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의 끝을 잡고

정인성 — 책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은 밤이 있다. 술을 콸콸 부으며 마음속에 담은 이야기를 전부 꺼내어 두기보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만들어준 칵테일 한 잔 앞에 두고 문장을 삼키고 싶은 밤이 분명 있다. 책과 술을 동료 삼아 홀로 마음을 희석해 보는 날에 사람들은 책바를 찾는다. 8년째 책바를 운영해 온 정인성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밤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런 밤이라면 그 끝을 놓기가 어려울 것 같다.

저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5분 이내에 잠들거든요.

밤에 일하다 보니 새벽에 자고 일찍 일어났다가,

때때로 낮잠을 자는 식으로 생활 패턴을 유지해요.

오후 4시네요. 책바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죠.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7월에 망원으로 책바를 이전하고 나서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어요. 한동안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느라 조금 바쁘게 지내기도 했고요. 곧 가을이잖아요. 손님들에게 내어줄 가을 메뉴도 고민하면서 지냈어요. 

 

바쁘셨겠어요. 망원동과는 많이 친해졌나요? 

이 근처에 살아서 마포구 권역을 원래부터 친근하게 생각했어요. 연희동에서 책바를 오래 운영하다 보니까 변화를 꾀하고 싶더라고요. 공간을 넓혀보되, 동네 주민과 외지인이 편하게 올 만한 곳으로요. 광화문을 비롯해서 동네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녔는데, 여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연희동 주민분들은 아쉬워하셨겠어요(웃음). 

자리 잡은 곳에서 왜 떠나냐며 궁금해하셨죠. 반대로 그곳에서 가게를 오래 운영하셨거나 그 동네를 잘 아시는 분들은 연희동의 장점과 아쉬운 점에 공감해 주시다 보니, 새롭게 도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면서 응원해 주셨어요. 아까도 잠시 연희동에 다녀왔는데 옛날 생각이 나가지고(웃음)…. 

 

머물던 시간이 기니까요. 새로운 공간인 망원 책바만의 특징이 궁금해요. 

처음에 책바는 사색과 몰입의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거예요. 우리 주변에는 맘껏 대화 나눌 장소가 참 많잖아요. 여기서만이라도 좋아하는 술 마시면서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즐기시길 바랐어요. 연희동이 ‘시즌1’이라면 망원은 ‘시즌2’라서 좀더 넓은 방향성의 공간으로 꾸리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연희동에서는 굉장히 작았던 터라, 지금 저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두 들을 수 있었죠. 주변 사람 기척이 신경 쓰이면 몰입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대화를 하지 못하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랑받은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은 지금 읽은 문장과 감상에 대해 나누고 싶을 테고, 저도 오시는 분들과 대화하고 싶은 갈증이 생기더라고요. 공간을 두 배 이상 넓혀서 행위의 자유도를 높인 게 가장 큰 특징이에요. 

 

그러면 이제는 대화가 가능해진 거예요? 

바 테이블이나 홀에서는 가벼운 대화가 가능해요. 소통의 성격이 커졌다 보니, 여기서는 작가님을 모셔 하이볼이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내밀한 시간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고 싶어요. 홀 너머 안쪽 공간은 이전처럼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에요. 좀더 고요한 분위기를 원하시는 분께는 ‘몰입의 방’을 추천하는데요. 문이 책장으로 되어있는데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안쪽 공간이 보여요. 훨씬 아늑하고 집중되는 분위기죠. 

 

많은 고민과 배려가 와닿아요. 책바의 역사가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에 남아 있죠. 그 책은 어떤 계기로 썼어요? 

책바는 롤 모델이 없어요. 책바가 오픈했던 2015년에는 책과 술의 조합은 물론이고 혼자서 술 마시는 행동을 낯설게 봤거든요. 저처럼 ‘혼술’하는 사람, 책과 술을 함께 즐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책바를 만든 건데,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차와 독서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듯이, 술과 독서도 어울린다고 생각해준 분들 덕에 지금까지 운영될 수 있었죠. 롤 모델이 없는 일을 시작하려는 누군가가 작은 도움이라도 얻길 바라면서 사업 구상과 준비, 실행, 운영까지 담은 책을 쓰게 됐어요. 

