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진아

이진아 — 뮤지션

장마였고 비가 억수로 많이 내렸다. 괜찮아? 오늘 괜찮은 거야? 비와 진아를 담고 싶었지만 마음이 자꾸 멈췄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야? 몇 번이나 되물으며 찾아간 자리에 이진아가 있었고, 작업실 문을 열며 해사하게 웃는다. 투명 우산을 내밀며 “빗속에서 촬영하는 거… 괜찮으세요?” 조심스레 묻자 기쁜 듯 우산을 받아들며 말한다. “날씨 때문에 걱정했는데, 빗속에서 촬영하고 싶다고 이야기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이진아의 목소리는 맑고 건강했다. 원래부터 그런 줄 알았는데, 찬찬히 자신을 굴려 온 덕분이었다. 슬럼프라는 언덕을 넘고, 힘든 마음을 보듬으며 차근차근 이 자리에서 현재를 사랑할 수 있게 된 사람, 언제나 지금 이 계절이 가장 좋다는 사람. 그 마음 덕에 우리는 함빡 비를 맞으면서도 이 시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다.

기록을 아예 안 하고 살면 힘든 일들이 쌓여서 머릿속에 맴돌아요.

잠잘 때도 떠오르고, 주변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기록을 하면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서 좀 나아져요.

필요 없는 기억은 기록함으로써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요.

눈길 닿는 곳이 온통 귀여워서 시선이 바빠요(웃음).

작업실로 초대해놓고 아차 싶어 부랴부랴 정리했어요. 인형도 하나 들여놓고, 사고 싶던 커튼도 구해서 달아두고요(웃음). 원래 저쪽에는 이전부터 좌식 소파 같은 걸 두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꾸 미루게 되네요. 제 공간이니까 공들여 꾸미고 싶고, 꾸미는 걸 좋아하기도 하는데 앨범 준비하느라 조금 바빠서 잠시 미뤄두고 있어요.

 

귀엽고 아늑한 공간이에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이진아예요.

 

‘피아노’가 ‘노래’보다 먼저 나오네요?

어? 그러게요. 의도한 건 아닌데, 노래보다는 피아노를 좀더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피아노의 어떤 점이 좋아요?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와서 친구 같아요. 뭐든 말로 하는 것보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요.

 

오, 말보다요?

네. 피아노 앞에 앉으면 말할 때와 다르게 마음이 평화로워져요. 얼마 전에 촬영을 하나 했는데 카메라가 도니까 스스로 느낄 정도로 제가 뚝딱거리더라고요. 말하는 것도 어색하고(웃음). 근데 말을 끝내고 연주를 시작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때 새삼스럽게 ʻ나는 피아노 앞이 편하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피아노와 자연스러운 관계로군요. 처음 피아노를 배운게 여섯 살 때라고 들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릴 때부터 치기는 했어요. 어린 시절, 집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거기서 이것저것 쳐본 기억이 나요. 교회에 가서 부르던 찬송가나 티브이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치던 단편적인 기억이죠. 그러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배웠어요. 바이엘부터 시작해서 체르니, 쇼팽, 베토벤…. 어린 시절 다들 한 번씩 거쳐 가는 그런 과정이었지요.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이었나, 꽤 오래 배웠는데도 어느 순간 학원 다니기가 싫더라고요. 점점 시들시들해져서 어떻게 하면 피아노 학원을 그만둘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한창 싸이월드 하던 시절에 대문글에 “피아노 학원 끊는 법 좀 알려줘.” 같은 거 써두기도 하고(웃음).

 

그러다 중학생 때 재즈 피아노에 입문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다시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에서 반주하는 분을 보게 됐어요. ʻ나도 피아노 칠 줄 아는데, 나도 저 자리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죠. 피아노 반주자가 나름의 로망이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수련회에서 보사노바 리듬으로 반주하는 분을 보게 된 거예요. 새로운 리듬으로 연주하는 걸 처음 들은 건데 엄청 독특하고 아름답더라고요. 같은 노래도 다르게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저도 그런 식으로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중학생 때 엄마랑 수학 학원 알아보러 가는 길에 맞은편에 있는 재즈 피아노 학원을 보게 된 거죠. “엄마, 나 여기 한 달만 등록해 줘.” 그랬어요.

