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의 모든 것

Everything In The Diary
문보영 — 시인

“오키나와빨대할머니한테 편지가 왔는데? 문보영, 아는 사람이야?” 어느 날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키나와빨대할머니는 나이고, 문보영은 시인이다. 일기를 우편으로 보내주던 이 시인은 편지 봉투에 공룡이나 강아지 같은 귀여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준다. 누가 봐도 궁금한 봉투다. 편지를 열면 A4 용지에 깜지처럼 빼곡하게 쓰인 손글씨 일기가 있고, 가끔 그림도 들어 있다. 보영에게 일기란 무엇일까. 시와 일기의 경계는 무엇일까. 또 그가 항상 곁에 두는 ‘말씹러’는 무엇일까. 그는 왜 엄청난 양의 편지를 들고 우체국에 가는 걸까. 

일기는 그 순간 느껴야 할 감정을 모두 밟고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것 같아요.

슬픈 일을 겪더라도, 얼렁뚱땅 슬픈 게 아니라

하나하나 씹어 삼키면서 슬플 수 있게 하는 거죠.

잠은 잘 잤나요? 악몽은 안 꿨어요?

네(웃음). 

 

어제는 몇 시에 주무셨어요? 

새벽 3시 반쯤 잠들어서 아침 10시에 일어났어요. 

 

매일 새벽 5시에 잠들어서 ‘잠 못 자는 사람의 새벽 12시부터 5시’라는 불면 챌린지 브이로그도 하셨잖아요, 일찍 주무셨네요. 

맞아요(웃음).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어요. 

 

보영 씨를 모르는 독자들은 ‘시인인데 브이로그를 해?’ 하고 생각할 것 같아요. 직접 소개해 주실래요? 

시 쓰는 사람이고요. 독자들한테 편지도 보내고, 유튜브도 조금 하고, 하다 말고, 또 하고…. 아주 평범한 사람이에요. 

 

한때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이젠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시네요.

어느 순간 그렇게 됐어요. 근데 막상 평범하게 살아보니까 이렇게 살고 싶진 않은 것 같아요. 

 

왜요? 

예전에는 일상을 잘 살아내고 싶었어요. 제가 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 나머지 부분에서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돼 버렸어요.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려고 애쓰다가 나중엔 일상을 유지하는 게 숙제처럼 느껴졌거든요. 결국 시 쓰기를 잘하려고 일상도 규칙적으로 살고 싶었던 건데, 시 쓰는 것보다 일상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졌달까요. 그래서 요즘엔 다 놓아버리고 무신경하게 지내려고 해요.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그냥 작업실에 가요. 청소기도… 언제 돌렸더라…. 

 

그게 정상인 것 같은데요(웃음).한동안 일상이 중요 화두였는데, 그럼 요즘엔 어떤 화두를 품고 지내요?

(조용히) 미래가 불안해요.

 

미래가 불안하다고요?

네.

 

어떤 의미에서의 불안이에요?

지금까지는 이렇게 사는 게 괜찮은 것 같았는데, 더 먼 미래를 생각하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가 생겨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요. 저는 원래 과거만 생각하던 사람인데 작년부터 자꾸 미래를 생각하게 돼요. 불안함이 일상이 되면 가끔 숨이 막혀요. 제가 해야 할 도리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서요. 돈도 벌어야 되고, 저축도 해야 되고, 규칙적으로 잘 살아야 하고, 어른이란 걸 증명해야 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올바른 삶 같은 걸 생각하면 종종 ‘에라,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어요. 

 

미래를 위해서는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게 아무래도 중요할 텐데, 지금 가장 중요한 키워드 세 가지를 꼽아 볼까요? 

우선은 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최근엔 시와 좀 많이 멀어졌어요.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도 했지만 해보니까 결국에는 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랑 너무 멀어지면 제가 좀… 슬퍼져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귀소 본능처럼 자꾸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다음 키워드는요? 

아침이요. 항상 정오가 지나 일어나다가 최근엔 10시에 줌으로 친구들을 만나면서 아침을 살아봤어요. 각자 글 쓰고 해산하는 화상 독서실 같은 걸 해보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일부러 나가지 않으면 사람 만날 일이 없어서 더 생산적이란 생각도 들어요. 며칠 전에 저한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깊이 있는 인간관계는 충분해 보이는데 얕고 넓은 관계가 없어 보인다.’고요. 근데 그게 너무 맞는 거예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친구를 만나지 않는 날엔 종일 누구와도 이야기를 안 하는 날도 있고…. 그래서 아침을 이렇게 보내는 게 더 기뻐요. 누군가를 줌으로라도 만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도 그렇고, 그걸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렇고요. 

