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잊어버리는 사람

권준호 — 일상의실천

‘수집’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사위를 둘러보다가 팬톤 오렌지 021C 색상의 쨍한 표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이거야말로 수집이구나!’ 대부분 눈에 보이는 물건을 수집하지만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모으기 위해 골몰한다.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이 바로 후자의 그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의 경험을 길어 올려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경험 수집이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이 안에는 10년간 관찰해 온 디자이너의 시선이 켜켜이 담겨 있다. 그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물성으로.

곰곰 생각해 봤는데, 저는 수집하는 게 좀처럼 없더라고요.

유일한 게 작업인 것 같아요.

이번에 10주년 전시할 때 10년 동안의 작업을 모아서

쭉 펼쳐놨는데 오신 분들이 어떻게 이걸 다 모아놨냐며 신기해하셨어요.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번 대화를 준비하면서 한 번 더 정독했는데, 두 번 읽으니 미처 못 본 것들이 또 보이더라고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감사한 이야기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김경철, 김어진이라는 친구들과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ʻ일상의실천’을 운영하는 권준호예요. 일상의실천은 올해로 10년이 되어 전시도 진행했고, 이제 10년이나 됐으니 2023년은 좀 여유롭게 보내자고 마음먹으며 지내고 있어요. 

 

‘특별한 걸 하자!’가 아니라 여유를 선택하셨군요. 

10년 동안 쉬지 않고 작업만 했으니까요. 근데, 전시를 끝내고 나니 다시 바빠져서 쉴 틈이 없네요(웃음)

 

책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클라이언트와 최대한 서로의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많이 꺼내어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작업의 톤을 화려한, 단정한, 발랄한 등의 형용사로 표현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는데….” 오늘 대화도 이미지를 그리면서 시작해 볼까요? 

아무래도 일할 때는 대화라는 게 굉장히 긴장되는 행위예요. 클라이언트를 처음 만나면 눈치 싸움도 하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파악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일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날이 서서 대화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은 그런 자리가 아니니까… ʻ무해한’이라는 단어를 고르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무해한 대화, 좋아요(웃음). 일요일에 만나게 됐어요. 평일엔 일을 하기 때문에 일정 잡기를 조심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는데요. 책에서도 규칙적으로 일하는 걸 선호한단 인상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그런 편인 것 같아요. MBTI를 엄청 신뢰하지는 않지만 몇 번 해봐도 계속 계획형인 ʻJ’ 성향이 나오더라고요. 주변 친구들은 그런 결괏값을 신기해해요. 제가 치밀하거나 계획적으로 하나하나 따지는 성향은 아니거든요. 근데 일하거나 작업할 때는 그렇게 하게 되더라고요. 금요일까지 작업을 보내야 하면 늦어도 화요일, 수요일까지는 제가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마무리가 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해요. 남은 시간엔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완성해야 안심이 되거든요. 

 

친구들에겐 치밀한 사람이 아니에요? 

네. 기억력이 나빠서 더 그렇게 보는 것 같아요. 일할 땐 까먹으면 안 되니까 달력이나 메모장에 빼곡하게 써놓곤 하는데요. 인간관계에선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니까 여러 가지를 잊어버리거든요. 사람 얼굴도 잘 기억 못 하고(웃음). 그런 면에서 허술해 보이는 인상이 있나 봐요. 

 

함께 일하는 어진 씨가 ‘부치는 글’에 이런 이야기를 쓰셨죠. “내 친구 준호는 불완전한 사람이다. (중략) 몇 개월 동안 함께한 인턴 직원의 성씨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을 탕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목을 읽으면서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기록을 많이 하시는 건가 생각도 했어요. 

그 영향도 있죠. 저는 영국에서 5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는데, 스스로 기억력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자꾸 기록하게 되더라고요. 한국에서 살 때랑은 엄청나게 다른 특유의 분위기, 날씨, 햇빛, 여러 상황, 순간들…. 이런 게 나중엔 흐릿하게만 남을 것 같아 아쉬워서요. 

 

아니, 어느 정도로 기억력이 안 좋으신 거예요(웃음)? 

