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아이의 표정으로

어지혜·장준오 — 스팍스에디션

응당 납작해야 할 것이 솟아나고, 평면 속에 입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팍스에디션 작업은 자주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그곳에 닿기까지 한 사람은 묵직한 물성으로, 한 사람은 가벼운 선과 색으로 작업해 나가면서 한곳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일들을 반복한다. 익숙한 것을 경계하고 낯섦을 찾아가는 둘의 얼굴에서 나는 아이의 표정을 본다. 잔뜩 가문 날 물을 함빡 맞는 꽃의 표정 같기도 하다.

언제나 기준은 설렘이에요.

어떤 분야 하나에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서 낯섦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긴장감을 가지길 바라서요.

새해 초입에 만나게 됐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지혜 저는 연초보다는 연말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새해가 주는 긴장감이 부담스러워서요. 목표를 세우는 순간 이뤄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는 게 싫어서 새해 목표 같은 건 정말 안 세우는데요. 올해는 새해보다 이전 해를 기념해 보자 싶어서 ‘2022년 기억하고 싶은 이벤트’를 정리해 봤어요. 일기장에 가볍게 적었는데 정리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올해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게 생겼고, 작년에 이어 지속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어요. 좀처럼 하지 않던 정리를 하고 나니 이전 새해맞이랑은 조금 다른 기분이에요. 

 

어떤 이야기들을 기록했어요? 

지혜 무용 배운 거요. 늘 해보고 싶던 거라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준오 지금까지 지혜의 삶은 오로지 작업뿐이었거든요. 저는 여기 앉아서 기타도 치고, 운동도 하고, 취미도 있었지만 지혜는 정말 작업밖에 없었어요. 어느 시점부터 삶이 많이 바뀌었죠. 

 

계기가 있었어요? 

준오 제가 3년 전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크게 사고가 났거든요. 거의 죽다 살아났죠. 몸 반쪽이 다 부러졌어요. 두개골, 갈비뼈, 어깨뼈, 쇄골…. 뇌출혈까지 왔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20여 년을 탄 오토바이인데 이런 사고는 처음이었어요. 저는 차 사이로 다니는 걸 싫어해서 차랑 같은 차선에서 운전하고, 헬맷도 꼬박꼬박 쓰고, 신호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렇게 안전운전을 했는데도 사고라는 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어쩌다가 사고가 난 건지 아직도 몰라요.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거든요. 오토바이 사고로 한동안 병원에 있었고 차츰 회복하면서 지혜가 운동을 시작했는데요. 그때부터 삶에 활력이라는 게 생겼어요. 옛날엔 둘 다 미팅 한 번 다녀오면 녹다운돼서 소파에 드러눕고 그랬는데, 지금은 하루에 미팅을 두세 개 다녀와도 끄떡없어요. 그러고 나서 밤에 운동하러 가고(웃음). 

지혜 가족이 아프고 개인적으로도 많이 힘들던 시기인데 준오 씨 사고까지 겹치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또 그해에 저희 개인전 <댄싱 블루>도 있었는데요. 2019년이 여러모로 전환점이 되는 해였어요. 굉장히 많은 경험이 한 번에 파도처럼 몰아쳤거든요. 그 시기를 겪고 2020년부터는 많은 게 바뀌었어요. 목표가 건강은 아니었는데 그 경험들이 운동으로 풀리더라고요. 운동하면서 에너지가 좋아지니까 삶에서 좀더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나 신경 써야 할 것들, 소중한 것들을 더 잘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런 걸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가 바뀌었죠. 

 

또 어떤 게 변했어요? 

지혜 이전에는 모든 걸 둘이서만 하고 싶었어요. 일도, 삶도요. 근데 둘이서만 하다 보면 한 명이 아플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혹은 좀 쉬고 싶을 때도 있는 거고요. 그런 환경에 처했을 때 둘만으로는 팀이 더 강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팀원을 늘리게 됐죠. 지난번엔 준오 씨가 사고를 당했지만 그게 저일 수도 있고, 둘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경우에도 팀이 지속적으로 흘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2020년 즈음에야 처음 하게 되었어요. 2021년부터는 저희 포함해서 총 네 명이 되었는데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만드니까 팀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동안 그래픽 디자인 신에서 활동해 왔지만, 개인 아트워크에 기반을 둔 그래픽 작업이다 보니 팀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울 거란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데서 2022년에는 큰 의미가 있어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 찾아 나가면서 설레는 2023년을 보내게 될 것 같아요. 

준오 작업 안팎으로 새로운 걸 많이 시도하게 될 것 같아요. 어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농구를 해봤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지난주에는 수영도 했고요. 수영 끝나고 먹은 밥 맛이 잊히질 않아요(웃음). 요새 좀 소홀한 것들, 안 해본 것들을 많이 해보려고 하는 시기예요. 특히 저는 아직도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력이나… 그런 부분에서 좀 문제가 있거든요. 지혜가 스팍스에디션 일에 온 힘을 다하고 있어서 좀 미안하고 고마운데, 다른 쪽에도 에너지를 쓰기 시작한 게 다행이기도 해요.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 같아요. 

