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인의 삶

The Life Of A Martial Artist

운동을 처음 만난 무렵, 어색한 순간의 이야기들.

7.
나는 겉보기와는 달리 야성미가 넘치는 어린아이였다. 아버지도 나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와는 달리 야성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비록 커다란 금테 안경을 쓰고, 점잖은 양복을 입고, 셔츠 속에는 하얀 메리야스를 즐겨 입으셨지만 마음속엔 아드레날린이 들끓는 분이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 오셨는데 장르는 100퍼센트 액션물이었다. 이 당시 아널드 슈워제네거, 스티븐 시걸,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할리우드 배우들은 늘 어딘가에 갇히거나 어딘가에 갇힌 이들을 구하러 가곤 했다. 영화는 매번 비슷한 줄거리를 반복하는데도 늘 재미있었다. 

한번도 아버지한테 공식적인 초대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나는 늘 아버지가 영화를 볼 때마다 함께 영화를 봤다. 영화가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면 약 5분쯤 뒤에 거실로 걸어 나왔다. 냉장고를 뒤지는 척… 주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땅콩을 까먹으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필통을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무언가를 하는 척하다가 은근슬쩍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곤 했다. 마치 극장에 몰래 들어선 사람처럼 영화를 감상하고, 영화가 끝날 무렵엔 이젠 지겨워졌다는 듯 방으로 이동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거의 일주일 동안은 무술에 빠져서 지냈다. 주인공의 액션, 우쭐하는 표정, 고통스러워하는 표정 등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따라 하곤 했다. 화장실 거울만이 나의 흑역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태권도 학원에 다니라고 했을 때 나는 너무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태권도 학원에 가는 걸 너무 좋아하면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될 것이고, 그럼 나는 태권도 학원 대신 다른 학원에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태권도 학원에 가는 날까지 태권도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태권도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이웃집 아이 민호 덕분이었다. 키가 작고 피부가 하얀 민호는 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다. 장난감이라고는 어머니 화장품과 카세트테이프밖에 없던 나는 민호네 집에서 매일 신세를 졌다. 민호네 집에는 관절이 사람처럼 움직이는 ‘지아이유격대’ 시리즈가 모두 있었다. 새로 산 변신 로봇 몇 개만 빼고는 어떤 장난감이 없어져도 모를 정도로 풍족했다. 매일 집에서 놀아 민호의 피부가 하얀 거라고 생각한 민호 어머니 덕분에 나는 함께 태권도 학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처음 일주일 동안 나는 무도인이 되었다는 자긍심에 들떠 있었다. 학원에 다닌 지 이틀째 되는 날 어깨너머로 본 돌려차기를 셀프로 마스터하고, 학원에 다닌 지 일주일 되는 날 싸움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선영이 누나(당시 동네 무리 중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던 친척 누나, 매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녔다.)와 싸워 처음으로 이기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 민호가 태권도 학원을 그만둔다는 말을 들었다. 다리가 아파서 가기 싫다고 말했다며. 어머니는 나에게 태권도 학원을 혼자서라도 다니겠냐고 물어봤고, 나는 민호를 나약한 녀석 취급하며 피식 웃었다. 민호는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 후로 학원에 혼자 가는 것이 심심하고 쓸쓸하기는 했지만, 그런 고독감이 가져다주는 깊은 매력이 있었다. 무도인의 모습에 심하게 몰입해 나는 천천히 그리고 쓸쓸하게 학원을 향해 정진해 나갔다.

눈이 많이 쌓인 어느 날, 나는 무도인으로서의 모습에 너무 심하게 몰입해 버려 왠지 다리를 절고 싶은 기분이 들어버렸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한 전투를 치른 후 내상을 입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축구 선수들이 하는 것처럼 한쪽 다리를 끌며,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잡고, 꽤 먼 거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등 뒤로는 고통스러운 발자국이 남았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는 어머니에게 나는 쿨하게 대답했다.

“좀 다쳤어….”

허무하게도 나는 노란 띠를 눈앞에 두고서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무도인의 자존심 때문에 그것이 꾀병이었다고 차마 밝힐 수 없었다.

 

30.
발톱을 자르다가 왼쪽 발등에만 털이 수북한 것을 발견했다. 이전엔 그곳에 털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오른쪽 발등에도 털이 있기는 했지만 왼쪽처럼 덥수룩하지는 않았다.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른 사람의 다리 같았다.