 

이제는 독서와 술이 어울린다는 걸 책바에서 알게 된 분들도 많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책과 술의 문화가 자리 잡은 데는 책바가 한몫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이제는 롤 모델이 없는 업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시대가 온 것 같아요. 모두가 낮에 일했다면 요즘은 저처럼 밤에 일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매력과 취향으로 새롭게 시도해 보는 거죠. 꽤 오래된 책인데, 다른 개척자의 시선은 어땠을까 궁금해하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꾸준히 읽어주세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서점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위스키가 궁금해서 스코틀랜드에도 다녀왔죠. 실행력이 엄청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런가요(웃음)? 두 나라 모두 책바를 구상할 때 다녀온 건데, 일본은 주제와 판형이 다양한 잡지가 출간되고 서점도 많아요.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다채로운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술도 많고요. 서양 문물을 일찍 접해서 위스키를 오래전부터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결합된 덕분인지 술집에 가면 구석에서 책 읽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있어요. 어디서든 좋아하는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는 분위기와 문화가 매력적이었죠.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로 떠났는데요. 어떻게 하면 보통 술집들과 비교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저는 회사원이었으니까 술에 대한 경력이 부족하잖아요. 지식이 부족하다면 경험으로 채워보자는 마음으로, 위스키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에 가서 증류소 여러 곳을 돌아다녔어요. 관찰하고 배우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경험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스키 성지 여행》 중에서

거기가 아일러섬이였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위스키 성지 여행》의 배경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휴대폰에서 지도 앱을 켠다.) 지도로 보면 좀더 이해하기 쉬운데, 영국 윗부분이 스코틀랜드인데, 그중에서 아일러섬은 여기에 있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강화도 정도라고 할까요? 제주도의 3분의 1 크기인데 인구는 3천 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해요. 사람들 대부분이 관광업과 위스키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고요. 가는 방법이 많지 않아서 작은 비행기에 승객 서른 명 정도 태워 가는데,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기류 때문에 엄청 흔들려요. 무사히 랜딩하면 그제야 모두 박수를 쳐요(웃음). 《위스키 성지 여행》을 보면 하루키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증류소를 여러 곳 다니면서 이곳만의 음주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냈어요. 

 

하루키의 묘사를 직접 경험해 보니 어땠어요? 

자전거로 이동하면서 증류소들을 둘러보는데, 바다 냄새와 오크통의 향이 섞이는 게 기분 좋았어요. 아일러섬의 위스키는 이탄을 태워서 몰트를 건조시키며 훈연되도록 만든 거예요. 이탄은 그 지역에서 난 식물들이 퇴적된 거니까 대서양의 짠 내를 머금고 있죠. 

 

듣고 보니 이 책이 나중에는 자신을 위한 기록도 될 것 같아요. 

맞아요. 어떤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는 건 공식적인 기록이잖아요. 언젠가 제 아이가 생겼는데, “아빠는 왜 밤에 이런 일을 해?”라고 물어볼지도 몰라요. 아빠가 어떤 고민을 거쳐서 이런 길을 걸어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글을 쓰면 금세 지나가 버린 시간과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도 되고요. 그런 의미로 나중에 책을 몇 권 더 내고 싶어요. 

 

책바를 운영한 지 벌써 8년째예요. 처음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달라진 점도 있어요? 

음, 뭐가 변했을까요? (잠시 고민한다.) 근무 시간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 같네요. 책바 오픈하고 3년 정도는 주 6일 문을 열었어요. 혼자 일하는데 평일은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 반까지, 금요일과 토요일은 새벽 3시까지 일했던 거죠. 하루 쉬는 일요일은 ‘트레바리’에서 3년 동안 클럽장을 맡아서 진행했고, 각종 강연이나 클래스 기획이 들어오면 전부 참여했어요. 말 그대로 안 쉰 거예요. 그런데 어느 토요일인가, 새벽  4시에 퇴근해서 텅 빈 도로를 운전하는데 저도 모르게 졸음이 밀려와서 큰 사고가 날 뻔했어요. 순간, ‘이렇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를 위한 생활 패턴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근무 시간을 줄였어요. 

 

아찔한 순간이네요. 그때 쉬는 날은 기분이 어땠어요? 어제도 일했고, 내일도 일해야 하는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일주일 내내 하나도 안 힘들고 행복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안 쉬고 덜 자도 괜찮은 것 같았어요. 물론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지만 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책바가 자리 잡기도 했고요. 망원으로 이전하면서는 직원도 한 명 들어왔어요. 