기억이 막 섞여요. 이거랑 저거랑 섞이고, 이때 있었던 일과 저 때 이야기가 섞이고, A랑 했던 이야기가 B가 한 이야기가 되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이런 상황을 서운해하는 사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국에서의 기록은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책으로 10년 전에 출간되었어요. 블로그에 기록한 글을 출판사에서 보고 연락해 주셔서 만들게 된 책이었어요.

그럼 지금은 영국을 좀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겠네요. 한국이랑 많은 게 다르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이 특히 그래요? 

정말이지 모든 게 다 달라요. 특히 햇빛이 정말 그래요. 그때 매일 기록을 해둔 덕분에 드라마나 영상에서 풍경만 봐도 ʻ아, 이거 영국 햇빛이다.’라는 게 느껴져요. 영국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이도 보이더라고요. 영국 특유의 분위기는… 뭔가… 착 가라앉아 있어요. 비가 많이 오는 나라니까 비 내린 후에 뭔가 젖어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게 나라 전체에 정서처럼 깔려 있어서 그런 점이 인상 깊었죠. 

 

기록으로 뭔가를 기억하게 된다는 거 참 좋네요. 근황 이야기를 해볼게요. 지난 한 주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책을 낸 이후로 SNS에 남겨주시는 후기들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요. 독자들이랑 대화하고 싶다는 갈망이 늘 있었어요. 일방적으로 후기만 찾아 보는 일 말고, 대화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마침 이번 주에 그런 자리가 있어서 작은 서점에서 북토크를 하고 왔어요. 독자들이 남겨주신 감상과 질문을 기반으로 대화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어떤 질문들이 있었어요? 

질문 정말 많았는데… 기억이(웃음)…. 아, 그런 이야기가 많았어요. 실무에서 디자인을 하고 계신 분들이나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편집자, 기획자가 많이 참석한 자리였는데요. ʻ소통의 어려움’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특히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분들은 디자이너에게 수정을 요청하거나 방향성을 수정할 때 어느 정도까지 접근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에 ʻ디자이너에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냔 질문이었던 거죠. 

 

저도 궁금해요. 디자이너를 ‘외주’라고 부르는 것도 경계하시는데 저도 외부 디자이너와 함께할 때 그런 표현을 곧잘 썼던지라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더라고요. 

ʻ외주 디자이너’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근데 이런 단어는 우리 주변에 상당히 많아요. 일하는 사람을 ʻ노동자’라 부르는 건 당연하지만, 그 단어가 가진 사회적인 함의가 있잖아요. 단어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지만 계층이 낮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 같죠. 그런 의미에서 외주라는 단어도 비슷한 함의를 가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태도의 문제인 거죠. 외주나 용역이라는 단어를 쓰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 표현을 쓰면서 ʻ이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다.’라는 태도를 장착하는 것엔 부정적이에요. 굉장히 상징적인 것 중 하나가 아무 때나 전화하는 거예요. 내가 일을 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전화해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는 거죠. 통화가 가능한지 먼저 양해를 구하는 정도의 태도는 필요하다고 보는데,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거든요. 

 

외주 디자이너라는 단어보다도 ‘내가 너한테 외주 일 줄게.’라는 태도가 문제라는 거네요. 

맞아요.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전문직이라는 표현을 하잖아요. 디자이너도 분명히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을 찾아가서 의뢰할 때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어떤 문제가 분명히 있거든요. 거기에 대해 컨설팅을 받거나 머릿속에 있는 걸 시각적으로 구현해 주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거나 법적인 문제가 있어서 변호사를 만날 땐 분명히 존중해 주잖아요. ʻ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권위를 인정해 주고요. 그들에겐 일을 맡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유독 디자이너에겐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도 전문직이란 말에 동의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일상의실천은 ʻ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만 받으려고 해요. 우리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보다는 우리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 어려움을 해결할 때 더 재미있고 보람도 느껴서요. 

 

요즘도 그런 재미를 느끼나요? 

