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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어른스러워졌다”는 말을 들었다. 살짝 어깨에 힘이 들어간 기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말수가 적어지고 좀처럼 속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삼킨 지 얼마나 되었냐는 물음에 적절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방. 세상의 눈을 피해 잠시 숨어있기 좋지만 오래 있다 보면 어느새 나오는 법을 잊곤 하는 그곳을, 나는 예전보다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고요한 퇴근길,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까지 뛰어갈 요량으로 정류장에서 숨을 골랐다. 한 꼬마도 내 옆에 서 있었다. 이윽고 잰걸음으로 총총 달려나간 꼬마는 커다란 우산 아래로 뛰어들어갔다. 가만 보니 똑 닮은 모녀다. 문득, 비 오는 날이면 아파트 입구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 우산 아래서 나도 저 아이처럼 활짝 웃었을 텐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으니까. 어른이 되고 나서 두렵거나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엄마의 우산을 대신할 존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슬그머니 방 하나를 만들었다. 욕지기나 불만, 상처 같은 것을 넣어두고, 누구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밀 서랍처럼 단단히 잠가 놓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마음의 우물’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이는 ‘마음의 결 다듬기’라고 말했다. 마음의 결이라니, 부스스한 머리칼을 애써 빗어 넘기는 내 모습이 연상됐다. 평소 잔머리가 많은 편이라 비가 오면 고불고불해지고 파마를 해도 두 달이 못 가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어차피 끝나지 않을 싸움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도 그런 걸까. 구겨지면 펴놓고, 꼬이면 풀어놓기를 반복하는 미묘한 신경전.
‘내마음보고서’에 대해 알게 된 건 1년 전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만든 심리검사 프로그램, 건강검진을 하듯이 내 마음 상태를 체크해준다는 말에 언젠가 꼭 해보리라 생각했다. 이번이 그 기회였다. 2백문항의 질문으로 구성된 검사지를 작성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말쑥한 책 한 권이 도착했다. 고지서 같은 종이에 심각한 내용을 잔뜩 풀어놓은 일반적인 검사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책에는 나의 성향과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차분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정서적으로 기대고 싶지만 두려워하는 마음, 혼자만 알고 있는 근심, 스트레스 지수 그리고 나에게 제안하는 시 한 편까지. 조금은 불편하고 낯뜨거운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 가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도 있다. 나는 관계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가족과의 유대감,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공감대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럼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하게 느껴지는 건 관계에 대한 어떤 책임이나 부담 때문이기도 했다. 일종의 반작용인 셈이다.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어도 엉킨 실타래처럼 답답한 부분도 있었다. 이건 사랑의 온도를 재고, 슬픔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찾아와 이제 그만 나오라고 방문을 두드려주는 정도는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문을 열고 나오는 건 내 몫이겠지만.
일주일 후, 나는 매일 반복되던 퇴근길을 벗어나 낯선 모임에 갔다. ‘내마음보고서’를 받아본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워크숍 프로그램이었다. ‘마음’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는 무모한 시도만 아니었어도 어쩌면 가지 않을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방을 보여준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누군가 덥석 질문이라도 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곳에는 소박한 테이블과 간단한 주전부리,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두 사람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내마음보고서’를 처음 받았을 때의 기분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뻔한 얘기였어” “마지막에 나온 시가 마음에 들었어” “사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아닌 것 같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진공 상태에서 말을 섞었다. 여기서 지켜야 할 유일한 규칙은 ‘남을 도와주지 않는 것’.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나 섣부른 조언도 필요 없었다. 상대의 기분을 맞추려 애쓰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과제였다. 당시 나이는 몇 살이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 후로 무엇을 했는지 등 사실에 의거한 질문만 던지기로 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진솔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점점 무언가를 말하고 싶기도 하고,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방안에 꼭꼭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 모임을 멀리서 관망하리라는 다짐과는 다르게 자꾸만 내 사연이 대화의 구심점이 되었다. 몸을 뒤로 빼고 표정을 숨길수록 사람들의 눈이 나를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벌거벗은 기분에 얼마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 모임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혹독한 시간을 보냈으며, 오히려 지금은 홀가분해졌다고 털어놨다.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 그랬니” “힘들었겠다” “슬픈 일이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두 사람의 담담한 진심에 위로 받았다. 조금 전까지 간지럽고 불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금세 흘러갔고, 우리는 서로 뒤엉킨 마음을 미처 다 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면 위로 떠오른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더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밤 공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두렵나요?” “글쎄요. 모든 게 그냥 좀 아쉬워요.” 우리는 처음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이 책을 다시 숲으로 되돌린다면
