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WEE Korean Children’S Picture Book Award

《3초 다이빙》 정진호 작가

보이지 않은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시선 밖의 세상은 없는 것이 아니고 경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정진호 작가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영역으로 끌어낸다. 안에서 보는 것에 반대의 시선을 더해 건강한 눈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

‘WEE 한국 어린이 그림책 어워드’ 후보 작가 인터뷰 1

반가워요. 《3초 다이빙》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 33권 안에 선정되었어요.

예상을 못 했어요. 아이들을 자주 만나기는 하는데, 보통 제 책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수영이나 다이빙을 아이들이 부담 없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벽》이나 《별과 나》 같은 책은 이야기로 전개되는 책이 아니다 보니 수업하면 재미있어하는데 혼자 읽으면 좀 어렵다고 해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강연을 많이 나가고 창작 활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어요. 작년에 바캉스팀의 전래 프로젝트로 《전래도》라는 책을 자가 출판으로 냈어요. 창작 책은 1년에 한 권 내는 게 목표예요. 목표에 맞춰서 가고 있긴 한데 의뢰받은 그림 작업들이 아직 많이 밀려 있어요. 올해 요청받은 그림들이 좀 어려운 편이라 많이 고민되네요. 제 창작 그림책을 집중해서 작업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지금 작업 중인 책은 어떤 내용이에요?

창비에서 나올 책인데 양희은 선생님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양희은 선생님의 시대별 노래에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 나오거든요. 가사가 시적이어서 시에 그림 붙이는 시 그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후렴부도 있어서 어려워요.

 

쓰고 그린 책이 여섯 권이에요. 그림책을 만든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첫 출간 책은 《위를 봐요!》로 2014년 초에 데뷔했어요. 취미로 더미북을 만든 건 2012년부터였고요.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짧은 단편 소설을 습작하다가 야금야금 그림도 그렸어요. 건축학과 졸업 작품을 그림책으로 하고 싶었거든요. 《그림책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읽고 공부했어요. 그림책 작가들은 책을 만들기 전에 더미북이라는 걸 만든다길래 더미북도 만들어봤죠. 첫 더미북이 《금붕어》라는 책이고, 두 번째가 《부엉이》, 세 번째가 《위를 봐요!》예요. 《금붕어》는 제가 글을 쓴 건 아니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재해석해서 만든 책이에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림체가 아주 거칠고 단순해요. 그때 만든 더미를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대부분 못 그렸다는 반응이었어요. 돈을 꽤 들여서 세 권을 만들었는데…. “너 참 돈도 많다. 이게 무슨 종이 낭비니. 나무야 미안해.”라고 말하던 기억이 나요(웃음).

오랜 시간 건축을 위한 그림을 그렸을 텐데요, 책으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교와 학과가 학번마다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저희 때 건축학과에 이상한 기류가 있었어요. 건축 외에 자유롭게 여러 일을 시도해 보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졸업하고 이대로 회사원이 될 수 없다며 자발적으로 학생들끼리 건축마켓을 열고 프리마켓을 하곤 했어요. 그런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나는 꼭 설계 안 해도 돼.’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감사하게도 당시 교수님들이 ‘건축을 학문으로 받아들여라. 전공으로 공부를 하는 거지 직업은 아니어도 된다. 건축학적인 시선을 이용해서 다른 거 해도 된다.’는 말씀을 해주시곤 하셨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그림책으로 졸업 작품을 만들었죠. 제목이 <평화의 댐>이고 한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댐이 주제였어요. 전두환 정부 때 북한의 물 공격을 대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지어진 댐이거든요. 이 댐이 왜 지어졌고 어떻게 지어졌는지 제가 이 댐을 어떻게 활용해보고 싶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좌측에 그림을 그리고 오른 페이지에 도면을 그렸죠. 댐의 속을 파서 디엠지를 연구하는 시설을 넣겠다는 목표를 담았어요. 그림 아래에는 이것들이 왜 필요한지 글로 썼어요.

 

반응이 어땠어요?

교수님들이 폭발적으로 싫어하셨어요(웃음). 물론 신선하다며 좋아하신 분도 계셨지만 대부분 ‘건축학과에서 그림책으로 졸업할 생각을 하다니 너 참 용기 있다’는 반응이셨죠. 크게 인정받지 못해도 제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걸 찾아가는 과정이 불안하지 않았어요?