지혜 힘든 일들이 몰아치니까 자극이 오더라고요. 그 자극이라는 게… 준오 씨 사고가 인천에서 나서 병원이 인천이었거든요. 저희 집은 성북구였고요. 매일 두 시간씩 버스 타고 병원에 오가는데 오랜만에 공차가 엄청 먹고 싶은 거예요(웃음). 혼자 매장에 찾아갔는데 거기서 굉장히 스포티한 여자분을 보았어요. 근데, 그분이 풍기는 기운이 너무 좋은 거예요. 저도 좋은 기운을 내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저한텐 자극이었어요. 그 이후로 요가를 시작했고 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처음으로 생각을 멈추는 시간을 가지니까 그 시간이 온전히 행복하더라고요. 아무리 괴로운 상황이어도 마냥 힘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건강한 마음이 건강한 신체도 불러온 거네요. 두 분은 벌써 10년 넘게 함께 작업해 오고 있는데, 어떻게 만난 사이예요? 

준오 워낙 어릴 때 만났어요. 제가 스물일곱 살, 지혜가 스물한 살. 둘 다 학생이었죠. 

지혜 저는 중학생 때부터 쭉 캐나다에서 살았는데 한국에 잠깐 나왔을 때 친구랑 파티에 가게 됐어요. 일본 디제이가 오는 파티였고, 준오 씨는 거기서 만났어요. 며칠 머물다 다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그때 너무 불꽃같이 사랑을 해서(웃음)…. 우선은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6개월 정도 공부하면서 한국에서 지낼 수 있는 방향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SADI에 들어가면 한국에서 계속 작업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메리카노’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뮤지션 십센치 작업을 계속 해오셨잖아요. 시기적으로 그즈음 같은데…. 

준오 맞아요. 둘이 홍대 거리를 걷는데 십센치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어요. 먼 발치에서 보는데 공연이 충격적으로 좋았어요. 지혜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남자친구가 옆에 있는데(웃음).

지혜 아니, 음악이 너무 좋으니까 그런 거지(웃음). 

준오 공연 끝나고 대뜸 그랬어요. “우리 미술 하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뭐라도 같이 해봐요.” 그때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죠. 그게 인연이 되어서 공연이 생기면 포스터 작업을 하고 EP 아트워크도 작업도 하면서 ‘디자인이 이런 거구나.’를 알게 됐어요. 쭉 십센치와 같이 작업해 오다가 정규 앨범 디자인까지 맡게 됐는데 크레디트에 넣을 명칭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근데 ‘Design By’ 뒤에 마땅히 붙일 이름이 없더라고요. 장준오, 어지혜로 넣을까 하다가 같이 쓸 수 있는 이름을 만들자 싶어서 스팍스에디션이란 이름을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디자인을 전공한 거고요? 

지혜 네. 저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준오 씨는 조형을 전공했어요. 워낙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픽 디자인도 해보고 싶고, 패션 디자인도 해보고 싶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죠. 그러다 십센치 앨범 디자인이 촉발제가 되어 좀더 전문적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게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었죠. 뭐 하나 배우면 돌아와서 준오 씨한테 가르쳐 주면서 같이 배워 나갔어요. 

준오 두 명 등록금을 내야겠다 싶을 정도였어요(웃음). 저도 조형 작업을 할 때 지혜에게 보조 작업을 부탁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같이 20대를 보냈죠. 

 

그럼 올해가 두 분이 함께한 지…. 

준오 2007년에 만났으니까, 16년? 

지혜 근데도 여전히 싸워요. 오래 만나면 안 싸울 줄 알았는데 사람은 영원히 싸우는 관계구나 싶기도 하고요. 

준오 우리만큼도 안 싸우면 그게 사는 거야? 

 

잠깐만요(웃음). 싸우지 마세요. 그럼 십센치에게 작업을 제안할 때는 디자인을 배우지 않은 상태였던 거예요? 

준오 맞아요. 저는 항상 앨범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어요. 지금은 핀터레스트만 들어가도 멋있는 이미지가 널려 있잖아요. 근데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런 걸 볼 수 있는 건 잡지랑 레코드숍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잡지랑 앨범을 엄청나게 샀죠. 어릴 때부터 제 눈에 띄던 건 그래픽 디자인 쪽이었던 것 같아요. 원체 음악을 좋아해서 앨범 디자인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요. 좋아하는 음악을 모아서 시디를 만들고 앨범 재킷도 직접 디자인하곤 했죠. 어릴 땐 약간 자만심도 있어서(웃음) ‘내가 짱이다!’라고 생각하는 애였어요. 제 감각을 신뢰한 거죠. 십센치한테도 “나 좀 잘해!”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는 남들에게 말 거는 것도 거침없었어요. 길을 걷다가 좋은 향기가 나면 “무슨 향수 쓰세요?” 하고 쉽게 물어볼 수 있던 사람이죠. 근데 이젠 그렇게 못 하겠어요. 