작업할 때마다 자주 느끼는데, 잠시만요, 역시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찾아봐야 해요(웃음). 아, 책에도 언급한 내용인데요. 서울의 유명한 갤러리나 미술관을 위한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은 좋은 작업이 정말 많거든요. 근데 조금만 지방으로 가도 지역 축제 디자인이 특별하지 않아요. 장터 같은 데 붙어 있을 법한 허술한 이미지가 많죠. 그런 작업이 저희한테 들어오는 경우엔 담당자가 굉장히 큰 문제의식을 갖고 찾아오시거든요. 지역 축제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싶은데, 갑자기 바꾸려니 너무 급진적이어서 공무원의 반대가 심하니까요. 그럴 때 어느 정도 중간 지점을 함께 잘 찾아가야 하는데, 이런 상황을 잘 조율해서 문제가 해결됐을 때 가장 보람이 크더라고요.

클라이언트 이야기를 좀더 해볼게요. 저도 종종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좋은 클라이언트의 요건은 무수하겠지만 세 가지로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첫째로는 어떤 디자이너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의뢰하는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작업을 하는지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죠. 사전 조사 없이 의뢰부터 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단순히 요즘 잘나간다는 이유로 맥락이 안 맞는 일을 의뢰하는 거죠. 그럴 땐 좋은 작업이 나오기가 힘들거든요. 실무자라면 그걸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둘째는 중간자 역할을 성실히 해주는 거예요. 저는 실무자가 단순히 전달자는 아니라고 봐요. 실무자가 윗사람 의견을 전하기만 한다면, 굳이 실무자를 둘 필요가 있을까요? 대표자랑 직접 소통하면 되는 일인 걸요. 나아가 제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건 대표자의 의중을 미리 예상해서 ʻ대표님은 아마 이런 거 싫어하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피드백을 주는 실무자예요. 협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지레짐작으로 전달하는 거죠. 마지막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서로 배려하면서 작업하면 좋겠어요. 이 작업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되잖아요. 작업만 보내드리는 게 아니라 성실하게 설명도 덧붙이는데, 피드백이 수정 내용만 숫자 붙여 나열해 오는 경우엔 기운이 빠져요. 그 수정이 타당해 보이더라도 해주고 싶지가 않아요(웃음). 서로의 노력을 존중해 주면 좋겠어요. 

 

사전 조사, 성실함, 배려. 세 키워드로 기억해야겠어요. 근황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또 재미있는 일 없었나요? 

이번 주는 북토크가 가장 큰 이벤트였어요. 나머지는 전부 작업실에 있었죠. 10시에 출근하고 7시에 퇴근하면서. 

 

근무 시간을 딱 지키는 편이에요? 

가능한 한 지키려고 해요. 굉장히 많은 디자이너가 밤에 일하곤 하는데요. 아마 학교 다닐 때 ʻ야작’ 하던 습관이 남아서일 텐데, 저도 예전에는 밤이 아니면 일이 잘 안됐어요. 낮에도 커튼 쳐놓고 일부러 어둡게 만든 뒤 작업하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디자인이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협업을 통해 작업이 발전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을 하면 할수록 많이 느끼게 되죠. 전에는 제가 원하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마치 예술가처럼 골방에 틀어박혀서 만들고는 그 과정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결과물만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좀더 협업에 초점을 맞춰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면서 일하려고 해요. 그러려면 그들이 일하는 시간에 저도 깨어 있고, 멀쩡한 정신으로 있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10시부터 7시 작업 시간을 지키려고 해요.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은 그 시간을 기록한 셈이겠네요. 기록은 어디에 하는 편이세요? 

대체로 휴대폰이요. 휴대폰이 집 컴퓨터, 회사 컴퓨터, 노트북 다 연결되어 있어서 관리가 편하거든요. 사실 기록이라고 하기도 민망해요(웃음). 체계적인 문장으로 완성형으로 쓴 건 아니어서요.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에 실린 글도 10년 동안 단상 형식으로 남겨둔 메모에 살을 붙여서 하나의 글로 만든 거였죠. 순간의 짧은 생각을 메모하기엔 휴대폰이 가장 간편한 것 같아요.