 

클래식 피아노랑은 조금 다른 장르잖아요. 어렵거나 낯설진 않았어요?

딱히 그런 건 없었어요. 오히려 더 재미있었죠. 코드마다 색깔이 다른 것도 매력적이었고, 그걸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특히 재미있었어요. 재즈 피아노를 시작하고 나서는 즐겁던 생각만 나요. 스스로 하고 싶어 하던 걸 찾은 거여서 그때부턴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더라고요. 수학 학원은 끊고 싶었지만(웃음).

 

그때부터 피아노와 함께하는 생활이 쭉 이어져 온 거군요. 어느 라이브 영상에 아버지와 함께 나온 걸 본 적이 있어요. 인상 깊게 남아 있는데, 처음엔 집안에서 음악 하는 걸 반대했다고 들었어요.

재즈 피아노에 한창 재미를 붙여서 배우다 보니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는데요. 공부를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 정도다 보니까 차라리 음악 쪽으로 진로를 정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근데 저희 식구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언니들도 회사원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다들 안정추구형이다 보니까 부모님이 월급 받는 안정적인 직장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렸으니까… 울고불고 떼를 썼죠. 음악 해도 돈 벌 수 있다면서요(웃음). 우리 피아노 선생님은 레슨하고 공연도 하면서 돈 번다고, 다 할 수 있다며 막무가내로 설득했어요.

음악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재즈가 너무 좋았어요. 그저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Jazz It Up!》이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수많은 재즈 아티스트를 동경했고 끊임없이 꿈꿨거든요. 친구들한테도 당연하다는 듯 자주 이야기하고 다녔어요. 수학 학원 친구들한테 “난 수학은 못하지만 재즈 피아니스트가 될 거니까 상관없어! 흥!” 하면서요. (일동 폭소) 이게 혹시 확신이었을까요?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확신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아, 맞아요. 좋아하는 마음. 그래도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저 나름대로 여러 노력을 했어요. 검증을 받으면 좋겠다 싶어서 전문적으로 음악 하는 분들을 찾아가 “저 음악 해도 될까요?” 하면서 두 번 정도 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결과가 ʻ해도 된다.’여서 그걸 빌미로 부모님을 설득했죠. “봤죠! 해도 된다잖아요. 저 음악 할게요!” 하면서요(웃음).

 

그렇게 오늘날 이진아가 있게 된 거군요. 며칠 전까지 폭염이 이어지더니 오늘은 비가 참 매섭게 내려요. 진아 씨는 여름 좋아하나요?

사계절을 골고루 좋아해요. 언제나 지금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오늘은 여름이 좋네요(웃음). 항상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다고 믿고 싶거든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다.’라…. 그럼 요즘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ʻ앨범 준비’ 그리고 ʻ틈틈이 놀기’.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아요. 한창 앨범 준비 중이고 곡을 많이 만들고 있어서 앨범 준비가 제 근황 자체이기도 해요. 노는 걸 좋아해서 틈틈이 노는 것도 빼놓을 수 없네요(웃음).

 

주로 뭘 하며 놀아요?

오늘, 지금 할 수 있는 놀이를 하면서 지내요. 특별할 건 없어요. 카페에 간다든가, 근처에 있는 소품 숍을 들른다거나, 중고 서점에 간다거나….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티브이를 보기도 하고, 책도 읽고 다이어리도 쓰고요. 아, 얼마 전에는 친구랑 옷에 자수 놓는 놀이를 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원래는 잔디 모양을 수놓고 싶었는데 좀 징그럽게 돼서 실패했어요. 다음엔 다른 걸 놓아보려고요. 요즘 깨달은 건데, 저는 저를 놀아줘야 하는 사람이더라고요. 논다는 전제가 있어야 ʻ놀아야 하니 얼른 작업해야지.’라는 마음도 먹게 돼요.