 

왜요? 

준오 나이가 드는 걸까요, 이전의 저랑은 많이 달라졌다고 느껴요. 역시 이것도 사고 이후에 변한 지점같아요. 사고 이전까지는 젊음이나 청춘에 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근데 오토바이를 못 타게 되면서 ‘아, 내 청춘은 끝이 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항상 좋은 생각, 신나는 생각만 했던 사람인데 평상시에 안 하던 생각이나 행동을 많이 하게 됐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죽음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고…. 그렇다고 엄청 깊게 파고드는 건 아니지만요.

 

앨범 디자인은 지금도 꾸준히 하고 계시죠. 그 시초가 십센치 앨범 디자인일 텐데요. 저는 조각처럼 보이는 아트워크를 보고 당연히 CG겠거니 했는데, 저기 실물이 있네요? 

지혜 그 당시 준오 씨가 만들고 있던 조형 작품이었어요. 옷 벗는 사람의 상반신인데요. 벗겨지기 전의 부분은 드러나지 않고, 벗겨진 부분만 실물이 존재하게끔 만들었죠. 

준오 이 작업을 하면서 옷이라는 게 밖에서만 보이는 페르소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벗어날 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솔직함이라는 키워드랑 닿아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게 십센치가 말하는 솔직함이랑도 맞닿은 이야기 같아서요. 십센치랑은 인연이 쭉 이어져서 지금도 재미있게 디자인하고 있어요. 

지혜 십센치 1집 아트워크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게 저는 참 재미있었어요. 말 얼굴이라고 하신 분도 있는데 아예 다른 반응을 보는 게 즐겁더라고요. 준오 한눈에 안 읽히게 하자는 게 십센치와 저희 의도이기도 했어요. ‘이건 뭐구나.’라고 한 번에 보이기보다는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일 수 있게 하자.’는 거요.

십센치 [1.0](2011)

작업이 이렇게 흥미로운데 두 분의 뿌리가 그래픽 디자인이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어요. 조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준오 어릴 때부터 미술 말고는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예고에 갔죠. 1학년 때는 동양화, 서양화, 디자인, 조각 다 경험해 보는데 저는 그중에 이 분야가 제일 좋았어요. 흙을 만지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물성에서 오는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하나, 질감이 느껴진다는 게 특히 좋았죠. 

 

첫 작업 기억나세요? 

준오 사람 얼굴이었어요. 마침 작년 말에 대학 동기랑 두상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대학생 때 제일 좋아하던 작업이라 다시 하니 재미있더라고요. 디자인 작업을 할 땐 생각이 너무 많아서 골치가 아픈데 두상 만드는 건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어릴 때처럼 생각 없이 얼굴 만들고 놀자는 의미로 ‘포엣 피스Poet Piece’라는 이름도 붙여줬죠. 시적인 조각, 작은 조각이라 불러보려고요. 올해는 포엣 피스 작업도 꾸준히 해보려고 해요. 

스팍스에디션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일종의 실험처럼 보이기도 해요. 도전에 열려 있는 편인가요? 

준오 네. 그것만큼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지혜 저는 준오 씨에 비해 살짝 보수적이라면 준오 씨는 확실히 진취적이에요. 예를 들어 ‘이런 거 한번 해보자!’ 했을 때 반드시 필요한 재료가 있잖아요. 특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는 새로운 재료가 필요한데, 전 그걸 사러 가는 게 좀… 귀찮거든요. 색종이가 필요하면 일단 있는 걸로 해보려고 하는데, 준오 씨는 바로 나가요. 

준오 저는 그런 게 재미있어요. 뭔가를 해야 할 때 새로운 재료를 사러 나가고, 재료를 안고 돌아오면서 ‘빨리 만들고 싶다!’ 그런 흥미를 느끼는 거요. 안 해본 걸 하려니까 더 신나는 것 같아요. 요즘 많이 보이는 작업이나 유행하는 스타일은 특히 피하려고 하죠. 

 

새로운 걸 하려다 보면 실패하는 일도 생기잖아요. 

준오 그건 실패가 아니에요. 재미죠. 

 

조바심이 들진 않아요? ‘해야 하는데 잘 안 되네.’ 하고. 

준오 아니요. 재미있어요(웃음). 저기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작업이 작년 5월에 포스코 미술관에서 전시한 ‘CLAP’이라는 새 작품인데요. 몸통이 된 나무는 바깥에서 주워 온 거예요. 사람들이 쓰고 잘라버린 나무 자투리가 뒷산에 많거든요. 버려진 나무에 날개를 달아주자 싶었어요. 코로나19도, 경제도, 전쟁도 그렇고… 요새 좀 흉흉하잖아요. 그래서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기획은 잘됐는데 생각처럼 움직임이 안 나오더라고요. 저 작품은 이렇게 (직접 해본다.) 몸통을 잡았다 놓으면 날갯짓을 하는 구조거든요. 근데 어떻게 해봐도 날갯짓이 안 되더라고요. 처음 해보는 작업이니까 당연히 그럴 텐데, 정말 별짓을 다 했어요. 전시 날짜가 이미 잡힌 상태라 무척 신나게 작업했죠(웃음). 

