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태도

김은주 — 유리 편집

오랜 시간 에디터와 편집자로 일하며 책을 꾸려온 김은주 작가는 이제 말이나 글이 아닌 유리를 편집한다. 유리와 유리 사이를 읽고, 유리에서 생명을 끌어내고, 유리를 매달거나 눕히면서 유리의 태도를 관찰한다. 작품들 곳곳에 사연이 숨어 있어 자꾸 귀 기울이게 되는 그의 유리는, 감히 말해보건대 사랑스럽다. 웅장하고 거대한 예술 세계에서 작고 귀여운 걸 마주하며 안심하게 되는 건 어떤 연유일까.

만나서 반가워요. 

머리에 모빌이 닿는데 괜찮으세요? 모빌은 튼튼해서 괜찮은데, 불편하시면 조금 앞으로 옮기셔도 돼요. 

 

아니에요. 유리끼리 부딪는 소리가 너무 예쁜걸요(웃음). 새해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수많은 토끼를 구우면서 보냈어요. 2019년부터 흑토끼로 짬짬이 작업해 왔는데 마침 올해가 흑토끼의 해더라고요. 검은 유리 파우더로 토끼를 그리듯 작업하는 건데 회화 느낌을 좋아해서 자주 시도하고 있어요. 유리는 회화 느낌을 내긴 힘든 재료잖아요. 근데 유리 파우더를 뿌리니까 수채화 분위기에 번지는 듯한 느낌도 있어서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 작은 유리방 안에도 토끼가 곳곳에 숨어 있어요. 진짜 토끼와 함께 보내는 해네요(웃음). 

 

작은 유리방이라는 말이 참 귀여워요. 이 공간은 작업실인 거죠? 

네. 제 첫 작업실이에요. 그 이전에는 다른 분들 작업실에서 얹혀 지내듯 작업해 왔는데, 집 근처에 작업실을 만드니 생활이 훨씬 좋아졌어요. 투룸을 구해서 하나는 작업실로, 다른 하나는 유리방으로 만들었어요. 종종 오픈도 해보려고 해요. 아주 자그마한, 귀여운 전시를 꾸리는 거죠.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하는 정제된 전시보다는… 사랑스럽고 작은 전시. 작업실을 구할 때 살림살이나 가구도 좀 있고, 사람 온기도 배어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제 유리 작업이 누군가의 집에 놓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 작은 전시장이 마음에 쏙 드는데, 왜 우리는 전시라고 하면 자연스레 조용한 갤러리나 웅장한 미술관부터 떠올리는 걸까요? 

아트라는 게 생활과는 다른, 한 차원 위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일까요? 갤러리는 보통 일상의 소음을 제거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저는 물리적으로 잡음을 다 벗겨내고 작품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상의 나와는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경험하는 거니까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름다움일 거예요. 그 아름다움이란 꼭 잘 정제된 반짝거리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닌데요. 음, 이를테면 현대미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게 아니라 어떤 충격이나 질문을 던지는 식이잖아요. 그러면 보기 싫은 현실과 마주할 때도 있는데, 그걸 감상하는 데서도 아름다움이 생겨난다고 봐요. 저는 제 작업을 좀더 편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 공간이 만족스러워요. 여기서라면 제 작업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거든요. 작업을 계속해 나가다 보니 무엇보다 자기만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번 주말에 오픈 스튜디오를 앞두고 있죠? 

네. 작년 12월에 처음 오픈해 봤는데 청소할 게 진짜 많더라고요. 12월에 한 번 정리하고, 오늘 손님맞이를 위해 또 청소해서 이 정도지, 정말 어수선했어요. 평소에는 유리 조각이 완전히 저를 감싸고 있거든요. 작업방에서 실컷 작업하다가 유리방으로 건너와 이 자리에 앉아 창밖 보는 걸 좋아하는데… 저기 나무 보이시나요? 

 

겨울이라 잎이 없네요. 