 

변하지 않는 걸 꼽아본다면 역시 분위기겠죠? 혼자라도 편하게 올 수 있는 분위기요. 

네, 맞아요. 와주시는 분들을 생각해 보면 꼭 책만 읽지는 않으세요. 술 한 모금씩 마시면서 사색을 하거나 일기를 쓰기도 하고, 사무실에서는 도저히 안 풀리던 작업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마감을 치르는 중인 에디터나 작가들도 오니까요. 저는 술이 사람을 자신의 시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여기 오시는 건 만취하고 싶다기보다 같은 술이라도 누군가가 정성 들여 만들어준, 맛있는 술을 즐기러 오시는 거죠. 그러니까 혼자라도 문제없고요. 혼자 오시는 손님들은 바 테이블을 자주 이용하세요.

인성 씨는 혼술을 즐긴다고 알고 있어요. 

저는 혼술이라는 문화가 정착되기 전부터 혼자 술 마시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도 레벨이 있던데, 에디터님은 해보신 적 있어요?

 

음, 집에서 맥주 마시는 정도예요. 

그럼 레벨 제로예요. 아니 마이너스 1. 집 안에서 마시는 건 명함도 못 내밀어요. 

 

밖에서 마시는 게 아니라고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는 거예요? 너무하네요(웃음). 

어쩔 수 없어요(웃음). 적어도 편의점, 순댓국밥집에서 마셔야 혼술이죠. 저는 단체 손님으로 가득한 삼겹살집에서 혼자 마신 적도 있어요. 사람들과 모여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걸 피하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독립적인 공간에서 내 페이스대로 술을 즐기는 매력이 있어요. 책바를 운영하면서 저랑 비슷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돼요. 

 

혼자만의 시간에 몰입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었다는 의미도 되겠네요.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어요? 

사실 정말 많아요. 모두 말할 수는 없으니 최근을 위주로 기억을 더듬어 볼게요. 책바에는 남성분들도 오시긴 하지만 여성분들이 많은 편이에요. 하루는 근육이 우람한 남성분이 오셨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자주 찾진 않으셔서 뭔가 더 눈길이 갔어요. 그런데 그분이 다음번에 또 찾아와 주신 거예요. 마감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 그분만 남아 계셨는데, 제가 너무 궁금해서 슬쩍 말을 걸어봤어요. “오늘도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무슨 일 하세요?”라고요. 

 

정말 궁금했나 봐요. 

저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데 몸이 좋으시니까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트레이너를 하신대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트레이너라는 직업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한 직업이라, 쉬는 날 없이 일주일 내내 타인을 위해서 시간을 쏟는대요. 그래서 퇴근하고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유일하게 자기를 위한 때라고요. 읽고 싶은 책을 보고 술 한잔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기쁘고 감사했어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일 것 같아요. 손님을 대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바텐더의 불문율’이라는 말이 있는데, 술을 만드는 사람은 손님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함구한다는 매너예요. 그런 건 아주 당연하고, 일하면서 손님들 이야기를 엿듣는 경우는 일절 없어요. 자연스레 들려도 흘려버리려고 해요. 제가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면 오신 분들에게 편안한 공간이 되어주질 못하니까요. 단골손님께도 오시면 안부 묻는 정도, 그 이상의 특별함은 누군가에게 소외당하는 느낌을 줄지도 몰라요. 

 

이번 호에서는 잠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보는데요. 저는 ‘잠’ 하면 책과 술이 떠오르더라고요. 책을 봐도 잠이 오고, 술을 마셔도 잠이 오니까요(웃음). 그 두 가지가 전부 책바에 있어요. 인성 씨는 책과 술이 잠과 이어지나요? 

사실 저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5분 이내에 잠들거든요. 밤에 일하다 보니 새벽에 자고 일찍 일어났다가, 때때로 낮잠을 자는 식으로 생활 패턴을 유지해요. 근데 낮잠을 꼭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오면 책을 꺼내 들어요. 읽어도 도무지 의미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책 있잖아요. 읽은 문장을 계속 보게 만드는 책들. 그런 걸 읽으면서 잠을 청하기도 해요. 하지만 책과 술을 함께 즐기는 건 저한테 잠을 자기 위함은 아닌 것 같아요. 술도 기분 좋은 정도로만 마시거든요. 