놀이처럼 느껴졌어요. 다 모르겠고 그냥 재미있는 거 하자는 마음이었어요. 다행히 부모님이 지방에 계셔서 제가 뭘 하는지 잘 모르셨고요(웃음). 아시고 나서 처음에는 건축을 공부하고 왜 다른 일을 하느냐고 반대하셨지만 어쩌겠어요, 성인인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데요.

 

주변에서 반대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확신이 있었나 봐요.

부모님이 저를 길러온 방식이 그랬어요. 어린 시절부터 믿어주고 제가 뭘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저만의 취향을 일찍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어떤 교수님은 제가 작업하는 방식을 보고 이건 건축이 아니라고 했어요. 교수님들에게 좋은 평가를 못 받아도 내가 좋으면 그게 맞는 방향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나는 이걸 좋아하고 이걸로 뭔가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요. 건물을 지어야만 건축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실제로 페이퍼 아키텍처라는 분야도 있어요. 상상 속에 있는 건물을 도면으로 만들고 짓진 않는 예술 작업이에요. 계획만 하는 게 건축일까 하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지만 당당하게 자기 작업을 이어가는 분들도 많아요. 그리고 집 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무턱대고 지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지금도 제가 책으로 건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방식이 더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요.

어떤 어린이였을지 궁금해요.

어릴 때 몸이 약했어요. 직접 나서거나 몸으로 부딪히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오락을 하잖아요. 저는 직접 하는 거 말고 구경하는 게 더 좋았어요. 예전 게임은 싸우는 게 많았어요. 동네 형이 게임해 보라고 해도 싸우는 게 싫어서 안 했어요. ‘다 친구 하면 되지 왜 싸워?’ 하면서요.

 

《3초 다이빙》 어린이랑 비슷하네요.

맞아요. 제 유년 시절 모습을 담았어요. 달리기를 못하고 경쟁에서 늘 뒤처졌어요. 주인공 아이가 다이빙대에서 두 친구를 만나잖아요. 이 아이들은 어릴 때 제가 무서워하던 친구였어요. 덩치가 크거나 날렵하고 약삭빠른 애들. 책을 만들면서 어쩌면 이런 애들과도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제를 경쟁으로 잡은 직접적인 계기도 있어요. 한 초등학생을 만났는데 손등에 찍힌 달리기 등수를 보여주더라고요. 저는 등수대로 줄 세우는 게 정말 싫었거든요. 요즘에도 운동회를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제 어린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충격을 받았어요. 

이 이야기를 책으로 다뤄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위를 봐요!》의 주인공은 수지, 여자아이잖아요. 《3초 다이빙》은 남자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평균적으로 남자아이들의 승부욕이 더 강해요. 강연을 나가면 남자아이들은 “선생님 저 쟤보다 잘했죠? 누가 이겼는지 알려주세요. 1등이 누군지 알려주세요.”라고 말해요. 여자 친구들 중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지만 대부분 “저 잘했죠?” 인정받는 걸로 만족해요. 반면 남자아이들은 순위와 결과를 알고 싶어 하죠. 왜 이렇게 승부에 집착할까?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이렇게 길러진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에게 경쟁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얘길 해주고 싶어요. 일부러 지거나 포기하라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거 없이도 재미있다고요.

저는 《3초 다이빙》의 아이가 용감하다고 생각했어요. 못하는 걸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잖아요. 계단을 오르는 동선이 이 책의 중요한 여정 같은데요. 아이는 계단을 오르면서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알고, 나다움을 인정하는 거 같아요.

맞아요. “나 이런 거 못해.”라고 말하는 것과 지는 것 모두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다들 내가 좀 느리대.”라고 쓰인 계단 오르는 장면이에요. 두 발이 앞서 올라가고 아래에 있는 아이가 위를 쳐다보고 있죠. 사람은 누구나 다 잘할 수 없고 못하는 게 있어요. 어쩌면 학교에서 요구하는 걸 다 못할 수도 있고요. 저도 그랬기에 아이들에게 학창 시절 경험을 자주 말해줘요. 학교에서 제가 하는 방식이나 결과물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나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한 적도 있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즐겁게 잘 살잖아요. 학교에서 요구하는 테두리를 반드시 다 맞출 필요는 없다, 그 안에서 관계를 맺거나 네가 좋아하는 걸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얘길 그림책으로 해주고 싶어요.

