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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슬아·이훤·이찬희

입김이 살짝 보이는 차가운 날씨다. 바람이 불면 몸을 옹송그리는 날씨에 ‘헤엄 출판사’와 ‘작업실 두 눈’이란 명패가 붙은 집의 문을 연다. 마당에 살짝 내리쬐는 볕뉘가 참 예쁘다 생각하면서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 닫힌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해사하게 웃는 슬아와 그 뒤로 빼꼼 얼굴을 내민 훤이 보인다. 뒤이어 도착한 찬희가 한자리에 모이자 가장 먼저 오간 건 안부, 그다음엔 웃음. 모두의 웃음은 곡선을 그리며 집 안을 메웠고 웃음소리에도 움직임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웃음을 따라 들썩이는 어깨와 얼굴, 가끔씩 치는 손뼉 같은 것이 퍽 다정하다. 어떤 움직임은 이토록 유하고 따듯하다. 그윽하게 피어나는 가족의 그것을 사랑의 몸짓이라 불러보기로 한다.

순수하게 어떤 움직임을 정말 아름답다고 느낄 때도 있어.
걷는 것만 봐도 울 것 같은 사람이 있거든.

날씨가 부쩍 추워져서 그런지 이 집 진짜 따듯하다. 들어오면서 창으로 훤이 상체가 살짝 보이는데 엄청 반갑더라. 

슬아 오르막길이라 오는 데 힘들었지? 요즘은 좀 바빠서 친구들도 일할 때야 겨우 만나는 것 같아. 그래도 이렇게라도 보니까 다행이다 싶어.

집에서 만나니까 더 반가워(웃음). 커피랑 차 내려줄게. 잠깐 몸 좀 녹이고 있어.

 

아, 이런 분위기에선 존댓말 못 하겠어(웃음). 우리 오늘 편하게 얘기할까?

슬아 난 좋아. 이렇게 셋이 인터뷰하긴 처음이라 기대돼. 사실 질문지도 낱낱이 숙지하진 않고 읽어만 봤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웃음).

찬희 나도 그래. 살짝만 봤는데 다정한 느낌이어서 좋더라.

 

좋아. 우선 슬아랑 훤이 결혼 축하해! 이젠 슬아, 훤, 찬희 모두 제도가 인정하는 가족이 된 거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서도 친구보다 날 더 모른다고 느낄 때도 있잖아. 서로 소개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슬아 앉은 방향으로 해볼까? 찬희가 훤이를, 훤이 나를, 내가 찬희를.

찬희 훤이 형 본명이 진우잖아. 진우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는 외자 이름을 좋아해서 훤이 형이라고 부르고 있어. 나는 작업자로서의 훤이 형도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훤이 형이 좋아. 몇 번 셋이 같이 무대에 오를 일이 있었는데, 그때 형이랑 연주도 같이 했거든. 난 누군가와 함께 연주하는 게 사람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만약 형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길에서 우연히 만났더라면 큰 키랑 반듯한 용모 때문에 어른 같다고 생각했을 거야. 근데 형이랑 이야기해 보고 연주까지 해보니까 이 사람은 소년이란 느낌이 확 들더라고. 나이가 어린 것과 소년은 좀 다른 것 같아. 소년은 하나의 물성 같지 않아? 형을 보면 걱정이 없다는 느낌, 걱정 없이 살아온 사람 같단 느낌이 있어. 모자람 없이 살았는데 티 안 나는 스타일(웃음).

찬희한테 소개를 듣는 거 되게 새롭다(웃음). 그럼 내가 슬아를 소개해 볼게. 바깥에서의 슬아는 무너지지 않고 혼자 의연하게 가녀장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집에서의 슬아는 자주 취약해. 정확히는 집에서만 취약해.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둘 모두 가장 편히 대할 수 있는 자리가 집이라서 그런가 봐. 아, 그리고 슬아는 주변 친구들한테 마음을 많이 써. 그러니까 사실은 강한 사람이기도 한 거지. 한 가지 더 이야기해 보자면 꼼꼼해서 모든 걸 보고 있는 사람이야. 작업할 때뿐 아니라 생활할 때도 그래. 이번 주에 강연 세 개가 있고, 이비인후과에 가야 하고, 왁싱숍도 가고, 새 책 출간한 친구들의 홍보와 마음을 살피는 일정이 있다고 쳐봐. 나라면 분명히 놓치는 부분이 있을 텐데 슬아는 모든 걸 보고 있어. 캘린더에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정리해 놓기 때문에 웬만하면 틀어지지 않지. 생활과 작업 두 가지를 동시에 잘하는 선수 같아. 마라톤과 단거리 동시에 뛰며 선두에 있는 느낌이랄까.

슬아 훤이가 방금 나를 “모든 걸 보고 있다.”고 소개했는데, 찬희가 그런 점에선 나랑 닮은 것 같아. 찬희는 멀티태스커야. 언제나 여러 일을 동시에 해. 그래서 곤두서 있을 때가 많지. 동시에 뭔가를 많이 생각하니까 정신적으로 압박이 생길 수밖에 없어. 그런 점에서 찬희도, 나도 일종의 강박을 공유하고 있어. 근데 그런 나한텐 훤이가 일종의 이완제 역할을 해주거든. 훤이가 없으면 나는 쉴 새 없이 굴러가. 내 정신 상태는, 오르막길에서 내려가는 카트 같아. 생각도, 일도 멈출 수가 없는 거지. 나는 찬희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찬희는 뭐로 이완할까 걱정될 때도 있어. 근데 찬희의 이런 성향은 확실히 재주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찬희와 나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야망을 공유한 사이잖아. 야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인생의 피로도가 너무 다르거든. 재주가 뛰어나면 피곤할 수밖에 없어.