 

요즘에도 책과 술을 함께 즐기곤 하세요? 

손님들에게 그런 시간을 제공하는 역할이지만, 일하면서부터는 자주 그러진 못해요. 손님이 드문 날에 하거나 오늘처럼 쉬는 날에 가끔 책 한 권 들고 나서서 밥 먹고 근처 술집에 가는 정도죠. 오늘 들고 온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에요. 좋아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곧 나온다고 해서, 그걸 보기 전에 가볍게 읽으려고 골랐어요. 직업병 중 하나인데, 관심 있는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빠르게 읽어야 해요. 그 안에 어떤 술이 등장하는지 찾아내고 메뉴나 콘텐츠로 만들어서 알려야 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책바의 메뉴가 특별하죠. 술 카테고리를 책 장르로 나눴어요. 

술이 가진 도수라는 특징을 바탕으로 어떤 장르와 잘 어울릴지 고민해 본 결과예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칵테일은 짧은 글 한 편 읽을 만하니 시, 도수가 적당한 술은 가벼운 책 한 권도 무리 없으니 에세이, 도수가 낮은 술은 소설 그리고 책바만의 칵테일은 독립출판이라고 붙여뒀어요. 이외에 논알코올 메뉴는 만화, 봄과 여름에 어울리는 칵테일은 계간지라고 부르고요. 아, 곁들일 만한 안주는 별책부록이라고 해뒀네요. 메뉴판에 없는 칵테일이라도 만들어드릴 수 있으니 편히 물어보셔도 좋아요. 

 

이곳의 매력이자 유머네요. 위스키와 칵테일 종류가 많은 것 같은데, 인성 씨의 취향 때문인가요? 

그런가 봐요. 어림잡아 위스키는 백 가지 넘게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어서 어떤 행위에 몰두할 때 곁들이기에 알맞거든요. 그리고 칵테일은 참 재미있는 술이에요. 손맛이라고들 하는데, 같은 재료를 같은 비율로 넣어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요. 진토닉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진을 쓰는지 가니쉬로 레몬, 라임, 다양한 허브 중에 무엇을 넣는지에 따라 수백 가지 레시피가 있으니까요. 또 칵테일은 다양한 맛과 도수를 만들어낼 수 있어서, 취향껏 즐기기 좋은 술 같아요. 문학 속에도 칵테일이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메뉴에서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게 ‘책 속의 그 술’이에요. 하루키의 신작을 빠르게 읽으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잖아요. 

사람마다 소설 읽는 법이 다양하죠. 누구는 주인공 처지에서 공감해 보고, 누구는 책에 나온 장소를 직접 가보기도 하고요. 저는 주인공이 먹고 마시는 음식과 술이 그렇게 궁금하더라고요(웃음). 이따가 《이방인》을 읽을 건데 알베르 카뮈가 압생트를 무척 좋아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로 이야기가 시작되니, 술이 등장할지도 모르죠. 이렇게 책을 읽다가 술을 발견하면 다 기록해 두고, 인스타그램에서 손님들 제보도 받아요.

“당신은 지금 위험한 짓을 하는 거예요. 이런 칼바도스를 마시고 나면, 다른 건 안 마시고 싶어질 거예요.”
“하지만 언제나 이걸 못 잊을 거예요.”
“좋지. 그럼 당신은 낭만주의자가 되는 거야.
칼바도스ᅳ낭만주의자.”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중에서

술 이야기를 나누니 알딸딸해지는 기분이네요. 가을밤과 어울릴 만한 걸 추천해 주실래요? 

좋아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칼바도스’예요. 사과로 만든 브랜디인데요. 한번 꺼내볼 테니 향을 맡아보실래요? 

 

(잠시 향을 맡아본다.) 굉장히 진한데 달콤해요. 

그렇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간절기부터 잘 어울려요. 쌀쌀해질수록 과일의 단 향이 세지는 느낌도 들고요. 칼바도스가 《개선문》이라는 고전 소설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술로 등장해요. 사람들은 가을에 사랑을 찾으니까 단번에 이게 떠올랐어요. 주의할 점은 증류주라 도수가 높아요. 낮은 도수의 술은 나중에 책바로 오시면 추천 해드릴게요. 

 

꼭 한번 들를게요. 책바에서 열리는 글과 관련된 이벤트들이 흥미롭던데요. 