 

순간을 기록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책에도 “디자인이 밥벌이가 되면서 반복되는 노동이 됐을 때, 회의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순간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이 중요해졌다.”고 쓰셨지요. 

회의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의감 비슷한 감정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였어요. 저는 작업할 때 제가 그동안 쌓아온 작업자로서의 논리, 태도 같은 것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노력해서 전달해도 거부당하거나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수정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돼요. 그런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면 부정당하는 기분이 남더라고요. 이를테면, 인터넷에서 최저가 상품 고르듯이 디자인 견적을 묻는 메일 같은 건데 그런 문의는 꽤 자주 오거든요. 그럴 때 기분 나빠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게 왜 문제인지 남겨놓으면 변할 수 있다고 봐요. 일상의실천뿐 아니라 이 업계를 변화시키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죠. 실제로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이너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선례를 남겨주어 고맙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요. 

 

유독 창작 영역에서 금전적인 부분에 박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열정 페이나 재능 기부 같은 말이 그냥 나온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정확한 답은 아니겠지만, 창작을 재능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재능이라고 하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쉽게 해낼 거라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디자인, 글, 일러스트…. 사실 굉장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 건데,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어느 유명한 작곡가가 곡을 의뢰받았는데 굉장히 빠르게 곡을 만들어줬다고 해요. 근데 큰돈을 주고 의뢰한 클라이언트가 곡이 너무 빨리 완성되니까 ʻ대충 만든 거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하는데요. 작곡가가 이렇게 답했대요. “이렇게 빠르게 작업해 내기 위해서 지난 15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수련해 왔다. 그랬기에 가능한 것이다.” 같은 의미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창작자에겐 “너는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하잖아.”라는 이야기를 쉽게 하기도 하고요. 

정말 그래요. 저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은데 ʻ그래도 너는 너 하고 싶은 거 하잖아.’라는 이야기가 들려와요. 속상한 일이죠. 

 

뉘앙스를 좀 바꿔볼게요.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요? 

네, 다행히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거랑은 별개로 지루함을 느낄 때도 있겠죠? 

10년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일상의실천 소개글을 읽어볼게요. “(전략) 그래픽디자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평면 작업에만 머무르지 않는 다양한 디자인의 방법론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회의감이랄까, 권태에 금방 빠졌어요. 대학에서 가르치는 디자인 커리큘럼이 너무 한정적이어서요. 특히 제가 다닌 학교는 거의 모든 커리큘럼이 광고 쪽에 집중돼 있어서 마치 그래픽 디자인이 곧 광고인 것처럼 인식된 경향이 있었거든요. 제가 평생을 바쳐서 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는데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특히 유학 생활을 하면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영역이 생각보다 굉장히 넓다는 걸 알게 됐어요. 포스터, 아이덴티티, 모션 웹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이걸 그냥 ʻ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묶어 말하기엔 굉장히 다른 일들이거든요. 저는 공간이나 설치, 미디어 인터렉션 같은 영역에도 욕심이 많아서 그쪽 작업도 하고 있는데, 몸담고 있는 영역이 넓어서 지루해질 틈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권태에 빠지면 다른 디자인 작업을 하면 되거든요. 포스터 디자인을 하다가 막히면 조판 작업을 하는 거죠. 포스터 이미지를 만드는 게 우뇌를 쓰는 창작의 영역이라면 편집 디자인은 비교적 논리적인 좌뇌 영역이거든요. 아주 작은 디테일을 봐야 하고, 그리드를 맞추는 일이니까요. 그러다 또 지루해지면 우뇌를 쓰는 아이덴티티 작업을 하고(웃음). 제가 만약 한 분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면 금세 권태감을 느끼고 힘들었을 거예요. 물론 성향에 잘 맞아서 책 디자인만 10년, 20년씩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그런 성격은 아니거든요. 다행히 디자인 영역 안에서도 다양한 데 관심이 많아서, 이리저리 오가며 권태감을 극복하고 지내요.

작업의 힘듦을 작업으로 푸는 거네요. 