 

《3초 다이빙》의 아이가 찾은 건 다이빙인 거네요.

“학교에서 요구되는 수학이나 운동은 못해. 이길 마음도 없어. 이게 나야. 그런데 다이빙은 재미있어. 내가 좋아하는 건 다이빙이야. 거기선 1, 2, 3등이 없지.” 이 아이도 다이빙을 즐겁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믿게 되겠죠?

 

《3초 다이빙》을 그리면서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나요?

이 책을 그릴 때 몸이 좀 안 좋았어요. 작업하기 힘들었는데 “왜냐하면 누군가는 꼭 져야 하니까.” 페이지를 그리면서 스스로 위안받았어요. 계단을 오르는 아이의 모습을 아래에서 바라본 장면이에요. 《위를 봐요!》의 수지 시선과 반대되는 그림이기도 해요. 아래서 누워서 위를 바라보면 수지가 이런 모습으로 우릴 보고 있겠구나, 싶어서 꼭 넣고 싶었어요. 또 계단을 올라가는 와중에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기다려줄게. 빨리 와.”라고 얘기해 주는 거 같았어요. 그런 면에서 제 책은 저에게 특별해요. 내가 이야기를 만들지만 내가 들으면서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니까요.

《벽》 이야기도 해볼게요. 책의 도입부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모든 것들은 안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걸 읽으면서 내지를 보기도 전에 아이와 멈칫했어요. “우리는 지금 안일까?” “응 집 안이지.” “그런데 도로의 나무가 보기에도 우리가 안일까?” 하는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나무나 차가 보기엔 우리는 밖이 될 수도 있다니. 그동안 해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나요. 작가님은 이 책을 만들면서 어떤 걸 생각했어요?

아시다시피 《벽》은 안과 밖의 이야기예요. 그런데 안과 밖을 벽이 정해주진 않아요. ‘나는 안쪽에 있어. 바깥에 있어.’는 거길 지나는 사람이 정하는 거예요. 보통은 벽이 있으면 공간이 생기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바깥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안이지만 바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의 역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수업할 때 제가 늘 하는 질문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교실 벽 하나를 가리키고 “이건 무슨 색이지?” 물어요. 눈에 보이니까 잘 대답해요. 그런데 “반대쪽은 무슨 색깔이야?” 물으면 대부분 대답을 못 해요. 노란색인가 나무색인가 해요. 심지어 선생님에게 질문해도 잘 모르세요. 매일 보고 지나다니는 건물인데도 대답을 못 해요. 우리가 주로 한쪽만 보며 살거든요. 보통은 건물의 안과 밖의 재질이 달라요. 바깥에서 보는 모양과 안에서 보는 모습을 따로 생각해요. 하나로 연결된 거란 생각을 못 해요. 내가 있는 곳의 뒤편은 무슨 모양일까를 궁금해했으면 좋겠어요.

 

《벽》의 모델이 된 건물이 있나요?

구체적인 모델은 프랑스에 있는 롱샹성당이에요. 그 건물에서 받은 건축적 영감을 책으로 옮긴 거예요. 롱샹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는 벽과 창문을 통해 ‘안’과 ‘밖’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어요. 유럽 사람들에게 친숙한 안과 밖의 크기가 다른 공성용 창문의 모습을 이용해서 성당 내부에서도 밖을, 밖에서도 내부를 느낄 수 있게 디자인 한 것이죠. 판타지 소설가 이영도 작가의 단편 소설 《골렘》에도 이런 내용이 나와요. 마법사가 골램을 소환해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실험을 해요. 이제 나가려고 하는데 골램이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마법사가 나가는 걸 골램은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거라고 생각해서, 마법사가 굶어 죽을 뻔하죠. 거기서 마법사가 빠져나갈 때 벽이 없다고 생각해요. 문이나 벽이 아니라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고 나가요. 우리도 문을 열어두면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잖아요?