제가 좋아하는 나무예요. 사계절 내내 여기 앉아서 보곤 하는데, 저 감나무를 볼 때면 쉬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방에 뭔가를 놓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언어가 무언가를 지배할 때가 많으니까 갤러리라는 말은 좀 벅차고, 작은 유리방이라 부르고 싶었죠. 

 

여기 놓인 유리 작품들을 보면 기분이 조금씩 귀여워져요. 

제 작업을 보고 귀엽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전 또 그런 걸 좋아해요(웃음). 사실 그런 표현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왜요, 예술도 귀여울 수 있죠. 

음… 맞아요. 귀엽다는 말이 나오는 예술, 사랑스럽다는 말이 나오는 전시를 해나가고 싶어요. 

 

작업실이 반지하인데도 해가 잘 드네요. 유리가 빛을 만나 한층 영롱해 보여요. 

아침 8시 30분부터 11시까지 해가 예쁘게 들어요. 계절에 따라 빛 드는 각도가 다른데, 겨울엔 좀 깊숙하게 들어오는 편이에요. 유리라는 물성은 빛이 완성해 주는 부분이 있어서 지난 오픈 스튜디오가 참 좋았어요.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만들어서 선보였는데, 빛이 유난히 예쁘게 들어서 방문해 주신 분들이 유리 물성을 다각도로 감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여기 있는 작품들은 제가 알던 유리랑은 조금 달라요. 따듯하달까요. 

왜 그런 느낌이 나는지는 저도 설명할 길이 없는데, 아마 취향이 반영되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가 그러해서 만들 때도 저절로 그런 느낌이 나는 게 아닐까요? 스스로 따듯한 작업을 한다고 말하기 멋쩍은데 누군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참 좋네요(웃음).

어느 인터뷰에서 나무나 섬유처럼 따듯한 소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셨죠. 유리는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처음에 손이 잘 안 갔다고요. 말씀하신 그 따듯함이 어떤 느낌이에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질감이 있는 것? 섬유로 말하자면 보풀 같은 느낌, 나무로 이야기하자면 거친 나뭇결이 살아 있는, 샌딩되지 않은 상태의 나무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유리는 아무래도 보편적인 이미지가 차갑고 매끈한 느낌이잖아요. 대놓고 반짝이는 소재라서 저랑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꼭 작업 재료가 아니더라도 너무 정제되고 깨끗한 건 좋아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새 옷을 사면 빨아서 일부러 조금 헐게 만들어서 입을 정도로(웃음). 

 

쭉 작가로 지내오셨을 것 같은데, 사실 긴 시간 책을 만들면서 살아오셨죠.

에디터와 편집자로 25년 넘게 일해왔어요. 하는 일이 바뀌면서 변한 게 참 많아요. 우선 시간을 쓰는 게 그래요. 회사에 다닐 땐 일 위주로 시간을 써야 했는데, 지금은 거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 여유가 많아졌어요. 시간 쓰는 법이 달라져서 그런지 여기저기 눈길도 많이 가고,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생겼죠. 옛날엔 걷기 바빴던 길인데 지금은 쪼그리고 앉아 작은 꽃이나 화단을 보기도 하고요. 투두리스트를 만들어서 체크하는 대신 ‘오늘 이거 만들까? 몇 개나 만들어 볼까?’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못 하면 내일의 나에게 미룰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웃음). 

 

마감 있는 삶에서 벗어난 거네요. 

평생 마감 있는 삶을 살아왔지만 사실 마감이 매번 힘들었어요. 물론 마감 덕분에 성과를 내기도 했고, 에디터라는 직무는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서 좋았는데요. 전 아주 느슨한 사람인데 일정에 맞추려고 하니까 몸도 마음도 지치더라고요. 잡지 마감이 점점 힘들어져서 단행본 편집자가 되었고, 책을 만들며 지내오다 자연스럽게 다음 스텝으로 유리 작업을 시작했어요. 우연히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직업이 될 줄은 몰랐어요. 저는 뭐든 느리고 성격도 물러서 주변 사람들이 다 걱정하는 유형이었거든요. “나 잘할 수 있어!” 하고 말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저 또한 제 인생을 걱정했죠. 앞길을 생각하면 막막하더라고요. 