먼저 ‘빌보드 차트’는 주제를 하나 정해서 각자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보는 주기적인 이벤트예요. 우리가 아는 예술가들은 술의 힘을 빌려서 창작의 기운을 높이고 감수성을 펼쳤잖아요. 우리 같은 일반인도 술을 마시고 기분과 감성이 고양되면 침잠하던 생각을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내밀한 표현을 펼쳐 보일 수 있는 하나의 광장을 만든 거예요. 손바닥만 한 포스트잇에 문장을 쓴 뒤 붙여두시면 당선된 분들에게 술 한 잔을 선물로 드려요. 

 

‘연희동’, ‘사진을 보다가’, ‘봄’, ‘새로운 시작’ 등 주제가 다채롭던데요? 

사람들의 다양한 표현을 끌어내줄 수 있는 주제로 선택해요. 80회가 다 되어가다 보니 제 마음속에 있던 주제들이 슬슬 고갈되는데요(웃음). 그럴 땐 손님들에게 어떤 주제를 하면 좋을지 물어보기도 해요. 77회 주제가 ‘초심’이었거든요. 망원동으로 이사 오고 난 후 첫 주제였는데, 단골손님께서 추천해 주셨어요. 마음에 쏙 들었죠. 

 

빌보드 차트에서 나아간 게 《우리가 술을 마시며 쓴 글》이라는 책이에요. 

맞아요. 당선작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생각보다 인상 깊은 글이 많았고 오시는 분들 간의 연결도 되면서 반응도 좋다 보니까 그냥 지나가기 아쉬웠어요. 아카이빙의 의미로 1년마다 책으로 묶어보기로 했죠. 여기서 더 나아가게 된 게 ‘책바 문학상’인데요. 손님들이 글을 무척 잘 쓰시니까 상을 만들어 보자 싶더라고요. 명예가 무거운 기존 문학상들과 달리 부상으로 싱글몰트 위스키나 돔페리뇽 같은 샴페인 한 병 드리는 우리만의 문학상이요.

 

글을 쓰고 술을 선물하는 건 책바만이 할 수 있는 거네요. 문학상에는 어떤 장르들이 투고되는 거예요? 

에세이와 소설로 나눠서 전부 무기명으로 받아요. 수상작과 관련해서 특별한 일이 있었는데요. 한 글쓴이가 에세이와 소설에 모두 당선된 거예요. 심사를 보던 저와 문학 관련 지인들이 글의 뉘앙스가 비슷하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 이유만으로 어느 하나를 떨어뜨리기가 참 아쉬웠어요. 알고 보니 한 분이 맞았고 지금 그분은 독립 출판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세요. 

 

여기에도 판매용부터 비치용까지 책이 무척 많은데요. 기준이 궁금해요. 

아무래도 문학과 관련된 책이 많아요. 은유가 겹겹이 더해진 시, 누군가의 내밀한 감정 묘사를 살필 수 있는 소설과 에세이가 술과 어울리는 것 같아요. 건축, 예술 분야의 책들은 사람의 머리보다 마음을 자극하기도 하고요. 잡지도 있어요. 

 

인성 씨가 좋아하는 장르나 작가가 있는지 궁금해져요. 앞서 하루키가 자주 등장하기도 했죠(웃음). 

맞아요. 다만 저는 장르나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세 가지 기준에 맞는 책을 좋아해요. 첫째는 편견을 깨주고 시야를 열어주는 책이에요. 둘째는 문장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기분이 드는 책이고요. 셋째는 책 속 세상으로 끊임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 기준들을 전부 만족시킨 작가는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김연수, 장강명 작가를 좋아해요. 어릴 때는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자주 읽었고요.

근래에 읽은 책들 중 마음에 들었던 걸 꼽아본다면요? 

사실 이런 질문은 너무 잔인해요(웃음). 좋아하는 책이 많을뿐더러 읽은 책이 저를 설명하거나 규정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하거든요. 음, 그래도 하나 떠올려 보자면 김민식의 《나무의 시간》이에요. 김민식 대표님은 목공소를 운영하시는 나무 전문가세요. 나무 하나에 얽힌 역사부터 인문, 예술을 아울러 꼼꼼히 살펴보는데, 제가 죽기 전에 단 한 권의 책을 써야 한다면 이런 책을 쓰고 싶을 정도로 인상 깊게 읽었어요. 

