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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 — 양지바른
김지혜 — 지혜 스튜디오

“저게 뭐지? 근사하다.” 방금 본 멋진 소품을 설명하려는데 이름도 모르겠고 묘사도 쉽지 않다. “멋진 그림이 새겨진 카펫 같은 건데, 카펫보다 부드러워서 모포처럼 쓸 수도 있고 벽에 작품처럼 걸 수도 있어.” 모호한 설명 끝에 이름을 알게 되었다. ‘태피스트리’. 양지바른의 태피스트리는 삽시간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양지의 말갛고 밝은 아트워크가 자꾸 궁금해졌다. 뭐지? 어디다 그리는 거지? 어떻게 만드는 거지?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안 되겠다 싶어 양지바른을 찾아 나섰다. 양지가 머무는 곳은 광주광역시 양림동. 얌전하고 조용한 동네에 초대받은 날, 궁금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른다. 이내 현관을 열고 마당으로 뛰어나온 두 사람. 서로의 발소리만으로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이 곰살맞은 한 쌍과의 첫 만남이다.

양림동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서 양지(위), 김지혜(아래)

영감은 하나의 상상이에요.

무언가에서 영감을 얻으면 상상으로 물꼬를 트고,

저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무엇이든 해요.

나무가 많은 동네

광주는 더러 와봤지만 양림동은 처음이에요. 느낌이 참 좋은 동네예요. 얌전하고 다소곳하면서도 귀여운 인상을 받았어요. 

양지 제가 칭찬을 받는 것처럼 즐거워요. 양림동은 제가 참 좋아하는 동네예요. 서울이랑 거리가 있어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그래도 이곳으로 초대하게 돼서 기뻐요. 

 

여행하는 기분이라 좋았는걸요. 어느 인터뷰에서 양림동을 “나무가 많은 동네”라고 소개하시더라고요. 동네에 애정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지 뉴욕에서 7년 정도 지내다가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는데, 고즈넉한 곳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이젠 제 공간을 갖고 싶기도 했고요. 상업 시설이 발달하거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보다는 조용한 데 자리 잡고 싶었어요. 양림동을 눈여겨보던 중에 여기가 서양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선교사들이 자리 잡은 터였던 거죠. 100년 전 유산을 그대로 지닌 채 마구잡이로 개발되지 않은 점이 좋았어요. 자연과 가까운 동네라 더 마음이 갔고요.

 

이 건물도 참 예뻐요. ‘공간 양지바른’이라고 부르고 있죠. 건물보다는 하나의 존재… 같달까요. 

양지 오래된 주택인데 구조도 특이하고, 제 뜻대로 여기저기 개조해서 더욱 마음에 드는 곳이 되었어요. 저는 ‘양지바른’이라는 이름으로 그림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데요. 이름처럼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싶어서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다니다 이 주택을 만났어요. 따듯한 느낌이 좋아서 여기가 제 공간이구나 싶었죠.

 

공간이 꽤 넓어요. 슬쩍 둘러봐도 되나요? 

양지 그럼요. 공간 양지바른은 지하, 1층, 중간층, 2층으로 구성돼 있어요. 중간층이 있는 게 좀 독특하죠? 오래된 주택이라 이런 구조로 지어진 것 같아요. 중간층이 매력적이어서 여기를 택한 것도 있어요. 1층에는 제 아트워크와 태피스트리를 살펴볼 수 있는 쇼룸 겸 로비가 있고요, 구석엔 자그마한 숍 공간이 있어요. 제 아트워크를 엽서나 작은 굿즈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죠. 카페도 겸하고 있어서 마실 거리나 스콘, 케이크를 1층에서 구매하고 어디든 원하는 공간에서 즐길 수 있어요. 중간층은 제가 소중히 모아온 작가들의 오리지널 작품과 빈티지 포스터로 장식해 두었어요. 군데군데 제 드로잉 작업도 있고요. 지하는 아트북 위주예요. 뉴욕은 길거리에서 3-4달러면 빈티지 아트북을 구할 수 있는데 오가며 사 모은 게 꽤 많아져서 바리바리 들고 돌아왔거든요(웃음). 가끔 그릴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 지하에 있는 책을 아무거나 뽑아서 살펴보곤 해요. 제 취향으로만 가득 채웠기 때문에 책 한 권만 열어봐도 그리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요. 지하는 제 영감 꾸러미나 다름없어요.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니 ‘갤러리 카페’라고 분류돼 있더라고요. 갤러리인 것 같으면서도 쇼룸 같고, 또 어떤 면에선 카페인 것 같기도 해서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네요. 