 

엄청 부지런하신 줄 알았어요. 에디터, 편집자로 일하실 때도 계속 뭔가를 배우셨다고 들었거든요. “다른 사람 책을 내지 말고, 너의 취미 생활 변천사를 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취미가 많으셨다던데. 

이상하게 작업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컸어요. 그래서 작가 인터뷰를 유독 좋아했죠. 꼭 예술 분야가 아니더라도, 목공소나 철물점처럼 뭔가를 만들어 내는 공간이나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 의식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런 사람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요. 취미는 회사 생활이 힘드니까 숨구멍으로 찾은 거였어요. 정말… 살려고(웃음). 취미 생활을 해나가면서 손을 많이 쓰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 그걸 알려준 건 나무였죠. 저는 나무가 저랑 굉장히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나무가 생명이 있는 재료라는 게 좋았어요. 에디터 직업병인지, 뭔가에 이야기를 덧대는 걸 좋아하는데요. 나무에도 인간적인 의미를 덧붙이다 보니 재료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샌딩을 100방, 200방, 400방, 600방, 800방… 천몇 방까지 가면 사람 살결보다도 부드러워지는데, 그 순간을 위해 무념무상으로 샌딩하는 시간을 좋아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너무 좋다….’ 생각한 것 같아요. 작은 보드를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선물도 많이 했죠. 그러다 스툴에 도전하면서 느꼈어요. ‘아, 오래는 못 하겠다.’

왜요? 

스툴은 구조적이잖아요. 1밀리 차이로 너무 많은 게 틀어지더라고요. 저는 치밀한 사람이 아니라 계산이 잘 안 됐어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요. 한 단계 더 나아갈 동력이 있어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데 주춤거리게 되더라고요. 

 

유리 작업에는 계산할 일이 없나요? 

온도 조절이 좀 세밀한 편인데, 제 작업엔 온도가 절대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적절한 온도를 찾기 위해 매번 실험하는 편이죠. 유리는 과열되면 투명성을 잃어요. 그걸 ‘실투’라고 하는데요. 보통 사람들이 유리가 불투명해지면 실패한 거라고 여기지만 저는 결과물에 따라 그 과열된 느낌도 좋더라고요. 투명성을 잃은 반투명 상태. 유리 작업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작업을 누가 평가하는 것도 아니어서 매번 하는 실험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마 전공한 분들이 보면 제 작업이 황당해 보일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전통적인 유리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아요. 보통은 유리의 투명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저는 그걸 깨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반투명함에서 귀여운 느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유리를 배웠다가 잘 맞지 않아서 그만둔 걸로 알아요. 그러다가 부모님이 편찮으시고, 개인적으로 좀 힘들었을 때 ‘유리는 깨진다’는 사실에 위로받아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요. 

그 당시엔 모든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까 유리 공예가 김기라 교수님이 작업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가르쳐 주신다고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죠. 근데 그땐 무게감에 짓눌려 푹 가라앉은 상태여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어요. 그때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나도 힘들게 지낸 시절이 있었는데 작업을 통해 다시 나를 찾았어요.” 처음엔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이 지나니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어요. 작업하다 보면 완벽하게 몰입하는 순간이 와요. 그럼 유리와 나, 딱 둘만 남아요. 걱정은 보통 과거나 미래와 연관되어 있잖아요. 오롯이 지금에만 집중하니 걱정이나 상념 같은 게 서서히 사라지더라고요. 현재에 집중하는 게 나를 지키는 거란 걸 유리 작업하면서 알게 됐어요. 아마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어떤 순간이 특히 좋아요? 