 

《벽》은 건축적인 시선과 개념에서 시작한 이야기네요.

그래서 일부러 투시도 시점으로 그렸어요. 저는 설계도를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것도 실험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건축적인 비례나 구성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색을 많이 쓰지 않는 편이에요. 강조나 절제, 대비를 이용하거나 단순하게 그리는 걸 좋아하는 편 같아요.

저는 이 방식이 좋아요. 색은 확실한 이유가 있을 때 쓰고 싶어요. 《벽》과 《위를 봐요!》도 그렇죠. 캐릭터가 특히 간단한 이유는 그냥 누군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지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세히 그리지 않았죠. 《벽》에 나오는 사람을 남자아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어른일 수도 아이일 수도 있어요. ‘그냥 사람’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게 어렵더라고요. 원래는 머리카락도 없었는데 대머리라고 하길래 머리 중앙에 머리카락을 조금 그려 넣었어요. 옷도 입지 않았죠. 아이들이 왜 벌거벗었냐고 물어보면 “입고 있는데 일부러 안 그린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면 돼.”라고 말해요.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을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아니요. 상상을 표현하는 게 정말 어려워서 온갖 진을 빼요. 저는 구상을 오래 하는 편이에요. 머릿속으로 16바닥이 나올 호흡이 되나 많이 그려봐요. 내 아이디어가 200페이지 수준의 이야기가 되어도 적절하지 않고, 너무 짧아도 안 되잖아요. 또 너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의 호흡을 잘게 나누었을 때 재미가 있을까, 읽었을 때 여러 번 읽을 힘이 있을까, 깊이 고민하죠. 그래서 작업하는 기간이 꽤 긴데요, 저는 어려운 게 좋아요. 낑낑대고 오래 고민할 때 새로운 게 나오고 만족도가 높아요. 이건 그냥 쓱 그리면 되겠네? 하면 새로운 시도를 안 하게 되더라고요. 책을 만들 때마다 스타일을 다르게 하려고 해요. 할 때마다 고뇌하고 어떻게 하면 이걸 잘 표현할까 이것저것 시도하는 편이에요. 괴롭지만 그렇게 해야 더 좋은 책이 나온다고 믿어요.

 

생각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건축적인 시선이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어쩌면 제가 다른 걸 못 그려서 그런 걸 수 있어요(웃음). 시선과 구도를 잡을 때 큰 도움이 돼요. 건축은 기술적으로 짓게 만드는 공부는 아니에요. 이게 왜 이런 모양이어야 하는지, 물체의 본질을 공부해요. 대학에서의 첫 수업이 아직도 기억나요. 교수님이 종이컵을 학생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셨어요. “왜 종이컵이 이 모양이어야 하는지 40가지를 찾아봐.”라고 하셨죠. 종이컵이 원래 이렇게 생긴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끝이 말려 있는 건 내용물이 흘려내리지 않기 위한 것, 브이자로 좁아지는 건 잡았을 때 흘러내리지 않기 위한 것, 아랫바닥이 오목한 건 잘 서 있고 온도가 잘 전해지지 않아서 따뜻한 걸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법이더라고요. 종이컵 디자인을 완성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연구를 했고 그 하나하나가 다 이유가 있는 디자인이에요. 물체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훈련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위를 봐요!》는 제 인생 그림책 중 하나예요. 장애인의 시선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거든요. 공감각으로 풀어낸 시각이 정말 신선했어요. 이것도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인가요?

