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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을 여행하는 관계에 대한 안내서
AROUND REVIEW
영화 속을 여행하는
관계에 대한 안내서
영화는 관계의 이야기이다. 가볍게 뱉은 감탄사나 습관적 행동 하나에도 저마다의 이유와 사정이 있어 인물들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네 개의 관계를 통해 영화를 다시 바라보기로 했다.
미스 리틀 선샤인
콩가루 가족의 경우
김건태
고물차의 창문을 함께 미는 손바닥들
“엄마, 저는 올리브가 저 무대에 안 올랐으면 해요. 주위를 보세요. 이곳은 엿 같다고요. 저런 자들이 올리브를 점수 매기는 게 싫어요. 다들 비웃을 거예요. 엄마, 제발 못하게 하세요.”, “안 돼, 드웨인. 올리브는 열심히 연습했고, 여기에 모든 걸 쏟았어. 그걸 빼앗을 순 없어. 동생을 보호하려는 걸 알아. 하지만 올리브는 올리브로 놔두자고.”
발그스레한 얼굴에 통통한 배,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다. 아이는 미인대회에서 왕관을 쓰는 게 꿈이다. 성공을 향한 아홉 단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파하는 남자도 있다. 그는 아빠다. 니체의 얼굴을 벽에 붙인 채 자신의 꿈을 향해 묵언 수행 중인 오빠. 상습적인 헤로인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프로스트 석학이자 애인에게 실연당해 자살을 시도한 게이 삼촌과 2주째 식탁에 닭튀김을 올리는 엄마까지. 그들은 가족이다. 일곱 살 아이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미인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고물 차를 모는 가족. 그들은 같은 차에 앉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혼자만 단단한 섬이다.
1박 2일의 여정 동안 창밖의 풍경은 아름답고 그림자는 길어지며 행운은 그들 바깥에서만 춤춘다. 그러니까 실연당한 애인과 마주한 손에 하필 포르노 잡지가 들려있다거나, 자신만만했던 성공의 법칙이 실은 실패의 지름길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거나, 묵언을 깨고 들판에서 절규한다거나, 조금 더 깨어있기 위해 깊은 잠 속에 빠지는 일 같은 것들. 만약 이런 시련이 닥친다면 나는 섬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해 무엇을 손에 쥐었을까.
돌이켜 보면 나에게 가족은 실패로 맺어진 관계였다. 특히 아버지와 나는 늘 처음처럼 굴며 서툴게 서로를 대하고 모진 말로 상처를 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빚 더미에 앉았을 때에도 나는 가짜 영어 학원 수강증을 내밀며 돈을 요구하는 나쁜 놈이었다. 내 방문은 늘 닫혀있었고, 소란을 피하려 잠든 척 이불을 끌어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제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하던 시절들. 그러던 우리 부자 관계가 가까워진 것은 서로의 피를 본 다음이었다.
어느 날 잠을 자다 비명소리를 듣고 뛰쳐나갔는데, 주방에 서 있던 아버지의 손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아버지의 손목을 움켜쥐고 전화기를 찾았다. 후에 알고 보니 설거지를 하던 중 그릇이 깨져 아버지의 동맥이 잘려버린 것이었다. 그날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나는 아버지의 반대쪽 손을 붙잡고 울었다. 그 후로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나는 술에 취한 독일인 남자와 시비가 붙어 엄청 맞았다. 그는 덩치가 컸고 무거운 발로 연신 나의 머리를 밟았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얼굴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나를 빼내 추어탕을 먹였다. 그러고는 윽박지르기는커녕 그날의 상처가 아문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주었다. 크고 두꺼운 손의 감각. 뜨거운.