가마에서 구워져 나온 유리를 볼 때요. ‘어떻게 이렇게 따듯해지지?’라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 유리가 정말 좋아졌어요.

유리 편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요. 유리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색을 입히고 그림을 그리면서 이야기를 덧대는 것 같아요. 그게 편집처럼 보이고요. 

저는 색유리를 겹치거나 섞어서 작업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작업을 하면서 편집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굽기 전의 색유리는 색지랑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가마에서 어떤 온도에 이르면 서로 스며들거든요. 그게 정말 마법 같아요. 이게 연금술인가, 싶을 정도로요. 색을 쓰기 시작하면서 유리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정말 미친 듯이 색을 조합하면서 지냈죠. 

 

유리 작업은 상상이 잘 안 돼요. 어떻게 작업하는지 들어볼 수 있나요? 

유리라고 하면 대부분 “불어요?”라고 물으세요. 영화나 매체에서 블로잉 기법을 자주 보여주니까요. 저는 불어서 하는 기법은 사용하지 않고, 공예용 판유리를 잘라서 사용해요. 잘라서 만들고 가마 안에 넣는 거죠. 그러다 보니 평면 작업이 많아요. 유리 자르는 거 보실래요? 

 

(작업방에 들어서며) 낮과 밤처럼 옆방이랑은 분위기가 정말 달라요. 

여기가 훨씬 지저분하죠(웃음). 유리는 ‘자른다’기 보다는 ‘쪼갠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유리를 쪼갤 때는 유리칼과 오일 그리고 플라이어가 필요해요. 이렇게 유리칼에 오일을 묻혀 자를 부분에 길을 내듯이 슬쩍 선을 한 번 그어주고 다시 힘을 주면 자를 흔적이 남아요. 그리고 이 펜치같이 생긴 플라이어를 그 흔적 중앙에 대고 누르면 ‘쩍’ 하고 유리가 잘라져요. 그래서 곡선이나 타원처럼 자유로운 도형을 자르기가 쉽지는 않아요. 

 

쪼갠 유리를 가마에 넣으면 어떻게 변해요? 

젤리 같아져요. 흘러내리지 않고 말랑말랑해지는 지점이 있는데, 그 온도일 때 따듯함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한 번 구우면 색도 조금 변하고요. 나이가 들면 뇌가 익숙한 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설렐 일이 잘 없거든요. 근데 가마를 여는 날은 엄청 설레요. 가마에 넣기 전에 새로운 걸 꼭 하나씩 만들어 넣고 있는데, 매번 가마 열 때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요. 오늘이 바로 가마 여는 날이네요(웃음).

설레는 상태겠군요! 유리 작업에는 늘 이야기가 함께인 것 같아요. 저는 ‘검은 새’ 작품에 붙여 쓰신 글이 유독 좋았어요.

“어릴 때 연필 깎는 걸 좋아해서 친구들 것까지 일부러 깎아주는 아이였는데, 그때 연필심을 사각사각 깎아서 모아놓은 검은 연필 가루가 참 좋았어요. 고운 재 같기도 하고 검은 모래 같기도 해서요. 검은 새는 화사한 다른 돌 위의 새들보다 유난히 애정이 가는데 아마도 연필 가루가 곱게 내려앉은 듯한 느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이것도 직업병이에요(웃음). 편집자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거의 생활이 됐어요. 저는 처음 유리를 배울 때, 학생들이 쓰고 남은 유리들로 작업을 하곤 했어요. 남은 것들을 모아 제 것으로 만드는 게 꼭 편집 같다고 생각했죠. 편집자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저라는 필터를 통해 재구성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같은 이야기여도 어떤 편집자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다른 시각이 나오거든요. 유리 역시 제 감각, 선택, 취향이 담긴다는 점에서 편집 같다고 생각해요. 