 

패턴이 조금씩 바뀌고 있군요. 시, 아침,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꼽는다면요?

음… 아마… 편지요.

 

이번 호 주제어가 ‘편지’인데 마침 편지 이야기를 하시네요(웃음). 

꼭 짜고 치는 것 같네요(웃음). 편지 봉투에 일기를 넣어 우편으로 보내던 ‘일기 딜리버리’가 아무래도 가장 오래 해온 활동이다 보니 중요 키워드에서 빼놓을 순 없을 것 같아요. 구독 신청을 받아서 일기를 보내드리는 프로젝트인데요. 첫 원고는 일반우편으로 발송하고, 나머지 원고는 매주 정해진 요일에 이메일로 발송하고 있어요. 잠깐 쉬는 기간을 가졌는데 조만간 다시 시작하려고 해요. 일기 딜리버리만을 위한 새로운 봉투도 만들었거든요. 항상 직사각형의 일반 편지 봉투를 사용했는데, 이번에 친구가 캐릭터를 그려 주어서 크래프트 봉투에 인쇄해 제작했어요.

구독자로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네요. 《준최선의 롱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의 생계는 크게 세 가지로 지탱된다. 일기 딜리버리, 시 수업, 원고료, 그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일기 딜리버리다.”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한데 지금은 왜 쉬고 있는 거예요?

에세이랑 일기를 보내는 프로젝트다 보니까 구독자가 늘어날수록 부담이 생겼어요. 제가 살아온 삶이나 경험은 한정되어 있어서 해나갈수록 밑천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죠. 또 구독자는 늘어나는 반면 제가 성장을 못하고 있단 느낌도 있었어요. 초반에는 누가 봐도 상관없을 글들을 써서 부쳤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되니까 구독자를 의식하게 됐거든요.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구독자들이 듣고 싶어 할 말들을 골라서 쓰고 있더라고요.

 

듣고 싶어 할 말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반응도 잘해주는 성격이어서 피드백에도 영향을 많이 받아요. 예컨대, 어떤 사람이 제 글을 읽고 따뜻하다고 반응하면 계속 따뜻한 글만 쓰게 돼요. 제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건지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요. 그래서 잠깐 쉬면서 제 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어요. 근데, 어느새 제가 일기 딜리버리를 하면서 마감에 맞춰 글 쓰는 게 익숙해져 버렸더라고요. 마감이 없으면 안 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일기는 잠시 쉬고 몰래 ‘시 딜리버리’를 시작했어요. 구독자는 최소한으로 두고 마감은 있는 중간 지대를 찾은 거죠. 구독자들이 많이 유입되는 인스타그램엔 홍보하지 않고 블로그에만 조용히 알리고 시작했어요. 

 

안 그래도 시 딜리버리 신청 링크를 발견했는데, 이미 신청 기한이 지났다더라고요. 딜리버리 프로젝트는 불특정 다수를 두고 편지를 보내는 작업이잖아요, 아무리 일기를 부친다고 해도 일기장에 쓰는 것과는 좀 다를 것 같아요. 

제 글쓰기는 모두 일기장에서 시작돼요. 시도, 소설도, 일기도, 메모도요. 글을 쓸 땐 이게 일기가 될지, 시가 될지, 소설이 될지 저도 몰라요. 거기서 ‘이 이야기는 나만 알면 되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거야.’ 싶은 건 덜어내고, ‘이건 좀 웃긴데? 나 이걸로 누구 웃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글들은 타이핑하면서 장르를 정해요. 저는 사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펜과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나 손을 움직였을 때 글자가 적히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일기장에 글을 쓰는 거고요. 딜리버리를 시작한 것도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뭘 적는 걸 힘들어해서 메시지든 원고든 종이에 쓰고 다 편지로 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어요. 

 

‘보내고 싶다’는 건 받는 사람을 늘 염두에 둔다는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맨 처음 블로그에 글을 썼을 때 친구들이 제 글을 읽고 “너 좀 웃긴다.”라는 말을 많이 해줬거든요. 저는 살면서 웃긴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어봤어요. 대화하면서는 들을 수 없던 말인데 글을 썼을 때 누군가를 웃긴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저한테 글이라는 건 처음부터 내밀하면서도 외적인 요소였던 것 같아요. 저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타인을 웃기는 일이었던 거죠.

 

웃긴 글이 꼭 웃긴 상태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적당히 슬플 때 글이 잘 써진다는 이야길 하신 적이 있죠. 

