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ARM LITTLE THING

《도토리시간》 이진희 작가

얼마 전 우연히 닿은 바닷가에서 마음에 쏙 드는 돌멩이를 발견했다. ‘마늘처럼 생겼네. 반들반들하다. 어쩐지 나를 보고 말을 거는 거 같아.’ 하며 집에 가져와 깨끗이 씻고 선반에 올려뒀다. 오고 가며 지나치기도, 손으로 집어 들고 멍하니 보기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이진희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이 길에서 주운 돌멩이였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그 돌이 떠올랐다. 눈에 띄지 않지만 어쩌다 눈에 들어오면 손으로 한 번 쓰다듬게 되고, 쓰윽 만졌을 때 손끝에 퍼지는 질감이 슬며시 마음의 온도를 올려주는 게 참 닮았다. 노릇노릇 고구마가 굽히는 집에서 작고 여린 목소리로 나눈 이야기를 여기에 나눈다.

축하드려요! 《도토리시간》이 어린이들이 고른 한국 그림책 30권에 선정되었어요.

어린이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저는 어린이 독자를 늘 믿어왔어요. 누군가 저의 그림책이 어린이들에게 어려운 책이 아닐까 물어오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어요. ‘어린 친구들은 우리의 짐작보다 더 깊고 창의적이며, 모두 천재성을 갖고 있어서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라고요. 어린이 독자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인터뷰는 저와 어린이 에디터가 함께할 거예요.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도토리시간》을 꼽은 박이룸 어린이예요. 

두 분이 같이 들어오실 때 정말 기쁘고 미소가 가득 지어졌어요. 너무 반갑고 기대돼요.

 

제가 먼저 인터뷰하고 뒤에 어린이 에디터가 직접 질문을 할게요. 요즘 집에서 작업하신다고요. 농부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을 하셨어요. 그림에 성실하게 임하는 편이에요?

작업실 겸 집의 공간으로 이사를 온 지 1년이 넘었어요. 저는 성실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자유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놀기를 원하는 사람이에요. 그림책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일보다는 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에 맞춰 정해진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동경해요. 집 주위에 논밭과 누군가 가꾸고 있는 농장들이 있는데 산책을 하며 나란히 놓인 농부의 장화나 모자를 바라보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흙을 만지며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계절과 순리에 맞게 수확을 하는 과정을 짐작해요. 그림에 성실하게 임하고 싶어서 농부의 마음을 늘 생각하고 있어요. 칸트처럼 마음에 시계가 있는 듯한 사람을 만나면 닮고 싶거든요. 때로는 로봇처럼 정해진 시간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주어진 일을 착착 해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틈틈이 아무것도 안 하는 비어 있는 시간도 너무 중요하거든요.

 

주로 연필과 색연필로 그리는 거 같아요. 흐릿한 선을 여러 번 반복하여 덩어리로 만들고, 오래도록 그리며 불어넣은 온기가 고스란히 그림에 담겨 있어요.

그림 그릴 때 니트나 스웨터를 떠올리곤 해요. 포근한 느낌을 좋아해서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동물의 털도 좋아해서 털의 느낌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그런 표현이 색연필로 잘 구현이 되는 것 같아요. 연필은 가장 편한 재료고 시간을 쌓아서 그리는 그림이니까 손에 쥐면 마음이 편안해요. 웬만해서는 망치지 않을 거라는 느낌도 편안함을 더해주는 거 같고요. 가끔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카메라 필름처럼 미술 재료들도 언젠가 사라지면 어쩌나 걱정하곤 하는데, 그때가 되면 연필로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 모든 재료가 사라진다고 해도 왠지 연필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5년 전 《어라운드》 인터뷰에서 그림책 너머로 숨어 있고 싶다고 했어요.

