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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서 좋아요?
첫 배낭여행의 기억
처음 유럽을 여행할 때 주로 민박집에서 묵었다. 한 달간의 배낭여행에서 다양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을 텐데 대부분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 숙소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은 놀랍게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가끔은 그곳의 공기마저 바로 지금인 양 생생해 깜짝 놀라기도 한다. 파리를 떠올리면 약속한 시각이 훌쩍 넘어서까지 에펠탑 앞에서 혼자 비를 맞으며 일행을 기다리다, 하는 수 없이 민박집으로 돌아가 대문을 열던 순간이 떠오른다. 문을 열자 집 안에서 따뜻한 공기가 훅 쏟아졌고, 거실에 태연스레 앉아있던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그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로마의 민박집에서는 같이 묵던 여행자들과 친해져서 다음 목적지였던 스위스 여행을 취소하고, 로마에서 며칠을 더 묵으며 밤마다 ‘마피아 게임’을 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그곳들은 모두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생각해보면 오래 기억되는 건 위치나 침대 상태, 화장실의 청결도 등이 아니라 그곳에서 함께 지낸 여행자 친구들과 환대해주던 주인들이었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을 막 넘긴 대학생이었고, 민박집 사장님들은 나보다 적어도 열 살은 많은 어른이었다. 한국을 떠나 유럽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나를 대단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숙소에 도착해 주인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그들의 인생에 대해 상상해보곤 했던 것 같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어쩌다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그 질문.
바르셀로나에서
사귄 친구
병진 씨와 희진이 부부는 우리 부부와 동갑내기 친구다. 남편에게 병진 씨는 가끔 만나 술을 한 잔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술친구이자 요리 선생님이고, 나와 희진이는 종종 시내의 카페에서 만나 가벼운 수다를 나누는 친구다. 요리를 잘하는 병진 씨와 사교적인 희진이는 자주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을 차려주곤 하는데, 남편은 젓가락질을 한번 할 때마다 묻곤 한다. “이건 어떻게 요리한 거야? 뭐 넣은 거야?” 병진 씨는 그때마다 신이 나서 요리 방법을 이야기해준다. 그럴 때면 우리 둘은 마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다가 이어 맛있게 먹을 뿐이다.
이들은 바르셀로나에서 두 곳의 숙소를 운영 중이다. 하나는 여러 명이 묵는 민박집이고, 다른 하나는 한 팀을 위한 독채 민박이다. 그들이 운영하는 숙소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최근 우연히 들를 기회가 생겼다. 우리는 여행객이 된 것처럼 조금 설렜다. 마침 손님들이 모두 외출한 틈을 타, 그들에게는 일터이고 우리에게는 친구 집이지만, 손님들에게는 여행지의 숙소인 집의 거실 탁자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병진 씨는 틈틈이 빨래한 이불을 널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어쩌다 이곳에서
살게 되셨어요?
한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병진 씨가 처음 이곳에 온 이유는 언어였다. 잠시 일을 쉬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 새로운 언어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게 9년 전. 스페인어를 핑계로 바르셀로나에 와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요리를 공부하고, 지금은 숙소를 운영한다. 희진이는 처음에는 일 때문에 왔고, 그러다 이곳에서 병진 씨를 만나 본격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주말에 뭐 하세요?’라는 질문이야. 그럴 때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조금 난처해지곤 해. 우선 우리에겐 주중과 주말의 구분이 없고, 쉬는 날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그들이 원하는 답은 어쩌면 ‘성가족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지요.’라던가,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산책해요.’와 같은 대답이 아니었을까 싶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하루는 특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도 그렇다. 이곳에서 가이드를 하며 수많은 여행객을 만나는데 그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이곳에 살아서 좋으시겠어요.”이다. 그 말에 “네, 좋아요.”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어떤 점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쉬는 날 나와 희진이가 만나면 우리는 골목을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서로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다. 그뿐이다. 우리가 만나 특별한 관광지를 여행한다거나 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오늘은 도시락을 싸 들고 구엘 공원에 가볼까?” 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은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등 밀린 집안일을 하고, 은행이나 관공서 볼일을 보고, 장을 보고, 한국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주말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어디서든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바르셀로나 지인 아파트
박병진, 이희진 부부가 운영하는 숙소. 보께리아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있다. 손님들에게만 알려준다는 병진 씨의 맛집 리스트가 탐나, 종종 나도 그곳의 손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
H. blog.naver.com/ol_v_lo
여행지에서 사는 일
“민박집을 운영하면 시간이 많을 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내 시간이 많지 않아. 손님들은 각자 다른 시간에 도착하고, 그들을 맞이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지. 사실 매일같이 여행자들을 만나는 일이 늘 즐겁기만 하겠어? 하지만 종종, 나에게는 똑같은 하루가 손님에게는 여행지에서의 매우 특별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면 대단히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해. 그렇다고 해서 나도 그들처럼 매일매일을 특별하게 여기며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그럼에도 이 일이 좋은 건, 여행자들로 인해 에너지를 받는다는 점이야. 바르셀로나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았다면 못 느꼈을 거야. 가로등, 보도블록 하나마저 새롭게 보는 그들로 인해서 내 일상의 장면들이 특별해지는 거지.”
내가 본 병진 씨와 희진이는 누구보다 바르셀로나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식당이 생겼다고 하면 꼭 찾아가 맛을 보고, 작은 축제라도 열리면 짬을 내 다녀온다.
종종 차를 빌려 근교 여행을 하고, 본인들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늘 기꺼이 참석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한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에 살고 있었더라도,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어디에 사느냐보다 중요한 게 어떻게 사느냐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들을 볼 때마다 든다.희진에게 물었다. “한동안은 계속 바르셀로나에서 살 생각이야?”, “응.”,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있지. 당연히 있어.” 그들에게 선택지는 넓다. 나는 지금 그들이 바르셀로나에 살아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어 더없이 좋지만,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들의 손님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민박집까지 찾아오는 길에 보았던 낯선 도시의 보도블록의 모양이 어땠는지 창 모양은 어떠했는지 이야기하는 즐거운 상상. 그리고 잊지 말고 물어봐야지. “여기 살아서 좋아?”
에디터 이현아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