그렇죠. 클라이언트 업무도 그렇지만, 1년에 한두 개 정도 개인 작업도 하고 있는데요. 개인 작업이 그런 면에선 권태로움을 확실히 없애주는 업무예요. 일부러 더 디자인의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벗어나려고 하거든요. 책, 종이, 웹이라는 바탕을 완전히 벗어나거나 융합하는 식으로요. 육체노동으로 뭔가를 만들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요.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책 작업은 어땠어요? 저자이기도 하고, 디자이너이기도 한데 출판사를 따로 두었다는 점에서 좀 다른 지점이 생겼을 것 같아요. 

기존 단행본에서 아쉽던 부분이나 제 책에 대한 욕심, ʻ이렇게 만들어보고 싶다.’ 하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반영했어요. 판형도 일반 시집보다는 가로 폭이 조금 넓은데, 소설책이나 기존 단행본보다는 크기가 약간 작아요. 그러면서 세로로는 조금 긴 형태죠. 가벼운 책을 좋아해서 종이도 가벼운 걸로 골랐고, 글자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글밥을 담았어요. 책 표지로 사용한 오렌지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고요. 책은 글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오브제로 기능한다는 생각도 있어서 제본에도 신경 썼어요. 이 책의 제본 방식인 마루 양장은 각 양장보다는 책등이 둥글게 떨어지는 형태인데요. 오래전에, 책이 처음 만들어졌을 시절엔 주로 이런 형태를 띠었거든요. 사실 지금 하기엔 제본비도 비싸고 제작도 까다로워서 출판사를 설득해야 했어요. 감사하게도 제 의견을 수용해 주었지요. 표지에 책 제목이 담긴 방식도 좀 독특하죠. 국내 서적인데 영문 제목이 병기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거든요. 출판사에서도 외서를 번역한 책이 아닌데 영문 제목을 넣은 건 선례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한테는 일상의실천이라는 이름이 한글뿐 아니라 영어도, Everyday Practice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도 중요하기 때문에 꼭 넣고 싶었어요. 

 

본인의 글이 담긴 책을 직접 디자인해서였을까요. 표지 디자인부터 근사했죠. 

이 책의 두 가지 키워드는 ʻ일상’과 ʻ실천’이에요. 그래서 표지를 디자인할 때 위쪽엔 일상, 아래쪽엔 실천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책은 혼자 썼지만 일상의실천은 셋이 하는 스튜디오이기 때문에 삼각형으로 그려 넣었죠. 그 안은 구불구불한 선으로 채워져 있는데, 순탄하게만 지나온 것은 아니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꼬물꼬물 고민하고 부딪치기도 하지만, 이 삼각형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였죠. 아래쪽 네모는 실천을 표현한 건데요. 사회적인 맥락의 메시지를 담을 때 관심 있는 분야를 카메라 뷰파인더처럼 보자는 의미였어요. 그 안에는 굉장한 갈등과 마찰 그리고 파열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동적인 실루엣을 담았고요. 나름대로 둘을 대비되게 표현하려고 일상은 디보싱(옴폭 들어간 후가공)으로 작업했고, 아래는 엠보싱(볼록 튀어나오는 후가공)으로 마무리했어요. 

 

(표지를 만져본다.) 듣고 보니 후가공이 정말 반대네요?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해요. 일상과 실천을 대비되게 표현한 점도 재미있고요. 기록하는 행위는 일상에 좀더 가까운 거겠죠? 