맞아요. 처음 글을 쓴 게 되게 힘들 때였거든요. 힘듦을 글로 표현하는데 상처가 봉합되는 듯한 쾌감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자학 개그 같은 글을 자주 쓰는 것 같아요. ‘내 한 몸 자빠뜨려서 누군가 웃길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있는 거죠. 근데 항상 이렇게 글을 쓸 순 없어서 글쓰기가 좀 어려워진 적이 있어요. 일기 딜리버리도 그래서 잠시 쉬고 있는 거고요. 너무 힘들면 다 하기 싫어지잖아요. 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행복할 때는 글이 잘 안 나오는 편인데, 진짜 힘들 땐 그보다 더 안 써져요. 적당한 스트레스가 저에겐 글쓰기의 동력이거든요.

행복한 날엔 일기장에 사실만 적는다고 하셨죠. 그날의 날씨, 거리, 먹은 음식, 음식의 맛, 색깔, 모양… 같은 것들이요. 행복하다는 감정은 따로 기록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어, 그러네요. 행복할 때는 나를 행복하게 만든 대상이 보통은 물리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존재해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람이랄지, 물건이랄지, 날씨랄지….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에 사실만 기록해도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거죠.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저는 행복할 때 더 많은 글을 쓰고, 감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거든요. 슬픈 건 굳이 기록하지 않고요. 왜 쓰는 사람마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어쩌면… 제가 행복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불행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고요. “글을 쓰고 받는 모든 돈이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글쓰기를 노동으로 생각한 다음부터는 원고료를 받는 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바뀐 계기나 에피소드가 있어요? 

사실 요즘엔 글쓰기를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니, 좀 덜 생각하려고 하죠. 노동보다는 놀이처럼 생각할 때가 많아요. 글쓰기로 삶을 지탱해야겠다는 강박이 많이 사라졌거든요. 일기 딜리버리로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글쓰기라는 본질에 도움이 되냐고 물으면 사실 잘 모르겠어요. 가끔은 송구스러워요. 제가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그 무게감은 다른 것 같고요. 만족스러운 글을 써서 보내드리면 꽤 괜찮은 노동 같고, 그렇지 않을 땐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만족감은 어떨 때 와요? 

쓰고 나서 ‘열심히 했다.’는 기분이 들 때요. 웃긴 걸 썼고, 이상하고, 새로운 걸 썼다는 느낌이 들 때. 저는 그럴 때가 제일 좋아요. 글쓰기가 저한테 노동이기도 하고, 놀이인 면도 있고, 나를 위한 행위이기도 하고, 타인을 위한 것도 있어서 모든 요소가 뒤섞여 매번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직접 김승일 시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죠. 일기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분 대화가 참 재미있었는데, 김승일 시인이 그때 이런 얘길 했어요. “중2병 같은 일기를 많이 쓴다. 그게 나중에 보면 흑역사 같은데, 그걸 씀으로써 문장력이 늘었다.”고요.

(웃음)동감해요. 피아노도 며칠 안 치면 손이 굳는다고들 하잖아요. 그것처럼 일기든 뭐든 글을 한 사흘 정도 안 쓰면 펜 잡을 때 느낌이 딱 어색해요. 글을 계속 쓰면 머릿속에 단어들이 떠돌아다니거든요. 그 사이에서 최적의 단어를 골라야 하는데, 단어가 생각이 안 나고 문장 구조가 막 엉켜요.

최장기간 글을 안 쓴 게 어느 정도예요?

어… 대답하려고 보니까 글은 계속 쓴 것 같네요. 시는 안 쓰고 버틴 기간이 있는데, 글은 안 쓴 기간이라고 해봐야 나흘 정도인 것 같아요. 

 

지금 말한 글은 다 손으로 쓰는 글인 거죠? 

그렇죠. 작업으로 글을 쓸 때도 초고는 손으로 쓰고 컴퓨터로 옮기곤 하는데요. 저한테는 그게 퇴고 과정이에요. 일기장엔 이 문장 저 문장 섞여 있고, 그림도 그리면서 마구잡이로 쓰거든요. 줄도 휙휙 긋고요. 이런 자유로움 때문에 공책에 쓰는 걸 좋아하는데, 노트북에 타이핑하면 문장이 다듬어지고 서사도 정돈돼요.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이때 장르도 정해지고요. 손글씨가 노트북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해요. 

 

미발표 시를 공개하는 행사에서 그림이랑 글이 뒤섞인 보영 씨의 시를 봤어요. 특히 그 시는 딜리버리 하는 일기랑 무척 비슷해 보여서 일기와 시의 경계가 뭘까 궁금했어요. 