다시 영화로 돌아가,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미인대회에서 콩가루 가족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아름다움이 자신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목격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춤을 추는 아이를 보며, 가족들은 무대에 난입해 모두 함께 저질댄스를 춘다. 대회를 망치고, 다시는 미인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경고를 받고 물러나지만 가족들은 어쩐지 싫지 않은 표정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사막은 다시 나타날 것이며, 애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다시 식탁 위에 치킨을 내놓겠지. 하지만 시동조차 제대로 걸리지 않는 고물차를 밀 때, 그들의 환하게 펼친 손바닥과 바보같이 행복한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어쩌면 지금 지나고 있는 이 삶이 팍팍하고 지난하게 이어진대도 기어코 살아야겠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건, 서로의 펼친 손이 아직은 따뜻하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운드 오브 뮤직
노래로 하나 되는 가족의 경우
정혜미
말썽쟁이 수녀에서 7남매의 엄마, 해군 대령의 아내까지
“Doa deer a female deer, Re a drop of golden sun, Mi a name I call myself, Fa a long long way to run Sol a needle pulling thread, La a note to follow sol Tea, a drink with jam on bread, That will bring us back to Do.”
마리아는 수녀원의 견습수녀이다. 미사 시간을 지킨 적이 없고, 선배 수녀들에게 항상 꾸지람을 듣는 말썽꾸러기 견습수녀. 이런 모든 사건은 그녀가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 탓이다. 그런 마리아가 유서 깊은 본 트랩 가문에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마리아는 본 트랩 가정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도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가정교사로서의 첫날부터 만만치 않다. 화려한 집 안에 마련되어 있는 파티 홀에서 혼자 춤을 추다 본 트랩 대령에게 들키고, 호각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대신해서 부르는 대령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가정교사인 자신을 냉대하고 자신의 호주머니에 개구리를 넣는 장난을 서슴지 않는 아이들에게 상처도 받는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모인 저녁식사 시간, 솔방울이 깔린 의자에 앉아 소리를 지르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 한 번 더 망신을 당한다.
그런 마리아가 점차 아이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첫날밤, 천둥 번개가 치는 날씨 탓에 잠자리에 들었던 여자아이들이 마리아의 방으로 모여든다. 뒤이어 남자아이들도 온다.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몰래 집을 빠져나갔던 첫째 딸 리즐까지. 이날 밤 아이들과 마리아는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노래’를 부르며 절친한 친구가 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놓쳐도 되는 장면은 한 부분도 없다. 초록빛이 내려앉은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켜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 화려한 파티장에서 아이들이 인사를 하는 모습, 마리아와 아이들이 꾸민 인형극 등. 내 어릴 적 영화를 녹화해 둔 비디오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돌려보고, 처음으로 영화 DVD를 장만하게 만든 영화가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메인 테마 노래인 ‘도레미 송’의 뜻도 모르면서 발음대로 따라 불렀었다. ‘도레미파솔라티!’ 마리아가 헌 커튼으로 만든 옷을 아이들에게 놀이복으로 입히고,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온 시내를 누비며 노래를 알려주는 장면에선 그 커튼 옷이 너무도 갖고 싶어 엄마에게 졸랐었다. “나도 헌 커튼으로 원피스 만들어줘!” 심지어 마리아를 찾아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꿈을 꾼 적도 몇 번 있다. 이 영화는 나의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내 창의력을 키워준, 지금도 마음의 치유가 필요할 때 꺼내보는, 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영화다.
마리아는 사랑에 목말랐던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딱딱한 본 트랩 대령의 마음도 녹인다. 결국 본 트랩 대령과 사랑에 빠지고 7남매의 엄마가 된다. 하지만 본 트랩 가족은 마지막까지 평탄치 못하다. 독일 정권에 힘을 빼앗긴 오스트리아 해군 대령이었던 본 트랩 대령이 소환되면서, 가족은 이를 거부해 도망을 치게 된다. 독일군에게 쫓기던 중, 그날 밤 열리는 노래 대회에서 본 트랩 가족은 에델바이스란 노래를 하게 된다.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 국화로 지정된 꽃으로, 영화상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전부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연인의 사랑, 가족의 사랑, 국가의 사랑을 전부 녹여낸 사운드 오브 뮤직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아직까지도 가끔 명절이나 특별한 날, 텔레비전에서 상영하고 뮤지컬로도 재해석되는 걸 보면, 감히 이야기하지만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상실감에 허우적대는 그들의 경우
이자연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곤 한다.