 

엄청 낙천적이군요(웃음). 지금 표정도 신나 보여요. 

준오 재미가 컸지만 스트레스나 고민이 없던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만약 전시가 잡혀 있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기한이 없으니까 좌절하는 데에도 끝이 없었을 것 같은데, 전시 오픈일이 정해져 있으니 무조건 출품해야 하잖아요. ‘어떡하지? 안 되네.’ 하면서도 어떻게든 해야만 하니까 마구 도전했죠. 날개 소재를 얼마나 바꿨는지 몰라요. 몸통도 가느다란 나뭇가지부터 두꺼운 나무까지 다양하게 만들어보고, 날개랑 몸통이 만나는 부분에 경첩도 달아보고. 온갖 걸로 실험해서 나온 결과죠. 

계속 시행착오를 거치는군요.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스팍스에디션 홈페이지에 하나씩 소개돼 있어요. ‘그래픽 디자인’, ‘아트워크’, ‘전시’ 세 카테고리로 구분돼 있더라고요. 그래픽 디자인이 클라이언트 작업이나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모아놓은 거라면 아트워크는 개인 작업인 것 같아요. 

지혜 홈페이지를 꼼꼼하게 봐주신 것 같아서 놀랐어요. 말씀하신 대로예요. 그래픽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한 작업이고, 아트워크는 개인 작업에 가깝지만 가끔은 디자인 프로젝트를 위해 작업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픽 디자인의 소스가 될 때도 있거든요. 개인 작업으로서의 아트워크는 어지혜, 장준오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에 좀더 집중돼 있어요.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일종의 실험이라고 할까요. 일과 삶에서의 관심과 재미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걸 보여주는 일이 전시 탭에 들어 있는 거고요. 

준오 어떻게 보면 아트워크는 우리의 인풋이고 그래픽 디자인은 아웃풋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채우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아트워크로 해결하고 있거든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인풋과 아웃풋이 오가면서 저희 작업이 진행되는 것 같아요. 

지혜 디자인 작업은 아무래도 일이다 보니 클라이언트랑 계속 소통하고 맞춰 가야 해요. 온전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표현 기법으로만 할 수가 없죠. 그런 설득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개인 아트워크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준오 씨는 조형, 저는 회화인데요. 각자 아트워크에 집중하다 보면 피로감이 많이 사라지더라고요. 그게 준오 씨가 말한 인풋과 아웃풋의 교류인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일도 오래 하다 보면 피곤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 사이사이 재미있는 놀이가 있으면 아웃풋도 더 좋아지겠다는 생각으로 아트워크를 쌓아나가기 시작한 거죠.

스팍스에디션은 클라이언트 유형도 다양해요. 대기업과 작업하기도 하지만 작은 출판사와의 작업도 있고, 글로벌 아이돌 작업도 하지만 인디 뮤지션 작업도 하고요. 

지혜 언제나 기준은 설렘이에요. 너무 비슷한 일만 하는 것보다는 좀 새로운 걸 하고 싶다고 늘 생각하죠. 저는 어디엔가 안주하는 걸 경계하거든요. 요즘은 앨범 디자인을 많이 하고 있는데, 작업은 재미있지만 앨범 디자인만 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앨범 디자인 작업이 많으면 브랜딩 작업에 착수하고, 전시나 행사 프로젝트에 들어가기도 해요. 어떤 분야 하나에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낯섦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긴장감을 가지길 바라서요. 

 

최근에 설렌 일 있어요? 

지혜 RM 앨범 작업이요. 방탄소년단 [MAP OF THE SOUL : 7] 앨범 디자인 작업 당시 함께 호흡했던 담당자가 다시 제안해 주셨는데요. 스팍스에디션이 아트워크와 그래픽 디자인 경계를 넘나들면서 작업해 왔다는 데 착안해서 제안해 주신 프로젝트였어요. 케이팝 앨범 디자인은 보통 브랜딩 작업과 맞닿아 있어요. 체계적인 설계가 중요해서 아트워크도 그래픽 베이스로 풀어나가게 되죠. 그런데 이번 RM 작업은 회화적으로 접근해도 되고, 여러 가지로 열린 부분이 많았어요. 기획할 때부터 설렜죠. 그 작업이 이건데요, (앨범을 꺼낸다.) 타이틀이 [Indigo]예요. 작업 콘셉트는 청사진이었어요. RM의 첫 솔로 앨범이어서 앞날을 그려본다는 의미, 지금까지의 청춘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두루 담아서 작업해 보고자 했죠. 청사진은 설계도라는 의미도 담고 있어서 여러모로 알맞다고 생각했어요. 