‘이진아’라는 이름에 많은 사람이 목소리부터 떠올릴 것 같아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목소리라고 생각해요. 어느 인터뷰에서 “스트레스받을 수 있는 목소리지만 음악을 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노래를 돋보이게 하는 좋은 요소가 된다.”라고 이야기하셨지요. 오늘, 지금 내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음…, 요즘 제 목소리는 예전보다 차분해졌다고 생각해요. 옛날엔 좀더 밝고 희망찼다면 지금은 희망차게 노래해도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요.

 

왜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요?

작년에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계속 저를 채찍질하면서 “잘해야 해.” 하고 되뇌던 시간이 있었어요. 그런 압박 속에서도 틈틈이 놀긴 했지만 계속 뭔가를 이루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슬럼프를 이겨내기 위해 여행도 다녀오고, 생각도 정리하면서 목소리도 차분해지고 성숙해진 것 같아요.

 

요즘 컨디션은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슬럼프를 지나면서 저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했거든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려고요. 제가 부담 가지지 않고 현재를 선물처럼 즐기면서 살게 되면 좋겠어요.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게 저한테 좋은 방향이라 생각하거든요.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나 있었지만 작년은 특히 힘들었어요. 음악을 만들면서 울기도 하고, 제 이상향과 실력이 차이 나는 게 속상하고… 저를 못 견뎠던 것 같아요. 저는요, 노는 걸 진짜 좋아하나 봐요(웃음). 음악도 분명히 좋아하는데 트레이닝만 하는 건 제 성향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마음먹었어요. 제 안에서 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즐겁게 가지고 놀자고요.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슬럼프가 ʻ뿅’ 하고 사라진 건 아니지만, 두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오면서 어느 정도 환기가 되었어요. 뉴욕에서 재즈 클럽 공연을 자주 봤는데,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세상에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직접 실감하니까 오히려 부담이 덜해지더라고요. 제가 굳이, 꼭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채찍질하면서 저를 몰아붙이기보다는 진짜 즐기면서 잘하고 싶어졌죠. 물론 제 눈에 훌륭해 보이는 뮤지션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겠죠. 그 안에는 저마다 고통과 싸움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공연을 보면서 음악이란 본질을 다시 한번 되새겼어요. 세상이 말하는 기준을 내려놓은 채 처음 음악을 시작하던 시절을 마음에 새기고자 했죠. 순수한 기쁨, 사랑 같은 걸요. 언제나 그렇게 살아보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경쟁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되었나 봐요. 음악 그 자체를 즐겨보자는 마음을 먹고 나니까 많은 게 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앨범 작업이 무척 재밌어요.

앨범 이야기 전에 ‘기록’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이번 호에서는 기록 중에서도 무언가를 ‘수집’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해요. 우리는 저마다 다른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요. 어떤 기억은 열렬히 수집하고, 또 어떤 기억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게 되죠. 왜 이런 편차가 생기는 걸까요?

다 기억하려면… 힘드니까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2015) 에서도 중요한 기억은 수집하고, 그렇지 않은 기억은 버리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런 느낌 같아요. 모두 기억하려고 하면 몸도, 마음도 힘들 거예요. 특히 아픈 기억은 희미해져야 나중에 꺼내 볼 용기도 생기지 않을까요?

 

음, 맞아요. 흘려보내는 것도 일종의 용기 같아요. 진아 씨에겐 음악도 하나의 기록일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경험을 수집해서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주로 걸어 다닐 때 뭔가 떠오르곤 해요. 얼마 전엔 길을 걸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을 봤는데 다들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생각이고 상상이지만, 다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혼자 있을 때, 산책할 때 갖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편인데 그렇다고 곡을 쓰기 위해 일부러 나가는 건 아니에요. 요즘도 산책은 자주 하고 있어요. 경의선숲길도 걷고, 한강공원도 많이 오가죠. 귀여운 걸 좋아해서 소품 숍 투어도 자주 하고요.