회화를 전공하고 그림책을 선택하기까지 10년은 고민한 거 같아요.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을 만들자고 마음먹은 건 그림책 뒤에 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림 그려서 전시하는 것보다 책 만드는 일을 하면 책이 스스로 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나 제가 주인공이 되는 데 두려움이 있었는데 저 때문에 제 지인들이 굳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을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세세하게 여러 상황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림 그리고 책 만드는 일은 제 생각보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더라고요. 제가 드러나야 하는 일들도 가끔 있고요. 그런 점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며 함께하는 즐거움도 알아가고 있어요. 그래도 숨어 있을 시간은 언제나 필요해요. 숨어 있는 게 편해서 마스크 쓰는 것도 좋았어요. 모자를 쓰고, 안경까지 쓰면 더 좋아요. 늘 어떤 존재 뒤에 숨어 있고 싶어서 누군가를 만나도 친구가 있어야 의지가 되죠.

 

‘도토리시간’은 작가님이 숨어있는 시간인 거네요?

맞아요. 이곳에 이사 오고 마음이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결혼하고 남편이랑 같이 집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정말 혼자 있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밖으로 나가 산책을 자주 해요. 논밭도 지나고 제가 좋아하는 길을 걸어요. 산책하다 어딘가에 앉아서 가만히 노래를 듣고, 생각도 정리해요.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늘 그리워해요. 어린 시절에는 이불 속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했는데 오래 그림을 그리려면 허리를 보호해 줘야 해서 지금은 종종 옆으로 누워 있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집 고양이도 혼자 시간이 필요할 때면 어디론가 들어가서 한참 나오지 않아요. 참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날 아침》이 처음 만든 책이죠? 작고 여린 사슴은 혼자서 시련을 마주하고, 힘든 일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요. 사슴의 여정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알아채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용기를 봤어요.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책 같아요.

작가마다 모두 다를 텐데 저는 이야기를 구상할 때 외부에서 찾기보다 제 안에서 발견한 것들로 시작해요. 지금까지 저에게 이야기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시 같은 것이었어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지나갈 때 놓치지 않으려고 적어놓는데 그런 생각들은 평소 일상의 고민들이에요. 크고 제 그릇에 넘치는 이야기보다는 제 삶에서 매일 일상을 반복하며 느끼는 작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그런 일상이 저에게 가장 소중하거든요. 햇빛에 잘 말려진 작고 하얀 천처럼, 바스락하고 매일의 삶에 가까이 있는 그런 그림과 글이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만들고 싶은 그림책이 참 많은데 함께하고 싶은 다른 일들도 있어서 늦어지고 있어요.

 

《도토리시간》과 《어느 날 아침》은 아픔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다른 거 같아요. 《도토리시간》은 혼자 이리저리 뒹굴며 고독한 시간을 보낸 뒤 문을 열어 타인에게 향하고, 《어느 날 아침》은 타인과 함께 나누고 공감한 뒤 혼자로 돌아오네요.

이 부분은 저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아침》에서 《도토리시간》을 내기까지 꽤 긴 시간이 있었는데 각 책들은 당시 제 상황들과 비슷해요. 관계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바뀐 것들이 그림책에도 나타나고 있다니, 저도 흥미로워요.

 

어떻게 바뀌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저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더니 이제 조금씩 다른 사람들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요즘에는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과 내 곁에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종이 위에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직업이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요. 마음으로 아끼게 된 사람들과 만난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 마음도 깊어져요. 씨앗을 돌보고 물도 주고 곁에 앉아 있기도 하며 깊은 마음으로 나아가요. 그래서 함께한 시간이 사랑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엔 새로운 관계에 마음을 조금 빨리 열어보자 마음먹고 있어요. 사람에 대한 시선이 변하고 있는 게 지금 제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 같아요.

동물이 주인공이거나 도움을 주는 존재로 자주 등장해요. 동물을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글도 본 적이 있는데요, 작고 연약한 존재에 애정을 느끼는 편인가요?