양지 1차 목적은 양지바른 태피스트리와 아트워크를 보여주기 위한 갤러리이자 브랜드 쇼룸이었어요. 그다음 고려한 게 작업실이었죠. 사실 갤러리 카페는 사람들이 손쉽게 방문하도록 장벽을 낮추려고 만든 역할이에요. 브랜드 쇼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오질 않거든요. 공간을 열기 전엔 작업하다가 손님이 오시면 나가서 커피도 내어 드리고 작업도 설명해 드리는 걸 상상했는데요. 그건 제 오만이었어요(웃음). 작업에 집중하려고 하면 사람이 들어오고, 손님을 맞다 보면 집중력이 사라지고, 연달아 손님이 들어오면 정신도 없더라고요. 뉴욕에 있을 때는 제 작업을 꺼내 보일 공간이 SNS뿐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 반응에 갈증이 있었는데, 간간이 아트페어에 나갈 때마다 활력을 얻게 되더라고요. 사람들 반응을 즉각적으로,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데서 긍정적인 기운을 받으면서 가만히 사람들 반응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페 역할에도 소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온종일 커피만 마셨는데 지금 마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어요(웃음). 

양지 본격적인 카페라 말하기엔 조금 민망해요. 양지바른만의 시그니처 메뉴도 없고, 에스프레소 기계도 없거든요. 모든 커피를 다 핸드 드립으로 내려요. 

지혜 드립 커피라 더 맛있는 거 아닐까요(웃음)? 무엇보다 여기 케이크가 정말 맛있어요. 꼭대기층에서 고모님이 일주일에 서너 번 베이킹을 하시는데요. 스콘과 케이크에 진심이세요. 

 

마침 지혜 씨 소개를 들어보려 했는데 빵 소개로 말문이 열렸네요(웃음). 만나서 반가워요. 양지바른의 태피스트리를 디자인, 제작하고 계신다고요. 

양지 지혜는 제 그림을 상품으로 실현해 주는 역할을 해요. 태피스트리로 시작했지만 점차 영역을 넓혀가 보려고 요즘은 계속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어요. “이거 어때?”, “이것도 해보고 싶다!” 그러면서요. 지혜는 3주 정도 호주에 있었는데 마침 오늘 새벽에 귀국하게 돼서 가까스로 합류할 수 있었어요.

지혜 돌아오자마자 잠만 자고 부랴부랴 광주로 왔어요(웃음). 아, 그런데 혹시 KTX 타고 오셨어요?

 

네, 아침 10시 기차요.

지혜 우리 같은 열차 타고 온 것 같아요(웃음). 서울역 대합실에서 어떤 남성분 옷차림이 예뻐서 눈여겨봤거든요. 검은 목폴라에 검은 셔츠를 입으셨는데 단정하고 잘 어울렸어요. 근데 그분이 포토그래퍼분이신 것 같아요(웃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지금 막 떠올랐어요. 저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일해온 김지혜라고 해요. 꾸준히 해오던 일인데 문득 빠른 속도와 그보다 앞서 달려야 하는 상업 의류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다들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같이 달려야만 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뛰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숨 가쁘게 달리는 나날이 이어지던 때, 양지 작업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양지의 그림을 보면… 그리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고 마음이 따듯해져요. 팍팍한 일상 속에 이런 느낌이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지의 아트워크로 일상용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아트워크로 만들 수 있는 건 많지만 제가 섬유를 다루는 디자이너니까 이쪽 분야부터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 시작이 태피스트리였던 거군요. 두 분의 인연이 궁금해지는데요.

지혜 2014년에 뉴욕에서 만났으니까… 와, 올해 10년 됐네?

양지 정말이잖아! 둘 다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인 소개로 만나게 됐어요. 아직 이 도시에 적응하기 전이고, 친구도 많지 않을 때라 금방 친해졌어요. 성격도 잘 맞았고요.

지혜 양지를 보자마자 “엄청 예쁘다!” 그랬어요(웃음). 첫 만남부터 지갑을 잃어버리질 않나… 그런 상태로 같이 뮤지엄에 갔는데 굉장히 정신없던 기억이 나요.

 

주고받는 눈빛이 꾸밈없어서 묻지 않고도 친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자기소개는 재미없으니까, 이참에 서로 소개해 보면 어때요?

양지 성격 검사나 심리 테스트를 하면 저희 결과는 항상 다른데요. 그 궁합은 매번 100퍼센트더라고요. 어떤 검사든 다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신기해요. 