찬희 누나한테 훤이 형이 이완제라면 나한테는 먹는 게 그래. 처방 받은 약의 도움도 받고 커피로도 다스리지. 약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는 확실히 달라. 아예 먹지 않는 단식도 도움이 되고. 아, 완벽한 이완제가 하나 있다, 만화. 1권을 보면 재미가 있든 없든 끝까지 봐야 하는 성격이라 완독한 만화가 진짜 많아. 어릴 때부터 만화는 달고 살았어. 그 덕분에 굴러가는 카트도 가끔 멈출 수 있는 것 같아.

이번 호 주제어가 움직임이자 운동이거든. 그때 머릿속에 딱 떠오른 게 슬아랑 훤의 결혼식이었어. 슬아의 엄마인 복희가 훌라를 췄잖아. 생각해 보면 슬아의 아빠인 웅이도 프리다이버로 활동하고 계시고. 다섯 명을 모두 만나면 재미있겠단 생각으로 기획한 건데, 핵심 인물 두 분이 빠졌어(웃음). 그렇다고 해서 세 사람이 움직임과 거리가 멀진 않은 것 같아.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우선, 나는 사진가로 일할 때의 움직임에 관해 생각해 봤어. 작업 성격에 따라 속도나 보폭이 달라지거든. 지금 떠오르는 건 인터뷰 촬영 현장이야. 인터뷰 안에서는 사진도 시각 언어이기 때문에 텍스트만큼 중요하잖아. 그런데도 보조 언어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어서 좀 안타까워. 그러나 주변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든 현장에선 주인처럼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 좋은 주인이 되려면 현장에서 사진가가 자신의 존재를 잘 숨기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인터뷰이가, 피사체가 사진가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충분히 편안해지도록 모시는 게 좋은 주인이 되는 방법일 거야. 사진가의 움직임 중 하나는 사라지는 것, 희미해지는 것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어. 

슬아 훤이랑 작업할 때 이런 부분이 좋았어. 좋은 사진가는, 음… 영혼이 겸손하다고 해야 하나? 자신이 돋보이려는 마음이 적어. 지금은 네가 절친이라 편하게 촬영하고 이야기하지만 인터뷰라는 건 사실 긴장되는 자리잖아. 거기에 카메라까지 대동하면 인터뷰이가 조금 위축될 수 있단 말이야. 카메라는 권력이고 시선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해. 나 또한 카메라가 가까이 오면 무기 같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 그러니까 존재감을 싹 지우고 인터뷰이를 모시는 사진가는 믿음직스럽고 좋은 일꾼이 되는 거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주시하게 되는 구도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다는 건 구조적으로 균형이 많이 기울어져 있어. 그래서 최대한 뒤로 숨으면서 자연스럽게 현장을 이끄는 게 중요하지. 

찬희 나는 ʻ움직임을 본다’는 행위가 뭔가를 고를 때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생각해. 특히 나한테 시각적인 요소는 하나의 기준이자 잣대여서 사소한 움직임까지 유심히 보는 편이야. 이것도 일종의 강박일까? 누군가의 걸음걸이, 젓가락질, 아주 작은 행동까지 전부 살피게 되거든. 그러면서 역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는 존재라고 인지하게 되지. 뭔가를 보고, 보이는 걸로 판단하는 건 선택과 소거가 가능해지는 일 같아.

 

흥미로워. 좀더 얘기해 줘.

찬희 예를 들어서 밴드 라이브 무대를 볼 때 말이야, 나는 음악을 다 꺼버려도 된다고 생각해. 보는 행위가 남아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무대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 시각적으로만 판단하더라도 좋은 움직임을 보이는 밴드는 높은 확률로 음악도 좋을 거야. 만약… 움직임만 좋고 음악이 별로더라도 사실 상관없지 않을까? 이건 쇼잖아. 그래서 나도 내 움직임을 항상 곰곰이 생각해. 확실히 보는 건 좋은 체망이 되어주는 것 같아. 움직임만 보고도 좋다, 나쁘다를 가늠할 수 있으니까.

시선을 체로 쓴다는 말이 재미있어.

찬희 체로 거르지 않고도 순수하게 어떤 움직임을 정말 아름답다고 느낄 때도 있어. 걷는 것만 봐도 울 것 같은 사람이 있거든. 근데 반대로 걷는 것만으로도 때리고 싶은 사람도 있어(웃음). 사실 나는 혼자 밥 먹다가도 눈물이 날 것 같을 때가 있어. 삼인칭의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면 움직임 하나하나가 짠한 느낌이 들거든. 그래서 움직임이라는 건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요소 같아. 더 제대로, 잘 움직이기 위해 정진해야 할 것 같고. 

그런 한편, 들키는 것이기도 하잖아.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아까 슬아가 좋은 사진가는 영혼이 겸손하다고 했잖아. 그것도 평소 움직임과 관련된다고 생각해. 평소에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사진기를 든다고 해서 갑자기 겸손해질 수는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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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