나는 그 순간 내 평생 가장 힘겨운 일을 해냈다. 할머니한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난 아빠 얘기부터, 집에서 쫓겨나 차에서 사는 이야기, 평당에 있는 5백만 원 전셋집이랑 그 집 앞마당에서의 생일파티까지 모두 말했다. “힘든 시간들을 겪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도 하는 법이지. 그렇다고 해도 네가 한 짓은 정말 나쁜 거야. 지소야, 그건 변하지 않아.”
우리는 집이 필요하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등 생존을 위한 활동을 위해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영화를 보는 개인적인 활동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집에 초대를 받고 찾아오는 외부인의 ‘눈’을 위해서. 지소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단정한 교복을 입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닌다. 주변 아이들은 해맑게 부유함을 자랑하기 좋아하지만 정작 지소는 집이 없다. 아빠는 오래 전 집을 나갔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봉고차에서 생활을 근근이 이어갈 뿐이다. 그렇게 지낸 지 벌써 한 달. 아뿔싸, 지소의 생일이 다가온다.
지소에게는 집이 필요했다. 여태껏 우리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가 그녀에게 생겼다. ‘생일 파티를 열기 전까지 집을 마련할 것.’ 집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커지던 와중, 지소는 부동산 유리창 앞 ‘평당 오백만 원’이라고 적혀진 이층집 사진을 보고 멍하니 넋을 놓는다. 그래, 평당으로 이사 가자. 평당은 오백만 원으로 집을 살 수 있으니까!
지소의 엄마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노부인이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억대를 훌쩍 넘는 미술 작품을 모으기 좋아하며, 키우는 강아지 월리를 매주 애견 마사지 숍과 미용실에 데려가도록 한다. 애정과 관심을 듬뿍 받는 강아지. 잃어버리면 주인이 애타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찾아보려 애를 쓸 강아지. 지소는 강아지를 훔치기로 결심했다. 모든 길목에, 전봇대에 즐비하게 붙여진 잃어버린 반려동물을 찾는다는 전단지에는 오백만 원의 사례금도 결코 아깝지 않다는 이야기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소는 우여곡절 끝에 월리를 남몰래 훔치게 되었다. 완벽하게.
지소가 그렇게 데려간 월리는 노부인에게 덧없는 사랑이고, 끈적한 애정이며,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런 월리가 돌연 사라진 것은 그녀에게 재앙이었다. 그녀는 파들거리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만다. 월리의 부재는 그녀를 무겁게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말했다. ‘제 발로 나간 놈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안 찾아.’
노부인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다. 레스토랑 경영권을 넘겨주길 바랐던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둘의 마찰은 극심했고, 집을 나간 아들은 몇 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부인에게 누군가 곁을 떠나버리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어쩌면 영영 못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지독한 그리움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것, 그런 와중에도 괜찮은 척해야 한다는 것.
지소는 노부인에게 찾아가 월리를 돌려주며 자신이 훔쳐갔다는 사실을 힘겹게 꺼낸다. 마음 구석 아주 깊은 곳에 박혀있던 이야기는 입을 통해 고백이 되고, 반성이 되며, 후회가 되었다. 집이 사라진 아이와 아들을 잃은 노부인. 겉으로 보아서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각자의 삶의 굴레에서 나름의 짐을 지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상실감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이따금은 직접적인 연이 없어도, 공통의 감정만으로도 관계가 형성될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은 으레 ‘공감’이라고 불리곤 한다. 지소가 완벽히 훔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개가 아니라 노부인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정혜미 글 김건태 정혜미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