준오 처음 해보는 기법이었어요. 용액도 물을 섞어 직접 만들고, 현상지에 바르면서 작업한 거였죠. 이 용액이 빛에 노출되면 파래지고, 빛이 닿지 않으면 하얘지거든요. 현상지 위에 사물을 올려서 형태 그대로 하얘지는 구조를 이용해서 아트워크를 작업했어요. 

지혜 햇빛으로 기록한다는 점도 이번 앨범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랑 잘 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식물이나 모래, 흙 알갱이를 올려서 햇빛에 노출시키기도 하고, 투명한 종이에 가사를 출력해서 가사만 나타나도록 만들기도 했어요. 곡에 맞춰 아트워크를 작업했죠. 

준오 노래를 들으며 ‘이번에는 어떤 사물로 해볼까?’ 하면서 계획 세우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딱딱하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프로젝트여서 즐겁게 작업했어요. 특히 이 기법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어서 RM 씨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워낙 예술에 관심 있는 분이라 저희 작업실에 와서 직접 해보기도 했고요. 

 

여기서요? 

준오 네(웃음). 근데 아쉽게도 그날 해가 좋지 않아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어요. RM, 지민, 슈가 세 분이 오셔서 같이 작업했죠. 

지혜 세 분 다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준오 세 분과 함께한 작업물은 잘 안나왔지만 ‘우리 청춘의 모습은 그런 거지.’ 하고 생각하니 더 뜻깊게 와닿은 시간이었어요.

RM [Indigo](2022)

(웃음) 앨범 디자인보다는 같이 아트북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지혜 아, 르세라핌 앨범 디자인도 설렜던 작업이에요. 이 작업은 시도하는 것마다 너무 예뻐서 설렜어요.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인 킨츠키를 디자인 콘셉트로 잡고 접근한 작업이었어요. ‘두드릴수록 강해져.’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깨진 뒤에 다시 복원되었을 때 원래 가치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킨츠키로 표현하고자 했어요. 

준오 인쇄물이 처음 딱 나오면 너무 좋잖아요. 아시죠(웃음)? 근데 이걸 하도 많이 하니까 이젠 그런 설렘이 길게 가질 않거든요. 그런데 르세라핌 작업은 인쇄 샘플을 여러 번 제작하면서 발전시킨 작업이라 완성도 높게 나와서 지금도 보면 좋아요. (앨범을 여러 개 꺼낸다.) 

 

어? 색이 다 다르네요? 

지혜 멤버별로 색상을 다르게 했어요. 색은 보석에서 따왔죠. 예쁘죠? 

 

멤버들도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나만의 것이 생기는 거니까요. 

지혜 저희도 좋았어요. 샘플을 낼 때마다 즐거웠거든요. 샘플을 정말 많이 보면서 고민한 작업이에요. 음각으로도 해보고, 형압으로도 해보고, 코팅 없이 해보고…. 이 작업이 특히 좋았던 건 케이팝 앨범에서 해오던 틀을 깼기 때문이었어요. 이렇게까지 미니멀하게 작업하는 걸 오케이해 주실 줄 몰랐거든요. 

 

Vol.1이라는 글자와 미니멀 디자인 때문인지 약간 잡지처럼 보이기도 해요. 기획, 콘셉트, 색감, 디자인… 모두 아름답네요. 

지혜 그렇죠(활짝 웃는다.)?

르세라핌 [ANTIFRAGILE](2022)

어느 인터뷰에서 지혜 씨가 “디자인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타당한 이유를 들어서 이제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일이라면 개인 작업은 하면서 그 이유를 찾는다.”고 이야기하셨지요. 오히려 개인 작업을 하면서 내가 지금 관심 있는 걸 깨닫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지혜 맞아요. 디자인은 확실히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면서 콘셉트를 정하고 내용을 발전시켜야 해요. 색깔을 선택하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면, 아트워크는 좀 달라요. 근데 사실 저는 개인 작업을 할 때도 이야기를 단단하게 만들고, 시작하기 전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스펙트럼 오브젝트’라는 그룹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생각이 많이 변했어요. 열 명 정도 멤버가 함께하는 모임인데요. 애니메이션 작가, 만화 작가, 편집자 등등 다양한 직군이 모여 있어요. 각자 영감받은 콘텐츠를 나누고 좋아하는 걸 계속 넓혀나가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죠. 2주에 한 번씩 모이는데, 한 명이 영감받은 콘텐츠를 공유하면 모두가 그걸 경험해요. 콘텐츠는 영화, 그림, 음악, 글 뭐든 될 수 있고요. 어떤 지점에서든 저마다 영감을 받고 작업물을 만들어서 만나는 거예요. 각자 자기 작업물을 설명하는데 타당한 이유를 꼭 들어야 하는 게 아니어서 좋아요. “나는 이 영화에서 파란색을 느꼈어.” 하고 파랑으로 작업할 수도 있고, “나는 도전과 시도의 키워드를 읽었어.” 하고는 옛날에 포기한 그림을 다시 그려볼 수도 있는 거죠. 저한텐 이 과정이 새로운 자극이었어요. 큰 생각 없이 작업했는데 나중에 멤버들이 이유를 붙여줄 때도 있고, 제가 생각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 공유될 때도 있었죠. 스펙트럼 오브젝트를 하면서부터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무언가 해보는 시도를 많이 하게 됐어요.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감각적으로 느끼는 자극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말보다 더 명확히 전달될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렵지만, 지혜 씨 그림을 보면 춤추는 아지랑이가 떠올라요. 이런 게 말씀하신 ‘감각적으로 느끼는 자극’인 거죠? 그런데, 2주에 한 번씩 모인다면 격주로 작업을 하나 만들어야 하네요? 