 

음악을 장르로 많이들 구분하잖아요. 근데 저는 장르라는 게 모호하다고 생각해요. 파고들수록 더 그런 것 같고요. 진아 씨도 한때 음악 정체성에 관해 고민이 많았다는 기사를 봤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장르라는 건 사람들이 부르기 쉬우려고 나눠놓은 거잖아요. 일종의 주소처럼요. 근데 음악을 하는 사람이 꼭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한 가지 장르만 파고드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저는 특정 장르 하나만 좋아하거나 특정 장르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거든요. 저는 일단 피아노가 좋았어요. 피아노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데, 그동안 제가 흡수해 온 것들이 모든 장르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더라고요. 딱 가요라고만 말하기에도 애매하고, 재즈도, 팝도 아닌 장르 같다고 느꼈어요.

 

언젠가 ‘피아노팝’이라고 소개하는 영상을 봤어요.

그런 모호함 가운데서도 피아노로 만든 팝이니까 그렇게 정의해 본 때도 있었죠. 재즈랑도 연결돼 있으니까 ʻ재즈 팝’이라고도 종종 부르거든요. 근데 사실 이런 명칭은 크게 상관이 없어요. 어떻게 부르든 사람들이 제 음악이란 걸 알아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어떤 장르를 한다는 이야기보다는 ʻ이진아가 만드는 음악’이라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피아노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럼 노래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어요?

노래는 마음의 통역기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음악에 멜로디만 두는 것도 좋지만 노래를 부르면 좀더 친절하게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게 말이라는 형태의 필터를 거쳐서 전해지면 이해하기 쉽다고 보는 거죠.

 

그 ‘말’이라는 건 음악을 만들 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이번에 작업한 노래는 어떤 테마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ʻ도시’요. 꼭 도시를 테마로 해야겠다는 건 아니었는데요. 음악을 모아놓고 보니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더라고요. 아직은 가제지만 ʻ도시의 속마음’이라는 타이틀로 곡을 열한 곡 정도 묶어두었어요. ʻ시티 라이트’라는 제목의 곡도 있고, 도시 건물이 너무 멋있어서 건물에 대해 노래하기도 했죠. ʻ미스터리 빌리지’라는 곡이 타이틀인데, 현실의 우리 이야기를 상상 속 마을에 빗대어 표현했어요. 도시 분위기나 모습만을 노래한 건 아니고요, ʻ말’이라는 곡에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용기를 얻은 이야기도 담겨 있죠.

 

도시라고 하면 삭막하고 바쁜 분위기가 떠오르는데 진아 씨는 그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져서 새로워요. 도시가… 뭘까요?

도시요?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요(웃음). 그리고 또 열심히 사는 느낌이기도 해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들 그냥, 어쩌다 보니 도시에 살고 있는 거잖아요. 도시에서 산다는 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누군가는 어쩌다 보니 여기 태어나서 쭉 도시에 살고 있고, 또 누군가는 어쩌다 보니 도시가 아닌 곳에 태어나서 도시로 이동해 오기도 하고요. 저는 요즘 도시라는 단어에 건물이 떠올라요. 한창 꽂혀 있어서 그런지 지나는 모든 건물이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자그마한 건물이어도 저희보단 크잖아요. ʻ이 큰 걸 어떻게 만들었지?’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죠. 근데 건물은 보면 볼수록 음악과 닮았어요. 건축은 뼈대부터 만들고 하나하나 덧대고 쌓아 나가는 일이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요즘은 개발 중인, 아직 형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공사장 앞을 지나가면서 ʻ난 지금 이런 상태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해요. 빨리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고요. 어떤 건물은 크고 웅장하지만, 어떤 건물은 아기자기하고 자그마한데요. 저는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니까, 제 음악은 저런 큰 건물보다는 아기자기한 건물 쪽이겠지 생각도 하고요. 별생각을 다 하죠(웃음)?

 

주변을 늘 새롭게 관찰하는 것 같아요. 요새 눈에 띈 건물 있어요?