그걸 정의하는 건 너무 어렵지만, 이건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일기 딜리버리를 할 때 시를 써서 보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저 혼자 즐거워할까 봐, 그걸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저는 시를 쓸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데 저 혼자만 즐거우면 안 되잖아요. 물론 제 산문이나 일기뿐만 아니라 시에도 관심을 갖는 분들이라면 함께 즐거워할 수 있지만 평소에 시를 안 읽는 분들에겐 돌덩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시 역시 일기장에 쓴 글로부터 나오는데도 그 장르는 분명히 다르거든요. 

 

어떤 점이요? 

음… 뭘 하든 인과를 잘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인과를 깨버리고 뚱딴지처럼 다른 데로 가버리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는 후자가 좀더 시를 읽기 수월하다고 봐요.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시는 별자리처럼 점을 막 찍어 놓고 나서 독자한테 스스로 별자리를 마음대로 만들어 봐라, 하는 영역 같거든요. 

 

시에는 규칙이 없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런데도 시를 이루는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어떤 인터뷰에서 “시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시가 좋다.”고 이야기한 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얼마 전에 경험한 이야기를 해볼까 봐요. 온라인 시 수업의 연장으로 독자들이 쓴 시를 읽고 피드백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두 편의 시를 보낸 수강생이 여럿 있었거든요. 비슷한 색깔의 시를 보내 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완전 다른 두 편을 보내는 수강생도 많았어요. 재밌는 건, 완전 다른 두 편을 보내는 수강생들은 첫 번째는 누가 봐도 시 같은 걸 보내세요. 운율과 은유가 고루 들어 있는 그런 시요. 그다음엔 ‘저도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하면서 쭈뼛쭈뼛 보내거든요. ‘아무래도 처음이 낫죠?’ 하면서요. 두 번째 글은 교과서에 수록된 시에만 익숙한 분들이 보면 결코 시 같지 않을 법한 글이에요. 근데 저는 매번 그런 글에서 글쓴이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것 같았어요. 무조건 “두 번째가 훨씬 좋다.”고 코멘트 했죠. 결국 ‘시를 이루는 요소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시가 좋다.’는 건 이런 경우인 것 같아요. 행갈이가 철저하게 되어 있고, 마지막 문장까지 탁탁탁탁 정리되어서 아름답게 끝나는 형태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느냐인 거죠. 벗어날수록 자기 목소리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요. 그게 제가 바라는 시의 형태이기도 해요. 원래 있던 것에서부터 더 많이 벗어나는 시요. 

 

조금 어려운데, 정형화되지 않은 걸 원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좀더 새롭다거나 기존 질서를 깨뜨린 것들이요. 시나 글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그런 것들을 본 경험이 있어요? 

카프카, 카프카가 진짜 웃긴 사람 같아요. 카프카를 좋아한다고 자주 이야기하고 다니는데요. 그런 거에 비해 사실 많이 읽진 않거든요. 그래서 읽을 때마다 계속 새로운 것들을 만나게 돼요. 카프카가 A4 용지 반 장도 안 되는 분량의 산문을 되게 많이 남겼는데 그게 특히 재밌어요. 메모처럼 보이는 글인데 그게 제 눈엔 너무 시인 거예요, 산문시. 근데 본인은 시에 재능이 있다는 걸 모른 것 같아요. 그의 산문을 읽을 때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재능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렇게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저 뒤에 ‘말씹러’가 앉아 있거든요. 저는 계속 말씹러랑 대화하는 기분이 드는데(웃음)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실래요? 

어? 너 왜 거기 있어(웃음)? 말씹러는 제 반려 인형인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제가 인형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릴 때도 인형을 안 좋아했고 오히려 좀 영악하게 ‘좋아하는 척’하며 지낸 아이였어요. 인형이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굴면 어른들이 저를 순수한 어린애로 알아서 이야기를 잘 들어줬거든요. 근데 겪어보니 사람은 크면서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약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서야 애착의 대상을 찾게 됐죠. 가장 약해진 타이밍에 나타난 게 말씹러고요. 친구랑 우연히 본 돼지 인형인데 난생처음 저 인형을 꼭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같이 있던 친구가 사주어서 더 의미 있는 반려 인형이 됐죠. 

 

같이 지내보니까 어때요? 

모든 곳에 말씹러를 데리고 다녔어요. 제가 대중교통 타는 걸 힘들어해서 지하철 탈 때도 함께 있어 줬고, 시 수업 할 때나 행사에 갈 때도 항상 함께였어요. 인형에도 표정이 있는 거 아세요? 말씹러는 표정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도 읽히고 의도하지 않은 순간 눈이 마주치기도 해요. 그때 인형한테도 영혼이 있단 생각이 들어요. 전 그게 반려동물을 키울 때랑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요. 많이 아플 때 함께 있어 준 친구라 힘이 많이 됐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산문에 ‘인력거’나 ‘흡연구역’처럼 친구들 이름을 바꾸어 쓰잖아요. 그 이름들은 물론이고 말씹러 또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어요.

