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You

세상에 없는 마을
아이에게

27년 동안 내게 용기였던 아이에게.

짝꿍과

단짝

유치원에 다닐 때 용기라는 친구가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크고, 그 나이대 남자애들처럼 짓궂은 애였다. 용기는 나를 자주 괴롭혔다. 머리끈을 빼앗아 도망가거나 큰 손으로 등을 ‘탁’ 치고 모르는 척하는 식이었다. 용기가 그럴 때마다 머리끈을 찾아다 주거나 발을 걸어 휘청이게 하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가 단짝이었던가? 서로의 마음은 분명히 그랬지만 남들 눈에까지 대단해 보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절반은 쑥스럽고 절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사이, 생일 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할 때 아무도 모르게 서로의 초대장만 좀더 정성 들여 만드는 사이.

하루는 유치원 야외 수업으로 놀이터에 나갔고 우리는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 앉아 그림을 그렸다. 원장 선생님은 짝꿍과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아이와 나를 나란히 앉혔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이는 본체만체했다. 나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아이를 툭툭 쳤다. 아이는 옷깃을 내려 손을 덮고는 턱 끝으로 가리켰다. 이거나 잡으라는 건가? 나는 토라져 버려서, 아이 대신 김참이랑 짝꿍을 하겠노라 했다. 김참은 내가 내민 손을 꽉 잡아주는 아이였다. 어깨동무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나눠 주는 아이. 그날 나에겐 두 장의 사진이 생겼다. 심통 난 얼굴로 아이와 다른 곳을 보고 찍은 사진 한 장, 김참과 어깨동무를 하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사진 한 장.

아이와 나는 유치원이 끝나면 잠깐 남아 리코더를 배웠다. 나는 그 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리코더는 재미있었다. 잘 불었기 때문이다. 내 리코더는 빨간색이었고 아이의 리코더는 연보라색이었다. 아이는 리코더를 잘 불지 못했다. 귀가 찢어질 듯 높은 소리가 났고,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먼저 리코더를 그만두었던가? 끝까지 같이 했던가? 그런 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와 나는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았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고 얼마 안 가 우리 동으로 이사를 왔다. 게다가 윗윗집이었다. 아이와 나는 여전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단짝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다정해 본 적이 없던 까닭이다. 우리가 오랜 친구라는 사실은 서로의 부모님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말이면 어느 한 가족에 섞여 놀이공원에 가거나 가까운 데로 나들이를 갔다. 우리는 초등학생이 되고도 데면데면 굴었지만, 아이는 그때도 나를 괴롭히는 남자애들을 혼내주고 다녔다. 그때 아이는 키가 아주 작았지만 똑똑하고 요령 있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커다란 남자애들을 잘도 혼내고 다녔다. 아이가 내 뒤에서 단짝 노릇을 했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랜 뒤에야 알았다.

우리는 초등학생이 되고도 서로의 생일 초대장에 각별히 신경 썼다. 나는 10월이 오면 낙엽을 주웠고 12월이 되면 바삭바삭해진 이파리에 조심스레 편지를 써 코팅했다. 이름만 적을지, 성까지 붙일지 몇 번을 고민했다. 아이의 생일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었고, 어떤 머리핀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길어진 준비 시간으로 언제나 가장 늦게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나였다. 우리의 가을과 겨울은 매년 그런 식으로 완성되었다

다정다감

대동아파트

아이와 내가 살던 곳의 이름은 ‘대동아파트’였다. 대동아파트에는 또래가 많이 살았다. 우리는 이름보다도 언니나 오빠, 형, 혹은 ‘야!’ 같은 말들로 서로를 부르면서 지냈다. 학교가 끝나면 가방만 놓고 뛰쳐나와 이어달리기를 하거나, 롤러블레이드를 타거나, 팽이를 돌리거나, 요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어달리기 하는 걸 가장 좋아했고 아이는… 요요였던가?

사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아이나 친구들이랑 땅따먹기를 하는 것보다도 경비실로 달려가는 일이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놓고 엄마가 쥐여준 간식을 안고 밖으로 나와서는 아파트 후문으로 달려가 경비실을 노크했다. 그 안에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유치원 다녀오니?” 하고 물어봐 주던 아저씨가 있었다. 대부분 경비실 안에서 신문을 읽거나 과일을 먹거나 순찰을 나가던 아저씨는 키가 작고, 마르고, 웃을 때 얼굴에 주름이 많이 지는 인자한 분이었다. 짙은 감색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 가슴엔 노란색으로 수놓인 아파트 이름이 있었고, 모자에도 같은 노란색으로 띠가 둘려 있었다. 아저씨는 나를 볼 때면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크게 미소 지었다. 나를 볼 때만이 아니라 아파트 화단에서 무당벌레를 볼 때도, 가지에서 사마귀알을 뗄 때도, 넘어진 자전거를 볼 때도 웃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에게 좀더 크게 웃어줄 뿐이었다. 그건 내게 인사할 때 유난히 하얀 이가 더 많이 보인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유치원 다녀오니?”라는 인사가 “학교 잘 갔다 왔어?”로 바뀔 때까지, 나는 단 하루도 거르지않고 경비실에 들렀다. 아저씨에게 가장 먼저 하교 인사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이웃 어른들은 모두 내게 친절했지만 아저씨는 유독 정성을 다해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깨에서 툭 떨어진 가방끈을 제자리로 돌려주거나, 흘러내린 머리띠를 고쳐 씌워주고, 어제 쓴 모자가 내게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얘기해 주는 사람이었다. 내 어린 시절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느 날 아저씨는 피아노 학원에 가는 나를 불러 방울토마토를 한 알 쥐여주셨다. 그러곤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스로 눈높이를 맞추고 내 팔을 꼭 잡은 아저씨는 그 맑은 눈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내일부터 아저씨는 여기 없어요.” 나는 아저씨가 이상한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아저씨 목소리를 똑같이 따라 했는데, 엄마가 그랬다. “어머, 그만두시나 보네.” 아저씨는 그다음 날부터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종종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채 작별 인사를 하던 아저씨를 떠올린다. 뜨거운 껍질을 손수 까서 포슬포슬한 감자를 건네주던 손이나 설탕을 좋아하는 내게 너무 많이 묻혀 먹지 말라며 웃어 보이던 눈가의 주름 같은 것도.

