음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호스텔의 옥상이나 뒤뜰, 머무는 방의 베란다로 가져나가 넌다. 빨래를 다 널고, 바람에 나부끼는 그 동네 다른 집들의 빨래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이곳에서 살아 보려는 사람같이 느껴지곤 한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마음을 스치기도 한다. 아주 진심은 아니지만, 완전히 진심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마음. 그런 식의 흔들림은 몇 번씩, 예고도 없이 마음을 베고 지나간다. ‘결국 떠나야 하는 운명의 여행자는 길 위에서 몇 번이나 머무는 꿈을 꾼다. 이곳에서 생의 남은 모든 아침을 맞는 꿈을. 문득 내 몸의 일부처럼 애틋해진 사람과, 오래 알고 지낸 듯 마음 맞는 친구들과 여기서 이대로 살아가도 좋겠지 생각하는 순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행복하게 그려지는 꿈.’ 언젠가 나는 그렇게 적은 적 있다.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들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홀로 여행하던 나를 더 외롭게 했다.
우리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사라질 거야,
그렇지만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여행의 순간들 속에서 빨래가 있는 풍경을 골라 꺼내는 동안, 언젠가 애인이(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친구였지만) 들려준 얘기가 반복해서 떠올랐다. 아홉 살, 혹은 열 살 무렵이었을까. 그맘때 그 애는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부모가 일하러 나가 텅 빈 집에 가방만 던져두고 친한 친구 하나와 그 동네에 사는 모든 친구 집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가서 뭘 했는데? 아무 것도 안 했어. 그냥 찾아가는 게 전부였어. 어른들이 웬일이냐고 물으면 “물 마시러 왔어요!” 하고 물 한 잔 마시고서 또 다음 집으로 뛰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 얘기가 좋아서 몇 번쯤 다시 들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럴 때 그는 그 동네의 집과 집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골목이 얼마나 좁았는지도 설명해주었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집들이 엉키듯 붙어서 있는 동네는 외롭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아이들과 외로운 어른들이, 제 외로움을 서로에게 내색하지 않은 채로 고단한 하루를 열고 닫는 동네였을 텐데도. 그리고 상상하곤 했다. 해가 높이 떠 있는 오후부터 저물녘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소년들을. 가쁜 숨으로 더러 갈비뼈 아래가 시큰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양은그릇에 내어주는 시원한 냉수를 마시고는 소매로 입을 쓱 닦곤 했겠지. 그리고 다음 집으로 출발. “너희들 웬일이니, 동훈인 학원가고 없는데.”, “물 마시러 왔어요!” 그 얘기는 꼭 해지는 풍경처럼 따뜻하고 쓸쓸했다.
이제 그 거미줄 같은 골목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비탈에 모여 있던 키 작은 집들을 모두 밀어낸 자리에 아파트들이 높이 솟았다. 그곳에서 보낸 그 애의 어린 시절도 그런 식으로 영영 묻혀 버렸다. 나중에 우리가 오누이 같은 연인이 되고, 그 동네 건너편 어딘가의 언덕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 애는 먼 풍경에 손가락을 짚으며 일러준 적 있다. 저쯤이 어떤 골목이었고, 저기 보이는 데가 누구누구네 집이었는지. 그런 식으로 말해주어 봤자 나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 애가 자란 동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저녁이 좋았다. 이제 그 애에게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찾아가 걸어볼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사라지고 없다. 기억 속에서만 짚어갈 수 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골목,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집들. 이렇게 말하면 좀 슬픈 이야기 같지만, 나는 그때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기억함으로써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은 빨래처럼 나부낀다. 젖은 옷가지를 널고 햇볕에 바짝 마른 옷가지를 걷고 그것을 다시 꺼내 입듯이 매일은 반복해서 이어진다. 돌아와 생각해 보면 여행을 떠나 그리워했던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날들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리워하는 것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평범한 날들. 그렇게 생각하면 기억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그러니 더 열심히 기억해야 해.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애는 나를 돌아보았지만 다시 묻는 대신 난간을 짚고 선 내 손을 풀어 잡았다. 사라져 버린 동네를 왼편에 두고서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기억하기로 한다. 마주 잡은 손바닥에서 촘촘히 배어나는 땀. 멀리서 차례로 눈 뜨듯 불 켜지는 가로등.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동안 샌들 위에서 계속 앞으로 미끄러지던 발. 몇 번째 계단에서였던가, 샌들에서 기어이 빠져나와 바닥을 짚고만, 어딘가 머쓱해 하는 듯한 내 엄지발가락을 보며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칼발이어서 그래, 그만 웃어. 여름날 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웃느라 숙인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가 사랑한 것들은 언젠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에 나는 다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기억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그것으로 되었다고. 그 언덕에도 빨래는 나부끼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처럼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