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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는 마음, 달달한 커피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이토록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니.
인도에 온 뒤로 사흘간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우선 충격이 컸다. 주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걱정해준 탓(인지 덕분인지)에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벅찬 스케일의 혼돈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거의 자갈 수준의 흙먼지가 공기의 성분인 양 날리고 있어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리고 냄새. 느닷없이 거리에 멈춰 서서 비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 기도를 올렸을 정도인데, 그런 내 코로도 견디기 곤란한 악취가 공기의 또 다른 성분인 양 스며 있다. 이곳에서 반년을 지낼 수 있을까?
실눈을 뜨고 절박하게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서울에선 열 걸음마다 하나씩 나올 정도로 많은 카페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괜찮은 카페만 나와준다면, 일단 앉아서 괜찮은 커피만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절망에 찬 심정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비슷비슷해 보이는 거리를 두어 시간 헤매며 눈높이를 조정하고 다시 둘러보았다. 이번엔 공간이 아니라 간판을 훑으며 ‘Coffee’나 ‘Cafe’ 따위의 단어를 찾았다. 카페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찾는 유형이 없는 것이었다. 앉아서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쾌적한 공간. 필터 기능을 전부 꺼야 했다. 아니, 필터링 해제에 앞서 환경 설정부터 다시.
우선 도로 상태. 도로의 경계가 애매하다. 건물이 없는 공간이 곧 도로다. 도로의 가장자리는 코코넛 껍질, 각종 식물의 잎과 줄기, 여러 광물의 덩어리와 가루,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건축 자재,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색 바랜 현수막 조각, 종잇조각, 플라스틱 조각, 수많은 재질의 용기 등 온갖 쓰레기가 건물, 탁자, 의자, 탈것, 동물과 뒤엉켜 끝없이 이어지는 데다 차도와 인도가 따로 없고 심지어 신호등이나 차선 등 교통질서 유지에 필요한 장치도 없어서 어디에 자리 잡고 앉는다고 해도 그 자리를 가게 안이라 해야 할지 길바닥이라 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 환경을 디폴트로 설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터였다.
여기에 또 다른 상황이 겹쳤다. 일주일에 한 알씩 먹어야 하는 말라리아약이 꽤 독하다는 의사의 경고에 긴장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알씩 먹어야 하는 말라리아약이 꽤 독하다는 의사의 경고에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물 마시고 배탈이 났다는 무수한 일화는 경각심을 차고 넘치게 만들었다. 바짝 쪼그라든 간담으로 어떤 물로 끓였는지 알 수 없는 커피를 흙먼지까지 한 움큼 섞인 칵테일로 마시려면 꽤 큰 용기를 내야 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를 첸나이로 초대한 출판사 타라북스의 직원들이 자주 간다는 식당을 기웃거렸다. 직원이 탁자에 의자를 뒤집어 올리고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가니 의자와 탁자까지 걸레로 빡빡 문질렀다. 한 시간 넘게 식당을 치우는 광경을 목격하고 저곳이라면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했다.
빠낭 깔깐두 빨Panang kalkandu paal. 골든 밀크. 향신료 가루가 떠 있는 커리 색 음료가 금속 잔에 나왔다. 오직 혀로 판단하건대 우유에 한약재와 설탕을 넣어 끓이면 딱 이런 맛일 듯했다. 그 자리에서 검색하니 단맛을 내는 주인공은 야자나무에서 추출한 비정제 설탕인 듯했다. ‘Candy’와 ‘Kalkandu’는 어원을 공유하는 사이인 듯하다. 잔 모양이 독특했다. 잔의 둥근 바닥과 손잡이가 받침에 딱 맞물려 잔이 왔다 갔다 움직이지 않았다. 따뜻한 황금빛 우유가 쪼그라들고 얼어붙은 간담을 녹여 마침내 커피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서성거리며 변죽만 울리던 카페로 향했다. 큰 원형 철통에 커피와 우유가 각각 끓고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자 국자로 커피를 떠 하늘을 향해 팔을 한껏 올렸다. 국자를 살짝 기울이자 커피가 가는 줄기를 만들며 지름 5센티미터가량의 잔에 고스란히 담겼다. 뒤이어 우유 역시 같은 방법으로 따랐다. 액체가 낙하하는 힘 때문인지 커피와 우유는 잘 섞였고 거품이 부글거렸다. 달고 걸쭉한 ‘다방 커피’ 맛이었다.
“Are you a coffee person or a tea person?”
며칠 뒤 점심시간에 타라북스의 직원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커피 퍼슨이라고 하자 반가워하며 인도 방식으로 한 잔 내려주겠단다.
용기 디자인은 다르지만 추출 방식은 베트남 커피와 비슷했다. 두 개로 분리된 금속 통의 가운데 부분에 분쇄한 커피를 넣고 댐퍼를 얹은 다음 뜨거운 물을 부어 추출한다. 쓴맛이 강해 우유와 자그리(인도의 비정제 설탕)를 섞어 마신다는데, 이를 위한 잔 디자인이 합리적이다. 잔은 위로 길쭉하고 받침은 옆으로 넓적한데 용량은 동일하다. 잔에서 받침으로 부었다 다시 잔에 부어서 고르게 섞어 마신다. 그 과정에서 온도가 내려간다. 더 식히고 싶은 사람은 여러 번 옮겨 붓는다.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는 문화이니 만지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요리를 만들지 않을 테고, 결과적으로 열에 익숙하지 않으니 막 끓여 나온 음료를 식히는 과정이 필요해졌으리라 짐작하며 한 세트(잔에서 받침으로, 다시 잔으로) 옮겨 부었다. 앞서 길거리 카페에서 본 퍼포먼스의 가정 버전인 셈이었다.
단맛 강한 커피는 꽤 마실 만했고, 환경 설정도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진행되었다. 앉아서 시간을 보낼 카페를 찾고 싶은 바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 동네 저 동네 가보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지금은 5성급 호텔의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열흘 만에 맛보는 안락이다. 공간은 쾌적하고 직원들의 서비스도 좋지만 프렌치 프레스로 나온 몬순 말라바는 직접 주문하지 않았으면 엽차인 줄 알 뻔했다.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이 절실했기에 다른 모든 건 참았다.
내가 커피 퍼슨인지 카페 퍼슨인지 잘 모르겠다. 상관없다. 커피가 필요할 땐 거리로, 공간이 필요할 땐 호텔로 가면 되니까. 달달한 커피 한 잔 들고 흙먼지 속에 앉아 있는 저들이야말로 커피 퍼슨이다
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