동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동물을 닮은 사람들에게 눈길이 더가기도 해요. 예전에 저를 동물에 빗대어 생각한 적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어요. 차라리 언어라는 것이 없고 모두 동물들처럼 털이 달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동물들과 함께 있을 땐 아무 말 안 해도 된다는 데 편안함을 느꼈어요. 귀엽게 반짝이는 작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 마음에 작은 불빛이 켜진 것처럼 기쁘고도 슬펐고, 지금도 그래요. 나를 평가하지 않는 순수한 눈을 사랑한 것 같아요.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게 늘 애틋한 마음이 있어요. 이곳에 이사를 온 후로는 작은 곤충들이 눈에 많이 보여요. 곤충을 무서워해서 관심이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애벌레들부터 여러 곤충들까지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아무렇게나 덩그러니 죽어 있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는데 어떤 날은 그런 모습을 보고 내내 마음이 어둡기도 했어요. 이 세상에 슬픔이나 악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 존재하고 저의 내면에도 그런 부분들이 있지만, 그저 약한 존재들이 슬픔에 처하지 않고 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방향으로 몸을 틀어 찻길로 가지 말고 숲속에서 잘 살아남아 나방도 되고 큰 지렁이도 되고 커다란 거미도 되어 잘 살면 좋겠어요.

 

《어느 날 아침》의 사슴도 잘 지내고 있겠죠? 책에 등장한 작고 아름다운 존재들 생각도 많이 할 거 같아요.

맞아요. 이 전에는 제 안에 머물러 있었다가 밖으로 나간 아이들과 앞으로의 책에 등장하는 존재들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어요. 조금씩 밖을 바라보는 중이라서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 어떨지 기대하기도 하고요. 다음 그림책에는 함께 사는 고양이 ‘먼지’가 등장할 예정인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이상해요. 너무 사랑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픈데 그림책에 등장하는 제 고양이를 생각만 해도 귀엽고 애틋해요.

 

평소에 자주 하는 생각이나 망상이 궁금해요. 그 생각을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는 건가요?

다양하고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들이라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생각들로 정리해 보자면 끝말잇기와 비슷할 것 같아요. ‘저 풀 예쁘다. 별을 닮았네! 그 옆에 저게 뭐지? 엉망진창이네. 저런 초록색이 있었나? 고양이 차 조심해라! 고양이는 길 건널 때 차를 보고 건너나? 제발 차 보고 건넜으면 좋겠다. 길에 사마귀가 죽었네. 슬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던데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면 안 좋은 장면도 많이 보게 되는구나. 왜 죽었지? 곤충들아 생각 없이 나오지 마라. 찻길로 방향 틀지 말고 조심 좀 해라. 그래 네 탓은 아니야. 아아 숲 냄새가 좋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요. 그런 생각들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하얀 나비처럼 여기저기 날다가 훨훨 날아가버리곤 해요.

 

상상과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과 스토리로 만들어 32페이지 책으로 만드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어요?

둘은 저에게 너무나 다른 일이에요. 글과 그림이 있는 책은 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그림책은 아무래도 호흡이 길어서 장거리 달리기와 비슷해요. 어떤 이야기를 써 놓고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면 저는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곤 해요. 순간순간하고 싶은 것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라 싫증이 나거든요. 가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거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도 있고요. 시간이 꽤 지나면 과거의 내가 펼쳐놓은 것들을 수습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림책과 다르게 드로잉은 즉흥적으로 그리는 그림이라서 지금 나의 손끝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그 불완전함 때문에 드로잉이 재미있지만 또 어렵기도 해요.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어쩌면 이것이 내 무의식의 그림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서로 완전히 다른 매력인데 내공이 더 쌓이면 드로잉들로 그림책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림과 책을 연결해 세 가지 정도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싶은데, 서로 너무 다른 일이라 제가 세 명이면 좋겠어요. 공통점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재미있어서 포기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어린이였을지 궁금해요.

책과 도서관, 공원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앨범 속 사진들을 보면 늘 무언가를 심각하게 관찰하고 있던데 개미나 고양이 같은 친구들을 쳐다보는 거 같아요. 어린 시절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공원 옆에 살았는데 그곳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어요. 제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인데 꼭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는 시간이 좋았어요. 그림 형제의 ‘그림동화’처럼 짧은 이야기들을 좋아해서 늘 비슷한 종류의 책을 빌려봤어요. 자라면서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어요. 생각보다 과감한 편이라 대체로 마음껏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지냈어요. 이것저것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어린이였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때가 언제예요?