지혜 성격은 다르지만 취향은 같고, 서로 없는 걸 갖고 있어서 잘 맞는 것 같아요. 예컨대 양지는 머리로 생각하는 사고형인 반면, 저는 완전히 감정형이거든요. 그래서 양지가 너무 뇌로만 생각하면 제가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제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면 양지가 사고를 잡아주는 편이에요.

양지 제가 놓치는 것들은 지혜가 챙겨주고요. 저는 직진 스타일이라 뭐든 “진행하자!” 하는데요, 지혜는 제 이야기에 공감해 주면서도 “언니, 근데 이건 이렇게 바꿔보면 좋을 것 같아.” 하고 디테일하게 짚어줘요. 지혜 덕분에 큰 틀 안에서 작은 것들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죠. 저희는 취향이 놀랍도록 비슷해서 레퍼런스가 100개 있으면 그중 괜찮다고 고르는 게 똑같아요.

지혜 약간 아바타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양지 안 보이는 촉수로 연결된 느낌(웃음).

쿵짝이 엄청 잘 맞는데요(웃음). 지혜 씨는 아직 뉴욕에 살고 있는 건가요? 

지혜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지내고 있어요. 제주에 작업실을 꾸렸거든요. ‘지혜 스튜디오’라 이름 붙이고, 아티스트와 협업하면서 프로젝트성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는 뉴욕에 있을 때 토리버치Tory Burch라는 브랜드에서 오래 일했는데요. 앞서 말했다시피 빠른 흐름에 조금씩 지쳐갔어요. 빠르게 달려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거든요. 느린 호흡으로 작업을 음미하고 싶어서 지금은 그림 그리는 아티스트, 퍼포밍 아티스트와 협업하면서 이유 있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어요. 섬유나 자수 등을 활용하여 의류와 관련된 것들을 작업하고, 그중에서도 쓰임 있는 물건 만들기에 집중하죠. 그런 의미에서 양지랑 하는 작업이 좋은 자양분이 돼요. 평면으로 만들어지는 양지의 아트워크를 보면서 양지의 손맛을 어떻게 물성에 표현할 수 있을지, 어떤 섬유로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내보내면 가장 잘 전달될지 고민하는 게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자 모험이거든요. 

 

두 분이 함께하는 태피스트리는 세계 곳곳 장인들의 아틀리에와 협업하며 소량으로 제작한다고 들었어요. 퀄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판매 금액을 생각하면 타협도 필요할 것 같아요. 

양지 처음 작업할 땐 합리적인 가격대는 머릿속에 없었어요. ‘퀄리티로 승부를 보자!’뿐이었죠. 가장 좋은 퀄리티를 위해 샘플링 작업을 정말 많이 했어요. 가격을 고민하게 된 건 공간을 운영하면서부터였죠. 직접 구매자들과 만나게 되니까 가격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온라인으로 판매할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는 손님들 반응이 와닿더라고요. “조금 더 저렴한 것도 있나요?”라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았어요. 금액을 낮추기 위해 퀄리티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크기나 제작이 비교적 간편한 발매트로 장벽을 낮춰보면 어떨까 싶었지요. 

지혜 저희는 무엇을 만들든 퀄리티를 최우선에 두어요. 생활에서 쓰이는 걸 만드는 거니까 불편함을 최소화해야 하거든요. 또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윤리적인 부분이에요. 쓰임이 좋으면서도 무해한 걸 만들자는 마음이죠. 최대한 자연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재활용 코튼을 사용하는 식으로 작업하고 있거든요.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제품이더라도 자부심을 느끼고 싶어서 윤리성을 특히 신경 쓰고 있어요. 판매할 때 부끄러움이 없기를, 우리가 구매자여도 선뜻 사고 싶은 물건이기를 바라며 만드는 거죠. 

양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손실을 최소화하고 친환경적인 마음으로 만들면 금액대가 점점 높아지더라고요. 퀄리티를 지키면서 친환경적이고, 대중에겐 좀더 다가가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좋을까 고민하면서 지금은 한정 수량을 뽑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공장이나 아틀리에도 최대한 많이 조사하고 합리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곳을 택하기도 하고요. 

지혜 큰 브랜드가 아니어서 대량 생산은 어려운데, 대부분 소량으로는 제작을 잘 안 해주거든요.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 제주에 작업실을 만들면서 산업용 자수 기계라든지 섬유 관련한 기계들을 들여와서 앞으로는 직접 제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은 제품은 샘플링 작업도 해보고 조금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요. 이전까지는 양지 그림이 상품화되는 걸 돕는 중개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재미있는 걸 많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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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