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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을 여행하는 마켓을 위한 안내서
AROUND REVIEW
영화 속을 여행하는
마켓을 위한 안내서
우리는 거래한다. 무언가를 사고 또 무언가를 팔면서 시장은 만들어진다. 시장 안에는 사람이 있다. 결국 시장이 형성된다는 말 안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뜻이 담겨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어떤 시장을 만들었을까.
카트, 2014
사람 없는, 사람 사는 곳
이자연
우리는 무엇을 거래하고 있는 것일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기 계산대에서 바보같이 일만 했던 제가 지금 소리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외치는 저희를 좀 봐달라는 겁니다. 저희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저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저희가 바라는 건 사람대접 받는 것 하나입니다.”
마트는 늘 정갈하고 깔끔하다. 물건도 종류별, 크기 별로 선반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손을 뻗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고, 점원들은 손님의 기분에 맞춰 상품을 설명하고 안내한다.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된 모든 이들이 왕이 되는 세계의 모습이다. 한선희는 고객평가에서 어떠한 불평도 나오지 않는 모범직원이다. 3년 동안 벌점 1점도 받지 않았기에 3개월 후 정직원 계약을 약속받았다. 그녀는 점원들을 대표하여 구호를 선창한다. “고객은 왕이다. 고객감동 서비스.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사랑합니다.” 왜 그녀는 얼굴도 가물가물할 이들에게 구애를 하기 시작한 걸까.
마트 점원들은 근무 중 실수를 저지르면 벌점을 받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반성문을 쓴다. 밥을 먹고 몸을 뉘어 쉬는 공간이라고는 판자가 덕지덕지 붙은 보일러실 옆 구석진 방이다. 그런 그들에게 관리자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며 설움을 견디고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다들 부러워 마세요. 열심히만 일하면 다들 정직원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믿음도 잠시, 마트 점원들 사이로 일사불란하게 핸드폰 메시지가 도착한다. 한 달 뒤부터 계약 기간을 파기한다는 해고통지였다. 직원들의 분노는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이어졌고, 그렇게 기약 없는 파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마주하던 매대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어떤 날은 부둥켜 울었고, 어떤 날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뭉치면 산다. 다만, 흩어지면 죽는다. 선희의 아들 태영은 학교생활이 힘들다. 수학여행 신청서를 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입이 절로 다물어지고, 급식비 카드에 돈이 충전되지 않았다는 안내가 급식실 가득 퍼져 나간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평범한 학교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학교 행사에 다른 친구들처럼 해맑게 설레고, 오늘은 밥을 먹을 수 있는지 걱정하지 않는 것 말이다. 그런 그가 힘겹게 물었다. “엄마, 나 수학여행 간다고 해?” 밥을 먹던 선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질문은 어렵지 않은데 답하기가 영 어렵다.
이 영화는 우리네 현실이다. 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선뜻 아름답지 않을 용기를 취하며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 인생은 원체 투박하기 그지없고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방을 향해 예민해져야만 한다. “낙숫물에 바위가 뚫릴 수 있을까요?”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대답 없는 질문의 모습이 흐려져 간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2013
당신이 찾고 있는 건 무엇인가요
김이경
네 인생을 살거라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또 때로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푸른 눈, 태엽 인형같이 딱딱한 걸음걸이, 웃지도 말하지도 않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폴이다. 두 살 때 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그 현장에 폴이 함께 있었다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엄마는 항상 웃고 있는 반면 아빠는 무표정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정도이다. 두 명의 이모와 함께, 행복한지 불행한지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채 살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슈게트를 먹고, 공원에 앉아있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복된 삶.
그러다 우연히 아파트 두 층 사이를 연결해주는 계단실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입구에는 커다란 개가 앉아 있고 동굴처럼 어두운 공간을 지나 커튼을 젖히면 거울에 반사된 햇볕을 담뿍 받은 식물들로 가득한 정원이 나온다. 바로 이곳이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이다. 폴을 가엽게 여기는 프루스트는 그를 돕고 싶어 하면서도, 그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에 가라앉게 해. 내가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조금 고민하는 듯 보이던 폴은 잃어버린 부모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찾기로 마음먹고 매주 그곳을 찾는다. 기억을 찾기 위해 지불하는 50유로로 그녀는 ‘버섯이 많이 들어간 이상한 홍차’와 쓴맛을 덜어내기 위한 ‘마들렌’을 준비한다
홍차 한 모금, 마들렌 한입을 베어먹고는 의식을 잃고 기억을 더듬는다. 폴은 아빠에 대한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모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기억이라는 것은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폴은 불행을 행복의 홍수로 가라앉힐 수 있을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는 기억만 찾은 게 아니라 친구까지 얻었다는 것이다. 홍차와 마들렌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우정을 키워 나갔다. 프루스트는 기억을 잃어 실어증에 걸린 폴이 가여운 게 아니라, 두 이모의 지극한 보호 아래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인생을 사는 폴을 안타깝게 여겼다. 잃어버린 기억뿐 아니라, 그의 삶을 찾아주고 싶어 한 것이다. 결국 그녀조차도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마법은 통했다.
“네 인생을 살아라.”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처럼 폴은 아픈 기억들을 행복의 홍수로 가라앉히는 법을 배웠고 새로운 삶을 찾았다. 그동안 매일 같이 연주하던 피아노 대신 우쿨렐레를 들고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한 여자의 남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입을 연다. “아빠.”
거인, 2014
집과 교실이라는 시장
이현아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값
“제가 꼭 신부님 될게요. 제가 꼭 신부님 돼서 엄마, 아빠 키워주신 은혜 꼭 갚을게요. 저 대학교도 진짜 가고 싶고요. 저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게 되면… 저 진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가족이, 학벌이, 소속된 직장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매일 일기를 쓰는 시시한 일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인>의 영재에게 자기를 지켜줄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모두 영재의 부모님이 그를 보호시설인 그룹홈에 맡겼다고 생각하지만, 영재는 그곳에 제 발로 들어갔다. 자식을 책임질 의지가 없는 부모 밑에서 살기를 포기한 소년은 거인처럼 먼저 커버렸다. 영재는 스스럼없이 그룹홈의 원장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 비아냥에도 굴하지 않고 친구 말대로 ‘똥꼬를 빨며’ 보호시설에 오래 남기 위해 자신의 영악함을 판다.
독실한 마음도 없으면서 성당에 나가고 신학교에 가려고 거짓말을 판다. 그룹홈 창고에서 몰래 새 신발을 훔쳐서 학교 친구들에게 판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같은 방에 살던 친구가 자기 때문에 의심을 받아 쫓겨나지만, 영재는 돕지 않는다. 본인의 생존보다 중요한 건 없다.
영재가 훔친 신발을 학교 친구들에게 팔 때, 교실 속에서는 학생들 간의 서열이 드러난다. 평범한 집에 살지 않는 것, 부모님과 살지 않는 것, 일진이라고 불리는 애들과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교실 안에서는 타당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학생들은 서로의 서열을 가른다. 신던 신발을 다시 주며 환불해달라고 할 때도 영재는 조용히 바꿔줄 수밖에 없다. 그룹홈에서 살기 때문에, 돌봐줄 부모가 없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면 책임져줄 누구도 없기 때문에. 단지 평범한 일상을 갖고 싶어서 자신의 젊음과 대신해 영재가 팔아온 것들은 그에게 얼마만큼의 값으로 남게 될까.
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안가람 글 이자연 김이경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