한강을 걷다 보면 맞은편에 여의도가 보이는데요. 진짜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물이 높고 빌딩이 많아서요. 외국 같기도 하고요. ʻ저거 어떻게 만들었냐….’라는 생각도 자주 해요. 이탈리아에 갔을 때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을 보고 굉장히 감탄한 기억이 나요. 천장에 붙은 조각 하나까지도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오래된 종교 건축물들이 특히 근사한 것 같아요. 작은 부분에 감탄할 때가 많죠.

 

뚝딱 지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은 서울 어디든 너무 빨리 지어지고 부수어지는 것 같아요. 난개발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맞아요, 좋아하던 가게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걸 보면 슬퍼요. 꼭 제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 모든 게 바뀌는 게 정상인 건가 의문도 드는데, 정상인 거겠죠? 안 바뀌고 그대로 오래오래 있는 것도 이상한 것 같고요. 곧 발표될 ʻ도시의 건물’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수없이 넘쳐나고 또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해.”

 

점점 더 앨범이 궁금해지는데요(웃음). 도시가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하셨는데, 이번 앨범은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어요.

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속마음. 일단 제 개인적인 노래들이기는 해서 제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요. 저 또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앞서 ‘말’이라는 노래에는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죠. 혹시 지금 생각나는 말 있으세요?

“네가 다 알고 있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선택하는 걸 어려워하는 편인데요. 드럼 치는 조성준이라는 분이 저한테 “네가 다 알고 있어. 다 네 마음속에 있어.”라는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 말을 한 번에 믿거나 의지한 건 아닌데 조금씩 믿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아무리 선택하기가 어려워도 그중 제 마음이 닿는 건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틀리더라도 괜찮다는 생각도 자꾸 하려 하고요. 그런 이야기가 위로가 되어주더라고요. 누군가 저를 믿어준다는 말이잖아요.

 

맞아요. 그런 믿음은 큰 힘이 되죠. 이번엔 분위기를 살짝 바꾸어서 공간 소개를 해볼까요? 이 귀여움으로 가득한 작업실!

이전에는 집에서 연습하던 시기도 있는데, 성산동 쪽에 작업실을 얻게 되면서 작업실 생활이 시작됐어요. 그러다 작업실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어 여기저기 구해보다가 이 동네로 오게 됐죠. 지하층을 고른 건 합주도 마음껏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였어요. 큰 소리가 나도 괜찮으려면 지하를 구하는 게 좋을 거란 이야기를 들어서 여기로 정한 거죠. 처음엔 혼자 쓰려고 거실도 만들었는데요. 여러모로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친구들과 함께 쓰고 있어요. 성산동 작업실을 혼자 사용했는데 혼자 있으니까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여기 자리 잡으면 저쪽에 있어야 할 것 같고, 저쪽으로 옮기면 다시 여기 있어야 할 것 같고…. 왠지 혼란스러웠어요. 제가 뭔가를 하고 있어도, 하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자꾸 놀게 됐고요(웃음). 또 누군가 있어야 같이 밥을 먹으면서 환기도 하고 월세도 아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잘한 선택이었어요. 방을 여러 개 두고 있는데, 이 방은 온전히 저 혼자 쓰는 공간이에요. 공간 중앙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녹음 가능한 기기들도 세팅되어 있어요. 안쪽 작은 방에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두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었죠. 메인 공간에서는 작업하고, 피아노 연습을 해요. 곡을 쓰기도 하고요.

 

매일 출근하듯 오나요?

아주 규칙적으로 오는 건 아니지만 매일 오려고는 해요. 종종 너무 오기 싫을 땐 집에서 키보드로 작업하기도 하고요.

 

너무 오기 싫을 때는 어떨 때예요?

요즘 정말 열심히 했다, 전날 진짜 피곤했다, 하는 날((웃음). 마감할 게 따로 없으면 집에서 쉬기도 하죠. 제가 기계적이고 철두철미한 성격은 아니거든요. 옛날에는 시간을 정해두고 작업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오늘 할 일을 기록해 두고 체크리스트를 완료하면 놀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매일 체크리스트를 적어요?