그렇겠죠? 음… 그런데 어떤 면에선 실천에 가까운 것도 같아요. 클라이언트와의 이야기도 단순히 불평하려고 쓴 건 아니거든요. ʻ디자이너가 받아들이기에 무례하거나 불쾌한 지점이 있다.’는 걸 지적함으로써 클라이언트가 잘못을 인지하고 다음 디자이너에겐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면 일종의 실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일상 같은 기록이 실천을 이끌어낸다고도 볼 수 있겠어요. 두 권의 책을 낸 디자이너인데, 이전에 책을 쓸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네,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디자인에 재미를 느낀 게 ʻ졸전’ 책자를 만들 때였거든요. 그 책이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줬죠. 왜, 학교마다 한두 개씩 문제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저희 학교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술자리에서 푸념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쉽고, 공론화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이 있어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인터뷰했어요. 졸업 작품뿐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태도나 학교에 다니며 느낀 문제점 같은 걸 공론화하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기획했죠. 그때는 기획자 겸, 편집자 겸, 디자이너 역할까지 했단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어떤 형식으로 담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누군가 제게 준 콘텐츠를 형태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처음부터 함께 고민한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담을지 궁리하는 게 즐거웠어요.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내용 또한 주목받기 시작했죠. 교수진들이 책 다 거둬들이라고 할 정도로 반향이 있었어요. 그 책에서 굵직하게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교내 구타였는데요. 그 작업 이후로 그런 것들이 많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디자인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 작업물이 누군가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즐겁더라고요. 첫 책을 보고 영국으로 유학 간 독자도 있었고, 이번 책을 보고 디자이너로서의 태도나 클라이언트와 맺는 관계에 대해 좀더 생각하게 됐다는 분들도 있는데, 그럴 때 굉장히 뿌듯해요. 

 

작업물이 개인의 만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관심이 있는 듯해요. 특히 일상의실천 작업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게 많은데요. 나를 중심에 두고 작업하기보다는 타인이나 사회를 향해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인상이 있어요. 

우스갯소리지만, 제 MBTI가 ENFJ거든요. 근데 이 유형이 공감 능력이 엄청 뛰어나대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길 걷다가 구걸하시는 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책에 어머니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저희 어머니가 장애 아동 유치원을 운영하셨거든요. 장애 아동 중에서도 발달 장애 아동을 위한 유치원이었어요. 그 당시에 한국에서 발달 장애인이 유치원에서 교육받는다는 건 전에 없던 일이었거든요. 상태가 아주 심한 친구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아동과 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운영해 나갔는데요. 실제로 일본에서 장애 아동과 일반 아동이 함께 생활할 때 서로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었기에 그걸 도입한 거였거든요. 근데 몇 년 못 가고 무산됐어요. 일반 아동 학부모들이 엄청나게 항의해서요. 그런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기득권층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놓지 않으려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사회가 변하는 걸 막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래서인지 소외당하는 사람이나 환경적인 이유로 피해받는 사람들에게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디자이너로 산다는 건 관찰하며 살아가는 삶이다.”라는 문장을 쓰셨는데, 부지런히 관찰하기 때문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요즘은 어떤 걸 관찰하고 있어요? 

최근엔 글을 계속 써서인지, 소통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ʻ정확하게 표현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거요. 특히 클라이언트와 하는 의사소통이 그러한데요. 정확히 아닌 건 아니라고 해주어야 상대방이 불필요한 기대나 오해를 안 하게 되거든요. 명쾌하지 않으면 나중에 결과물을 보고 서로 당황스러워져요. ʻ왜 이런 요소를 담았어요?’, ʻ네? 이런 걸 담아달라면서요.’ 이런 식으로요. 얼마 전엔 IT 회사와 일 몇 건을 하게 됐는데 그때 소통이 쉽지 않다는 걸 엄청나게 느꼈어요. 혹시 ʻ판교 사투리’라는 거 아세요? 그쪽 업계에서 자주 쓰는 용어인데, 예컨대 이런 거예요. 외우기도 쉽지 않아서 어딘가에 적어뒀는데, 잠시만요. (메모장을 찾는다.) “개발 방향이 어느 정도 얼라인 됐고요. 아직 개발팀 리소스 파악 중이라서 업데이트는 못 했는데 슬랙에 말씀드린 것처럼 두 데이까지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겨우겨우 유추해서 답장을 드렸더니 “너무 늦는 거 아닌가요? 씨 레벨에 보여줄 건 있어야지. 린하게 일정 더 당길 순 없어요? 지난번 미팅에서 분명 에자일 하겠다는 레슨 런을 공유해 주셨고….”

 

아악! 

(웃음) 생각보다 훨씬 더 영어를 많이 쓰시더라고요. 어느 날은 ʻ락업’을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 전혀 모르겠는 거예요. “락업이 뭔가요?”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대충 알아듣는 척했더니 나중에 다 꼬이더라고요. 알고 보니 락업은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 거였어요. 유추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죠. 물론 의도를 가지고 영어를 쓰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소외하는 소통 방식이라 생각해요. 