준오 맞아요. 그래서 자꾸 멤버가 늘어요. 처음엔 다섯 명이서 시작했는데 점점 나태해지더라고요. 초반엔 다들 꼬박꼬박 작업해 오고 열심이었는데 너무 친하다 보니 “나오늘 바빠서 못 했다.” 하고 빈손으로 오는 일도 있었어요. 그 빈도가 점점 잦아지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운 멤버를 부른 거죠. 새 사람이 오면 긴장하게 되잖아요. 그럼 다시 열심히 하게 되고, 또 느슨해지고, 멤버를 영입하고…. 그렇게 열 명이 된 거죠. 

지혜 이 모임을 통해 계속 작업에 긴장감을 주려고 해요. 저희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리듬 앤 스팍스’도 그렇고, 워크숍이나 모임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지혜 모임 만드는 걸 좋아해요. 친한 친구여도 목적이나 이유가 없으면 자주 만나기가 어렵잖아요. 준오 씨 사고 이후로는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랑 자주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또 개인 작업도 계속 잘해 나가고 싶은데 마감이란 틀이 없으면 안 하게 되더라고요.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는 아쉬워서 작업하는 모임을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최근에는 사캉스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세러데이 바캉스’라고, 토요일마다 만나서 놀 듯 작업하는 모임이에요.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서로의 작업을 보며 이야기 나눌 기회여서 소중해요. 일이 바빠지면 잠정적으로 쉬기도 하지만 저희한테는 이런 게 노는 거고 재미거든요. 

준오 이왕이면 멋지게 놀아보자,인 거죠. 

 

스팍스에디션 작업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지혜 계속 2019년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시점부터 모든 게 바뀌었어요. 이전에는 퇴근도 없이 작업했는데, 직원을 들이며 체계가 잡히면서 많은 게 나아졌어요. 예전에는 프로젝트 도중엔 부담감 때문에 뭘 못 했거든요. 근데 이제는 잠깐씩 놓는 연습을 하게 돼요. 하루 한두 시간 정도 클라이언트와 연락이 안 닿는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건 아니더라고요. 지구는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요(웃음). 이제는 제 시간을 좀더 소중히 여기고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여러 매체에서 스팍스에디션을 설명할 때 “주제와 형식에 한계가 없다.”는 표현을 자주 하죠.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더 새로운 걸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진 않아요? 

지혜 저는 좀 있어요. 클라이언트는 분명히 저희가 해온 것 중에서도 가장 잘된 사례를 보고 의뢰했을 거여서 그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자그마한 경이라도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은 작업을 보여주기 전에 글로 쓰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글 에서 조금은 경이를 찾게 되더라고요. 글쓰기 과정을 거치면 아이디어가 생겨서 새로운 걸 할 수 있게 되는 게 특히 좋아요. 옛날에는 머리로 생각하고 말로 막연하게 표현하곤 했다면, 지금은 글로 정리해 보면서 계획을 세워요. 

 

매번 프로젝트 시작 전에 글을 쓰세요? 

지혜 네. 계속 리서치하고 써보면서 방향을 잡아 나가요. 클라이언트에게 PT할 때도 이미지보다 글로 먼저 보여드리려고 하죠. 확실히 글이 많은 걸 명확하게 설명해 주더라고요. 감정적으로 뭔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미지보다 글이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혜 이미지는 물론 직관적이에요. 그렇지만 이미지만 보면 거기 담긴 해석이나 부연 설명이 좀더 필요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반면, 글을 먼저 읽고 이미지를 보면 보이는 부분이 더 많아져요. 만약 파도의 물결이 콘셉트라면, 옛날에는 파도의 물결 이미지를 먼저 보여드리고 설명했거든요. 지금은 좀더 상상할 수 있게끔 잔물결이 만들어내는 파동이나 이야기를 글로 먼저 보여드리고 이미지를 제시해요. 예전에는 그림으로 전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글로 먼저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확장되더라고요. 

준오 내용이 더 풍성해지죠. 글은 한 문장이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거든요. 류시화 시집 중에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있어요. 저는 이 문장을 보고 “우와.” 했어요. 새는 앞만 보고 날잖아요. 근데 사람은 뒤를 너무 많이 돌아봐요. ‘아,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걸.’, ‘그때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사람 그때 나한테 왜 그랬지?’ 하면서요. 저 문장을 읽는 순간 엄청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글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앞서 새 작업 이야기도 나눴는데, 혹시 요즘 새에 관심이 많나요? 