중학교 시험 기간에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공부보다 그림이 더 재미있었고, 밤을 새워도 힘들지 않더라고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미술 학원에 다녔는데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제 그림을 안 그리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미술 학원 선생님이 꼭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저와 엄마를 설득하셨어요. 그래서 학원을 계속 다니고 덕분에 미대에 진학해서 지금까지 흘러왔어요. 그런데 그림을 제대로 그리게 되었다고 느낀지는 몇 년 되지 않았어요. 그전까지는 그림을 좋아하긴 하는데, 재미있다기보다 ‘좀 고통스러운 건데 나는 그래도 이게 좋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드로잉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림이 정말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림과 책이라는 분야가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요소가 정말 많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 지점이 너무 좋고 재미있어요. 그런데 재미라는 건 단순히 즐겁고 신난다가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아우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재미가 계속된다면 그림을 그릴 거예요.

 

내향적이고 느릿한 성격 같아요. 나와 잘 지내고 바깥세상에 어우러지기 위해 애쓰는 시간도 있었을 거 같아요.

학교 다닐 때는 내향적이어서 불편하다는 생각보다는 왜 친구들이 좋아지고 편안해지면 반을 바꾸는 걸까 궁금했어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속도가 조금 느린 편이라 그런 생각을 자주 했죠. 아침에는 늘 졸렸고 학교에 가면 점심을 먹기 전까지 정말 졸렸던 기억도 나요. ‘나는 왜 이럴까?’라는 질문은 늘 있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작은 물음표들이 따라다녔고 더 큰 물음표는 20대 시절에 따라다녔어요. 무엇 하나 쉽지 않은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버거워서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나만 이렇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러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부분이 재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족함뿐인 재능이요. 하루하루 그렇게 지내왔고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편안한 날들도 찾아왔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어린이들이 있다면 지금의 아픈 부분이 나중에 빛나는 부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림만 보고 작가님을 알아채는 분들이 많아졌죠?

그림을 그린 지 10년 되었을 때, 세상에 그림 스타일이 너무 다양하고 내 그림을 봐주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스타일을 확실하게 잡고, 이름도 바꾸고 사람들에게 나를 각인시키는 방법으로 했으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렇게 속도가 느리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죠. 근데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재료 연구가 너무 재미있거든요. 여러 색의 재료들과 색채, 각각의 질감을 생각하면 마음이 빵처럼 부풀어 올라요. 새로운 재료를 사서 종이에 처음 써볼 때 정말 기분이 좋아요. 하고 싶은 게 많고 이것저것 다 해보는 스타일이라서 독립 출판도 해보고 느리면 느린 대로 가야지, 하고 생각하며 그려온 나날들이 제 자부심이 되었어요(웃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한다고 착각하기 쉬워요. 왜 나는 잘하는데 안 알려지지? 하는 생각을 저도 한 적이 있어요. 그림은 많이 그려야 잘하게 되는 건데 말이죠. 좀 오래 돌아왔는데 어쩔 수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겪을 거 같고요.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분들에게 ‘시간이 좀 걸려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이렇게 가도 괜찮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언젠가 뭐 좋은 일도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림을 재미있게 그릴 수 있다면 괜찮은데, 재미가 없으면 굳이 할 필요는 없겠죠.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엔 뭘 하면서 보내요?

그림 그리지 않는 시간에는 책 읽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사실 다른 할 일도 많고 이불 속에 있는 것도 좋아해서 한심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우리 집 검은 고양이들과도 놀아주고 가끔 집안일도 하고 산책도 하고 그래요. 함께 집에서 작업하는 남편과 밥도 먹어야 해서 집에서도 때때로 분주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책을 만드는 마음도 달라질 거 같아요. 작가로서 독자로서 그림책은 어떤 존재인가요?