네. 그래야 오늘 할 일을 잘 마치고 놀 수 있으니까요(웃음). 계획 짜고 뭔가 쓰는 걸 좋아하다 보니까 스스로 데드라인 정하는 게 일하기 편하더라고요. 데드라인이 없으면 자꾸 미루게 돼요. 오늘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녹음실을 잡아둔다거나, 작업 제출 마감 일자를 정해두면 훨씬 성실하게 작업할 수 있게 돼요. 물론 외부 마감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거라면 유연하게 굴 때도 있어요. ʻ이건 좀 미룰까, 내일 할까.’ 하면서요.

 

오늘 대화를 준비하면서 유튜브 채널도 열심히 봤어요. 그것도 하나의 일상 수집이자 기록이겠죠.

유튜브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건데 용기가 안 나고 실행력이 없어서 생각보다 늦게 시작했어요. 평소에 사진으로 남기던 것들을 영상으로 남기는 거라 크게 어려운 건 없었고, 재미있었어요. 다만, 보는 사람이 있는 채널이다 보니까 제 일상이 매 순간 예쁜 건 아니라는 게 마음에 좀 걸렸어요. 너무 평범하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매번 맨 얼굴로 촬영하려니 ʻ현타’가 오기도 했죠.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너무 애쓰지 말고 하고 싶을 때만 하자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지는 때를 기다리는 거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촬영할 때 살짝 뻔뻔해지기도 하더라고요(웃음).

 

브이로그는 일상생활을 기록하는 거잖아요. 내 생활을 영상으로 남기는 데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음악가지만, 음악만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저도 생활을 살고 제 삶이 있으니까 음악 바깥의 모습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음악을 하고 음악을 좋아하지만 귀여운 것도 그만큼 좋아하거든요. 맛있는 거 먹는 것도 좋아하고, 쉬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런 걸 구독자랑 함께해 보고 싶었죠. 근데 브이로그를 한창 하다 보니까, 팬들은 온전한 일상보다는 음악을 좀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음악에 관련된 걸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기록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해답을 얻었어요?

아직 고민 중이에요. 다만, 저만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려고 해요. 일상과 음악을 섞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일상 공간에서 버스킹을 한다든지, 집에서 기타를 친다든지…. 도디dodie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자연스러운 라이브를 콘텐츠로 잘 풀어내는데, 그분 영상을 보면서 영감을 많이 얻었어요.

이번 호에서는 ‘팬덤’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보려고 해요. 무언가의, 누군가의 팬이야말로 수집광이 아닐까 싶어서요. 진아 씨한테는 ‘러블리진’이라고 하는 팬들이 있죠.

너무 고마운 분들이죠. 제가 하는 음악에 일종의 동의를 해주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응원이자 공감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감사하고 좋은데 미안한 마음도 커요. 제가 다른 아티스트에 비해 팬분들에게 제대로 사랑 표현을 못 하는 것 같아서요. 다른 아티스트들은 “여러분, 사랑해요!” 같은 것도 많이 하시던데…. 사랑과 감사 표현을 자유롭고 귀엽게 잘하는 분들을 보면 부러워요. 계속 공연을 하다 보니까 매번 와주시는 분들은 얼굴도, 이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든요. 그런 분들한테는 고맙다는 말을 전할 기회도 훨씬 많았던 건데 제대로 표현을 못 하는 게 항상 미안해요. 팬카페에도 글 하나 멋지게 못 남기고…. 쑥스러워서 그래요(웃음). 요새는 팬분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저만의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요.

 

앞서 고민 중이라고 하신 새 유튜브 콘텐츠가 방법이 될 수도 있겠네요. 팬덤이라는 건 참 신비해요. 팬덤에 속한 사람은 한 명 한 명의 개인이지만, 전체로 보면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서요. 팬을 실체로 실감한 순간이 있어요?