 

유리와 다른 재료를 섞어 작업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선 편집일 수 있겠네요. 재료를 섞는 작업은 모빌을 만들 때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평면인 유리 작품에 입체감을 불어넣고자 공중에 띄우는 방법을 생각하셨다고요. 

모빌 작업 이후로 재료 섞는 걸 더 좋아하게 됐어요. 재작년인가, 요령 없이 하루 열 시간 이상을 작업만 하고 지내다 보니 어깨를 완전히 못 쓰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유리를 투과하던 빛이 눈에 띄었고, 모빌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 작업이 워낙 평면 형태다 보니 공중에 띄우면 좀더 입체감을 갖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여러 가지 재료로 매달아 봤는데 금속선이 가장 잘 맞더라고요. 탄성이 있다는 것도 좋았죠. 한층 풍성한 공간감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왜 유리와 빛을 연결하고 싶었어요? 

빛은 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줘요. 왜, 그림자가 없으면 귀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빛이 유리를 통과하면 그림자가 생겨요. 그런 모든 게 생명이 생기는 과정처럼 보였어요. 

 

유리가 업이 된 데는 갤러리 우물에서 한 첫 전시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맞아요. 회사를 그만두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유리 작업만 하며 지내고 있었어요. 그 당시 재미있는 게 오직 유리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작업이 꽤 쌓였는데, 어느 날 갤러리 우물 대표님이 “막연하게 작업만 하지 마시고 내년 3월에 전시하실래요?” 하고 제안해 주시더라고요. ‘날 뭘 믿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럴까요?” 하면서 시작된 전시였어요. 비전공자에 경력도 없는 제가 전시라니, 아는 것도 없으면서 덜컥 하겠다고 하다니(웃음). 근데, 한 번 하고 나니까 계속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 전시니까 응원 차원에서 지인들이 제 작품을 많이 사주었거든요. 근데 그게 단순히 기념품으로 남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믿고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제 유리 작업이 소장하고 싶은 물건이 되기를 바랐어요. ‘계속해 보자.’라는 단순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전시가 일종의 촉발제가 된 거네요. 

동기 유발이 된 거죠. 전시는 참 특별한 기회예요. 주제에 맞춰 이것저것 해보고, 흐름과 강약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니까요. 이를테면 토끼가 주제인 전시라면 토끼로 수많은 것에 도전해 볼 수 있어요. 이 토끼, 저 토끼, 색깔도 형태도 다르게 마음껏 해볼 수 있죠. 전시라는 게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자리다 보니 부담도 많이 되는데요. 앞으로도 제안이 오면 제 깜냥이 어떻든 무조건 한다고 할 거예요. 하다 보면 생각이나 작업이 좀더 확장되고 ‘이런 거 만들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법에도 점점 깊이가 생기거든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술도 늘고요. 

 

작년에 《AROUND》도 10년이 되어서 사옥에서 기념할 만한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기획까지는 재미있었는데 그걸 공간에 풀어놓는 게 책이랑은 달라서 좀 헤매게 되더라고요

잘 알죠(웃음). 텍스트는 사이사이 맥락을 생각하면 되는데 이건 실물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설치가 가장 힘들어요. 전시할 때 가장 당황한 지점이 설치였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어서요. 근데 보여준다는 건 결국 설치가 다라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도 제일 어렵고 고민을 많이 하는 게 설치예요. 그래도 요즘은 작은 유리방에서 아무 때나 연습을 해볼 수 있어서 감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요.

계속 눈길이 가는 작품이 있는데, 저 작은 화분에 꽂아둔 유리 작품은… 열매인가요? 