주짓수 도장은 신촌 오거리 근처 으슥한 골목 지하에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사람들의 체온 때문에 벽면에 김이 가득 서리는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세계 사람들은 한순간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시선을 떼고 자신들이 하고 있던 일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서로 팔다리가 뒤엉켜 있었고, 그것을 풀지 못해 끙끙대고 있었다. 즐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거의 모두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벽돌과 비슷한 신체 비율을 가진 한 사람만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이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은색 벨트를 맨 그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며 친절한 듯 의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오셨어요? 운동하시려고?”

어릴 때 태권도 학원을 그만둔 이후로 언젠가는 운동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공부 때문에, 직장 때문에 아무리 해봐도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내 안의 무도인은 여전히 상상 속에 갇혀 있었다. 겨우 시간이 난 것은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된 다음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름의 회사를 차려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지냈지만, 백수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어느 날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정체성 없이 닥치는 대로 기회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주짓수 수업은 대체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지나갔다. 잡지사에 캐리커처를 그려 보내고, 작은 가게에 페인트칠을 하는 등… 뭐가 뭔지 모르겠는 일들은 이미 낮 동안 충분히 했다. 밤늦은 시각까지 뭐가 뭔지 모르는 걸 하려니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주짓수를 배우는 것은 어릴 때 학교에서 뜨개질을 배우는 것과 무척 비슷했다. 다만 실과 바늘이 훨씬 무거울 뿐.

“팔을 이곳에 넣고 다리를 저쪽에 넣고 엉덩이를 살짝 틀어서 도복을 잡아당기세요. 그리고 어깨로 살며시 밀어요. 그러면….”

사범님이 아주 쉽다는 듯 자연스럽게 시범을 보이면 상대방은 케겍거리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자 한 번씩 해보세용~”

색깔이 있는 벨트를 맨 사람들은 수월하게 따라 했고, 순백의 벨트를 맨 사람들은 그들의 의상만큼이나 순수한 동작을 만들어 냈다. 나와 나의 파트너는 운동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팔을 이곳에 틀어서… 다리를 저쪽에 밀고… 도복을 넣고 어깨로 살며시 당기면….’ 나는 사범님이 시범 보인 동작을 파트너에게 똑같이 해봤지만 나와 파트너 사이에선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불가사리 같은 모양으로 누워 있기, 인절미 흉내 내기, 사람으로 윷놀이하기 등 바보 같은 놀이를 창조하는 콤비 같았다. 한번은 나와 파트너 둘 다 서로의 몸을 이용해서 창의적인 매듭을 묶고 있었다. 누가 공격이고 누가 수비인지도 모르고 각자 매듭을 매는 일에 매진해 있던 것이다. 그러자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몸은 엉망으로 꼬여 버렸다. 우리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고, 옆을 지나던 사범이 잠시 멈춰 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매듭을 풀 듯 두 사람을 떨어트리고 다시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몸이 너무 꽁꽁 묶여 풀리지 않았다.

“잠깐, 근데 이 다리가 얘 다리인가? 얘 다리인가? 그렇다고 이게 팔은 아니잖아?”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거들어서 몸을 풀어주었다. 너무 꽁꽁 묶여서 조금만 늦었어도 둘은 한사람이 될 뻔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샤워를 하다가 실수로 샤워기의 물을 마셔버렸다. 너무나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목구멍이 물을 삼켜버린 것이다. 이 운동을 며칠이나 더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왼쪽 발등에 길게 난 털을 발견한 건 그다음 날이었다. 하루 만에 갑자기 털이 자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털이 자랐다고 해도 한쪽만 이렇게 자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다리가 바뀐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버렸다. 뾰족한 사물로 다리를 찔러 보기도 하고 줄자로 발 길이를 측정해 보기도 했다. 왼쪽 발이 오른쪽 발보다 5밀리미터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와 몸이 꼬여버린 사람은 뚱뚱하고 수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를 찾아서 항의하거나 다리를 다시 바꾸자고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의 발등에 난 털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정말 나와 섞인 사람이라면 나와는 반대로 오른쪽 발등에 긴 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체육관에 나가게 된 건 오로지 그의 발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글·그림 한승재(푸하하하 프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