이 책은 이야기에서 출발했다기보다 평면도에서 시작했어요. 보통 평면도에 사람을 그려 넣으면 머리만 보이잖아요. 평면도인데 머리가 아닌 다른 곳을 보여주는 상황이 어떤 게 있을까? 사람들이 누우면 몸이 다 보이겠네, 하는 생각이 든 거죠. 그렇다면 평면도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하루 종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등을 역추적하면서 수지라는 캐릭터를 잡아갔어요. 공간이 먼저 구성되었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입힌 거예요. 그 과정에서 제가 중·고등학교에서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저는 그 친구들 행동이 비교적 익숙해요. 사람이 재채기하거나 팔을 긁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공간을 먼저 구성했지만 스토리가 상황에 착 붙었을 때 쾌감이 엄청날 거 같아요.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정말 즐거웠어요. 그런 경험을 매번 하진 않지만 《위를 봐요!》는 그런 감이 왔어요. 《3초 다이빙》도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소재를 찾다가, 갈릴레이 실험을 보며 느낌이 팍 왔어요. 갈릴레이 실험에서는 깃털과 대포가 떨어지는 시간이 거의 같거든요. 설사 조금 빨리 떨어질 순 있지만 그건 그 존재가 빨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이기고 지는 게 의미가 없는 거죠. 다이빙이 이 이야기를 잘 표현할 수 있겠다, 경쟁을 벗어나서 똑같이 즐길 수 있는 소재라고 여겼어요.

 

위를 바라봤을 뿐인데 수지의 웃는 얼굴을 봤어요. 누군가를 웃게 하는 게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은 아니잖아요.

어떤 분들은 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냐고 물어요. 그냥 웃음을 줄 순 있잖아요. 길을 지나가는 한 아이는 수지를 웃게 한 거예요. 그게 수지에게는 내려올 수 있는 용기가 된 거고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 사실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돼요. 기술적인 도움이나 물질적인 조력보다 ‘너 내려와도 괜찮아. 너 내려와서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면 되지 않을까요?

 

작가님의 책은 전체적으로 ‘남들과 달라도 괜찮아. 우리가 몰랐지만 평범함과 익숙함 뒤에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그 책들을 보며 유연성을 생각했어요. 작가님의 가치관이 책에 묻어난 건가요?

제가 담은 메시지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시선’이에요. 평소라면 잘 안 보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일상에서 스쳐 지나갔던 별, 반딧불, 내가 보지 않은 반대편의 시선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확장되면 둘을 하나로 볼 수 있는 시선, 유연성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벽을 반대쪽에서 보면 달라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벽이야. 우린 사람을 볼 때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되지만, 모두 한 사람이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작고 미약한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 믿거든요. 

 

미약한 것들을 잘 발견하는 편 같아요.

제가 학창 시절부터 쌓아온 습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어떤 단어를 보면 꼭 사전을 찾아본다는 거예요. 내가 이 단어를 확실히 아는 게 맞나 의심을 품고 숨은 뜻을 찾아봐요. 제가 생각하는 의미 외에 재미있는 뜻을 담은 경우도 많거든요. 얼마 전에는 아내와 차를 타고 가다가 ‘사춘기’라는 단어가 궁금해졌어요. 사춘의 한자를 찾아보니 생각할 사, 봄 춘을 쓰더라고요. 너무 예쁜 단어죠. 봄을 생각하는 시절이라는 뜻이에요. 봄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지만 봄을 생각하는 중이라고 이해하니까 청소년들의 행동이 귀엽고 예뻐 보이는 거예요. 혹시 반나절은 몇 시간인지 아세요? 3시간이에요. 낮이 12시간이고 나절은 낮의 반이니까 반나절은 3시간인 거죠. 보통 “나 반나절 일했어.” 하면 해가 떠 있는 시간 내내라고 생각하잖아요. 잘못 쓰인 거죠. 내가 단어를 정확하게 쓰고 있나 찾아보길 추천해요. 자주 살펴보는 습관이 글 쓰거나 그림 그릴 때도 도움이 돼요. 단어 하나의 세밀한 뜻을 생각하려고 노력하거든요.

작가님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영향을 미친 예술가가 궁금해요.

어린 시절 병원에 오래 있으면서 주로 외국 작가의 그림책을 보면서 컸어요. 그림책이 보편화되지 않아서 미국에서 기부받은 책이 많았거든요. 군인일 때 그림책을 사고 싶어 서점에 갔다가 이수지 작가님의 《동물원》을 발견했어요. 너무 좋았는데 한국 작가의 그림책이라 더 놀랐어요.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때부터 이수지 작가님의 팬이 되었어요. 휴가 나올 때마다 작가님 그림책을 한 권씩 샀어요. 이수지 작가님을 실제로 만났을 때 너무 떨리던 기억이 나네요. 세르주 블로크의 그림 스타일도 좋아해요. 그 작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내공이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해요. 선 하나인데 저 작가가 그리면 다르고, 점 하나도 이유가 있어 보여요.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의 목표예요. 강연 때 아이들을 만나면 너무 ‘넘사벽’인 그림은 따라 그리지 않더라고요. 제 책은 그리기 쉬우니까 “이런 건 나도 그릴 수 있어.” 해요. 그게 칭찬인 거죠. 이런 책이 더 필요하겠구나 생각해요.