사실 말씹러는 제 별명이었어요. 별명이라기보다는… 방금 이야기하신 인력거랑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인력거가 계속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딴생각에 빠져 전혀 못 듣고 배시시 웃고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인력거가 “문보영은 행복한 말씹러네.” 그랬어요. 그때 말을 씹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생겼는데, 이 돼지 인형 이름이 말씹러면 좋을 것 같았어요. 

 

행복한 돼지 인형인 거네요(웃음). 어떤 것이든 앞에 ‘준’이라는 말을 붙이면 좀 괜찮아진다고 했어요. 책 제목에도 ‘준최선’이 들어가고 준인간, 준시인, 준삶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해왔죠. 최근에는 또 어떤 단어들을 낮춰 부르고 있어요?

요즘엔 준최선의 폐해가 생겼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준최선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데도 ‘준최선이면 됐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 같아요. 안일해진다고 할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좀더 최선을 다하자는 태도를 갖게 됐어요. 그래도 ‘준’을 붙여서 좀 나아진 부분은 노출에 부담이 덜해졌다는 거예요. 저는 사진이나 영상에 찍히는 걸 좀 부담스러워해요. 영상 인터뷰 같은 건 일부러 피할 정도로요. 말을 잘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카메라가 돌아가면 말을 더 못하게 되고, 나아가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데에도 부담이 생기더라고요. 그건 어쩌면 완벽주의 때문인 것도 같은데요. 준이라는 단어 덕분에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많이 생겼어요. 노출을 덜 부담스러워하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죠. 

 

준완벽주의(웃음).

맞아요! 준완벽.

다시 일기 딜리버리 얘기를 해볼게요. 뉴스레터면서 한 달에 두 번 우편으로 발송된다는 점이 재미있어요. 어떻게 우편으로 발송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났어요. 독자들에게 뭔가 보낼 수 있다면 직접 쓴 편지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는데, 뉴스레터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작업을 떠올리게 됐죠. 제가 휴대폰으로 뭘 읽는 걸 어려워하다 보니까 물성 있는 걸 보내고 싶더라고요. 종이에 적힌 글은 친구랑 같이 볼 수도 있고, 아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니까. 물성이 주는 만족감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시인이 되고 독자들에게 편지 받을 일이 종종 생겼는데 받고 나면 기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하며 편지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인상이 생겼어요. 사실 처음엔 오래 할 생각 없이 이벤트성으로 시작한 건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꾸준히 하게 됐죠. 

 

작업하는 사진만 봐도 편지 양이 어마어마하던데 구독자가 몇 명이에요? 

비밀이에요(웃음). 

 

구독자 수를 밝히면 수익이 드러나겠군요(웃음). 그 많은 양을 출력하고, 접고, 포장하고, 스티커 붙이는 작업만으로도 너무 힘들지 않아요?

저는 편지 포장하는 게 너무 좋아요. 딱 하루만 집중해서 작업하면 끝나는 일이어서 오래 힘들진 않아요. 오히려 정신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 좋아하죠. 평소에는 정신노동만 하고 있으니까요. 반대로 편지 부치는 걸 매일 하라고 하면 그땐 또 육체노동이 힘들어지겠죠? 

 

일기 딜리버리를 하기 전에도 편지를 자주 쓰셨나요? 

아니요. 저는 연애편지도 써본 적이 없고, 친구한테 쓴 것도 중학교 2학년 때가 마지막인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학생 때 대통령이랑 교장 선생님한테 편지 쓴 적이 있네요. 

 

네? 

저는 교육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육학과에 진학하기도 했죠. 워낙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대통령이랑 교장 선생님께 학교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보낸 적이 있어요. 저희 학교는 빈부격차가 유독 큰 학교였어요. 잘 사는 집 애들과 못 사는 집 애들이 섞여 있었거든요. 근데 제 눈엔 그 격차가 너무 많은 걸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특히 출발선을 결정해 버리는 것 같았죠. 그래서 교육에 대한 제 생각들을 편지로 길게 써서 보냈어요. 

 

답장이 왔어요? 