 

지금까지 들어보면 인성 씨의 일상이 책바와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일과가 어떤가요? 

되도록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편인데요. 마감 후에 새벽 2시에 퇴근하면 잠은 3시 전에 자요. 일어나는 건 9시에서 10시 사이고요. 늦게 자니까 늦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분들도 계신데 그렇게 오래 자진 않아요. 아침 먹은 뒤엔 일주일에 세 번 요가를 하고, 점심 먹고 나선 졸리니까 낮잠을 30분 정도 자요. 그때부터는 말씀처럼 책바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죠.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보고 싶었던 전시를 보거나 책을 읽어요. 출근은 6시 정도고요. 

 

낮잠을 딱 30분만 주무시는 거예요? 저는 두세 시간 잘 때도 있거든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이 수면 패턴도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오래 잘수록 오히려 개운하지 않고 몸이 무거워서 낮잠은 가볍게 자요. 대신 밤잠은 어떻게든 여섯 시간 이상 자려고 하죠. 이외에는 하루 세끼를 꼭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는데요. 식사에도 밥처럼 탄수화물이 필수인 사람이에요. 아침은 그릭 요거트에 그레놀라와 과일을 넣고 올리브 오일을 둘러서 먹고요. 

 

잠과 식사, 운동까지 일상을 유지하는 규칙이 뚜렷한 분이네요. 

생각해 보면 회사 다닐 때도 그랬더라고요. 그때는 새벽형 인간이었는데, 출근이 9시까지라면 암묵적으로 다들 8시까지 와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주 52시간 근무 같은 규정도 없던 때라 일을 많이 했고, 저녁에는 술을 좋아하는 상사 때문에 회식이 자주 있었거든요. 근데 저는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운동을 해야 하는데, 갑작스레 잡히는 회식으로 저녁에 운동을 가지 못하는 날이 많은 거예요. 결국 아침에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5시 반에 일어나서 7시에 회사에 도착하고, 8시까지 운동한 후에 샤워하고 아침까지 먹고 일했어요. 지금은 또 완전히 다른 생활 패턴이지만 무리 없이 잘 적응한 걸 보면, 일상에서 균형을 찾고 지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봐요. 그래야 컨디션이나 기분이 뾰족해지지 않고 유지되고요. 

 

그럼 휴식 시간에는 뭘 하세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절대 일하지 않고 쉬려고 노력하는 데 잘 지켜지진 않아요. 자꾸 뇌를 쓰게 되더라고요(웃음). 보통 일할 땐 스트레스 받는다고들 하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하기 싫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가진 능력치 이상의 임무여서 노력을 해서라도 해내고 싶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성취감으로 바꾸고 나만이 해낼 수 있는 걸 발견하는 게 뿌듯해요. 

 

조금 늦은 시간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성 씨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언제예요? 

요즘 가장 즐거울 땐 자전거를 타는 퇴근길이요. 올해 여름이 너무 더웠잖아요. 난 이렇게 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구나 깨달았거든요. 날 좋은 봄이랑 가을에는 보통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데요. 이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한 날이 슬금슬금 오더라고요. 새벽 2시쯤 기온이 20도 정도 되는데, 그 온도가 사람이 가장 행복한 기온 같아요. 바람도 선선하고 끈적이지도 않고 고요한 거리를 그저 달리면 되는 때. 

 

이제 긴 대화의 마지막 질문을 건넬게요. 오늘은 자기 전 어떤 생각을 할까요? 

오늘도 수고 많았다. 졸립다, 자자!

인터뷰를 마친 뒤 주인장은 작고 동그란 잔에 포트와인을 내어줬다. 향과 맛을 차분히 설명하는 주인장과 재촉 없이 온화한 얼굴을 띤 이 공간이 무척 닮았다고, 와인을 야금야금 마시며 생각했다. 마감을 마친 에디터들이 고된 얼굴로 찾아온다던데, 이번에는 나도 슬쩍 끼어들고 싶어진다. 어디서 왔고 어떤 이름을 가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술과 책을 앞에 두고 똑같이 행복해하는 이곳. 그날에 대한 부푼 기대감 때문인지, 몇 모금의 와인 덕분인지 오늘 하루 잠이 잘 올 것만 같은 예감이다.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