 

단순하게 보이지만 쉽게 그린 그림은 아닐 거 같아요.

연습을 많이 해요. 단순하니까 비례가 맞지 않으면 이상하거든요. 제 그림인데 똑같이 그리라면 잘 못 그리겠어요(웃음).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엔 뭘 하면서 보내요?

주로 집에 있어요. 영화 보고 책 읽고 고양이 배 만지는 게 제 취미예요. 아내랑 조잘조잘 이야기도 많이 해요. 아내는 집에서 그림을 그려요. 의류디자인을 전공했고 게임 회사에서 일하다가 일러스트레이션을 막 시작했어요. 또 보드게임을 즐겨 해요. 처남이 보드게임 마니아라 집 가득 보드게임이 있어요. 보통 네 명이 해야 하는데 부부만 있으니 재미가 없나 봐요. 코로나19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면서 같이 보드게임을 해요. 방 탈출 보드게임을 특히 좋아해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동시도 쓰는 거 같던데요.

올해 초에 이안 선생님의 동시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오리 돌멩이 오리》예요. 강가에 있던 오리 떼와 돌멩이가 사람을 보고 후드득 날아가요. 미처 날아가지 못한 돌멩이를 집으로 가져와 창가에 두면서 날아갈까 지켜보는 이야기예요. 그 시를 읽고 많이 울었어요. 그즈음 고양이 한 마리를 보냈거든요. 오리가 돌멩이를 안고 펑펑 우는 걸로 그렸는데 너무 슬프다는 의견을 듣고 다시 그리기도 했어요. 그때 시를 한 번 써보고 싶더라고요. 가끔 취미로 쓰는데 재미있어요. 나중에 혹시 책 제안이 들어오면 내용은 동시인데 6컷 만화처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다음 책은 어떤 내용이 될까요?

아직 콘티 단계인데, 진행하기 어려워서 묵혀두고 있어요. 페이크 뉴스에 대한 이야기예요. 몇 년 전에 버스에서 엄마가 아이를 두고 내려서 이슈가 된 적이 있어요. ‘엄마가 아이를 버스에 두고 혼자 내렸다’는 기사가 났는데 며칠 뒤에는 ‘버스 기사가 문을 바로 닫아버렸다.’ ‘아이가 내렸다가 다시 탄 거다.’ 말이 엄청 많았어요. 우리는 매체를 통해 사건을 전달받는데 가짜 뉴스가 정말 많아요. 뭐가 진실인지 혼란스러워요.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담고자 하는 얘기가 많아서 어려워요. 형식도 인터뷰처럼 새롭게 해보고 싶은데 잘 안 풀리네요. 비슷한 소재로 다루는 그림책도 있지만 동물로 의인화하거나 가볍게 다루는 방식이 아닌 르포 같은 느낌으로 다루고 싶어요. 이걸 그림책으로 푸는 게 맞나 싶기도 해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이나 꿈꾸는 삶이 있나요?

건축을 좋아하고 잘 아니까 제가 아는 건물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어요. 이 건물을 누가 지었고 어떤 의도로 지어졌으며 왜 좋은 건축인지를 알려주고 싶어요. 건축은 그림보다 더 해석이 필요해요. 그림은 눈에 보이는 거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건축은 설명을 안 해주면 이 건물이 왜 좋은 건물인지 모르거든요. 내가 와본 장소가 품은 이야기를 알면 사람들도 훨씬 더 깊이 이해하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집에 관심이 많고 집 이야기를 흥미로워해요. 계속 그림책을 만들고 가끔 건축 가이드도 하면서 유유자적 살고 싶어요. 그림책은 할 수 있다면 1년에 두 권 내고 싶고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장수인 장소 협조 박쥐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