준오 네(웃음). 새에 관심을 가진 것도 병원 생활하면서 시작된 건데,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창가에서 새소리를 듣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누군가 언제 행복함을 느끼냐고 물어보면 “지금 이 순간이요.” 할 만큼 행복했죠. 또 류시화 시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시인이 이런 문장을 썼어요.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정말 멋있지 않나요? 

지혜 준오 씨가 아프던 시기에 새한테서 감명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지금은 새의 능력이나 역할보다는 새가 가진 이미지가 준오 씨에게 자극이 돼서 그걸 계속 조형으로 만들어보고 있는 시기죠. 

 

어느 인터뷰에서 준오 씨는 “움직임의 한순간을 포착해서 조형으로 영원히 남긴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죠. 

지혜 맞아요. 조형이라고 해서 멈춰 있는 작업은 아니에요. 최근엔 움직임의 순간을 포착해서 고정해 버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 직접 움직여볼 수 있는 조형 작업을 만들고 있거든요. 준오 씨는 지금도 움직임을 좀더 다양하게 주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있어요. 움직임을 좀더 예술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거죠. 

준오 요새는 이런 걸 만들어보고 있어요. (비닐과 나무로 만든 모형을 가지고 온다.) 아직 테스트 중인 작업인데, 날개의 방향을 좀 다양하게 해보고 싶어요. 이 부분을 꽉 조였다가 풀면 날갯짓을 하거든요. 약간 고무동력기 같죠? 이런 태엽 구조는 처음 해보는 거라 위생 비닐을 잘라서 만들어 봤어요. 

 

지금 두 분, 뭔가를 처음 해보고 설레는 어린아이 같아요(웃음). 두 분의 작업이 전시가 되기도 했는데, 2019년에 진행한 개인전 <댄싱 블루> 이야기를 해볼게요. 

지혜 저희 아트워크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않은 시절에 문현철 큐레이터에게 제안받은 전시였어요. 전시를 준비하면서 둘의 스타일이 엄청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사실 저희는 작업뿐만 아니라 성향과 취향도 정말 달라요. 음악만 해도 그래요. 준오 씨는 메탈 좋아하는데 전 그런 음악은 듣기가 좀 힘들거든요(웃음). 저는 정적인 음악이나 피아노곡 같은 걸 좋아해요. 둘이 같은 걸 좋아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극과 극으로 나뉘는 편인데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개인 작업에서 이러한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가 디자인할 땐 둘의 취향을 아우르면서 중간으로 모여든다는 게 좋아요. 저는 요즘 요가 하면서 아트워크의 모티프를 찾아내곤 해요. 요가를 하다 보면 생각이 피어올랐다가 잠재워지고, 또다시 떠오르고, 사라지는 걸 반복하거든요. 그런 지점이 연기의 움직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으로 표현해 보고 있는데요. 준오 씨는 물성이 느껴지는 무거운 걸 좋아해요. 질감이 주는 매력, 날것의 형태. 

준오 확실히 노동할 수 있는 작업이 좋아요. 저는 노동에서 오는 기쁨이 큰 사람인 것 같아요. 묵직한 거, 질감적으로도 힘이 있는 거. 작업할 때 좀 수고스럽다고 느끼는 데서 재미를 찾고 있거든요. 저는 그런 작업을 할 때 더 신이 나요. 이 위층이 조형 작업실인데, 옥상을 개조한 거여서 겨울엔 굉장히 춥거든요. 근데 작업을 시작하면 금세 추위가 사라져요. 추운 줄도 모르는 거죠. 오히려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더 힘든 사람이에요.

전시 콘셉트는 어떻게 블루가 된 거예요? 

지혜 그 당시 준오 씨가 한창 하던 작업이 ‘파란 귀’였거든요. 그 색상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댄싱 블루라는 타이틀이 탄생했죠. 저는 이전에 푸른색과 검정색으로 작업한 튤립 그림이 있어서 그 작업과 어우러져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회화, 준오 씨는 조형으로 작업한 전시였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때도 준오 씨는 시멘트 400킬로짜리 조형을 만들고…. 

준오 진짜 무거웠어요. 친구들 총동원해서 옮기고, 어휴. 

지혜 이 공간에도 곳곳에 파란 작업들이 보이는데요. 이 안료가 빛을 흡수하는 재료예요. 그래서인지 볼 때마다 묘하게 달라 보여요. 근데 이 재료가 조형물에 딱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입자 상태로 둥둥 떠 있는, 살짝 덧대 있는 상태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 안료가 날리는데 한창 작업할 땐 얼굴이랑 몸, 옷이 전부 파란색이 되곤 했어요. 