맞아요. 실제 화분에 꽂고 자갈로 덮어두었어요. 요즘 식물을 모티프로 작업을 하나씩 해보고 있어요. 원래 저는 자연을 좋아하거나 식물을 관찰하는 편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다 이 동네에 오고 나서 관심 가지는 분야가 좀 달라졌어요. 처음 눈여겨본 식물이 저 담벼락 아래 있는 화단인데요. 지금은 눈이 쌓여서 식물이 안 보이지만 봄, 여름, 가을에는 담벼락 아래 작은 식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요. 이름표도 하나씩 꽂혀 있죠. 누군가의 작은 보살핌으로 여러 사람이 기쁨을 누리는 게 좋더라고요. 여기 작업실을 얻은 이후로 쪼그리고 앉아 화단 보는 일이 많아졌는데, 식물 형태가 매번 달라지는 게 신기했어요. 식물의 생장을 유리로 표현해 봐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작년 12월에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만들면서 나무를 많이 만들었거든요. 겨울엔 색이 별로 없으니까 붉은 열매 같은 걸 함께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서 붉은 열매로 시작했고, 그 뒤엔 봄의 시작을 표현하고 싶어서 산수유 같은 노랑을 만들어 보았어요. 봄의 환희, 기쁨, 들뜸을 담았죠. 하다 보니까 잎도 만들어 보고 싶고, 큰 열매도 해보고 싶어서 점점 발전해 나가는 단계예요. 이것저것 만들고 이 유리방에 쭉 펼쳐놓은 다음 저만을 위해 전시를 열고는 스토리텔링을 해나가고 있어요. 처음엔 유리만 두었는데, 다른 유리와 조합해 보고 진짜 식물과도 배치해 보고, 이렇게 화분에도 꽂아보고…. 여유가 생기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되니까 식물에도 눈길이 가고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생활의 여유가 관찰을 가능하게 해준 거네요. 

데이비드 호크니는 회화의 생명력은 ‘나를 통과할 때 나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실물을 비슷하게 그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 나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바라보기가 핵심이라고 하고요. 무언가를 오래 바라본다는 건 현재에 집중한다는 이야기 같아요. 호크니는 “예술은 현재다.”라고도 이야기하는데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유리에 집중할 때 저와 유리만 남는 것과 같은 맥락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이 시간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게 호크니가 말한 예술이 아닐까, 그게 여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요즘은 여유가 생겼을 때 어떤 걸 관찰하면서 지내요? 

유리요(웃음). 저는 작업이 노동이라는 생각을 잘 안 해요. 종일 유리를 관찰하고 작업하면서 지내고 있죠. 아, 근데 유리 주문을 받는 건 좀 다른 문제예요. 주문받고 나면 작업이 노동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주문받아서 작업하고, 판매해서 수익이 생기는 건 분명히 좋은 일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작업을 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재미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수익 없이 작업만 할 순 없으니까 그걸 보완하기 위해 작업실을 주기적으로 오픈하려고 하는 거고요. 그럼 제 작업을 직접 보신 분들이 마음에 드는 걸 한 점씩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자리에서 유리를 보고 느낀 감정과 기분도 함께 가져가시면 좋겠어요. 유리를 볼 때마다 여기서의 기억이 떠오르면 더 좋을 거고요. 

 

혹시… 저도 구매할 수 있나요? 

어떤 거 갖고 싶으세요? 일하러 와서 괜히 지갑 열지 마세요(웃음). 

 

새해 선물로 좋을 것 같아서요. 저기, 포토그래퍼도 눈독 들이는 게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대화와 촬영을 마친 뒤, 한껏 올라간 어깨를 내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와, 이제 긴장이 풀리네요.” 우리는 손에 쥔 모든 장비를 내려두고 서랍을 칸칸이 열며, 선반 위에 가볍게 놓인 유리들을 매만지며 유리의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마음에 드는 유리를 몇 개씩 집어 들고 적당한 금액을 지불한다. 간단한 포장을 기다리면서 이토록 작고 귀여운 예술이 곁에 있음이 기껍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누군가의 애씀이 내게로 와 다시 따듯해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할 수 있는 멋진 순환이 아닐까. 집에 돌아와 흑토끼 접시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쓰니!” 하고 말씀하시는 엄마 입꼬리가 유난히 예쁘게 올라가 있는 것 같아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