둘 다 왔어요. 한두 장 써서 보낸 게 아니라 A4 용지 열 몇 장을 적었거든요. 대통령에게 직접 답장을 받은 건 아니고,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편지죠. 교장 선생님이랑은 편지를 보낸 이후로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선생님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에 관해 이야기 나눴어요. 저희 학교에 좀 이상한 문화가 있었는데 모의고사 성적으로 상위 4퍼센트 안에 들면 학교에서 빵을 줬거든요. 근데 그게 좀 이상한 거예요. “너 빵 받았어?”로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성적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판별하는 거잖아요.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는 동력으로는 좋은데 하위권이지만 열심히 해서 중위권이 된 학생도 있을 텐데 상위 4퍼센트 안에 드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여서…. 그 바깥에서 잘하는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교장 선생님과 나눈 이후로 상위 4퍼센트가 아니라 성적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른 학생들에게 빵을 주는 문화로 바뀌기도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빵은 그냥 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편지를 쓸 운명이었나 봐요. 이 이야기는 처음 밝히는 건데, 오글거리네요(웃음). 

 

아니, 너무 대단한데요. 편지의 힘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일기 딜리버리에 손수 답장해 주는 구독자들이 많다고 했죠? 그 편지에도 힘이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답장을 받았을 때 기분이 아직도 생각나요. 엄청 좋았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잠깐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는데, 수술받고 회복하는 기간에 엄마한테 “엄마, 수술 잘 끝났으니까 내가 편지 읽어 줄게.” 그러면서 읽어 드린 적도 있어요. 엄마는 당연히 제가 편지를 쓴 줄 알고 “응, 읽어 봐.” 하셨는데 저는 독자 편지를 낭독하고(웃음). 그 편지엔 당연히 저희 엄마 얘긴 하나도 없고 문보영이 왜 좋은지, 문보영의 시가 왜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거든요. 근데 엄마가 엄청 좋아했어요. 아마 제가 편지를 썼더라도 그것보다 좋아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좋네요(웃음). 책에 “나는 일기를 쓰면서 발생한다.”고 쓰셨어요. 일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단 생각도 드는데, 좀더 이야기해 주실래요? 

저는 평소에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고, 제 진심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근데 일기를 쓰면 그게 보일 때가 있어요. 일기를 쓸 때 개요를 잡고 구조적으로 접근하진 않잖아요. 생각나는 대로 이 문장, 저 문장 일단 쓰고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그 안에서 진심을 마주하는 경험이 많아요. 그런 너저분한 문장 사이에서 진심을 찾게 되는 것 같아서 일기 쓸 때에야 제가 발생하는 것만 같았어요. ‘진심이라는 게 되게 너저분한 거구나….’ 깨닫기도 했고요. 물론 일기장에서 매번 진심을 찾게 되는 건 아닌데, 그건 또 그 자체로 좋아요. 일기는 꼭 뭔가 되지 않아도 되거든요. 전 일기의 그런 점이 제일 좋아요. 시가 되어도 좋고, 소설이 되어도 좋고, 에세이가 되어도 좋고, 그냥 일기여도 좋고,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아요. 일기는 일기여서 좋아요.

저에게 일기란 시간을 실감하게 해주는 도구인데 “일기를 쓰는 순간 시간으로부터 풀려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제 일기장을 펼쳐볼게요. 이거… 아무도 일기라고 생각 안 할걸요? 메모도 아니고, 일기도 아닌 아수라장.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만 써놓고 그날 뭘 했는지는 전혀 써놓지 않아서 일기장으론 그날 제 행적을 알 수 없어요. 웃긴 이야기, 꿈꾼 내용, 마구잡이로 해본 생각이나 상상들… 그런 게 적혀 있다 보니 그제 쓴 일기랑 오늘 쓴 일기는 지속되는 것도 같아요. 오늘 안에서 일기들이 분절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시간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게 아닌 거죠. 어떨 땐 전혀 다른 날짜의 기록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일기는 사람마다 쓰는 방식이 달라서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는 오늘 나는 누구랑 뭘 했고… 그런 이야기를 쓰잖아요. 

와, 저 어릴 때 일기 쓰는 거 너무 싫었어요. 

 

그 기억이 싫어서일까요, 일기를 처음 쓴 걸 대학생 때라고 이야기하시던데요. 

실제로 초등학생 때 일기를 안 썼어요. 쓰기가 너무 싫으니까 방학 숙제도 일기장에 시를 써가곤 했죠. 메모 같은 짧은 글을 써놓고 “이건 시예요.” 그랬어요. 그게 아니면 빈 일기장을 들고 등교했고요. 어떻게든 일기를 안 쓰고 싶어서 발악하던 애였죠(웃음). 