이 책을 다시 숲으로 되돌린다면
내가 읽던 이 구절은
숲의 어느 부분에 새겨져 있을까
자작나무 겨드랑이쯤일까
숲은, 인간의 말들을
어디쯤 철 지난 현수막처럼 걸치고 있을까
이 책을 다시 숲으로 되돌린다면
밑줄 그은 이 구절,
나무의 살갗에 새긴 문신은 흐려질까
한 땀 한 땀마다
솟아났던 푸른 울음들은 새살 돋을까
숲은, 가시철사처럼
파고드는 문장들을 뱉어낼 수 있을까
이 책을 다시 숲으로 되돌린다면
제 소리를 갖지 못하는 이 구절을 사라지리라
매미, 쓰름매미,
숲에는 제 이름으로 노래하느니
숲은, 탈피 껍질처럼 텅 빈
인간의 문장들을 빗방울처럼 떨쳐 내리라
– 나에게 온 시 한편, 박현수 시인의 『이 책을 다시 숲으로 되돌린다면』
‘마음’을
연구하는 사람들
‘마인드프리즘’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돕는 곳이다. ‘마음’을 연구한 지 횟수로 10년째, ‘심리치유 전문기업’이라는 번듯한 수식어가 있지만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을 준다. 공간은 아늑하고, 사람들은 다정하다.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런데 여기가 회사라고 했지?’ 하며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게 된다. 마인드프리즘은 심층심리분석 시스템을 기반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내마음보고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심리검사다. 보통 임상적으로 정신질환을 진단하기 위해 사용하거나 심리적 특징을 유형화하는 반면, 내마음보고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인에게 가장 의미 있으면서 그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중요한 심리적 색깔을 알려준다. 모든 분석의 중심이 ‘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홈페이지에 신청하면 심리검사지가 배송되는데, 온라인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개인 정보는 철저히 보호되며, 만 17세 이상부터 참여할 수 있다.
내마음워크숍
개별상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내마음보고서>를 받아본 후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꽤 괜찮은 대안이 있다. <내마음보고서>를 거울삼아 나를 더 들여다볼 수 있는 워크숍 프로그램이 그것. 참가자들의 치유에 도움이 되고자 세심하게 구성했기 때문에 일종의 집단상담치료의 역할도 한다. 마인드프리즘의 전문 디렉터가 진행하며,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나와 너, 우리에 대해 더 깊이 조명하는 ‘홀가분워크숍’이 있다.
워크숍을 진행한
‘홀가분디렉터’와의 대화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분야의 학문을 전공하진 않았어요. 다만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마음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죠. 마인드프리즘의 설립자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 중이신 정혜신 박사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현장 디렉터로 일하고 있어요. 저는 신념에 따라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결정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강한 신념도 내 주변과의 관계, 그 안에서의 감정의 높낮이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의문이 생겼어요. 그 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왔네요.
‘마음’이라는 건 손에 잡히는 단어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 정의에 대해 가장 와 닿는 말이 있었나요?
“누구에게나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The patient is always right.” 제가 헷갈리고 흔들릴 때마다 되뇌는 말이에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이 어떤 반응을 하는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심지어 내가 누군가를 못되게 괴롭힐 때도 충분한 이유가 있죠. 그 속살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다면 누구나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제가 현장에 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저는 주로 성찰과 치유의 워크숍을 개발하고 진행하는 역할을 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약 3천여 명의 참가자들을 만난 것 같아요. 단기 진행이 일반적인데, 같은 멤버로 10회 정도 만난 분들도 있어요.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으면 저 역시 치유 받아요.
정작 자신의 마음이 힘들 때 어떤 방법으로 이겨내실지 궁금해요.
‘이겨내는 것’은 저도 잘 못해요. 어떤 사람은 자기만의 공간에서 충전을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제 경우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편이에요. 저한테 솔직하게 반응해주는 지인을 만나서 마음껏 징징대요. 아프다, 화난다, 꼬인다, 밥 달라, 사랑 달라…. 그러다 보면 제 스스로 뭐가 필요한지 좀 더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징징댔을 때 상대의 반응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도움이 돼요. 역설적으로 진짜 내가 가장 원하는 것,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을 깨닫거든요. ‘아, 잘하고 있다는 격려가 필요했구나’, ‘미움을 받아서 서러웠구나’ 하고요. 그렇게 조금씩 어려운 숙제를 풀어갈 힘을 얻는 것 같아요.
마인드프리즘
Tel 02 3445 8557
www.mindprism.co.kr
에디터 오혜진
일러스트 오채은 자료제공 마인드프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