아이와 내가 살던 아파트엔 경비 아저씨는 물론이고 정다운 이웃으로 가득했다. “1층 이쁜이!”하고 인사를 건네는 6층 아저씨가 있었고, 밥이 부족하면 한 그릇만 달라고 초인종을 누르는 옆집 아주머니도 있었다. 나에겐 친절한 이웃이 많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이웃에 신세를 져야 한다면 언제나 아이네 집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는 우리 가족에게 최고의 이웃이었던 것이다. 급한 일로 꼭두새벽에 부모님이 먼 길을 떠나야 했던 어느 날에도 아빠는 나를 안고 아이네 집으로 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곳에서 눈을 떠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그즈음 쑥스러움을 벗고 안팎으로 막역한 사이가 된 우리는 장난스러운 콤비로 지냈다. 급식으로 나온 반찬을 가리키며 ‘히드라 눈알 볶음’이라느니, ‘저글내장탕’ 같은 말을 해대며 비위 약한 애들을 울리곤 했던 것이다. 아이네 집에서 신세를 진 그날은 우리의 장난을 못 이겨 끝끝내 토악질을 해버린 친구 때문에 담임 선생님께 혼이 난 날이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친구들을 골렸고 서로에겐 남모르게 다정했다.

내가 없는

내 동네

아이는 여전히 그 아파트에 산다. 몇 번 이사했지만 어찌어찌 다시 대동아파트로 돌아왔다. 그 안에서 동을 몇 번 옮겼고, 몇 달 전에 또다시 동 이사를 했다. 아이는 내게 이사한 동호수를 알려주며 비밀번호까지 불러주었다. 내가 정말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따고 들어간다면 아이의 부모님이 무척 놀라겠지만, 내가 그 집 비밀번호를 안다는 사실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아이와 나의 사이는 여전히 그런 것이었다.

아이가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아이를 만나러 갔다. 내가 사는 곳으로 오겠다는 아이를 말리고 택시를 불렀다. 밤이 늦었고 움직이기 귀찮을 정도로 나른했지만 내가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동네에 가는 건 기꺼운 일이었다. 새벽이든, 밤이든, 아침 벽두든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대동아파트가 보고 싶었고, 거기서 아이를 만나는 건 더없이 즐거운 일처럼 보였다. 어두운 동네 어귀에 내려 아파트 정문에 서자마자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잖아.”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아이의 키는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겼고 뼈대도 굵어졌다. 내 키는 초등학생 때 그대로였고 체중도 자꾸 줄었다.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몸집으로 우리는 어두운 아파트 단지에 섰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선 아이는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아이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래야만 시작될 수 있는 대화였다. 우리는 목이 길어진 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이의 군인 시절 같은 거, 남이 했으면 귀를 막고 도리질 쳤을 그런 거. 휴가를 나와서 나랑 봤던 영화 얘기나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차려준 콩밥을 먹은 얘기, 먹지 못하는 콩을 산더미처럼 쌓아줘서 울고 싶었다던 얘기, 퇴근한 우리 아빠 권유에 못 이기는 척 함께 술잔을 기울인 얘기, 길어지는 술자리에 하룻밤 자고 간 얘기, 휴가 끝나고 콩밥의 여운이 남아 오래도록 괴로웠다던 얘기. 그럼 나는 배턴을 받아 아이네 집에 간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없는 아이 집에 갔을 때 아주머니가 내어주신 가래떡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아이의 동생 생일을 살뜰히 챙기는 언니 역을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초등학생 때 아파트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담배피우던 아이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같은 것들.

우리는 이제 생일 파티를 하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특별한 초대장을 만들지 않고, 낙엽을 주워다가 편지를 써서 코팅하는 일 따위도 하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는 김용기도 없고, 손을 잘잡아주는 김참도 없다. 변하거나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니 이 밤이 너무나 쓸쓸했다. 아이와 실없는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주고받는 그 즐거운 시간에도 나는 문득문득 슬퍼졌다. 이토록 사랑하는 동네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아이와 한동네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이나 어색했다. 나는 나보다 머리 두 개, 세 개만큼 큰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슬픈 마음으로 “우리는 친구지?” 하고 물었다. 그때 아이는 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지 못한다. 아이의 표정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까치발을 해도 아이의 얼굴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동네라면 생각만 해도 늘 기뻤는데 왜 그날은 그다지도 먹먹했을까. 사랑하는 이웃이, 다정한 경비 아저씨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무리 올려다봐도 보이지 않던 아이의 표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도 안심할 수 있던 건 올해도 분명, 아이와 나는 서로의 생일을 축하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가 여전하다는 데서 늘 용기를 얻었다. 그것이 어떤 회로를 거쳐 내게 용기가 되었는지는 평생 알 수 없겠지만, 27년짜리 친구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이라는 건 분명하게 알았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아이와 만든 27년이라든지, 아이와 함께 살아온 대동아파트 시절이라든지, 이웃들에게 “1층 이쁜이”로 불리던 귀여운 시간이라든지… 그런 순간이 모여 만들어 낸 힘을. 그 밤, 나는 아이 옆에서 시간의 더께를 느끼며 동네를 잃은 슬픔을 차분히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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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