 

일기 이야기 중 또 인상 깊은 말이 있어요. “잊기 위해 일를 쓴다.”는 거요. 근데 내 손으로 적어놓은 이상 더 짙게 기억하게 되지 않아요? 

맞아요. 뭔가를 글로 쓰는 순간 잊히지 않게 되죠. 처음엔 망각하기 위해 쓴다고 했지만 실제론 망각으로 이어지진 않아요. 오히려 제 감정을 더 정확하게 느끼게 하죠. 그 순간 느껴야 할 감정을 모두 밟고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것 같아요. 슬픈 일을 겪더라도, 얼렁뚱땅 슬픈 게 아니라 하나하나 씹어 삼키면서 슬플 수 있게 하는 거. 

 

그럼 좀 나아지나요? 

네. 하지만 가끔 쓴 걸 다시 읽었을 때 그 기억이 너무 아파서 가시가 되어 저를 찌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일기 화형식을 해요. 이건 폐휴지함으로 꼭 보내 버려야겠다 싶은 일기들을 모아서 버리는 거예요. 여태 살면서 딱 두 번 해봤어요. 

 

엄청 용기 있는 행동 같아요. 혹시 다른 사람 일기를 본 적도 있어요?

아빠 일기요.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저희 아빠가 문학을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근데 아빠가 20대 시절에 쓴 일기장을 보면 최승자 시인, 이성복 시인의 시가 다 필사돼 있어요. 아빠한테 여쭤봤더니 “우리 시대 때는 그런 거 다 읽었다.” 하시던데, 제가 시인이 된 건 어쩌면 아빠 피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또 재미있는 건 아빠 일기장은 아빠 혼자 쓰신 게 아닌 것 같아요. 네댓 명이 쓴 교환 일기처럼 보이죠. 필체도 휙휙 바뀌고 장마다 글씨체가 너무 달라요. 얇은 한 권의 노트 안에서 한 사람의 글씨가 그렇게까지 바뀔 순 없을 것 같거든요. 호칭도, 내용도 계속 바뀌어서 여러 명이 썼거나 여러 자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혼자 쓴 건데?” 하시더라고요.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를 읽었을 때 그 내용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생겨나는 감정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시나 소설을 읽었을 때도 좋기는 한데, 누군가의 일기를 읽었을 때랑은 그 좋음이 또 다르거든요.

 

일기는 인간적이고 선해서 남의 일기를 읽게 되면 쓴 사람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했잖아요. 아빠는 영영 미워할 수 없겠네.

그럴 거예요. 아빠를 한 번도 미워해 본 적이 없어요. 아이, 러브, 유, 파파.

(웃음) 일기를 쓰는 이유가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순간에도 자기 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죠. 누군가에게 미움받는다는 걸 어떻게 감지해요?

자의식인 것 같아요. 제가 미움받는다는 자의식이요. 그래도 최근엔 그런 생각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요. 거기엔 독자들의 영향이 크죠. 저는 누군가의 팬이 되거나 응원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응원한 누군가 잘 됐을 때 덩달아 기쁜 건 공감 능력이 뛰어난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처음엔 독자들이 저를 응원하고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이해를 못 했어요. 감사하긴 한데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근데, 어느 순간 진심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내가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동안 누가 날 응원하고 좋아해 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라고요. 나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좋아할 수 있게 됐고 누가 저를 좋아해 주는 것도 이해하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엔 독자들이 좋아해 주면 그게 진심처럼 느껴져요. 저도 덩달아 신나고요. 

 

그럼 일기를 쓰는 이유도 조금 바뀌었겠네요? 

지금은 일기 쓰는 이유가 하나로 수렴되는 것 같지는 않고, 음… 돌잡이 때 제가 연필을 잡았다고 하는데 그 에너지가 일기로 이어진 건가 싶기도 해요(웃음).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저한테는 자연스러운 일이어서요. 일기장을 이루는 종이들이 저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저는 한 번도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일기장엔 그런 기분이 들어요.

 

이름, 문보영. 소속, 일기장.

그거예요(웃음).

 

수시로 일기를 쓰지만 아무 데서나 쓸 수는 없다고 했어요. 누군가 있는 데서 쓰는 게 어렵기 때문에 도서관이나 침대에서 쓴다고 하셨는데요. 일기를 써본 가장 의외의 장소는 어디예요?

화장실이요.

 

집… 화장실이요?