두 가지 기억이 떠올라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는데요. 그 당시에도 노래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종종 들려주곤 했어요. 그럼 친구들이 듣고 좋다고 해줬거든요. 제가 쓴 가사를 공책에 베껴 쓰기도 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요. 그런 게 정말 고마웠죠. 아, 그 시절 다이어리도 가지고 왔는데 이따 보여 드릴게요(웃음).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진짜 제 팬이 생겼다고 실감한 순간도 있어요. 음반이 나오기 전부터 홍대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는 사람이 거의 안 왔거든요. 보통 지인을 초대하곤 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매일 부를 순 없어서 아예 안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정말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꽤 슬픈 기분으로 공연을 시작했는데 고등학생 두 명이 입장하더라고요. 공연을 끝까지 보시고는 마지막에 저한테 책받침 같은 걸 건네주고 가셨어요. 제가 노래하고 피아노 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코팅한 거였는데, 작은 편지와 함께 건네주신 기억이 나요. 그게 지금까지도 굉장히 큰 용기가 돼요.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알 것 같아요. 무척 소중한 기억이라는 것도요.

음악을 그만둬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어떻게 저를 알게 되었는지, 그날 공연엔 어떤 마음으로 찾아왔는지 아직도 궁금해요. 그 당시엔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했거든요. 그분들께 지금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혹시 진아 씨도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있나요?

저요? (눈을 반짝이며) 완전, 완전 있어요. 많이 있어요. 일단… 저는 장나라 팬이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요(웃음). 싸이월드 클럽에 팬 사이트를 만들어서 운영하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가입하면 ʻ가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도 달고, 사진도 열심히 올렸죠. 관리도 전부 제가 직접 했는데 그 당시 군인 팬들이 많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는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이나 키스 재럿Keith Jarrett 같은 뮤지션을 좋아했어요. 그중에서도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을 정말 좋아해서, 방에 사진도 붙여 놓고 지냈죠. 그런 재즈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서요.

 

팬이 되어보기도, 가져보기도 했잖아요. 팬심이라는 게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요. 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싶은 마음, 보고, 듣고, 배우고 싶은 마음…. 그런 순수한 마음인 것 같아요.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무언가를 수집한다는 건 나의 취향과 맞닿아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 취향은 역시 귀여운 거(웃음). 특히 마음이 편해지는 귀여움을 좋아해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음…. 저는 강아지가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고 생각하는데요. 저희 집 강아지는 갈색 푸들이거든요. 그 생명체를 보면 아무리 슬픈 일이나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다 풀려버려요. 귀여운 건 그런 거 같아요. 마치 귀여움이 존재 이유인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저런 생명체가 있지, 싶은 마음이 자주 들어요. 신은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을까요? 우리를 위로해 주려고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잘 모르겠어요. 되게 신기하고 묘해요. 하나님은 하늘이랑 땅이랑 엄청 멋있는 산도 만드셨는데, 진짜 어이없게 귀여운 강아지도 만드셨잖아요. 코커스패니얼, 판다… 어떻게 이런 귀여운 걸 만드신 거죠? 사실 귀여운 물건들도 물건 자체가 귀엽다기보다는 물건에 귀여운 생명체를 그림이나 형상으로 담았기 때문에 귀여운 게 아닐까요?

궁극의 귀여움은 동물이라는 거군요(웃음). 소품 숍도 자주 다니시는 것 같아요. 귀여운 가게 소개해 주실래요?

홍대에 있는 ʻ수바코’요! 거기 주인장이야말로 귀여움 마니아이신 것 같아요. 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걸 잔뜩 모아 오시는 걸까요. 존경하는 마음으로 구경 다니고 있어요. 이런 걸 보면 세상엔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사람들이 모은 것과 취향을 보는 걸 좋아해요. 물론 수집하는 것도 그렇고요. 옷 가게 겸 소품 숍인 ʻ모데스트무드’도 좋아하고, ʻ보키 프로젝트’도 좋아해요. 보키 프로젝트는 직접 그린 일러스트로 마스킹테이프를 제작하는데,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걸 정말 잘 표현하거든요. 볼 때마다 감탄하게 돼요(두 눈을 빛낸다).