격하게 공감해요. 저는 필요 없는 영어를 사용하는 데 엄청난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줄임말도 그렇고요. 언젠가부터 그런 의사소통 방식이 보편화된 것 같아요. 그게 뭐냐고 되묻는 건 바보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된 데는 소속감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얼마 전엔 클라이언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요. 그런 표현 쓰지 말아 달라고. 소통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요. 정확하게 소통해야 오류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거든요. 아, 또 관심 있게 관찰하게 된 말이 있어요. 요즘 제가 거슬려 하는 말 중 하나가 “갑자기?”예요. 대화를 하다 보면 다른 소재로 넘어갈 때도 있고, 특히 아이디어 회의할 때는 유연하게 이 얘기, 저 얘기 튀어나오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라고 하는 순간 그 말을 꺼낸 사람이 맥락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 것처럼,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돼요. 평가절하되는 거죠. 그걸 인식하고 나니까 “갑자기?”나 “네가?”라는 말이 거슬리더라고요. 조심해서 써야 하는 표현이란 생각이 들어요. 결국엔 누군가를 소외하게 되는 거니까요. 

 

요즘 소통하는 법을 관찰하고 있군요. 

아무래도 클라이언트나 동료들이랑 많은 얘기를 하면서 작업하다 보니까 불통에서 빚어지는 오류를 최소화하고 싶어서 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책 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한때 은어처럼 ʻ보그체’라는 말이 유행했잖아요. 그런데… 비속어를 섞어 써야 확 와닿는데, 순화하자면(웃음) ʻ인문체’라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되게 근사하게 적힌 문장을 열심히 읽었는데, 읽고 나서도 무슨 이야긴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문체를 말하는데요. 제 글은 절대 인문체로는 쓰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썼어요. 그래서인지 ʻ술술 읽힌다.’는 후기를 읽으면 그렇게 기쁘더라고요. 

 

지금까지는 클라이언트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반대로 디자이너로서 해선 안 될 태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책 후반부에 ʻ큐레이터와의 대화’를 실었어요.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 온 큐레이터와 대화하면서 이쪽 의견을 많이 들어보려고 했죠. 그때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ʻ큐레이터의 글을 읽지 않는’ 디자이너였어요. 사실 이건 정말로 많은 디자이너가 자주 하는 실수거든요. 콘텐츠보다 시각적인 것, 보이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이런 실수가 나오게 돼요. 저 또한 비주얼만 우선해서 콘텐츠를 놓친 적은 없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이번 호 주제어는 기록이자 수집이에요. 디자이너로서의 기록 역시 하나의 경험 수집이라 생각했는데요. 기록물 외에 또 모으는 게 있나요? 

안 그래도 주제를 듣고 제가 모으고 있는 걸 생각해 봤는데, 수집하는 게 좀처럼 없더라고요. 유일한 게 작업인 것 같아요. 이번에 10주년 전시할 때 10년 동안의 작업을 모아서 쭉 펼쳐놨는데 오신 분들이 어떻게 이걸 다 모아놨냐며 신기해하시더라고요. 영국에서 공부할 때 인상 깊게 본 것 중 하나가 아카이브를 굉장히 열심히 한다는 거였어요. 공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일반 기업들도 아카이브를 제대로 한다는 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슈퍼마켓 중에 ʻ세인즈버리’라는 곳이 있는데요. 구멍가게로 시작한 곳인데 처음에는 통조림 패키지를 손으로 그리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그 패키지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아카이빙해 놨는데 그런 점도 너무 멋졌어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걸 찾아보기 어렵잖아요. 디자인이 바뀌면 과거의 것을 부정하고 지금이 더 좋은 거라는 식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영국은 과거 유산을 지켜가면서 발전하더라고요. 그런 점이 인상 깊어서 저도 해봐야겠다 생각한 거죠. 그래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하고부터 모든 작업을 모아두었어요. 그걸 이번에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도록 모두 전시한 거고요. 