저는 그림책에 참 다양한 감정을 느껴와서 예전보다 지금 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림책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힘들어져서 애증의 대상이 되기도 했거든요. 조금 멀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어요. 사람과의 관계도 너무 좋아하면 이상해지듯이 책과 저의 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제는 그림책을 만들지 않아도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을 때,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봐요. 제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담담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다가가고 싶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거, 그리고 싶은 것들을 보고 좋은 느낌이나 따뜻한 감정을 받으셨다면 너무 좋겠지만, 제 목소리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걸 읽고 좋은 영향을 받으세요.’ 하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지 않아요. 가끔 길을 가다 예쁜 돌멩이를 줍거든요. 그러면 친구에게 “이거 어때? 내가 주웠어.” 하고 잠시 보여주는 정도면 좋겠어요. 친구가 자려고 누웠을 때 ‘왜 나한테 그 돌을 보여줬을까?’ 생각나는 그런 책이었으면 해요.

어린이가 묻고 작가님이 답한 이야기

박이룸 7세

Q.작가님에 다람쥐는 뭐예요? 도토리는 어디에 있어요?

지금 저에게 다람쥐는 저와 함께 사는 친구예요. 제가 숨어 있으면 자꾸 꺼내려고 해요. 저도 그렇고요. 저의 도토리는 저의 이불 속이기도 하고 고양이의 털 속이기도 하고, 또 산책길의 의자 이기도 해요. 어느 곳이나 잠시 혼자 있을 수 있다면 그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Q.먼지라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도토리시간의 고양이는 왜 심술 궂다고 했어요?

고양이는 심술궂어서 귀엽거든요! 먼지도 먼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지내는 고양이에요. 저를 막 물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조그만 털바지를 입은 것 같은 발이 너무 귀여워요. 장미에 가시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고양이는 마음대로 사는 모습을 볼 때에 웃음이 나요.

Q.어느날 아침에서 어떻게 사슴이 뿔을 찾으러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게요. 지금의 저라면 어땠을까요. 이룸 친구라면 어땠을까요? 정말 어렵고 중요한 질문이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Q.사슴이 나올떼와 돌아올때 왜 나무색이 달라요?

와아 정말 관찰력이 뛰어나요. 이 질문 덕분에 <어느날 아침> 을 오랜만에 다시 보았어요. 나무 색은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잘 보면 마지막 페이지 나무의 유리집에는 불이 켜져 있어요. 희망의 마음을 담은 숲 장면인가 봐요! <어느날 아침> 을 만든 지 오래되어서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이런 세심한 질문을 처음 받아서 즐거워요.

Q.왜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겄도 나만에 그림을?

그림은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재미있다는 기준은 꼭 기분이 좋거나 기쁜 것만은 아닌데 힘든 부분을 감수하더라도 그림은 재미있어요. 즐겁지 않았다면 그리지 않았을 거고 앞으로도 스스로 더이상 즐겁지 않아진다면 그리지 않았으면 해요.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것도 즐거운 것에 포함되는 함정이 있어요. 그렇게 그리다 보니 이룸이 친구에게 나만의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나 봐요. 정말 큰 칭찬을 받아서 기뻐요!

Q.이모가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는?

저는 숨어 있는 작가들을 좋아해요. 작가의 삶이 많이 드러나 있지 않고 작품으로 알려진 작가들을 좋아해요. 아마도 궁금해서 그런가 봐요. 그런 작가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해 볼 때가 많아요. 아무도 내 그림을 알지도 좋아해주지 않아도 끝까지 좋은 작업을 했던 작가들이 늘 의문이에요. 그리고 저도 묻고 싶어져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림이 좋았어요? 외롭지 않았나요? 이런 질문들을 마음속으로 해본답니다.

[인쇄물(본문)은 박지은 어린이가 직접 적은 글자와 답변은 칠곡할매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

에디터 김현지·박이룸

포토그래퍼 장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