 

역시 좋아하는 걸 말할 때 사람은 가장 자기다운 활기를 띠나 봐요.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성향은 기록할 때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작업실에도 곳곳에 메모한 흔적이 보이는데, 손으로 기록하는 걸 좋아하나요?

다이어리는 중학생 때부터 쭉 쓰고 있고, 작업 일지나 체크리스트는 손으로 쓰기도 하고 컴퓨터로 메모장에 쓰기도 하는데요. 이번에는 작업 이야기를 유독 손으로 쓰고 싶더라고요. 이전까지는 빨리 끝내고 싶다, 얼른 발매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지금은 만드는 과정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제대로 기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래서 작업 일지면서도 일기 같은 글을 꾸준히 쓰고 있어요. 주로 “오늘은 무슨 녹음을 했다, 녹음할 때 이러저러한 일들이 재미있었다.” 같은 내용이죠. 제 마음이 어땠는지 감정 기록도 하고요.

 

기록할 때랑 하지 않을 때의 차이가 있어요?

기록을 아예 안 하고 살면 저도 모르게 좀 힘들던 것이 쌓여서 머릿속에 맴돌아요. 잠잘 때도 계속 떠오르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서 주변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기록을 하면 그래도 생각이 저장되고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요. 필요 없는 기억은 기록함으로써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요.

 

기록으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는 거네요.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제 마음이 편해지는 게 중요한 사람이란 걸 새삼 알겠어요.

 

얼마 전에 인터뷰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먼 훗날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남긴 기록들이 어떻게 될까…를 종종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었는데요. 진아 씨는 이 기록들이 어떻게 남기를 바라요?

음…. 어디 귀여운 박물관 한구석에 잘 남으면 좋겠어요. 어떤 전시에는 아티스트가 남긴 작업 일지나 작가 노트 같은 게 전시되기도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남으면 기쁘겠지만, 그러려면 제가 엄청나게 열심히 살아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꿈이고요(웃음). 사실 사라져도 크게 상관없긴 해요. 저는 제가 꼭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물론 저도, 제 기록도 소중한데요. 후대 사람들이 꼭 저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은 없어요.

 

어, 그럼 음악가로서의 진아 씨는요?

그래도 무언가를 남긴다면 그게 음악이면 좋겠어요. 제 음악을 듣고 누군가 약간의 미소를 머금으며 위로받는다면, 그걸로 행복해요.

 

지금도, 앞으로도 분명히 그럴 거예요. 앞으로 남기고 싶은 기록 있어요?

앞으로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해나가고 싶어요. 꾸미는 것도 재미있고 좋지만, ʻ진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음악이 뭘까요?

그러게요, 솔직한 거 아닐까요? 저한테 솔직한 것, 음악에게 솔직한 것. 이 순간 느끼는 것들을 그대로 담아내는 음악이면 좋겠어요. 그걸 그대로 연주하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요즘의 목표이기도 해요. 이번 앨범에 ʻAccepting’이라는 제목의 곡이 있는데요. ʻ받아들이다.’라는 의미잖아요. 지금 제 목표와 닮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한때 ʻ이건 이래서 아니야, 저건 저래서 아니야.’ 하면서 전부 튕겨내던 시절이 있었어요.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뭐든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싶거든요.

 

점점 더 진아 씨다워지겠군요. 기대할게요. 이제 우리, 학창시절 다이어리 구경할까요(웃음)?

막상 보여드리려니까 쑥스럽지만… (일기 여러 권을 꺼내 펼친다.) 아, “키 커지고 싶다.”는 이야기는 왜 쓴 거지(웃음). 직접 쓴 시도 있고, 그림도 참 열심히 그렸네요. 오늘 가져온 건 고등학생 때 일기장인데, 흐린 눈으로 봐주세요!

어제의 진아가 모여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