 

나의 작업만큼 타인의 작업에도 관심이 많을 것 같아요. 문득 궁금해지는데 타인의 작업 중에 기억에 남는 창작물이 있나요? 

노순택 작가님 사진들이요. 그분 사진이 제게는 무척 충격적이었어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사진은 노순택 작가님 이전에도 많았지만,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표현하면서도 그 안에 현시대의 아픔을 선명하게 담는 작가는 흔치 않았다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시리즈 중 하나가 ʻ얄읏한 공’인데요. 평택으로 미군 기지가 이전할 때 꾸준하게 촬영한 사진들인데, 말하자면 역사적인 시리즈거든요. 근데 조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굉장히 아름다워요. 사회적인 메시지를 저렇게까지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전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작가님은 사회적인 현장에서, 가슴 아픈 현장에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을 찍는 게 맞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크셨다고 해요. 직접 쓰신 책도 여러 권 나왔는데 그런 딜레마에 많이 괴로워하시더라고요. 생각할 거리를 정말 많이 던져준 사진작가죠. 

 

일상의실천 작업과도 어느 부분은 닮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인식된다면 영광이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디자이너로서의 기록은 인간 권준호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요. 디자이너 권준호는 전형적인 것에서 탈피하고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도록 하는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아마 삶의 가치도 이러한 방향일 것 같은데, 오늘날 준호 씨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가치를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저한테는 늘 숙제 같은 건데요. 예전부터 저 자신을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형이 워낙 특출한 예술가여서 어릴 때부터 제가 더 평범하게 느껴진 것도 같은데, 그래서인지 전형적인 걸 자꾸 탈피하고 싶더라고요.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전형적인 디자이너의 모습은 좀 피해서 살고 싶어요. 일상의실천도 생계를 위해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단순한 일, 사회적 메시지가 없는 일도 당연히 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늘 추구하는 ʻ전형성에서 탈피한 디자인’이나 ʻ배제되는 사람이 없는 작업’은 꾸준히 해나가고 싶어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요.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는 일도 중요할 것 같아요. 

이번에 책을 내고 제가 참 좋아하는 디자이너 선배가 인상적인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정확히 뭐라고 하셨더라…. 찾아볼게요(웃음). “첫 출간 축하드리고 성실하고 신선한 행보를 응원합니다.” 저는 여기서 ʻ성실’하고 ʻ신선’하다는 게 굉장히 큰 칭찬으로 와닿았거든요. 땡스북스 대표님이신데요. 10년 전에 첫 책을 내고 땡스북스에서 북토크를 하고, 이번에도 북토크를 했는데, 그게 참 의미가 크더라고요. 앞으로도 ʻ신선한 행보’를 유지해 나가고 싶어요. 이런 말들이 저에겐 독려가 되는 거고요. 

 

디자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신선한 행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카이브요. 현업에서 디자인하고 있는 사람들의 작업물을 모아 한 공간에서 보여주고 싶어요. 이번 10주년 전시를 하면서 저희 스튜디오가 10년 동안 한 작업물들도 이렇게 재미있게 봐주시는데 수많은 디자이너의 작업물이 한데 모여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작업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아카이브 공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디자인 라이브러리 같은 곳도 분명히 있지만, 그곳에 수집된 작업은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어서 약간은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요. 좀더 일상적이고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디자인들을 아카이브하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것 역시 수집인 셈이네요. 그 공간, 완성되면 꼭 초대해 주세요. 

좋아요!

“무해한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에 사뭇 긴장했다. 세상에 무해한 게 얼마나 될까, 그걸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염려한 터다. 한마디, 두 마디, 대화가 이어지면서 나는 긴장에서 조금씩 풀려났다. 중간중간 그의 말에 웃으며 박수치고 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을 떠올린다. 우리 목소리가 담긴 녹취록을 찬찬히 풀고 나서 어떤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 믿음을 잊지 않고 싶어 조심스레 일기장을 펼쳤다. 그날 일기에는 이런 문장이 남았다. “어쩌면 오늘, 무해한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일단은 그렇게 쓰고 싶다.”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권준호 | 안그라픽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