준오 두 분도 조심하세요(웃음). <댄싱 블루>를 준비한 6개월 동안은 정말 개인 작업에만 몰두한 시간이었어요. 재미있었고, 기대도 많이 되었죠. 근데 딱 오픈하자마자…. 

지혜 사고가 났죠. 

준오 그래서 저는 그 전시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요. 

 

아이고….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군요. <댄싱 블루> 저는 참 좋았어요. 두 분의 작업과 스팍스에디션 작업을 두루 볼 수 있는 기회여서요. 대화를 준비하면서 블루에 관해 묻고 싶었어요. 스팍스에디션이란 이름은 “불꽃같이 빛나고 따듯한 작업을 모아가자.”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알고 있는데, 블루는 차가운 색상이라 왜 타이틀이 블루였나 궁금했거든요. 근데 작품의 색깔에서 출발한 거였군요(웃음). 생각이 너무 많아서 ‘불꽃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라 파랑인가….’ 했는데. 

준오 오, 그렇게 합시다. 맞아요, 그겁니다. 

지혜 (웃음) 이 재료가 햇빛을 흡수하는 블루여서 따뜻하다는 맥락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준오 댄싱 블루의 출발이 된 파란 귀가 저기 있는 작품인데요, 작품 뒤에 걸린 그림 보이세요? 뾰족한 귀. 파란 귀는 저기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저 그림을 그릴 땐 제 어릴 때 모습을 생각했어요. 저는 어릴 때 자아가 너무 세서 예민한 아이였어요. 어떤 말이든 오해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파란 귀를 만들었죠. 

지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준오 씨는 아직 뾰족한 귀야. 

 

귀를 한쪽만 만들어서…. 

준오 어, 그런가 봐요(웃음). 얼른 한쪽을 더 만들어야겠어요.

스팍스에디션의 수많은 활동 중 특히 좋아하는 게 콰르텟프레스예요. 출판사를 만들다니.

준오 책은 멋있어요. 정말 멋있어요. 

지혜 처음 콰르텟프레스를 만든 이유는 아트워크가 계속 쌓여서였어요. 쌓여가는 작업들을 묶어두지 않으면 휘발될 것 같았거든요. 개인 작업 LAYER를 묶어 책과 굿즈를 만들었고, 그 이후에 BLOOMERS 작업도 묶어서 《BLOOMERS FRAME》 시리즈를 만들었죠. 

준오 그 사이에 친구인 이규태 작가의 《Jaein》을 만들었어요. 책 이름과 동명인 재인 씨랑 여행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프로포즈를 위해 그린 그림들이거든요. 이런 책을 어느 출판사에서 내주겠어요(웃음). 저희는 브랜딩 위주로 디자인 작업을 해오고 있지만 사실 제일 좋아하는 건 앨범과 책 디자인이에요. 이 두 디자인의 수명은 참 길어요.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앨범 재킷은 지금 봐도 좋잖아요. 다음, 다음, 이 다다음 세대까지도 이어질 거고요. 두 작업 모두에 애정이 있지만 저희가 음반사를 만들 순 없으니까 출판사를 낸 거죠. 평생 남을 좋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요새 활동을 잘 안 하고 있어서 민망하지만(웃음). 

 

올해는 또 어떤 것들을 하고 싶어요? 

지혜 무용도 계속하고 싶고, 다양한 운동도 계속 도전해 보고 싶어요. 회화 작업을 열심히 해서 개인전도 해보고 싶고요. 스팍스에디션은 계속 더 단단해져야겠죠. 

준오 우선 3월 17일에 이규태 작가와 2인전이 잡혀 있고요. 아마 올해 지혜 개인전이랑 제 개인전이 모두 열릴 것 같아요. 재미있게 준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커요.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불가능한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에요. 아무 제한도 없어요.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준오 엄청나게 큰 조각이요. 이건 제 로망이기도 한데,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볼 수 있는 곳에 커다란 조각 작업을 하고 싶어요. 

지혜 의외네. 엄청 큰 공연장에서 기타 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준오 그건 지금도 실현 가능하거든! 

 

기대할게요(웃음).

준오 얼마 전에 SHEHISHIM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어요. 올해는 공연도 해보려고 해요. 놀러 오세요(웃음). 스팍스에디션은… 솔직히 지금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렇게 일이 계속 들어오는 게 감사하고, 말이 안 된다고도 생각하거든요. 세상에 디자인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저희는 감사하게도 일을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서 딱히 어떤 브랜드랑 어떤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앞으로 이 이상 사랑받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개인 작업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꼭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에 가지 않고도 길에서 볼 수 있는 멋지고 큰 작업. 그 조각 작품을 제가 해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만든 무언가로 불특정 다수에게 변화… 까지는 아니어도 약간의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대화 나누는 목소리를 지면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종일관 밝고 건강한 표정으로,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들 사이에서 내 마음이 얼마나 활짝 피었는지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래도록 생각했다. 나는 용기 있고 씩씩한 사람들의 현명한 작업을 믿는다. 좋아한다는 뜻이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