아니요. 원하지 않던 뒤풀이에 계속 참여해야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던 때여서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공황이었던 것 같아요. 그땐 그런 용어나 증상을 모르고 정신과나 상담 센터가 지금처럼 알려진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글쓰기뿐이었거든요. 그 시끄러운 뒤풀이 장소에서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술을 안 마셔서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멀쩡한 것도 싫었고요. 숨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서 화장실로 가서는 떠오르는 걸 막 적었어요. 사실 꼭 화장실이 아니어도 됐는데 그때 제가 문학병이 있었나 봐요(웃음). 혼자만의 공간이 절실했고 아무도 없는 시간이 필요했던 기억이 나요.

 

돌파구 같은 거였군요. 이야기하다 보니 일기랑 편지는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마음에 있는 말들을 꺼내게 된다는 점도 그렇고요.

편지는 결국 사람한테 가닿으면서 끝이 나요. 그래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오로지 상대에게 닿는 것만이 목적이고 다른 쓰임이 없어서요. 노출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고, 특정한 상대가 있고… 아,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독자의 편지를 엄마 앞에서 낭독한 게 갑자기 죄송해지네요. 그런데 가끔 어떤 일기는 편지처럼 누군가에게 읽히면 쓰임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기를 손으로 쓰기도 하고, 블로그에 쓰기도 하고, 우편 딜리버리를 하기도 하고, 뉴스레터도 하고, 유튜브로도 기록하고 있어요. 플랫폼마다 구독자나 콘텐츠에도 차이가 있을 텐데 어때요? 

구독자들 특성을 규정지을 순 없지만, 인스타그램에서는 댓글을 달 수 있고, ‘좋아요’ 같은 기능이 있잖아요. 뉴스레터나 일기 딜리버리 또한 답장을 받을 수 있는 구조고요. 근데 제 블로그는 그런 기능을 다 닫아두었거든요. 그래서 소통한다는 느낌이 없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보고 있다는 걸 알아요.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도 제 글을 읽어준다는 데서 안정감이 들어서 더 큰 신뢰가 생겨요. 블로그는 제가 처음 기록하던 고향 같은 플랫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시 딜리버리를 몰래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블로그부터 떠올린 것 같아요. 

 

편지는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다수와의 소통을 위한 건 아니군요. 

아주 낮은 수준의 소통, 때로는 엄청 깊은 소통. 블로그는 SNS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요. 음… 말하자면 온라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일기장?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기 딜리버리의 정체기는 내밀한 글을 불특정 다수에게 발송하는 데서 온 것 같단 생각도 드네요.

맞아요. 일기 딜리버리는 너무 즐거운 일이지만 계속해 나가면서 특별한 걸 보내야겠다는 부담이 좀 있었어요. 저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 일상에서 어떻게든 특별한 걸 발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의미 없는 사물이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해서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가끔은 제가 위선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글한테도 미안하고, 그 대상한테도 미안했죠. 삶의 경험이 많아지면 할 말이 많아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에도 할 말을 만들어야 하는 게 힘에 부친 것 같아요. 그럴 땐 좋은 글이 안 나오니까요. 

 

계속 고민하면서 일기를 부치고 있던 거군요. 다시 시작할 일기 딜리버리 시즌2는 조금 다른 태도로 하게 될 것 같아요. 

승전결은 신경 쓰지 말고 무정형의 일기를 써보자는 생각으로 준비 중이에요. 사실 제 일기가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조는 아니었어요. 아마 많은 독자가 이전에도 무정형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지만, 제 눈엔 그 안에서도 기승전결이나 서사 구조가 보였거든요. 거기서 가끔씩 인위적이란 느낌을 받은 거고요. 그런 습관이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잠시 쉬었던 거고, 이젠 그걸 좀 내려놓으려고요. 더, 조금 더 무정형으로 써볼 거예요.

 

럼 어느 정도 시랑 비슷해지는 면도 있겠네요.

확실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둘의 경계가 흐려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한번은 일기도 시라고 생각하면서 문예지에 일기를 발표해 버린 적이 있어요. 그 일기가 수록된 문예지를 받아보곤 너무 창피했어요. 일기가 시보다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일기인 걸 시라고 노력 없이 발표한 것 같아서요. 

 

시에는 노력이 필요한 거군요.

아니요, 만일 제가 일기 딜리버리에 시를 보낸다면 또 아무 노력 없이 시를 일기라고 했다고 창피해할걸요. 저는 글을 쓰는 행위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요? 

 

그걸 찾아가는 게 우리의 평생 과제 아닐까요? 보영 씨가 또 무얼 찾아갈지 궁금해지는데요.

역시 미래는 두렵네요(웃음).

 

미래가 두렵단 말로 끝내긴 아쉬우니 10년 뒤 문보영에게 한마디를 남겨 볼까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휘둘리지 말고 작업실에 가렴. 거긴 창문이 있고 햇살이 비치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으니까.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